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숫자의 미혹에서 벗어나기 2021년 11월 21일
작성자 김기석
숫자의 미혹에서 벗어나기

‘천국에는 아라비아 숫자가 없다‘. 시인 고진하의 시 제목이다. 시의 내용을 살필 겨를도 없이 제목이 상기시키는 기억의 편린들이 우련하게 떠올랐다. 아라비아 숫자는 일종의 기호일 뿐이지만 사람들은 그 숫자 때문에 희망을 품기도 하고 절망에 빠지기도 한다. 행여 누가 볼세라 몰래 열어보던 성적표에 적힌 시험 점수와 석차가 떠오른다. 중학교 시절, 담임선생님은 교실 뒤에 일흔 두 개의 못을 박고 그 달의 성적순으로 이름표를 걸어두었다. 자리가 뒤로 밀릴 때마다 아이들은 모멸감에 치를 떨었다. 지금은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때는 그 폭력적 현실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아라비아 숫자는 사람들을 일렬로 세워 계층화한다. 성인이 되었다고 하여 아라비아 숫자로부터 해방되는 것은 아니다. 연봉, 타고 다니는 차의 배기량, 살고 있는 집의 평 수는 사람들을 가시적으로 서열화한다. 주식 시황판을 눈이 빠져라 바라보는 이들은 점멸하는 숫자를 보며 한숨을 내쉬기도 하고 탄성을 지르기도 한다. 아라비아 숫자는 사람들을 우쭐거리게 만들거나 주눅들게 만든다. 아라비아 숫자는 힘이 세다. 하지만 아라비아 숫자가 할 수 없는 일도 많다. 사람의 품격이나 아름다움, 공감 능력, 책임감, 우정, 사랑 등을 계량화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던가.

수학 능력 시험이 끝났다. 51만 명 가까운 수험생들 가운데는 오랫동안 입고 있던 구속복을 벗은 것처럼 홀가분함을 만끽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절망과 자책 속에서 무자맥질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왠지 운명으로부터 모욕당한 것 같고, 자신의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부정당한 것 같은 느낌이 들 수도 있다. 그 한 번의 시험 결과가 자기 미래를 결정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이때의 두려움은 주입된 두려움이다. 두려움은 성찰을 방해하고 사람을 마비시켜 다른 삶을 상상하지 못하게 만든다. 하지만 세상이 만들어놓은 질서와 규율을 유쾌하게 위반해본 이들은 아라비아 숫자가 지배하는 세상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있음을 자각한다. 의외로 쏠쏠하고 멋진 세상 말이다.

매튜 폭스는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삶이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사다리 오르기로서의 삶이다. 이런 삶을 선택한 이들은 늘 경쟁에 내몰린다. 오르려는 이들은 많고 기회는 적기 때문이다. 가끔은 앞선 이들을 끌어내리기도 하고 뒤따라오는 이들을 짓밟기도 한다. 승자와 패자가 갈리고, 적대감과 원망이 마치 공기처럼 주변을 떠돈다. 승자들은 많은 것을 누리며 자기들은 그럴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권력에 도취된 사람들은 자기보다 못하다고 여기는 이들을 모욕하고 멸시한다. 도스토옙스키는 자신의 시베리아 유형생활 경험을 담은 책 ‘죽음의 집의 기록‘에서 권력은 인간을 눈멀게 한다면서 이렇게 말한다. “포악함은 습관이 된다. 이것은 차차 발전하여 마침내는 병이 된다. 나는 아무리 훌륭한 인간이라 해도 이러한 타성 때문에 짐승처럼 우매해지고 광폭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세속적인 성공이 곧 사람의 품격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능력주의 사회에는 인간적 따스함이 깃들 여지가 별로 없다.

사다리 오르기로서의 삶과 구별되는 삶의 방식이 있다. 원무, 즉 둥근 꼴을 이루어 추는 춤으로서의 삶이다. 야수파 화가인 앙리 마티스의 ‘춤’을 떠올려보면 좋겠다. 초록색 대지와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알몸의 여인들이 춤을 추고 있다. 색채는 강렬하고 구도는 단순하다. 선은 한껏 자유로워 여인들이 느끼는 기쁨과 에너지가 그대로 드러난다. 다섯 명의 여인들은 서로 손을 잡은 채 원을 이루고 있다. 원은 높낮이가 없다. 원무의 기쁨 속에 녹아든 이들은 저 바깥에서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이들을 자기들의 춤 속으로 기꺼이 맞아들인다. 함께 손을 잡는 순간 원은 더 커지고 기쁨 또한 증대된다. 분열된 세상에서 하나 됨을 맛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확대된 욕망을 동력으로 삼는 소비사회에서 이런 삶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보이는 까닭은 우리가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자족하는 마음은 소비사회에 대한 가장 급진적인 저항이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만일 어떤 사람이 자신의 동료들과  발을 맞추지 않는다면 그는 아마도 다른 북소리를 듣고 있는 것일 거라고 말했다. 다른 북소리에 맞춰 걷는 사람들이야말로 질식할 듯한 현실에 틈을 만드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자학과 자기 연민에 침잠하기를 거부하고 일어선 이들을 통해 새로운 희망이 세상에 유입된다.

(* 2021/11/20일자 경향신문 컬럼 '사유와 성찰'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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