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목회서신] 우리는 어떤 편지인가? 2021년 10월 07일
작성자 김기석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요13:35)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모든 이에게 임하시기를 빕니다.

그동안 평안하셨는지요? 어렵고 곤고한 시간을 견디고 계신 교우들이 많습니다. 수술을 받고 회복을 기다리는 분도 계시고, 수술을 앞두고 계신 분도 계십니다. 인생의 가장 어려운 순간을 견디고 있는 모든 분들에게 하나님의 치유의 능력이 부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시대적 우울감이 우리를 확고하게 감싸고 있습니다. 앞날을 기약하기 어렵다는 사실이 우리 어깨를 더욱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불안에게 기회를 주지 않는 끈질기고 확고한 믿음이 필요한 때입니다. “주님의 진노는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영원하니, 밤새도록 눈물을 흘려도, 새벽이 오면 기쁨이 넘친다“(시 30:5)는 시편 기자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벌써 한로(寒露) 절기가 다가오는데 여전히 날씨가 덥습니다. 아열대성 고기압이 강화되고 있기 때문이라 합니다. 기후 변화는 절기에 대한 우리의 감성조차 바꿔놓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많은 이들이 코로나 백신 접종을 마쳤습니다. 10월 말부터는 위드 코로나로 전환될 예정이라는 보도가 나오고 있습니다. 교회 모임에 대해서는 아직 뚜렷한 방침이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서서히 일상을 회복하기 위해 모두가 마음을 모아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며칠 연속으로 참 이상한 꿈을 꾸었습니다. 교우들이 많이 모여서 애찬을 나누는 꿈이었습니다. 솥에서는 쇠고기뭇국이 끓고 있고, 다양한 음식이 상 위에 차려지고 있었습니다. 시끌벅적한 그 분위기가 얼마나 좋았는지 모릅니다. 땅이 황폐하여 사람도 없고 짐승도 없는 세상의 쓸쓸함을 안타까워하는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은 회복을 약속하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지금 황무지로 변하여, 사람도 없고, 주민도 없고 짐승도 없는 유다의 성읍들과 예루살렘의 거리에 또다시, 환호하며 기뻐하는 소리와 신랑 신부가 즐거워하는 소리와 감사의 찬양 소리가 들릴 것이다. 주의 성전에서 감사의 제물을 바치는 사람들이 이렇게 찬양할 것이다“(렘 33:10b-11a). 꿈에서도 이 말씀을 떠올리며 홀로 미소를 지은 것은, 일상의 소음이 더없이 그립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다가도 저는 문득 걱정에 사로잡혔습니다. ‘이래도 되나? 아직은 모임이 금지되어 있는데. 이러다가 누구 한 사람이라도 확진자가 나오면 어떻게 하지?’ 그런 걱정을 하다가 깨곤 했습니다. 꿈에서 깨어서도 불쾌하기는커녕 괜히 흐뭇했습니다. 그리고 제 속에 숨겨졌던 그리움의 실체를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누리지 못하지만 우리가 함께 했던 시간이 얼마나 귀한 시간이었는지를 절절하게 깨달은 것입니다. 부디 이런 날이 속히 우리에게 열렸으면 좋겠습니다.

요즘 ‘오징어 게임‘이라는 넷플릭스 드라마가 전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합니다. 저는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만 그 속에 반영된 기독교인들의 모습이 매우 부정적이라지요? 징검다리 건너기 게임에서 다른 사람을 밀어트린 후 자신은 살아남았다고 감사의 기도를 올리는 사람, 아내를 때리고 딸에게 몹쓸 짓을 한 후에 습관처럼 ‘우리 죄를 사해 달라‘고 기도하는 목사, 눈이 가려지고 양손이 뒤로 묶인 채 비 오는 거리에 버려진 주인공을 모두가 외면할 때 그의 안대를 벗겨주며 ‘괜찮으세요‘라고 묻는 대신 ‘예수 믿으세요‘라고 말을 건넨 거리의 전도자.

벌써 여러 해 전입니다만 영화 ‘밀양‘이 나왔을 때 청년 교사들과 함께 보러 간 적이 있습니다. 그 영화는 이청준 선생의 소설 <벌레 이야기>를 기초로 하여 만들어진 영화였습니다. 소설은 기독교인들이 늘 입에 달고 사는 용서의 문제가 우리 삶의 구체적 상황 속에서 어떻게 작동될 수 있는지를 묻습니다. 작가는 ‘용서하라‘는 말이 때로는 피해자에 대한 폭력이 될 수도 있음을 보여줍니다. 애지중지하던 아들 알암이가 참담하게 죽임을 당한 후, 알암이 엄마의 삶은 무너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범인은 알고 보니 아이가 다니던 학원의 원장이었습니다. 알암이 엄마는 그 범인에게 복수를 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범인은 오히려 경찰의 보호를 받고 있었습니다. 복수의 표적을 빼앗긴 알암이 엄마는 미칠 것 같았습니다.

그때 주변의 기독교인들이 집요하게 전도를 합니다. 주님께 귀의하지 않으면 그 시련의 시간을 이겨낼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순간 알암이 엄마는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고 다른 이들보다 더 열성적인 신도가 되었습니다. 영화는 기독교인들의 집회 모습을 보여줍니다. 찬양을 인도하는 사람들, 열정적인 설교자 등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어느 날 알암이 엄마는 교인들에게 교도소에 있는 범인을 찾아가겠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그러지 말라고 만류하지만 기어코 그를 만나 ‘당신을 용서한다‘고 말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만남은 비극적으로 끝납니다.

범인과 마주한 알암이 엄마는 범인의 평온함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습니다. 그는 감옥에 있는 동안 전도를 받았고, 주님께 귀의한 후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알암이 엄마는 그 범인을 용서한다고 말함으로 그보다 정신적으로 우위에 있음을 드러내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평온한 범인의 모습은 알암이 엄마를 내적으로 무너뜨렸습니다. ‘내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누가 용서할 수 있나?‘라는 질문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알암이 엄마는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합니다. 그것은 어쩌면 신에 대한 변형된 복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작가인 이청준 선생은 땅에서 벌어진 일은 땅에서 풀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애를 써보아도 결국 풀리지 않는 문제는 하나님께로 가져갈 수밖에 없지만요. 영화 ‘밀양‘은 원작의 이 비극적인 결말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알암이 엄마의 아픔을 깊이 이해하고 사랑하는 한 존재를 통해 새로운 삶을 이어갈 희망의 싹을 암시하며 끝납니다.

영화를 보고 나와서 다들 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다들 충격을 받은 것이지요. 그러다가 교회에서 찬양을 인도하던 한 청년이 말했습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찬양 인도자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세상 사람들 눈에 나도 그들처럼 보이겠거니 생각하니 한 대 맞은 것 같아요.” 찬양 인도자의 열정적인 멘트와 몸짓과 태도는 익숙하지 않은 이들이 보면 조금 이상해 보일 법도 했습니다. ‘오징어 게임’이라는 드라마 속에 반영된 기독교인들의 모습이 모든 기독교인들의 모습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이미지는 세속인들의 눈에 비친 기독교인들의 적나라한 모습인 게 분명합니다. 거룩함을 말하지만 가장 세속적이고, 현실에 대해 가장 깊이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몽환적 세계 속에서 헤매는 사람들 말입니다.

미국의 신학자인 랭돈 길키가 일본의 수용소에서 겪은 일을 기록한 <산둥수용소>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는 중일전쟁이 한창 벌어지고 있던 1943년에 중국에 있는 한 기독교 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본은 중국에 머물고 있던 서양인들을 잠재적 위험 요인으로 파악하여 위현(지금의 산둥) 수용소라는 곳에 가둡니다. 그 수용소는 나찌의 수용소나 구 소련의 수용소처럼 학대와 고문이 자행되는 곳은 아니었습니다.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그런대로 끼니는 이어갈 수 있도록 음식이 제공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 수용소에서는 나름의 수용소 문화가 형성되었고, 때로는 아주 유쾌한 시간도 보낼 수 있었습니다. 다양한 동기로 중국에 와있던 사람들이 비좁은 공간을 공유하다보니 사람들의 특성이 오롯이 드러나곤 했습니다. 그곳은 일종의 축소된 인류와 같았습니다. 랭던 길키는 그곳에 머무는 동안 서구 사회를 지탱한다고 여겼던 합리성과 공정함의 원리가 자기 이익을 관철시키려는 인간의 욕망으로 인해 얼마나 속절없이 무너지는지를 여실히 경험했습니다.

그나마 종교인들은 신앙이 없는 이들에 비해 조금은 관대한 태도로 다른 이들을 대했습니다. 그들은 삶에는 뜻이 있다고 믿었고, 그 열악한 상황을 일종의 과제로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가톨릭 신부와 수사와 수녀들은 수도원 생활의 경험 때문인지 그 공동생활에 잘 녹아들었습니다. 쾌활하고 이타적인 모습을 보였고, 용감하고 강인하게 현실에 맞섰습니다. 그들은 수용소 안에 있는 이들을 따뜻하게 받아들였고, 누구하고나 잘 섞였습니다. 술, 도박, 욕설, 음란을 일삼는 사람들까지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그들을 단순히 수용하는 데서 그친 것이 아니라 그들을 사랑으로 대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개신교 선교사들은 좀 달랐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도덕적으로 비난하거나 물리적으로 거부하지는 않더라도 정신적으로 거부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하려고 애를 쓰기는 했지만 여전히 벽을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랭돈 길키는 그 경험을 한 후에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타인을 도울 수 있는 길은 경건함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도덕성이 높은 사람도 변덕스러운 형제를 품을 포용력이 없다면 그를 섬길 수 없다.“(랭돈 길키, <산둥수용소>, 이선숙 옮김, 새물결플러스, p.343) 개신교를 비하하기 위해 하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정말 요구되는 태도가 무엇인지 돌아보자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에 대한 세상의 조롱이 아픕니다. 바로 우리들 각자가 일상의 자리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 그 이미지를 바꾸어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성도들을 가리켜 “그리스도께서 쓰신 편지“(고후 3:3)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먹물로 쓴 편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으로 쓴 편지입니다.

이 가슴 벅찬 선언이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고 싶습니다. 홀로는 감당하기 어렵지만 함께하면 할 수 있습니다. 이 멋진 길에서 여러분의 동행이 되어 참 기쁩니다. 오늘도 내일도 몸과 마음 두루 건강하시기를 빕니다. 주님의 은총의 바람에 몸을 맡긴 채, 주님이 우리를 어디로 이끄시든 감사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평화를 빕니다.

2021년 10월 7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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