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갈릴리에 머문 사람 2022년 01월 21일
작성자 김기석
갈릴리에 머문 사람
  -서덕석, <조지송 평전>, 서해문집

“사람은 그의 전체적인 상황, 그가 응답해야 하는 요구의 술어로만 이해될 수 있다. 사람이 지니고 있는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의 본성이 아니라 그가 그 본성으로 무엇을 하느냐다.”(아브라함 요수아 헤셸 선집 3, <누가 사람이냐>, 이현주 옮김, 종로서적, p.15)

인간-존재는 인간-되어감이다. 인간은 자기 외부 세계와 접촉하면서 자기 삶을 형성해 나간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같은 사람인 동시에 다른 사람이다. 같음은 반복되는 일상을 통해 형성된 습관이고, 다름은 일상을 새롭게 경험함으로 빚어지는 현실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인생의 저자이다. 주어진 시간의 잉크가 다 마르기 전까지 삶의 이야기를 빚어가는 것이 인생의 과제이다. 세상에는 사람 수만큼이나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그 이야기들은 대개 어떤 큰 이야기의 한 부분으로 존재한다.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Alasdair MacIntyre)의 말이 참 크게 다가온다. 그는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나는 어떤 이야기, 혹은 어떤 이야기들의 일부로 존재하는가?’라는 보다 앞선 질문이 해명될 때에만 비로소 대답될 수 있다”고 말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어쩌면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의 일부가 되기를 소망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억압과 수탈로 점철된 인간 역사를 거슬러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존엄성을 누리며 사는 세상을 꿈꾸는 이들을 보며 세상은 어리석다고 비웃는다. 하지만 그런 비웃음을 감수하며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 기획하는 사람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진노의 팔을 붙드는 사람들이다. <조지송 평전>은 영등포산업선교회의 초석이 되었던 한 인물에 대한 평전인 동시에, 삶의 현장에서 현실화되는 하나님 나라를 꿈꾸었던 이들의 사회적 전기이기도 하다.

8부로 구성된 이 책은 조지송의 어린 시절의 가정적, 신앙적 배경으로부터 시작하여 그가 산업선교에 입문하기까지의 이야기를 전기적으로 서술한 1부와 그의 삶을 회상하는 옛 동지들의 회고를 담은 8부를 액자 구조로 삼아 영등포산업선교회를 중심으로 한 다양한 활동 이야기가 2부에서 7부 사이에 배치되어 있다. 사람이 길을 선택할 때도 있지만 길이 사람을 선택할 때도 있다. 사람들은 자기 인생에서 우연처럼 일어난 사건이 실은 필연이었음을 뒤늦게 깨닫곤 한다. 농촌 목회를 꿈꾸던 그가 산업선교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던 것도 마찬가지이다. 산업전도연구원 훈련을 받으며 체험했던 노동의 경험은 영원히 그의 인생의 방향을 결정한 일종의 첫 키스의 추억과도 같은 것이었다. 소외된 노동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의 열악한 상황과 노동의 괴로움을 경험했기에, 조지송은 그 모든 악조건을 견뎌내며 살아내는 노동자들의 모습에서 거룩함을 보았다. 노동자들이 노동의 참 가치를 자각하고, 연대와 돌봄을 통해 자기 권리를 지켜내도록 돕는 일은 그에게 단순한 사회적 실천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동참하는 과정이었다.

조지송은 노동자 선교 활동의 명칭을 ‘산업전도’에서 ‘도시산업선교’로 바꾼다. 저자는 이것이 “선교의 영역을 노동자 개인의 신앙 문제에 국한하지 않고 산업화와 도시화에 따른 사회문제와 인간 삶의 전 영역을 선교 대상으로 확립해야 한다는 취지였다“(p.86)고 밝힌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의 선교‘ 신학이라는 큰 맥락에 근거한 것이지만, 노동자들의 삶의 자리에 녹아 들어갔던 체험 덕분에 더욱 확신을 가지고 지향하게 된 것이었다. 민중신학이 태동하기 전에 이미 노동자 혹은 민중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생겼던 것이다.

조지송의 삶을 몇 마디 말로 요약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몇 가지 핵심어를 통해 그의 삶 혹은 지향을 가늠해 볼 수는 있다. 현장성, 학습, 자기 변화, 조직, 네트워크, 균형과 절제가 그것이다. 그의 실천은 ‘doing theology‘의 전형이었다. 행동하는 신앙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현장의 요구에 신학적으로 응답한 삶이라는 뜻에서 하는 말이다. 노동자들의 현실이야말로 그의 신학함의 자리였다. 그렇기에 그는 끊임없이 배웠고 그 배움에 근거하여 자기를 혁신해 나갔다. 한 가지 방법만을 고집하지 않고, 상황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했다. 자유롭게 뻗어나가며 새로운 상황과 접속한다는 의미에서 리좀(rhizome)적이라 할 수 있다. 노조 운동이 위기에 처했을 때는 소그룹 활동을 통해 노동자들의 연대를 이뤄냈고, 노동자들의 품위 있는 삶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생활협동조합을 만들기도 했다. 또한 영등포산업선교회가 주도했던 사회적 실천을 세계 교회에 알리고, 그들의 지지와 후원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선한 꿈을 공유하는 이들의 네트워크는 고난의 시기에 서로를 지탱해주는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궁하면 통하고, 통하면 변하고, 변하면 오래간다(窮卽通, 通卽變, 變卽久)는 옛말이 그대로 적용된 예라 하겠다.

조지송의 실천이 리좀적이라 해서 중심조차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의 행동을 견인한 두 가지 동기가 있다. 하나는 예수 정신을 살아내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노동자들에 대한 깊은 사랑과 신뢰였다. 사실 이 둘은 한 뿌리에서 나왔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에게 있어 노동자들은 역사적 대의를 위해 동원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역사를 견인하는 소중한 주체였다. 주체로서 바로 서기 위해서는 자기에 대한 존중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가 사회 운동을 예술과 결합시키려 했던 것은 그 때문이다. “예술에는 그것을 향유하는 사람이 스스로 인간임을 자각하도록 이끄는 힘이 있어 그것을 읽고 보고 감상한 노동자는 자신이 노동 현장 속에서 겪는 차별과 부당한 대우가 인간에 대한 모독임을 깨달아 비인간적인 것에 분노하고 저항할 수 있게 되는 것“(p.281)이라는 저자의 말은 그 핵심을 꿰뚫고 있다. 그런 중심이 확고했기에 상황이 아무리 변해도 그는 균형과 절제를 잃지 않을 수 있었다. 보수적인 교회가 산업선교에 대해서 의혹의 눈초리를 보낼 때에도 그는 교회와 함께 해야 한다는 기본을 소홀히 하지 않았고, 그들을 경멸하거나 배척하는 대신 노동자들의 이야기가 잘 전달될 수 있도록 세심한 노력을 기울였다. 

병환으로 인해 그는 현장에서 물러설 수밖에 없었지만, 그가 이끈 ‘바보들의 행진‘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역사적 예수의 삶이 끝난 십자가로부터 수없이 많은 작은 예수들이 탄생했던 것처럼, 조지송은 그를 계승한 이들을 통해 생생하게 되살아나고 있다. 미국의 정치학자 한나 아렌트는 나찌의 폭력을 겪은 후에 사멸성에 대비되는 탄생성(natality)의 개념을 제시했다. 죽음과 절망의 심연에서조차 희망을 향해 고개를 드는 인간의 끈질김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다. 조지송이라는 이름은 ‘탄생성’이라는 개념이 단순한 개념이 아니라 참임을 보여주는 기표로 우리 가운데 있다.

<조지송 평전>은 인물 평전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제시하고 있다. 저자인 서덕석 목사가 10여 년 동안 들인 각고의 노력 덕분에 우리는 한 인물의 생명 사회적 전기를 손에 들게 되었다. 이로써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매우 소중한 자산 하나가 추가되었다. 꼼꼼한 사료 정리와 다양한 이야기들의 적절한 배치, 그리고 군더더기 없이 명료한 문장은 책의 가치를 한껏 높여주고 있다. 터키의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인 오르한 파묵은 자기의 글쓰기를 일러 ‘바늘로 우물 파기‘라고 말한 바 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불가능한 일을 실천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수없이 많은 자료의 숲속에서 적절한 자료를 선택하고 배열하고 서술하기 위해 그가 들인 노력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갈수록 지리멸렬을 면치 못하는 한국 교회는 조지송이 남겨준 신앙적 실천적 유산을 창조적으로 계승할 수 있을까? 신자유주의 경제 질서에 포획된 우리 사회의 현실 속에서 교회의 증언은 그리고 실천은 어떠해야 할까? 조지송의 말은 한국교회가 가야 할 방향에 대한 확고한 암시이다.

“교회는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편에 있어야 해요. 나는 고통당하는 사람들 가운데 가면 예수님이 살아 움직이는 게 보여요. 그러다가 화려한 교회에 가면 정말 예수님이 있는가 하는 의심이 가요. (…) 민중과 함께 아픔을 나누고 노동자들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고통을 당해본 체험을 가진 교회라야 참다운 그리스도의 구원을 이룰 수 있는 교회라고 생각해요.“(p.366)

조지송은 우리 앞에 물음표로 서 있다. 이제는 우리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할 차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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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세욱(22 02-19 07:02)
궁즉변 변즉통 통즉무궁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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