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죽음에 이르는 욕망7 2018년 12월 05일
작성자 김기석
하나님에 의해 의지가 꺾인 인간

“문전세재는 웬 고갠가 구부야 구부구부가 눈물이로구나”. 진도 아리랑의 메김소리이다. 보통은 ‘문경새재‘라고 부르지만 그것은 문전세재의 오기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는 모양이다. 문전세재는 여성들의 고달픈 인생살이를 은유적으로 일컫는 말이라는 것이다. 전근대사회의 여성들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3번의 문을 통과해야 했다. 안방에서 부엌으로 나가는 쪽문, 부엌에서 마당으로 나가는 부엌문, 마당에서 바깥으로 나가는 대문이 그것이다. 각각 출생, 삶, 죽음을 상징한다.1) ‘구부구부‘는 물론 ‘굽이굽이’를 의미하는 방언이다. 구성진 가락 속에 담긴 한과 슬픔, 그리고 회한이 절절하다.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세상에 여행자처럼 왔다 돌아간다. 세상은 누구에게나 낯설다. 일상에 몰두하고 살 때는 그 낯섦이 뚜렷하게 의식되지 않지만,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갑자기 고개를 들 때 찾아오는 현기증처럼 인생이 낯선 순간이 있다. 삶의 의미 물음 혹은 자기 존재에 대한 물음은 그 때 발생한다. ‘없음’에서 ‘있음’으로, 다시 ‘있음‘에서 ‘없음’으로 귀결되는 지상적 실존의 여정을 흔들림 없이 걸어가는 이가 있을까? 오직 고사목만이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산다는 것은 흔들림을 자기 삶으로 받아들이는 것인 동시에 흔들리면서 더 든든한 뿌리를 얻는 과정이 아닐까?

“만물은 흔들리면서 흔들리는 만큼
튼튼한 줄기를 얻고
잎은 흔들려서 스스로
살아 있는 잎인 것을 증명한다.”2)

젊은 시절 좌우명처럼 외곤 하던 오규원의 시구이다. 속절없이 흔들리던 청춘의 불온함을 스스로 위무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흔들림조차 없는 확신은 위험하다. 교조주의로 귀착될 수 있기 때문이다. 흔들리면서 더 큰 중심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면 다행이겠다. 누구에게나 삶은 무겁다. 김현승은 “나는 내가 항상 무겁다,/나같이 무거운 무게도 내게는 없을 것이다.//나는 내가 무거워/나를 등에 지고 다닌다,/나는 나의 짐이다”3) 시인은 자기 속에 납덩이가 들어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영혼인 줄 알고 삼킨 납덩이가 버겁지만 한 것이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성조들의 삶도 힘겹기는 마찬가지였다. 갈 곳을 알지 못한 채 익숙했던 세계를 떠나야 했던 아브람이 그러하고, 형과의 갈등을 피해 낯선 곳으로 이주해야 했던 야곱의 삶이 그러했고, 세찬 운명의 발길질에 채여 나락까지 내동댕이쳐졌던 요셉의 삶이 그러하다. 어느 누구도 느긋한 평화, 호젓한 평화를 누리지 못했다.

탈 많은 채색옷
오늘 우리 이야기의 초대 손님은 요셉이다. 롤러코스터를 타듯 그의 삶은 부침이 극심했다. 그는 야곱이 마음을 다해 사랑하던 라헬의 소생으로 태어나 아버지의 각별한 사랑을 받으며 살았다. 야곱은 늘그막에 얻은 아들을 애지중지했다. 그 사랑의 외적 표징은 아버지가 지어 입힌 채색옷이었다. 사랑에 눈 먼 야곱에게는 그 채색옷에 스며든 불화와 분쟁의 씨앗을 볼 눈이 없었다.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그를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그의 형들이 아버지가 형들보다 그를 더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창37:3-4)

부모의 사랑이 모든 자식들에게 똑같이 베풀어질 수는 없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는 손가락 없다지만 유난히 아픈 손가락도 있는 법이다. 부모도 편견과 한계에 갇힌 존재일 뿐이다. 문제는 그 마음이 차별로 구체화될 때이다. 야곱이 요셉에게 해 입힌 채색옷은 다른 아들들의 마음에 질투의 불을 붙였다. 문자적으로 보면 채색옷은 여러 가지 색깔이 들어간 옷을 말하지만, 소매가 달린 옷으로 보아야 한다는 이들도 있다. 고대 세계에서 소매가 달린 옷은 노동에 매달리지 않아도 되는 이들이 입는 옷이었다. 그러므로 그 옷은 일종의 특권의 상징이었다. 성경은 요셉의 형제들이 동생을 미워했다고 말하는 동시에 그에게 편안히 말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 마음에 벽이 생긴 것이다. 클라우스 베스터만은 이것을 일종의 ‘사회적 추방(social ostracism)‘4)이라고 해석한다. 아버지의 편애를 받는 요셉은 형들의 친밀한 사귐에서 배제된다. 배제는 배제하는 자와 배제 당하는 자 모두에게 상처를 입힌다.

어느 날 요셉은 형들과 양 떼의 형편을 살피고 오라는 아버지의 지시를 받고 들로 나갔다가 낭패를 경험한다. 멀리서 그가 오는 것을 본 형들은 요셉을 죽일 궁리를 한다. 장자인 르우벤의 중재로 죽임은 면했지만,  요셉은 채색옷을 벗기운 채 물 없는 구덩이에 던져진다. ‘옷을 벗기운 자’가 된 것이다. 완전히 무기력해진 그가 속절없이 죽음을 기다리던 때, 형제들은 유다의 제안에 따라 요셉을 미디안 상인들에게 종으로 팔아버린다. 형제들에게 요셉은 더 이상 인격성이 없는 물건이었던 것이다. 물화를 뜻하는 독일어 ‘Verdinglichung’는 사물로 변한 인간 존재의 참상이 담겨있다. 물화되는 순간 사람은 더 이상 자기 삶의 주체가 아니다. 자유 의지는 박탈되고, 교환 가능한 부품으로 간주된다. 아버지의 큰 사랑을 받던 요셉은 급기야 사물의 자리로 추락했다.

편애가 낳은 참극이었다. 그들은 범죄의 흔적을 조작한다. 숫염소를 잡아 요셉의 채색옷에 피를 묻혀 아버지에게 가져간 것이다. 피가 묻고 찢겨진 옷을 받아 든 야곱은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아들을 위해 애통해했다. 위로받을 길 없는 슬픔이 그를 엄습했던 것이다. 과거에 염소 가죽을 손과 목에 두르고 눈이 어두운 아버지를 속여 복을 가로챘던 속임수의 명수 야곱이 이제는 속임을 당하는 자가 되었다. 인생유전이 이러하다.

존재의 용기
그런데 왜 형들의 증오는 차별의 주체인 아버지가 아니라 동생인 요셉에게 집중되었을까? 우리는 형제들의 모습에서 가인을 본다. 가인은 하나님께서 자기 제물을 받지 않으시자 아벨을 복수의 표적으로 삼는다. 하나님을 징벌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기보다 큰 권력에 대한 증오를 사회적 약자나 권력자에게 사랑을 받는 이들에게 퍼붓는 경향이 있다. 일종의 속죄양 만들기이다. 형제들은 아버지 야곱에게 따지거나 대들기보다는 차라리 요셉을 제거하는 길을 선택한다. 정신적 나약인 동시에 비겁이다.

미디안 사람들은 요셉을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았다. 성경은 보디발의 집에서 요셉이 어떻게 지냈는지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그가 여호와의 복을 받았다고 말한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창39:2-3). 사물로 퇴락했던 요셉이 형통한 자가 되었다. 이 놀라운 변전을 연결하는 구절은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이다. 함께 하시는 하나님, 곧 임마누엘은 무저갱으로 추락하는 사람을 끌어올리신다. 주인 또한 눈 밝은 사람이었다. 요셉이 하는 일을 통해 보디발은 요셉이 여호와의 복을 받은 사람임을 알아차린다. 

요셉이 행복하고 다복했던 과거에 사로잡혀 있거나, 형제들에게 버림받았던 충격에 붙들려 있었다면 이런 일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무의미와 공허, 죄책감, 비존재의 아찔함, 운명의 당기는 힘에 그는 굴복하지 않았다. 그는 비록 스스로 선택한 것은 아니지만 현재의 상황을 자기 삶으로 수용했다. 절망을 절망으로 수납하기보다는 새로운 생의 시작점으로 살았다. 이런 것을 일러 폴 틸리히는 ‘존재의 용기’(courage to be)라 했다. “죄책과 저주의 불안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긍정하는 것은 자기를 초월하는 뭔가에 동참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5) 하나님에 대한 요셉의 믿음을 보여주는 내용은 많지 않지만, 하나님의 선행적인 사랑이 그를 은총에 비끌어맨 것은 분명하다. 그렇기에 그는 절망의 맨바닥을 온 몸으로 기어가면서도 자기를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보디발은 자기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탁했다. 

“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창39:5)

하나님의 복은 인종이나 민족의 경계에 구애받지 않는다. 요셉은 복의 통로가 되었다. 하지만 호사다마라 하지 않던가. 성경 기자는 그 화가 유입되는 지점을 간결하지만 적확하게 그려낸다. “요셉은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더라”(창39:6). 유능한 데다가 용모까지 빼어난 요셉, 사람들의 시선을 끌만하지 않은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연모했다. 고위 관료인 남편의 잦은 부재가 여인의 마음에 그런 욕구를 불러일으킨 것일까? 여인은 요셉에게 눈짓을 하고 동침하기를 요구했다. 진정한 사랑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정욕이 아니었을까? 신원하 교수는 정욕과 사랑을 이렇게 대조한다.

“한 마디로 사랑과 정욕은 모두 상대를 원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지만, 정욕에는 동반자 의식이 철저히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사랑이 상대에게 관심이 있다면, 정욕은 짜릿한 욕구 충족에 더 관심이 있다. 사랑은 상대와의 언약에 신실하고자 하는 반면, 정욕은 삶을 나누고 돌보아 주려는 마음이 없다. 사랑은 서로에게 숨김이 없고 벌거벗어도 부끄럽지 않지만(창2:25), 정욕은 중요한 것을 감추고 드러내지 않는다. 사랑은 인격적 교감으로 따뜻해지지만, 정욕은 외롭고 고독하다. 사랑은 미래를 위해 때로 절제하지만, 정욕은 현재 감정과 만족에만 골몰한다.”6)

오직 의지의 인간만이
정욕에 사로잡히는 순간 이성의 빛은 흐려지고 양심은 잠잠해진다. 정욕이 빚어낼 결과 혹은 위험은 고려되지 않는다. 요셉은 여인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자기를 신뢰해 준 주인을 배신할 수 없었고, 또한 하나님 앞에서 큰 죄를 지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요셉은 감정보다는 의지의 인간이다.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은 기독교인을 가리켜 ‘다른 의지에 따라 사는 의지의 인간’이라고 규정한다. 

“의지의 인간만이 기독교인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의지의 인간만이 꺾여질 수 있는 의지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의 의지가 절대자 또는 하느님에 의해 꺾여진 사람이 기독교인이다. 본능적인 의지가 강할수록 꺾여진 상처는 클 것이고 그만큼 그는 훌륭한 기독교인이다. 이것이 ‘새로운 복종’이라는 말로 특색있게 표현된 그것이다. 기독교인은 새로운 의지를 받아들인 의지의 인간이다. 기독교인은 더 이상 자신의 의지대로 살지 않고, 자신의 의지를 철저히 꺾음으로써─급진적으로 변화하여─다른 의지에 따라 사는, 의지의 인간이다.”7)

요셉의 탁월함은 자기 의지를 꺾었다는 데 있다. 태어나기를 그렇게 태어난 것일까? 아니면 신산스런 삶의 과정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던 것일까? 시련을 겪는다 해도 자기 의지를 꺾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의지에 순복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헤셸은 자기의 마음을 단속하고 고쳐나가는 것이 인간의 사명이라 말한다. 

“한 개인은 부단히 자기 자신에게 짐을 지우고 스스로 마음을 단속할 사명을 지니고 있다. 사람은 그의 성품을 끊임없이 고쳐나가야 한다. 비록 그의 영혼은 순결하게 태어났다 하더라도 사람은 점차적으로 그 자신의 독물(毒水)에다 그것을 섞는 법을 배워나가게 마련이다.“8)

요셉을 향한 여인의 유혹은 일회적인 것이 아니었다. 여인은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다. 그러나 요셉은 단호하고 철저하다.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창39:10). 유혹의 자리는 피해야 한다. 어떤 여지도 남겨두어선 안 되기 때문이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요셉으로 인해 여인은 상처를 받는다. 자기 존재를 부정당한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일이 있어 요셉이 그 집에 들어섰을 때 여인은 그의 옷자락을 붙잡고 “나와 동침하자“고 요구한다. 요셉은 불에 덴 듯 화들짝 놀라 자기 옷을 여인의 손에 버려두고 밖으로 나갔다. 서양의 많은 화가들이 이 결정적 순간을 화폭에 담아냈다. 종교적 금기에서 풀려나 육체에 대한 탐구에 열중하던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들에게 이 장면은 아주 좋은 소재였기 때문이다. 베네치아의 화가들이 그려낸 보디발의 아내는 어깨나 가슴을 드러내고 있거나, 벌거벗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틴토레토의 그림은 전형적이다. 요셉은 붙잡으려는 여인의 손은 절박하기 이를 데 없다. 반면 요셉은 다급하게 몸을 뒤로 젖혀 그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애쓰고 있다. 이 극적인 대비가 빚어내는 긴장이 자못 심각하다.

여인의 손에 들린 요셉의 옷은 유혹을 뿌리친 자의 정결함의 상징이지만, 보디발이 아내는 그것을 정반대의 증거로 조작한다. “그 여인의 집 사람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보라 주인이 히브리 사람을 우리에게 데려다가 우리를 희롱하게 하는도다 그가 나와 동침하고자 내게로 들어오므로 내가 크게 소리 질렀더니 그가 나의 소리 질러 부름을 듣고 그의 옷을 내게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갔느니라”(창39:14-15). 좌절된 욕망 혹은 거절당함의 경험은 원망이나 분노로 화하기 쉬운 법. 그 분노에 기름을 붓는 것은 수치심의 자각이다. 

애욕에서 거짓말로
보디발의 아내는 즉각 요셉에 대한 복수를 시작한다. 먼저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을 자기의 음모에 끌어들인다. 실체적 진실이 무엇이든 그들은 어쩌면 그 음모에 기꺼이 속아 넘어갈 준비가 되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종으로 팔려온 뜨내기가 어느 날 주인의 눈에 들어 자기들의 기득권을 위협하는 자리에까지 올랐으니, 그들이 요셉을 호의로 대했을 리는 만무하다. 그러나 그의 뒤에는 보디발이라는 거대한 산이 있으니 요셉을 함부로 대할 수도 없었다. 여인은 집안에서 미세하게 작동하고 있던 그런 역학관계를 알아챌 만큼 명민한 사람이었다. ‘히브리 사람’이라는 말은 그들과의 차이를 드러내고, ‘우리‘라는 말은 집 사람들로 하여금 여인과 합일화 할 수 있는 여지를 열어 준다. 사람들은 기꺼이 그 말의 올무에 걸려든다. 여인은 그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알리바이를 완성한다. 

그리고 남편이 귀가하기를 기다렸다가 즉시 요셉을 모함한다. “당신이 우리에게 데려온 히브리 종이 나를 희롱하려고 내게로 들어왔으므로 내가 소리 질러 불렀더니 그가 그의 옷을 내게 버려두고 밖으로 도망하여 나갔나이다”(창39:17-18). ‘당신이 우리에게 데려온’이라는 표현은 선악과를 따먹고 책망을 받자 아담이 한 말을 연상시킨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3:13). 죄는 책임의 방기 혹은 전가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여인은 자기를 지키기 위해 소리를 질러 사람들을 불렀다고 말한다. 거짓의 드라마가 이렇게 만들어진다. 이로써 여인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 정결한 사람이 되었고 요셉은 배은망덕한 패륜아가 되었다. 화가 난 보디발은 요셉을 감옥에 가둔다. 요셉의 전락은 끝이 없다. 형들에게 버림받아 물 없는 웅덩이에 갇히고, 종으로 팔리고, 이역 땅에서 감옥에 갇혔다. ‘구부야 구부구부가 눈물이로구나’. 

보디발의 아내는 단테의 <신곡> 중 ‘지옥편’ 제30곡에 등장한다. 단테는 그 여인을 사기꾼과 거짓말쟁이들이 머무는 곳인 지옥의 제8원에 배치한다. 그곳에서 여인은 목마를 도시의 성 안으로 들이도록 트로이 사람들을 설득했던 그리스인 시논과 함께 열에 들뜬 상태로 누워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단테는 아다모에게 묻는다. 

“‘너의 오른편에 바싹 달라붙어 누워 있으면서 겨울날 축축이 젖은 손처럼 연기를 피우고 있는 그 기구한 두 놈은 누구냐?‘ 그가 대답했다. ‘내가 이 벼랑으로 몰아쳐 왔을 때 그들을 여기서 보았더니, 저들은 꼼짝도 안 했는데 이후로도 언제까지나 움직이지 않을 것이오. 한 년은 요셉을 모함하던 거짓말쟁이, 다른 놈은 트로이의 거짓말쟁이 그리스인 시논. 그들은 호된 열병으로 독한 내를 뿜고 있다오.’”9)

애욕에 사로잡힌 이들이 벌을 받는 장소는 지옥의 제2원인데, 단테가 보디발의 아내를 제8원에 배치한 것은 여인의 죄 가운데 애욕보다 더 큰 것이 거짓말이라고 보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인간이 쓴 드라마에서 요셉은 바닥없는 심연으로 가라앉고 있지만 하나님의 구원 드라마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개된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지금 우리의 관심이 아니다. 우리는 요셉이 함께 즐기자는 여인의 제안을 거부했던 까닭이 궁금하다. 

작가적 상상력
독일 작가인 토마스 만은 대작 <요셉과 그 형제들>을 통해 그 까닭을 상세하게 탐색한다. 길기는 하지만 그의 상상력과 추리력을 따라가 보기로 하자.

첫째, 하나님의 약혼자였던 요셉은 차마 하나님을 실망시킬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배신이 외로운 그분에게 안기게 될 특별한 아픔을 배려할 만큼 충분히 현명했다”는 것이다. 형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픔을 배려했다는 사실이 놀랍다.

둘째, 주인의 품위를 지켜줄 뿐만 아니라 그에게 결코 상처를 입히지 않겠다고 맹세했기 때문이다. 자신을 알아봐주고, 신임하고, 권한까지 위임해준 이를 배신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셋째, “흡사 남자처럼 행세하는 여주인의 구혼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수동적인 여성의 위치로 내려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요셉은 쾌락의 대상이 되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늘의 관점에서 본다면 성 차별적인 요소인 것은 분명하다.

넷째,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자부심에서 비롯된 순결의 계명이 그로 하여금 그녀와 피를 섞지 못하도록 했다.” 토마스 만은 애굽을 노쇠한 문명의 상징으로 읽는다. 그는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미래를 언약할 수 없는 노쇠한 것“이 “젊은 피를 탐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비록 아무것도 아닌 신세로 전락한 상태였다 해도 요셉은 속된 사람이어서는 안 되었다. 그런 자부심이야말로 끝없는 추락 속에서도 그를 지탱해주는 힘이었던 것이다.

다섯째,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다. 사람들이 모두 다산과 풍요를 보장해준다고 믿었던 우상 앞에 절을 할 때 야곱은 단호하게 그들과 절연하고 살았다. 축제의 열기에 빠져 행음하는 가아안 사람들의 현실을 혐오하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요셉을 지키는 든든한 울타리였다.

여섯째, “사랑으로 말미암아 상대방을 애타게 그리는 그녀가 처하게 된 슬프고 저주스러운 상황을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았다는 것이다. 요셉은 그녀의 “절규를 황폐한 유혹, 흡사 악마의 유혹 같은 것으로 받아들였다.” 정욕은 채워질 수 없는 허구렁이고, 정욕에 빠진 이들이 거두는 것은 공허함일 뿐임을 알았기에 요셉은 여인에게 그러한 진실을 깨닫게 하고 싶었다. 정욕 혹은 욕망은 시간이 갈수록 변질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일곱째, 그의 가족 관계 속에서 벌어진 추문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야곱이 레아를 통해 얻은 아들 르우벤은 아버지의 첩 빌하를 범하는 죄를 저지른다(창35:22). 르우벤은 아버지를 수치스럽게 만들었다. 그것은 지울 수 없는 기억이었다. 야곱은 임종의 자리에서 장자인 르우벤을 칭찬하는 한편 그가 한 부끄러운 행동을 상기시킨다.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내 능력이요 내 기력의 시작이라 위풍이 월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다마는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하지 못하리니 네가 아버지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으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창49:3-4). 르우벤의 행위는 아버지를 발가벗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요셉은 아버지의 근심어린 눈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고 느꼈다.” 아버지의 눈길을 의식하면서 자신을 망각하고 아버지를 발가벗길 수는 없었던 것이다.10)

한 개인의 행동을 결정짓는 요인은 참으로 다양하다. 작가는 상상력을 동원해 요셉의 마음에서 벌어진 복잡한 생각들을 읽어낸다. 작가는 여인의 유혹을 물리친 요셉의 행동을 다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인간 행동의 이면에서 작동하고 있는 다양한 계기들을 추론해볼 뿐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도 낯선 존재이다. 늘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행동하다가도 한 순간에 무너지기도 한다. 특히 성의 문제는 이성의 경계를 허물 때가 많다. 보디발의 아내가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던 요셉에게 끌렸던 것은 어쩌면 자기 안에 깃든 어떤 공허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자기 속의 결락을 채우고자 하는 것은 모든 인간의 보편적 욕망이다. 하지만 방향을 잘못 잡은 욕망이 우리를 끌고 가지 않도록 늘 경계해야 한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에 의해 자기 의지가 꺾인 사람이어야 한다.



이홍재 칼럼, ‘문경새재인가 문전세재인가’, 전남일보, 2013년 6월 20일
오규원, <사랑의 技巧>에 나오는 ‘만물은 흔들리면서’ 부분, 민음사, 오늘의 시인총서, 1978년 9월 30일, p.79
김현 편, <나는 내가 무겁다> 중에 나오는 김현승의 ‘鉛‘ 부분, 정우사, 1994년 3월 30일, p.120
4. Claus Westermann, , Eerdmans, 1987, p.263)
5. Paul Tillich, , Fountain Books, March 1977, p.161
6. 신원하, <죽음에 이르는 7가지 죄>, Ivp, 2012년 6월 22일, p.186
7.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 선집7, <진리를 향한 열정>, 이현주 옮김, 종로서적, 1985년 3월 20일, p.102)
8.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 앞의 책, p.119
9. 단테 알리기에리, <신곡>, 한형곤 옮김, 서해문집, 2012년 1월 20일, p.301
10. 토마스 만, <요셉과 그 형제들4>, 장지연 옮김, 2001년 11월 20일, p.762-7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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