목사님 컬럼

제목 의심은 더 깊은 인식으로 인도하는 통로 2019년 03월 25일
작성자 김기석
의심은 더 깊은 인식으로 인도하는 통로
       -카라바조의 ‘의심하는 도마’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1571-1610)는 동명의 위대한 예술가 미켈란젤로 때문에 자기 이름보다는 그의 출신지인 카라바조로 더 알려진 사람입니다. 이 르네상스적 인물은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의 물결이 유럽을 휩쓸던 때 세상을 마음대로 떠돌며 살았습니다. 미술사에서 이 사람처럼 피카레스크적인 인물은 찾아보기 어려울 겁니다. 그는 성정이 뜨거운 사람이어서 폭행 사건에 연루되기 일쑤였고, 심지어는 살인까지 저질렀다고 합니다. 그에게는 현상금까지 내걸렸기 때문에 그는 도망자로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도망다니면서도 그는 자기의 화가로서의 재능을 십분 발휘하여 수도원의 보호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의 그림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은 충격을 받기도 합니다. 성서의 주제를 다룬 그림들 가운데 그가 즐겨 그린 것은 참수장면입니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 <세례 요한의 참수>, <다윗과 골리앗> 등의 그림은 보이는 이들을 섬뜩하게 만듭니다. 너무나 사실주의적으로 그렸기 때문입니다. 과연 그런 그림을 수도원이나 성당에 걸 수 있었을까 의구심이 들기도 합니다. 그의 그림은 어두컴컴한 배경과 환한 빛을 받고 있는 중심 인물들이 극단적인 대비를 이루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기법을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라고 하는데, 늘 위험 속에서 살아야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주인공이고 싶었던 그의 마음이 그렇게 표현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가 구사한 이 화법은 이후의 바로크 화가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렘브란트도 그중의 하나입니다. 

그가 그런 그림만 그린 것은 아닙니다. 그는 우리가 서양적 주체 곧 홀로 주체의 외로움을 설명할 때 예로 들곤 하는 ‘나르시스’의 모습도 그렸습니다. 물에 비친 자기 모습을 골똘하게 바라보고 있는 나르시스는 어쩌면 다른 이들과의 교감에 실패하고 자기 속에 유폐된 채 살던 카라바조 자신의 모습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보려는 그림은 <의심하는 도마>(107*146cm, Sanssouci Museum, Potsdam)입니다. 도마는 회의적 신앙의 대명사처럼 소비되는 인물입니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그는 공관복음서에서는 이름으로만 등장하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캐릭터를 가진 인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서 그는 예수님을 신뢰하고 따르는 충직한 제자로 소개됩니다. 유대인들은 신성모독이라는 죄명을 걸어 예수를 죽이려 합니다. 가까스로 사지에서 벗어났던 예수님은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전갈을 받자 주저 없이 유대 땅으로 다시 가려 하십니다. 제자들은 위험하다면서 말리지만 예수님의 뜻은 확고합니다. 그때 도마가 동료들에게 말합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요11:16). 그는 자기 속에 일고 있는 두려움을 떨치면서 예수님과 운명을 함께 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두 번째로 등장하는 장면은 요한복음14장입니다. 세상 떠날 날이 가까운 것을 아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때 도마가 여쭙습니다.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도마는 모르면서 침묵하기보다는,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시인하고, 또 물을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배움을 향해 열린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도마가 세 번째 등장하는 대목은 부활절 이후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다른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도마는 그 자리에 있지 않았습니다. 동료들이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전하였을 때 그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믿어지지 않는 현실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말합니다.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요20:25). 여드레가 지난 후에 주님은 제자들이 모여 있는 곳에 홀연히 나타나시어 도마에게 당신의 상처를 만져보라시면서, 의심을 떨쳐버리고 믿음을 가지라고 권고합니다. 

카라바조는 모든 것을 검증해본 후에야 사실로 확증하는 르네상스적 태도에 경도되어 있습니다. 그는 이 극적인 장면을 아주 사실주의적으로 그렸습니다. 하지만 이 그림에서 우리는 중세기의 성화에 나타나는 성스러움이나 초월성을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화면 한복판에는 등장인물 넷이 한 덩어리인양 모여 있습니다. 그들의 얼굴을 비추고 있는 빛은 그들의 심리적 긴장감을 고스란히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네 사람의 시선은 한 곳을 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옷자락을 걷어 올린 채 옆구리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가로로 벌어진 창날의 상처가 깊습니다. 가슴은 창백하게 보이고, 얼굴은 조금 피로한 기색을 띠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도마의 손목을 붙들고 상처의 절개부를 만져보도록 이끌고 있습니다. 주님의 손등에는 못자국이 뚜렷합니다. 이마에 깊은 주름이 잡힌 도마는 왼손을 허리에 얹은 채 오른손을 뻗어 예수님의 상처자국에 손가락을 깊이 찔러 넣고 있습니다. 마치 부검의처럼 예리한 눈빛으로 그 상처를 살피고 있습니다. 도마 뒤에 서 있는 다른 두 제자 역시 주체할 수 없는 호기심을 드러냅니다. 이 그림이 충격적인 것은 그 어떤 외경심도 드러나지 않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카라바조는 이 그림을 통해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 것 같습니다. ‘의심은 과연 불경한 것인가?’ 카라바조는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회의를 허용하지 않는 신앙이 얼마나 위험한지 우리는 잘 압니다. 회의를 모르는 신앙은 폭력과 손을 잡을 때가 많습니다. 자기의 옳음을 지키기 위해 다름을 용납하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종교든 문화든 이데올로기든 차이를 용납하지 않는 근본주의는 다 폭력적입니다. 그들은 인식론적 상황의 다양성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한편 자기들의 교설이나 생각을 보편적 구속력이 있는 것으로 여깁니다. 인간은 누구나 다 유한합니다. 누구도 진리를 전유할 수 없습니다. 

의심은 더 깊은 인식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하는 안내자입니다. 데카르트는 참으로 알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의심해보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다는 도마의 태도가 비난받아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의심의 숲을 통과하지 않는 한 뭔가를 깊이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삶은 모호합니다. 빛과 어둠, 성과 속, 선과 악이 뒤엉켜 있습니다. 그렇기에 누구도 삶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어제 옳은 것이 오늘도  옳은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늘 새롭게 물어야 합니다. 세상의 어떤 것도 당연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그림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도마의 손을 이끄는 주님의 손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더 깊은 인식의 세계로 인도하시기 위해 기꺼이 당신의 상처를 내보이십니다. 그것은 비난이나 꾸중이 아니라 회의를 통과해야 신앙에 이를 수 있음을 긍정하는 표지입니다. 회의는 불경 혹은 불신앙의 징표가 아니라 은총의 통로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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