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초원의 성모 2019년 01월 24일
작성자 김기석
초원의 성모

지오반니 벨리니(Giovanni Bellini, 1435-1516)는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활동한 화가입니다. 아시다시피 베네치아는 피렌체와 더불어 르네상스가 꽃을 피운 도시입니다. 베네치아는 동서 교류의 중심지였고 경제적으로도 아주 활발한 도시였기 때문에 많은 예술가들이 이 도시를 찾아왔습니다. 16세기 이전의 그림이나 조각은 대개 종교적인 주제 혹은 신화적인 주제를 다뤘습니다. 장엄한 분위기를 내기 위해서인지 색채는 대체로 어두웠습니다. 예술가들은 도상학적 전통을 존중했고 아주 조금씩만 형태적 변화를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르네상스 시대의 들뜬 분위기 속에서 예술가들은 차츰 전통에 예속되기보다는 예술의 새로운 형식을 탐색하는 데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벨리니가 대표적 인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베네치아 화풍을 만든 사람이라고 평가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는 종교적 주제를 다루면서도 베네치아의 풍경을 배경에 그렸습니다.

런던 국립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초원의 성모>(The Madonna of the Meadow, 1500-05, 85.4*66.5cm)는 그러한 특질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화면의 한 복판에는 아기 예수를 안은 채 고요히 앉아 있는 성모가 피라미드 형태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흰색 머릿수건은 순결 혹은 정결을 나타내고, 적갈색 옷과 청색은 은총과 영광을 각각 나타냅니다. 성모는 고개를 갸웃한 채 두 손을 모아 기도를 올리고 있습니다. 마주한 두 손이 이룬 공간은 마치 연약한 뭔가를 감싸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너무 힘주어 잡지도 않고 그렇다고 하여 허술히 놓아버리지도 않는 미묘한 균형이 참 아름답습니다. 마치 로댕의 ‘대성당’이라는 조각을 보는 것 같습니다. 로댕은 마주보고 있는 두 오른손이 만나 빚어낸 공간을 형상화하고는 그 작품의 제목을 ‘대성당’이라 붙였습니다. 서로의 아픔을 어루만지기 위해 내민 손이야말로 교회의 본질이라는 것일까요?

성모의 무릎 위에 벌거벗은 아기 예수가 고요히 잠들어 있습니다. 마치 무게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무슨 꿈이라도 꾸는지 입술이 아래로 조금 내려가 있습니다. 벌거벗은 아기는 무구함과 연약함 그 자체입니다.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죄가 유입되기 이전의 인류의 상태를 ‘꿈꾸는 순진무구’(dreaming innocence)라는 말로 요약한 바 있습니다. 주객분열이 일어나기 전의 상태, 곧 타자에 대한 경계도 두려움도 발생하지 않은 상태라는 말이지요. 신적 광휘에 싸이지 않은 예수는 참 사람 그 자체입니다. 세상의 어떤 소요도 그 달콤한 잠을 깨울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구조가 조금 낯익지 않나요? 짐작하신 그대로입니다. 성모의 무릎 위에 누운 예수의 이미지는 미켈란젤로를 통해 우리에게 잘 알려진 ‘피에타’와 도상학적으로 거의 일치합니다. 피에타는 ‘비탄’ 혹은 ‘슬픔’이라는 뜻으로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의 슬픔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벨리니는 똑같은 도상학적 구조를 취해 죽음이 아니라 생명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변화입니다.

하지만 세상이 평화롭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세상은 늘 죽음의 위협 아래 있습니다. 화면의 왼쪽 상단에 있는 나무를 보십시오. 잎이 다 진 앙상한 나뭇가지 위에 까마귀 한 마리가 앉아 있습니다. 까마귀의 무게로 인해 가지가 잔뜩 휘어 있습니다. 엘리야 이야기에서 까마귀는 피신 중에 있던 예언자에게 먹을 것을 물어다 주는 길조이지만 서양 미술 전통에서는 대개 불길한 새로 등장합니다. 그렇다고 하여 까마귀가 악마의 형상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죽음도 삶의 한 부분이기 때문일 겁니다. 죽음이 없다면 삶은 얼마나 권태로울까요? 하이데거는 인간은 죽음에 이르는 존재라 말했습니다. 그 말은 인간은 죽음이라는 한계를 의식하며 자기 삶의 의미를 탐색하는 존재라는 말일 겁니다. 죽음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저 나뭇가지 끝에 있을 뿐입니다.

시간 속을 바장이며 사는 인간은 끊임없이 삶의 의미를 물으며 자기 삶을 형성해야 합니다. 시간의 다른 말은 불안입니다. 시간은 변화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삶과 죽음, 빛과 어둠, 희망과 절망, 기쁨과 슬픔, 의미와 무의미 사이에서 흔들립니다. 벨리니는 그러한 진실을 화면 속에 숨겨두었습니다. 까마귀가 앉아 있는 나무 아래쪽으로 시선을 돌려보십시오. 백로 한 마리가 날개를 펼친 채 잔뜩 긴장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잘 살펴보면 그 앞에 뱀 한 마리가 고개를 쳐들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뱀은 설명하지 않더라도 잘 아시겠지요? 그렇습니다. 뱀은 유혹자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유혹했던 뱀이 은근한 유혹자였다면 여기서는 매우 위협적으로 보이는군요. 산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전선에서 싸우는 과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싸움에 벌써 지친 것일까요? 엎드려 있는 소 앞에 어떤 사내가 망연한 표정으로 앉아 있습니다. 술에 취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삶은 참 곤고합니다.

그런데 성모의 오른쪽 공간은 건강한 삶의 표징들을 보여줍니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흰 구름이 무심히 떠갑니다. 저 멀리 산도 보이고, 베네치아 근교의 작은 도시도 보입니다. 성곽에 둘린 도시는 깨끗합니다. 황폐의 흔적이 보이지 않습니다. 성 밖의 들판에는 흰 옷을 입은 여인이 서 있습니다. 손에 작대기를 든 채 소와 나귀를 돌보고 있군요. 평온한 일상입니다. 그러나 그곳에서의 삶이 쉽지만은 않을 것 같습니다. 대지는 척박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하나님은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에게 “너는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을”(창3:19)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여인이 입고 있는 흰 옷은 노동이 저주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언합니다. 힘겹기는 해도 일상의 자리야말로 거룩과 만나는 자리입니다.

분주함이 신분의 상징처럼 된 세상에서 우리는 뒤쳐지지 않기 위해 질주합니다. 호흡은 가빠오고, 시야는 좁아집니다. 시간의 향기를 느낄 여유를 누리지 못할 때 내면의 황폐가 시작됩니다. 피에르 쌍소는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라는 책에서 건강한 사람의 모습을 이렇게 그리고 있습니다. “시대의 흐름에서 약간 뒤로 물러나 살 수 있는 사람. 즐겨 침묵을 택할 수 있는 사람. 지식이나 경험을 쌓기 위해 애쓸 때나, 시대의 격랑 속에서 힘든 전투를 벌이고 있을 때조차도 즐겨 명상에 잠길 수 있는 그런 사람”. 

벨리니의 이 그림은 고요함 속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눈을 감은 채 기도를 올리고 있는 성모, 진정한 안식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 같은 아기 예수. 두 분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 속에서 일렁이던 거친 감정들이 잦아들고, 어깨를 짓누르던 삶의 무게가 가벼워짐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멈춰서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성마른 이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 성공의 사다리를 오르기 위해 위만 바라보는 이들은 절대로 볼 수 없는 것들 말입니다. 숭고하고 아름다운 세상에 접속할 때 사람은 일상의 진흙 속에서 한 송이 꽃을 피워낼 수 있습니다.

지오반니 벨리니(Giovanni Bellini, 1435-1516)는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활동한 화가입니다. 아시다시피 베네치아는 피렌체와 더불어 르네상스가 꽃을 피운 도시입니다. 베네치아는 동서 교류의 중심지였고 경제적으로도 아주 활발한 도시였기 때문에 많은 예술가들이 이 도시를 찾아왔습니다. 16세기 이전의 그림이나 조각은 대개 종교적인 주제 혹은 신화적인 주제를 다뤘습니다. 장엄한 분위기를 내기 위해서인지 색채는 대체로 어두웠습니다. 예술가들은 도상학적 전통을 존중했고 아주 조금씩만 형태적 변화를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르네상스 시대의 들뜬 분위기 속에서 예술가들은 차츰 전통에 예속되기보다는 예술의 새로운 형식을 탐색하는 데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벨리니가 대표적 인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베네치아 화풍을 만든 사람이라고 평가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는 종교적 주제를 다루면서도 베네치아의 풍경을 배경에 그렸습니다.

런던 국립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초원의 성모>(The Madonna of the Meadow, 1500-05, 85.4*66.5cm)는 그러한 특질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화면의 한 복판에는 아기 예수를 안은 채 고요히 앉아 있는 성모가 피라미드 형태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흰색 머릿수건은 순결 혹은 정결을 나타내고, 적갈색 옷과 청색은 은총과 영광을 각각 나타냅니다. 성모는 고개를 갸웃한 채 두 손을 모아 기도를 올리고 있습니다. 마주한 두 손이 이룬 공간은 마치 연약한 뭔가를 감싸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너무 힘주어 잡지도 않고 그렇다고 하여 허술히 놓아버리지도 않는 미묘한 균형이 참 아름답습니다. 마치 로댕의 ‘대성당’이라는 조각을 보는 것 같습니다. 로댕은 마주보고 있는 두 오른손이 만나 빚어낸 공간을 형상화하고는 그 작품의 제목을 ‘대성당’이라 붙였습니다. 서로의 아픔을 어루만지기 위해 내민 손이야말로 교회의 본질이라는 것일까요?

성모의 무릎 위에 벌거벗은 아기 예수가 고요히 잠들어 있습니다. 마치 무게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무슨 꿈이라도 꾸는지 입술이 아래로 조금 내려가 있습니다. 벌거벗은 아기는 무구함과 연약함 그 자체입니다.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죄가 유입되기 이전의 인류의 상태를 ‘꿈꾸는 순진무구’(dreaming innocence)라는 말로 요약한 바 있습니다. 주객분열이 일어나기 전의 상태, 곧 타자에 대한 경계도 두려움도 발생하지 않은 상태라는 말이지요. 신적 광휘에 싸이지 않은 예수는 참 사람 그 자체입니다. 세상의 어떤 소요도 그 달콤한 잠을 깨울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구조가 조금 낯익지 않나요? 짐작하신 그대로입니다. 성모의 무릎 위에 누운 예수의 이미지는 미켈란젤로를 통해 우리에게 잘 알려진 ‘피에타’와 도상학적으로 거의 일치합니다. 피에타는 ‘비탄’ 혹은 ‘슬픔’이라는 뜻으로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의 슬픔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벨리니는 똑같은 도상학적 구조를 취해 죽음이 아니라 생명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변화입니다.

하지만 세상이 평화롭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세상은 늘 죽음의 위협 아래 있습니다. 화면의 왼쪽 상단에 있는 나무를 보십시오. 잎이 다 진 앙상한 나뭇가지 위에 까마귀 한 마리가 앉아 있습니다. 까마귀의 무게로 인해 가지가 잔뜩 휘어 있습니다. 엘리야 이야기에서 까마귀는 피신 중에 있던 예언자에게 먹을 것을 물어다 주는 길조이지만 서양 미술 전통에서는 대개 불길한 새로 등장합니다. 그렇다고 하여 까마귀가 악마의 형상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죽음도 삶의 한 부분이기 때문일 겁니다. 죽음이 없다면 삶은 얼마나 권태로울까요? 하이데거는 인간은 죽음에 이르는 존재라 말했습니다. 그 말은 인간은 죽음이라는 한계를 의식하며 자기 삶의 의미를 탐색하는 존재라는 말일 겁니다. 죽음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저 나뭇가지 끝에 있을 뿐입니다.

시간 속을 바장이며 사는 인간은 끊임없이 삶의 의미를 물으며 자기 삶을 형성해야 합니다. 시간의 다른 말은 불안입니다. 시간은 변화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삶과 죽음, 빛과 어둠, 희망과 절망, 기쁨과 슬픔, 의미와 무의미 사이에서 흔들립니다. 벨리니는 그러한 진실을 화면 속에 숨겨두었습니다. 까마귀가 앉아 있는 나무 아래쪽으로 시선을 돌려보십시오. 백로 한 마리가 날개를 펼친 채 잔뜩 긴장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잘 살펴보면 그 앞에 뱀 한 마리가 고개를 쳐들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뱀은 설명하지 않더라도 잘 아시겠지요? 그렇습니다. 뱀은 유혹자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유혹했던 뱀이 은근한 유혹자였다면 여기서는 매우 위협적으로 보이는군요. 산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전선에서 싸우는 과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싸움에 벌써 지친 것일까요? 엎드려 있는 소 앞에 어떤 사내가 망연한 표정으로 앉아 있습니다. 술에 취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삶은 참 곤고합니다.

그런데 성모의 오른쪽 공간은 건강한 삶의 표징들을 보여줍니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흰 구름이 무심히 떠갑니다. 저 멀리 산도 보이고, 베네치아 근교의 작은 도시도 보입니다. 성곽에 둘린 도시는 깨끗합니다. 황폐의 흔적이 보이지 않습니다. 성 밖의 들판에는 흰 옷을 입은 여인이 서 있습니다. 손에 작대기를 든 채 소와 나귀를 돌보고 있군요. 평온한 일상입니다. 그러나 그곳에서의 삶이 쉽지만은 않을 것 같습니다. 대지는 척박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하나님은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에게 “너는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을”(창3:19)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여인이 입고 있는 흰 옷은 노동이 저주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언합니다. 힘겹기는 해도 일상의 자리야말로 거룩과 만나는 자리입니다.

분주함이 신분의 상징처럼 된 세상에서 우리는 뒤쳐지지 않기 위해 질주합니다. 호흡은 가빠오고, 시야는 좁아집니다. 시간의 향기를 느낄 여유를 누리지 못할 때 내면의 황폐가 시작됩니다. 피에르 쌍소는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라는 책에서 건강한 사람의 모습을 이렇게 그리고 있습니다. “시대의 흐름에서 약간 뒤로 물러나 살 수 있는 사람. 즐겨 침묵을 택할 수 있는 사람. 지식이나 경험을 쌓기 위해 애쓸 때나, 시대의 격랑 속에서 힘든 전투를 벌이고 있을 때조차도 즐겨 명상에 잠길 수 있는 그런 사람”. 

벨리니의 이 그림은 고요함 속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눈을 감은 채 기도를 올리고 있는 성모, 진정한 안식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 같은 아기 예수. 두 분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 속에서 일렁이던 거친 감정들이 잦아들고, 어깨를 짓누르던 삶의 무게가 가벼워짐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멈춰서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성마른 이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 성공의 사다리를 오르기 위해 위만 바라보는 이들은 절대로 볼 수 없는 것들 말입니다. 숭고하고 아름다운 세상에 접속할 때 사람은 일상의 진흙 속에서 한 송이 꽃을 피워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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