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우리 손에 들려진 두레박 2022년 02월 10일
작성자 김기석
우리 손에 들려진 두레박
  -유진 피터슨, <하나님께 응답하는 기도>, Ivp, 2021

시간 여행자인 인간, 시간의 향기에 취해 살 때도 있지만 권태로운 시간으로 인해 멀미를 하기도 한다. 시간이 지나간 자리에서 무상함의 얼굴을 보는 이들도 있고, 명멸하는 아름다움을 보는 이들도 있다. 불안은 에덴 이후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뿌리 정서이다. 아무 것도 확정적인 것은 없다. 유장하게 흐르던 강물이 때로는 좁은 지형에서 급류가 되기도 하고, 폭포가 되어 떨어지기도 한다. 바깥에서 바라보면 장엄하고 아름답지만 그 물결을 타고 흐르는 이들에게는 공포가 아닐 수 없다. 시간의 격랑 속에서 멀미를 할 때마다 우리는 일상의 모든 공포가 사라진 세상을 꿈꾼다. 

호메로스의 <오뒤세이아>는 트로이 전쟁이 끝난 뒤 고향인 이타카로 돌아가던 오뒤세우스 일행의 모험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흐레 동안의 풍랑에 시달리며 표류하던 그들은 로토파고이족이 사는 나라에 도착했다. 원주민들은 오뒤세우스의 부하들을 따뜻하게 맞아주면서 로토스라는 열매를 주었다. 그 열매를 먹은 이들에게 일어난 일을 호메로스는 이렇게 전한다.

“그리하여 그들 중에 꿀처럼 달콤한 로토스를 먹은 자는 소식을 전해주거나 귀향하려고 하기는 커녕, 귀향은 잊어버리고 그곳에서 로토스를 먹으며 로토파고이족 사이에 머물고 싶어했소.“(호메로스, <오뒤세이아>, 제9권 93-97행, 천병희 역, 단국대학교 출판부)

오뒤세우스는 울고불고하는 이들을 억지로 배로 데려가, 노 젓는 자리 밑에 묶어놓고는 ‘아무도 로토스를 먹고 귀향을 잊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출항을 독려했다. 어느 것이 더 좋은 선택일까? 시간의 이빨에서 해방된 로토파고이족 속에 머무는 것인가? 아니면 시련을 겪으면서도 기어코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인가? 우리는 이 두 욕구 사이에서 흔들린다.

불확실함 속에서 살아야 하기에 인간은 번민한다. 희노애락애오욕을 겪으며 흔들린다. 확고한 세계에 대한 그리움은 그렇게 발생한다. 흔들리는 존재이기에 내면 깊은 곳에서 무상을 넘어 영원한 것을 찾는다. ‘Homo pecator, 기도하는 사람‘은 인간에 대한 가장 근원적인 정의이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는 말이다. 누구나 기도한다. 그 기도는 언어화된 것일 수도 있고, 신음이거나 몸짓일 수도 있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은 히브리인들의 신음소리를 기도로 들으셨다.

시편은 기본적으로 예배 공동체의 찬양이지만 기도이기도 하다. 인간은 어떻게 기도를 드릴 수 있는가?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한 그리움이 없다면 기도는 불가능하다. 하나님에 대한 그리움은 경험을 통해 쌓인 것이라기보다는 선험적으로 주어진 인간의 조건이다. 그렇기에 기도는 하나님의 선제적 은총에 대한 응답이다. 시편을 기도를 배우기 위한 도구로 삼으려는 유진 피터슨의 책 제목이 <하나님께 응답하는 기도>인 것은 그래서 적절하다. 저자는 “기도는 무엇을 하거나 무엇을 얻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존재하고(being) 존재가 되어 가기(becoming) 위한 도구“(p.13)라고 말한다. 기도는 누구라도 하는 것이지만 제대로 기도하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하다. 시편은 기도 훈련을 위해 최적화된 텍스트이다. 온갖 삶의 경험이 그 속에 다 녹아들어 있기 때문이다.

“시편의 세계는 그런 인간의 삶이 빚어낸 다채로운 무늬로 가득 차 있다. 기쁨의 찬가가 있는가 하면 깊은 탄식이 있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한 감사가 넘치는가 하면 아무리 불러도 응답하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도 있다. 가없는 용서의 마음을 드러내는 시도 있지만 악인이나 원수들의 불행을 기원하는 시도 있다. 시편을 읽다가 가끔 그 적나라한 감정 표현에 놀라는 당혹스러운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시편 속에는 인간이 이 세상에서 겪는 온갖 경험이 녹아들어 있다.“(김기석, <하늘에 닿은 사랑>, 꽃자리, p.10)

<하나님께 응답하는 기도>는 시편으로 기도할 때 우리가 명심해야 할 열 개의 주제와 현장의 소리를 담은 부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도의 텍스트‘, ‘기도의 길‘, ‘기도의 언어‘, ‘기도와 이야기‘ ‘기도의 리듬‘, ‘기도의 은유‘, ‘기도와 예배‘, ‘기도와 원수들‘, ‘기도와 기억‘, ‘기도의 끝‘. 각 장의 제목만 보아도 이 책이 기도와 관련된 모든 주제들을 망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은 왜 기도해야 하는가? “기도 없는 세상은 재촉하고 강요하며 요구하는 세상“이고 “우리를 협박하는 세상“(p.43)이다. 세상의 요구에 응답하기 위해 반복적으로 자기를 착취하는 순간 우리 영혼은 납작해진다. 인간의 소명은 자기를 넘어서는 것이다. 자기 중심성에서 벗어나 타자의 세계에 눈을 뜨고, 그 세계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과 깊이 접속할 때 인간은 자유롭다. 그 자유로움은 우리를 더 넓은 세계로 안내한다.

시편 기도는 우리 기도의 언어가 꼭 정제된 언어, 감정을 표백한 언어가 아니어도 괜찮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시편 시인들은 자기들 속에 들끓고 있는 온갖 감정들을 숨기려 하지 않는다. 죄로 얼룩진 적나라한 언어가 발화되고 누군가에게 불쾌감을 자아내는 말도 튀어나온다. 기도의 언어는 천사의 언어가 아니라 인간의 언어일 뿐이다. 숨기고 가리는 것은 어쩌면 기도를 들으시는 분과의 거리감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나님의 현존 앞에서 부정적 감정을 노출하는 순간 우리 속에 여백이 마련된다. 그 자리에 하나님의 은총이 스며든다.

시편의 저자를 특정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시편의 편집자들은 각각의 시들을 특정한 이야기와 연결해 볼 것을 제안한다. 73편의 시편 표제에 다윗의 이름이 나온다. 그렇다고 하여 그것이 다 다윗의 시라는 말은 아니다. ‘르다위드’(l‘dawid)는 ‘다윗의 시‘, ‘다윗을 위한 시‘, ‘다윗의 전통을 따른 시‘(p.80)라고 새길 수 있다. 곡절 많은 다윗의 삶을 떠올릴 때 그 시편들의 삶의 자리가 드러나고, 우리도 그 이야기에 합류한 여백이 생긴다. 개별적인 경험이 자기 속으로 수렴될 때 나이브한 감상주의에 빠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누군가의 경험에 깊이 공명하고 자기 삶을 성찰하는 거울로 삼을 때 그 경험 혹은 이야기는 보편성을 획득하게 된다. 그 큰 이야기 속에 합류함을 통해 우리는 자기를 넘어선다.

시편 기도는 우리 삶에 리듬감을 부여한다. 밀물과 썰물이 갈마드는 리듬을 통해 바다가 싱싱하게 유지되듯이, 삶은 밤의 명상과 낮의 활동이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건강해진다. “기도에는 리듬이 있다. 그 언어는 우리가 받은 은총을 우리의 호흡으로 모으고, 우리 삶의 내적 리듬을 세계와 언약이라는 외적 언어에 맞추어 조율한다. 우리 존재의 중심은 들숨과 날숨이라는 우리 생명의 리듬을 따르는 언어로 표현된다.“(p.96-97) 

시편 기도는 우리를 은유의 세계로 안내한다. 유진 피터슨은 은유를 ‘영과 물질이 일치하는 언어‘(p.114)라고 말한다. 은유는 단순한 문학적 수사법이 아니다. 은유는 확장하고 연결하는 언어이다. 그렇기에 다양한 경험을 담아낼 수 있다. 예컨대 시인이 하나님을 ‘피난처’라고 고백한다면 그 고백은 마음 둘 곳이 없었던 시인의 신산스러운 삶의 경험을 배경으로 할 때 비로소 그 표현 속에 담긴 삶의 곡절이 드러난다. ‘하나님은 빛’이라는 은유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길을 잃어본 경험을 한 사람이라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시편 기도는 예배 공동체와 더불어 드려져야 한다. 시편은 개별적 존재인 시인의 창작이지만 공동체의 예배에서 음송됨을 통해 공동체의 노래가 되었다. 시편 속에는 오랫동안 그 찬양을 드려온 이들의 기쁨과 슬픔, 절망과 희망, 상처의 기억과 치유가 고스란히 배어 있다. 시편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그렇기에 주관적이고 감성적인 층위에서 벗어나 함께 순례길에 오른 이들의 흐름을 따르는 것이기도 하다. 시편으로 기도하는 동안 우리는 단편적으로 닥쳐와 어쩔 수 없이 겪어내야 했던 우리 삶의 이야기의 맥락을 이해하게 된다.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은 하나님의 선율은 스타카토식으로 전개되기에 여간 주의하지 않으면 알아차리기 어렵다고 말한 바 있다.

시편 기도가 우리를 이끌어가는 곳은 어디인가? “모든 시편 기도는 지도에도 없는 고통과 회의와 곤경이라는 숨겨진 나라들을 통과하는 기나긴 여정 후에 도착하는 곳이다“(p.179). 그 지점은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찬양이다. 시편을 제외하고 ‘할렐루야’라는 단어가 유일하게 등장하는 곳은 요한계시록 19장이다. 옛 세계가 무너지고 새로운 세계가 도래하기 전, 그 사이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은 시련을 피할 수 없지만 시련을 넘어 마침내 그들이 당도하는 세계는 어린 양의 잔치자리이다. 그 기쁨의 자리에 울려 퍼지는 소리가 바로 ‘할렐루야’이다. 시편 기도는 우리를 절망적 현실에 짓눌리지 않고 미래에 약속된 완성을 바라보도록 해준다.

<하나님께 응답하는 기도>를 통해 유진 피터슨은 본인의 시적 재능을 황홀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책에서 그의 언어는 함축적이고 반짝이며 확장적이다. 명사와 동사 위주의 글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형용사와 부사가 많은 그의 글이 낯설 수도 있겠다. 하지만 꼼꼼하게 읽어나가노라면 그 언어들이 우리를 삶의 심연으로 이끌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많은 이들의 기도가 자기 욕망 주변을 맴돌 뿐 더 깊은 곳으로 나가지 못하는 것은 기도의 전범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시편을 벗 삼아 하나님의 마음에 깊이 두레박을 드리우는 순간 우리는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샘물을 맛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 응답하는 기도>는 우리 손에 들려진 소중한 두레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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