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우리 앞에 물음표로 선 사람들 2018년 12월 05일
작성자 김기석
우리 앞에 물음표로 선 사람들

티쿤 올람
예수는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 하셨다. 인간은 밥도 먹어야 하지만 삶의 의미를 먹어야 사는 존재라는 뜻으로 새겨본다. 의미, 그것은 객관적인 데이터로 측정할 수 없다. 다만 보이지 않게 발생할 뿐이다. 무의미하다고 느끼는 일을 반복해야 할 때 영혼은 황량한 묵정밭으로 변한다. 반대로 몸은 고단해도 일을 통해 보람을 느낀다면 그 고단함은 이미 고단함이 아니다. 의미는 사변이나 사색을 통해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몸이 함께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 우리 삶의 자리는 에덴의 동쪽 놋 땅이다. ‘놋‘은 ‘유리하다, ‘방황하다’라는 뜻이다. 신을 등지고, 형제자매에 대한 책임을 방기한 존재들에게 불안은 일종의 숙명이다. 히드라의 피가 묻은 옷이 헤라클레스의 살갗을 파고 들었던 것처럼, 인간은 벗어버릴 수 없는 불안의 옷을 입고 살아간다. 안식 없음, 고향 상실이 우리 삶의 실상이다. 유대인들의 전설은 모든 인간이 하늘로부터 내려왔다고 말한다. 이 땅의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있는 어느 순간 하늘로부터 소리가 들려왔다. “돌아오라.” 그러나 사람들은 돌아가는 길을 잊었다. 날개조차 없으니 날아오를 수도 없다. 그래서 예민한 시인은 하늘에 편지를 쓴다. “밤마다 하늘에 편지를 씁니다./옷 벗는 길을 묻고자 하여이다./사랑의 길을 알고자 하여이다.“(이성선, ‘사는 일이 바로 신비’ 중에서) 우리를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는 불안의 옷을 벗고 마침내 하늘에 오르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하늘에 오르는 길은 놀랍게도 저 낮은 곳을 통과하는 길이다. 저릿한 아픔과 슬픔의 강물이 흐르는 곳,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거쳐 가는 길이란 말이다. 무작정 아파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고통을 즐기라는 말이 아니라, 지금 외롭고 고통 받는 이들의 벗이 되는 노력 없이는 하늘 가는 길을 찾을 수 없다는 말이다. 사람들은 그 사실을 일쑤 외면한다. 마음 내키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 비릿한 예토(穢土)를 게으르게 어슬렁거린다. 

유대인들은 아이들에게 “네가 태어나기 이전의 세상보다 떠날 때의 세상이 더 아름답게 살라”고 가르친다고 한다. ‘티쿤 올람’(tikkun olam), 세상을 고친다는 뜻이다. 앞에서 이야기한 생의 의미 혹은 보람은 바로 이런 실천을 통해 발생한다. 그러나 욕망의 벌판을 허위단심으로 걸어가는 이들이 이런 삶을 선택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간혹 인생이 표지판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내가 가는 길이 마땅히 가야 할 길에서 얼마나 벗어났는지를 일깨우는 표지판, 그리고 있음 그 자체로 우리 삶을 그 방향으로 견인하는 표지판 말이다. 

헝가리의 철학자인 게오르그 루카치의 말에 깊이 공감한다.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미세먼지 가득한 하늘은 우리를 만나기 위해 수 만년, 수 억년 전에 출발한 그 별빛과 우리 사이를 차단한다. 대기 중에 떠있는 미세먼지는 세찬 바람이 불거나 비가 내리면 걷히기도 하건만, 우리 마음에 드리운 미세먼지는 여간해서는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뿌연 저 하늘 너머 어딘가에 별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우리의 꿈을 일깨우는 별, 우리를 삶의 신비 앞에 세우는 별은 분명히 있다. 별이 된 사람들 말이다.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단12:3). 그들의 ‘있음‘을 상기하는 것만으로도 우리 삶은 조금 맑아진다.

지난 세기 이 척박한 땅에 태어나 한 세상 살다 떠난 이들 가운데도 별이 된 사람이 많다. 그들의 이름을 호명하고, 그들의 삶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우리 내면의 어둠이 조금씩 스러진다. 그들의 삶과 실천은 온통 욕망 주위를 맴돌며 사는 우리 삶의 부끄러움을 환기시키지만, 새롭게 살고 싶다는 열망을 일깨우기도 한다. 기독교 신앙을 토대로 해서 살아간 아름다운 이들의 이름을 망각의 강물에서 건져내는 것, 그들의 삶을 기억해내는 것은 그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다.

아홉 명의 증인들의 입을 통해 듣는 별이 된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는 우리 가슴을 벅차게 만든다. 그들이 살아온 삶의 방식이나 실천은 각기 다르지만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깨달음과 실천 사이의 틈 없는 일치
믿음생활이란 고백을 삶으로 번역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성육신적 삶이 없다면 믿음의 고백이란 얼마나 공허한가. 종교적 언어는 끊임없이 일상의 언어로 재해석되어야 한다. 예컨대 장기려는 복음은 교회 안에서만 통용되는 언어를 넘어 모든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언어로 다시 서술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서술하는 술어로 ‘진실, 사랑, 성실’이란 세 단어를 제안한다. 이것은 단순한 언어의 교체만이 아니다. 그는 “예수가 만들려고 했던 세상이 진실과 사랑과 성실이 넘치는 공동체였다고 본 것이다”. 박이약지(博而約之), 두텁게 알되 그것을 요약할 수 있어야 참으로 아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관점이 분명해야 한다. 장기려는 차별 없는 세상의 꿈이 곧 하나님의 꿈이자 예수님의 꿈이라고 믿는다. 그렇게 믿기에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병원을 운영하면서 가난한 이들을 돌보고 환자들을 위한 의료보험조합을 만들었던 것도 차별 없는 세상의 꿈에서 나온 것이다. 

김용기 역시 기독교를 성육신의 종교라고 믿는다. “기독교는 기독교를 믿는 이들을 통하여 이 세계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어야 하고 기독교인들의 삶은 성육신의 증거가 되어야 한다고 그는 보았다.” 각자가 할 수 있는 일을 시작하면 된다. 그는 복음의 핵심을 평화로 파악했다. 평화를 구체적인 삶에서 구현하기 위해서는 먼저 경제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그는 가나안 농군학교를 만들었다. 지향이 분명하면 해야 할 일이 보이는 법이다. 

아낌
성육신적 삶을 실천했던 이들의 또 다른 공통점은 생명에 대한 아낌이다. 노자는 사람을 다스리고 하늘을 섬기는 데는 아낌만한 것이 없다(治人事天 莫若嗇)고 말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다면 세상에 있는 어떤 것도 함부로 대할 수 없다. 하나님의 세계는 덜하지도 넘치지도 않는다. 반면 인간의 욕심은 차고 넘친다. 그로 인해 세상은 욕망의 전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물질이 풍부해진다고 하여 탐욕이 잦아들지는 않는다. 전장을 지배하는 논리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겨야 한다는 것이다. 전장처럼 낭비가 심한 곳이 없다. 효율성을 제고하기 위해 누군가를 제거하고 배제하는 일이 일상이 된다. 버림받은 이들의 눈물과 피를 받아먹은 땅은 불모의 공간으로 변한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그러하지 않은가? 

영혼의 별이 된 이들은 작고 연약한 것들에 눈길을 준다. 사회적 약자들을 단순히 낙오자로 취급하지 않고, 함께 살아야 할 소중한 이웃으로 본다. 버려진 이들을 가슴에 품고, 그들 편에 서서 싸운다. 그 마음은 하늘과 접속한 이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다. 

1926년에 미 감리교회의 파송을 받아 한국에 온 에스더 레어드는 40년을 한결같이 이 땅의 가난한 이웃들을 섬겼다. 나애시덕(羅愛施德)이라는 한글 이름이 가리키듯 그의 삶은 ‘사랑으로 덕을 베푸는 삶’의 연속이었다. 차별받던 여성, 어린이, 결핵환자의 곁에 성심껏 머물렀다. 세상이 버린 이들을 아낀 것은 그것이 곧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부터 거지들의 친구가 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황광은 또한 아낌의 사람이다. 그는 길거리에서 유랑하는 아이들을 돌보고, 전쟁통에 고아가 된 아이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다. 자기 힘에 부칠만큼 많은 이들을 돌보아야 했지만 그 일로부터 달아나지 않았다. 그것이 하늘에 잇대어 살아가는 그의 존재 이유였기 때문이다. 그는 어려움에 직면한 이들을 시혜의 대상으로만 바라보지 않았다. 그들 속에 삶의 이유를 심어줌으로 스스로 삶의 주체가 되도록 도왔다. 

저항
믿음의 사람들은 정의와 공의가 무너진 세상에 분노한다. 하나님의 분노(Ira Dei)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인간의 영혼을 욕망의 방향으로 잡아끄는 세상에서 마음을 올곧게 세워 하늘을 지향하는 삶 자체가 이미 저항이다. 하지만 세상 풍조에 따라 흐르지 않고 그 물결을 거스르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의지만으로는 불가능하겠지만, 위에서 공급되는 힘으로 한다면 가능하다.

산기도 중에 신비체험을 한 이현필은 일체의 세속적인 가치관에 매이지 않은 참 자유인으로 살았다. 겨울에도 맨발로 지내고, 자기가 먹으면 다른 사람 먹을 몫이 줄어든다며 굶기를 밥 먹듯 했다. 기인처럼 보였지만 그는 존재 자체로 자본주의의 허상을 폭로했다. 자본주의는 사람들에게서 다른 삶을 상상할 능력을 박탈한다. 그러나 이현필과 그를 따르는 이들은 다른 이를 위해 자기를 선물로 내놓는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삶으로 입증했다. 이런 것이 진짜 저항이 아니던가. 

가난하고 외롭게 살면서도 세상의 작고 하찮은 것들 속에 깃든 영원의 빛을 보아낸 권정생의 삶도 저항이라 말할 수 있다. 버림받음의 경험, 거지가 되어 세상을 떠돌던 경험, 병약한 몸으로 버텨야 했던 일평생을 버무려서 그는 아프지만 아름다운 이야기를 빚었다. 그는 높고 새된 소리로 사람들을 유혹하는 자본주의의 노래에 맞서 나지막하지만 결코 스러질 수 없는 생명의 노래를 불렀다. 

사람들이 광주의 어머니라고 부르는 조아라의 삶은 또 다른 저항을 보여준다. 그의 삶은 “해방 이전에는 잃어버린 주권 회복을 위한 저항“으로, “해방 이후로는 독재체제의 장기집권에 대한 저항”으로 점철되었다. 사람들을 부자유하게 만들고, 굴욕을 강요하는 체제에 순응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품부하신 생명에 대한 모독이었기 때문이다. 체포와 투옥을 두려워했다면 결코 갈 수 없는 길이었다. 조아라에게 저항은 하늘의 소명이다. “우리 모두는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정의로운 뜻을 실천함으로써 무형가치인 사랑과 정의와 진실과 평화가 역사의 현장에서 실현될 수 있도록 하는 책임을 받았다고 나는 믿는다. 나의 이러한 소신과 책임 의식은 성서에서 받은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강렬한 고백이다.

공동체
세속적 가치질서가 우상적으로 작동하는 세상에 맞서려는 이들은 혼자서는 그 꿈을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한다. 그 꿈에 동조하고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어줄 이들이 필요한 것은 그 때문이다. 교회를 흔히 신앙공동체라 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공동체는 생활을 함께 할 때 빚어진다. 신앙 공동체란 세상적 가치관으로부터 유쾌하게 탈주를 감행한 이들의 모임이다. 사람들이 서열에 따라 위계적 관계를 맺지 않고 각각의 지체들이 부여받은 은사와 소명에 따라 서로에게 책임적 존재가 되려 할 때 공동체는 건강하게 유지된다. 

공동체는 어떻게 구성되는가? 건기의 초원에 마지막 남아 있는 물웅덩이에 동물들이 모여들 듯 어떤 영적 스승이 만들어낸 영적 자장에 이끌린 사람들이 모여 형성된 공동체가 있다. “자기 아의 한 영혼을 우주로 알고, 하나님으로 알았고, 마치 살아있는 예수님을 영접하듯” 한 이현필을 중심으로 모인 사람들의 모임인 동광원이나 귀일원이 그 한 예이다. 동광원의 수도자들이 귀한 것은 그들이 세속과 절연한 채 기도에만 힘쓰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세상에서 버림받은 이들의 품이 되어주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것이다. 시인 정현종의 표현을 빌자면 그들은 누군가를 부둥켜안을 때 팔이 엿가락처럼 늘어나는 사람들이었다.

대천덕에 의해 시작된 예수원은 성령의 능력 안에 있던 초대교회의 꿈을 실험하는 공동체였다. 인간의 욕망을 극대화함으로 동력을 얻는 자본주의의 폐단을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대천덕은 초대교회가 경제적 공유 공동체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의 역사하심 때문이라고 믿었다. 그렇다면 지금 이곳에서 그런 삶을 사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예수원은 그런 삶을 실험하고 또 생성하기 위한 장소이다. 

풀무원 공동체는 6·25 전쟁이 끝난 후에 오갈 데 없었던 미군부대 하우스보이들을 원경선이 받아들여 돌보면서 시작되었다. 누군가의 원조에 의지하여 살기보다는 먹을 것을 자체 생산해야 한다는 원칙에 따라 농장을 운영하게 된 것이다. 수익을 내는 일이 공동체의 중심이었다면 그렇게 오랫동안 유지될 수 없었을 것이다. 풀무원 공동체는 점차 생태적 삶과 노동을 지향하는 공동체로 발전해갔다.

소년교도소 출신 청소년들, 경찰에게 붙들려온 양아치들, 그리고 전쟁고아들을 삶의 어엿한 주체로 세우려는 황광은의 노력은 난지도 보이스타운으로 열매를 맺었다. “아무에게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의지할 것. 노동의 대가없이 어찌 숨을 쉬고 먹고 마시려고 하는가. 땀 흘려 얻은 수확으로 밥을 먹는 기쁨을 알라. 그리고 그런 너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라.” 그곳은 단순한 수용시설이 아니라, 영혼의 용광로였다.

물음표로 선 사람들
형태가 어떠하든 이러한 신앙공동체는 하나님의 통치의 가시적 현존이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들 신앙 공동체는 하나님 나라의 향도들이라 할 수 있다.
세상이 어둡다. 희망이 있느냐고 묻는 이들이 많다. 그런 질문 자체가 그들 내면에 깃든 어둠과 절망의 증거이다. 희망은 희망이 있다고 믿는 이들에게는 있는 것이지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없는 것이다. 미묘하다. 이 책에 소개되고 있는 이들의 삶의 내력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희망이 있느냐는 물음 자체가 죄스럽게 여겨진다. 그들은 희망에 대해 묻지 않고 희망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우리 앞에 별처럼 빛나는 존재로 우뚝 서 있다. 그들의 삶과 실천은 우리 앞에 건네진 질문이다. ‘그대는 어떻게 살 것인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머리로 구성하지 말아야 한다. 모름지기 우리가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을 믿는 이들이라면 이들처럼 한번 살아보아야 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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