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세상의 모든 슬픔을 짊어지고 2020년 07월 03일
작성자 김기석
세상의 모든 슬픔을 짊어지고
    -미켈란젤로의 ‘론다니니 피에타’

세상 도처에서 어머니들의 피울음이 들려옵니다. 자식을 잃고 우는 라헬의 울음소리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기억 속에 일종의 원형으로 각인되어 있었습니다. 예레미야는 망국의 아픔을 다독이며 주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나 주가 말한다. 라마에서 슬픈 소리가 들린다. 비통하게 울부짖는 소리가 들린다. 라헬이 자식을 잃고 울고 있다. 자식들이 없어졌으니, 위로를 받기조차 거절하는구나“(렘31:15). 생때 같은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아픔과 한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는 얼룩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식을 잃은 지 수십 년이 흘렀는데도 그 무덤가에서 구슬픈 울음을 터뜨리는 이들을 볼 때마다 그 슬픔의 깊이를 가늠할 길이 없어 허둥거리곤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를 때 많은 여인들이 가슴을 치며 슬퍼했습니다. 그 때 주님은 여인들을 위로하며 이르셨습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두고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두고 울어라“(눅23:28). 슬픔은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근원적 정서입니다. 슬픔은 우리에게서 허세의 가면을 벗기고 삶의 실상과 마주하게 합니다. 윤동주의 팔복은 ‘슬퍼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는 구절을 여덟 번이나 반복하고 있습니다. 슬픔 그 자체가 복일 수는 없지만, 슬픔은 사람의 마음을 이어주는 다리라는 측면에서 보면 복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슬픔 자체를 찬미할 수는 없습니다. 슬픔을 넘어 기쁨에 이르기를 바랄 뿐입니다.

수많은 화가와 조각가들이 성모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시신을 무릎에 안고 슬퍼하는 모습을 형상화했습니다. 그것을 일러 피에타(pieta)라 합니다. 종교의 유무를 떠나 사람들은 피에타 앞에 설 때 숙연함을 느낍니다. 그 형상 속에 표현된 슬픔이 인류의 보편적 정서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피에타 하면 사람들은 즉시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 있는 미켈란젤로(1475-1564)의 피에타상을 떠올립니다. 1498년부터 1500년 사이에 제작된 그 작품은 조형적으로 나무랄 데가 없습니다. 대리석에 영혼이 깃들게 하는 것을 소명으로 삼은 사람이라는 세간의 평가가 과장이 아닙니다. 선과 면으로 이루어진 완벽한 삼각 구도는 흔들림 없는 불멸의 표상으로 보입니다. 아들을 무릎에 안고 있는 어머니의 얼굴은 슬픔에 차 있지만 매우 절제되어 있어 차라리 우아해 보입니다. 축 늘어진 그리스도의 모습도 인간적 비참함과는 무관해 보입니다. 허리를 곧추세우고 있는 어머니와 아들은 절묘한 십자가 형태를 이루고 있습니다. 

감상자들은 슬픔에 압도되기 보다는 거룩함의 현현을 보는 것 같은 느낌에 입을 다뭅니다. 20대 중반에 이른 젊은 천재의 재능이 그 작품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문득 저항감이 생깁니다. 로마제국에 의해 반역죄로 처형당한 청년 예수와 참척의 고통을 당한 그 어머니의 슬픔은 말끔하게 표백되어 있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시대의 요청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중세 말의 혼란 속에서 사회는 들끓고 있었습니다. 권력 기관으로 변한 교회는 사람들의 시린 마음을 어루만지고, 마땅히 가야 할 길을 가르치기보다는 자기 확장욕에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중세를 지탱하고 있던 세계관이 서서히 기울고 있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그런 혼돈 속에서 질서를 찾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미켈란젤로는 그 이후에도 몇 개의 피에타상을 더 제작했습니다. 작업 도중 미켈란젤로 자신이 일부를 파손했다고 알려진 피렌체 피에타(1548-1555), 형태적으로 불안정할 뿐만 아니라 조야한 느낌이 드는 팔레스티나 피에타(1550-1556), 그리고 미완성작으로 남은 론다니니 피에타(1555-1564)가 그것입니다. 같은 주제를 여러 번 다뤘다는 것은 주제를 바라보는 그의 인식에 변화가 생겼음을 암시합니다.

미술사적으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내 마음에 최고의 피에타는 밀라노의 스포르체스코 성 박물관에 있는 론다니니의 피에타입니다. 그 피에타상을 처음 본 순간 작품 속에 깃든 깊은 슬픔과 고요함에 압도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미켈란젤로가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까지 매만지던 작품입니다. 작품은 초벌로 돌을 다듬은 상태일 뿐 완성과는 거리가 멉니다. 거칠고 투박합니다. 흰 대리석의 물성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습니다. 마치 사는 동안 우리 몸과 영혼에 새겨진 아픈 기억들 같습니다. 젊은 시절 미학적 이상에 따라 작품을 만들던 미켈란젤로가 말년에 그렇게 투박한 작품을 만든 것은 인생의 쓴맛과 단맛을 다 겪고 난 후였기 때문일 겁니다. 미학적 이상을 추구하기 위해 가열차게 달려왔지만 그의 마음에 남은 것은 유한한 인간의 슬픔이었던 것일까요? 형식, 균형, 비례, 아름다움의 추구는 뒤로 물러나고 삶의 실상을 드러내는 것이 그에게 더 중요했던 것일까요?

그는 생의 말년에 예술을 우상이나 전제 군주로 만드는 일의 부질없음을 토로한 바 있습니다. 나이듦은 육체의 쇠락과 정신적 긴장의 이완을 초래하지만 삶의 실상을 깨닫게 만들기도 합니다. 젊은 날의 열정이 스러진 후에야 볼 수 있는 것들이 분명 있습니다. 삶은 이러저러해야 한다는 당위와 열정이 스러진 자리에 남는 것은 허무이거나 자유입니다. 미켈란젤로가 당도한 세계는 허무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총에 자기를 자유롭게 내맡기고 싶어했습니다.

어머니 마리아는 시신으로 변한 아들 예수를 뒤에서 부둥켜안고 있습니다. 저절로 굽은 등은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슬픔을 고스란히 드러냅니다. 뒷모습만으로도 슬픔을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그러나 슬픔의 표현이 노골적이지 않기에 오히려 우리 마음을 건드립니다. 그런데 이 작품을 가만히 보면 마치 죽은 예수가 슬픔에 잠긴 어머니를 업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미켈란젤로가 의도한 것이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머니는 아들을 부둥켜안아 일으키려 하고, 아들은 어머니의 슬픔의 무게를 오히려 짊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신비가 아닐까요? 발터 니그는 미켈란젤로에 관한 책을 마무리하면서 론다니니의 피에타에 대해 이렇게 평가합니다.

“이 피에타 앞에서 어느 누가 그의 매끄러운 묘사를 탓하면서 이런 매끄러움을 수단으로 그가 아름다운 형식만 섬겼다는 비난을 할 수 있겠는가? 고통의 흔적을 극명하게 드러냄으로써 복음의 세계를 구체적으로 보여 주는 이 형상을 바라볼 때 이런 바보스러운 항변은 무너지고 만다. ‘론다니니의 피에타‘ 안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신약성경이 담고 있는 그리스도교 정신이다. 그리스도교 정신은 권력, 무게, 그리고 위엄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그리스도교를 이렇게 보는 의견들은 ‘론다니니의 피에타‘에서 남김없이 극복되었으며, 사람의 아들이 처한 통절한 절망은 그를 표현하는 데는 충분하지 않은 충격이라는 말에 자리를 내준다. 측은함만 오롯이 남는다. ‘론다니니의 피에타‘는 형언할 수 없는 것과 대면할 때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침묵이다.”(발터 니그, <미켈란젤로-하느님을 보다>, 윤선아 옮김, 분도출판사, 2012, 181-2쪽)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시는 분이 아닙니다“(히4:15)라고 말했습니다. 스스로 연약함 속에 있었기에, 스스로 고난을 당함으로 순종을 배우셨기에 그분은 우리를 도울 수 있습니다. 론다니니의 피에타는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의 시간을 지나고 있는 모든 이들을 그 품에 안습니다. 우리가 일터에서, 거리에서, 바다에서, 집에서 갑작스레 죽음을 맞이한 자식들 때문에 가슴에 멍이 든 모든 어머니와 아버지의 아픔을 함께 나누려 할 때 고난당하신 예수님과의 깊은 일치가 이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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