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공동체를 세우는 교회 2018년 12월 05일
작성자 김기석
공동체를 세우는 교회

“사랑한다는 것은 모든 사람의 가슴에 숨겨진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것이며, 그들을 신뢰할 뿐만 아니라 더 큰 신뢰로 이끄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바라보고, 만지고, 귀 기울이는 것이다. 특별히 상처 입은 사람들, 낙심한 사람들, 위기에 처한 사람들과 함께 머물면서 그들이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장 바니에

시간이 인간의 삶 속에 스며들어오는 순간, 고달픈 삶이 시작된다. 시간은 우리에게 아름다운 꿈을 가져다 줄 때도 있지만, 권태와 공포를 안겨주기도 한다. 소중하게 여기던 것들을 앗아가거나, 아름답게 반짝이던 것들을 바래게 만들기도 한다. 가차없는 시간의 공포를 니체는 ‘시간의 이빨’(teeth of time)이라는 말로 드러냈다. 유한한 시간 속을 걸어가는 모든 이들의 보편적인 운명은 불안이다. 불안이 엄습하면 굳건하다 여겼던 존재의 터전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것은 어지럽고 불쾌한 경험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할 수 있는 한 불안과의 조우를 연기하려 한다. 그 때문에 뭔가에 몰두하거나, 분주함 속에 자기를 밀어넣는다. 아니면 자기 마음을 비끌어 맬 기둥을 찾는다.
현대인들을 사로잡는 가장 무자비한 우상 중 하나는 끊임없는 활동이다.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시간과 능력의 한계는 고려되지 않는다. 어느 때부터인가 우리는 시간에 떠밀리며 살아간다. 가속화된 시간은 인간을 종으로 부리기 시작한다. 영화 ‘모던 타임즈’에서 컨베이어 벨트 앞에서 스패너를 들고 똑같은 동작을 끊임없이 반복하던 찰리 채플린을 떠올려보라. 끊임없는 활동 덕분에 이전보다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는 것은 사실이지만, 마음 깊은 곳에 깃든 헛헛함은 가실 줄 모른다. 문명의 이기 덕분에 생활이 많이 편리해졌지만 그렇다고 하여 삶의 여백이 늘어난 것은 아니다. 숨은 가쁘고, 옆을 바라볼 여유는 더욱 없다. 느긋한 평화 혹은 안식은 허락되지 않는다. 신자유주의 경제 질서 아래 살아가는 우리네 삶의 풍경이다.
신자유주의 경제 질서의 작동원리는 인간의 욕망 부추기이다. 욕망은 결핍을 전제하고, 결핍은 충족을 지향한다. 욕망과 충족 사이의 거리가 멀 때, 다시 말해 결핍의 시간이 지속될 때 삶은 비애로 가득 찬다. 세상의 부귀영화를 다 누려본 코헬렛은 욕망 위에 인생의 집을 지으려는 허망함을 이렇게 요약한다.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강물은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전1:7-8). 아무리 다가가려 해도 다가갈 수 없는 카프카의 ‘성’처럼 만족 혹은 행복은 영원히 지연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욕망이 커질수록 타자에 대한 배려의 공간은 줄어든다. 타자는 욕망 충족의 걸림돌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욕망이 지배하는 세상의 주민은 누구나 궁핍하다. 욕망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신으로 숭상받는 것은 돈이다. 돈은 사람들에게 유사-전능함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돈을 신으로 여기는 이들은 자연이나 사물 등 존재자들 속에 숨겨진 고유한 아름다움 혹은 신적 광휘를 보지 못한다. 세상의 모든 유혹은 뱀이 하와를 유혹할 때 했던 말, 곧 ‘네가 신처럼 되리라’는 뱀의 유혹의 변주이다. 뱀은 오늘도 광고의 의상을 입고 사람들의 마음에 스며든다. 뱀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순간 우리는 채워질 수 없는 욕망의 허구렁에 빨려 들어가게 마련이다. 독일의 시인 횔덜린이 말하는 ‘궁핍한 시대’는 그렇게 도래한다.
지금 우리 현실은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히브리인들의 처지와 유사하다. 부자유, 무의미, 소외, 불안과 공포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이런 문제를 다룰 수 있는 가치의 중심은 무너진 지 이미 오래다. 기술과 자본을 독점한 이들이 사람들을 지배한다. 그 체제는 강고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피라미드로 상징되는 지배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사람들을 도구로 전락시키는 체제를 역겨워하신다. 세상은 강자들의 지배를 당연하게 여기지만 하나님은 그런 세상을 불의한 체제로 여기신다. 부과된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자기를 착취할 때, 인간은 경탄의 능력을 잃어버리고, 자기 소외의 수렁에 빠질 수밖에 없고, 하나님의 형상은 훼손되게 마련이다. 애굽에 내린 열 가지 재앙은 바로 그런 현실, 착취를 제도화하고 있는 그런 세상에 대한 심판이다. 
심판은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동시에 새로운 사회 체제를 창조하신다. 출애굽 공동체는 바로 하나님이 열어주신 대안 공동체이다. 탈출 공동체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바라보며 위험이 가득한 광야로 들어가면서 형성되었다. 광야는 나약함을 허락하지 않는다. 낮의 뜨거운 해와 밤의 차가운 바람은 인간의 육신과 영혼을 단련한다. 광야는 또한 생략하는 법을 가르치는 공간이다. 그곳에서는 최소한의 물과 식량으로 살아내야 한다. 그리고 광야생활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기들과 동행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함께 길을 걷는 이들에 대한 고마움이다.
광야 생활의 초기에 하나님은 시내산 앞에서 히브리인들과 언약을 맺으시면서, 그들에게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라는 소명을 부여하셨다. 세상의 아픔과 슬픔을 지고 하나님 앞에 서는 동시에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백성을 섬기는 삶, 허망한 열정에 사로잡힌 타락한 세상을 정화시키는 삶을 살라는 것이었다. 오직 밑바닥 삶을 경험한 이들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시험을 받아본 사람만이 시험 받는 이들을 도울 수 있고, 짓밟혀 본 사람이라야 같은 처지에 빠진 이들을 도울 수 있다. 하지만 아직 그들은 그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애굽에서 살던 기억과 습성이 그들을 놓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회막을 만들 것을 지시하셨다. 영연방 최고 랍비이자 저명한 신학자인 조너선 색스(Jonathan Sacks)는 "개인들의 무리를 언약의 사회로 탈바꿈"하는 데 필요한 일은 "함께 가치 있는 무언가를 창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자유는 외부의 힘에 의해 보장될 수 없다. 하나님의 힘으로도 그것은 불가능하다. 자유는 오로지 국민들 스스로의 공동의 노력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 여기에 성막 건설의 참된 의미가 있다. 국민은 형성에의 노력을 통해 형성된다."(<사회의 재창조>, 말·글빛냄, 2009, p.289)
회막은 출애굽 공동체의 정체성의 상징이었다. 하나님과의 만남의 장소를 짓는 체험을 통해 그들은 더 이상 낯선 이들이 아니라 운명을 함께 나누는 동료가 되었다. 회막을 짓는데 필요한 물품은 사람들의 자발적인 헌신으로 마련했다. 어떠한 강요도 없었고, 기여의 경중도 가려지지 않았다. 실을 낸 사람이라고 해서 주눅 들 필요도 없었고, 비싼 가죽이나 금은보물을 바쳤다고 하여 으쓱 거릴 것도 없었다. 회막을 짓는 과정을 통해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지어졌다. 회막은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라는 소명의 가시적 상징물이었다. 회막을 짓는 정성으로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가시적 표징을 일으켜 세워야 한다.
바울 사도는 교회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몸이라 했다. 교회의 존재 이유는 그리스도의 손과 발이 되는 데 있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를 손과 발로 삼아 굶주린 이들을 먹이고, 병든 이들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소외된 이들의 벗이 되어주려 하신다. 본회퍼는 일찍이 교회는 ‘공동체로서 존재하는 그리스도’라고 말했다. 교회의 존재 이유는 자기 확장이 아니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현존을 경험하도록 하는 것이다. 제도로서의 교회는 일쑤 그 사명과 모순되는 상황에 빠져들기도 한다. 교회가 구원의 방주를 자처하고, 엇비슷한 경제적 능력을 가진 이들의 사교장처럼 변해갈 때 교회의 몰락은 가속화될 수밖에 없다.
한국교회는 1970-80년대를 거치면서 급성장했다. 대형교회들이 등장한 것이 그 무렵이다. 그 시기는 경제 부흥기를 맞아 많은 농촌 인구가 도시로 유입되던 때와 겹친다. 사람들이 오직 노동력으로 파악되고, 경쟁과 효율이 숭상되는 도시에 사는 이들의 영혼은 외로움에 잠식당할 수밖에 없었다. ‘잘 살아보자‘는 가슴 벅찬 희망을 품고 도시에 왔지만 도시는 인정의 사막일 뿐이었다. 불안과 외로움이 일상이었다. 사람들이 향촌 사회가 제공해주던 따듯한 지지와 격려를 그리워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때 교회가 품이 되어 그들을 맞아주었다. 교회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이기도 했지만, 세상에서 입은 이런저런 상처들을 털어놓고 서로 위로를 나눌 수 있는 유사-가족 공동체이기도 했다. 
시인 정일근은 ‘둥근, 어머니의 두레밥상’이라는 시에서 “모난 밥상을 볼 때마다 어머니의 두레밥상이 그립다”고 노래했다. 세상의 밥상은 이미 이전투구의 아수라장으로 변했고, “한 끼 밥을 차지하기 위해/혹은 그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우리는 이미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짐승으로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두레밥상은 어머니가 피우시는 사랑의 꽃밭이다. 거기서는 귀하지 않은 이가 하나도 없다. 어쩌면 이런 장소에 대한 기억이 사람들이 짐승으로 변하지 않도록 지켜주는 보루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의 교회는 어떠한가? 교회마다 형편이 다르니 전칭명제로 판단을 내리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교회는 ‘세상의 밥상‘과 별반 다를 바 없는 것 같다. 교회 성장이 지상 목표로 설정되는 순간 복음적 가치는 뒷전으로 밀려난다. 본과 말이 뒤집히는 것이다. 성장이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내부의 역량을 총동원하면서 예배의 기쁨과 공동체적 따뜻함은 가뭇없이 스러진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현대 기술문명의 특징을 ‘닦달과 몰아세움’으로 파악한다. 자연이나 사람에게 어떤 성과를 내놓도록 닦달한다(her-aus-forden)는 말이다. 교회라고 하여 형편이 다르지 않다. 실적 경쟁에 내몰린 이들은─그들이 목회자건 일반 신자건 간에─안식을 누리기는커녕 탈진 상태에 이르곤 한다. 
아브라함 헤셸은 안식일을 가리켜 “생존을 위해 벌이던 잔혹한 싸움을 일시적으로 그치고, 개인적 갈등이든 사회적 갈등이든 모든 갈등 행위를 멈추는 날“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 날은 또한 “광포한 시간의 대양, 격렬한 수고의 대양 한가운데“ 떠있는 “고요의 섬”이다. 예배를 통해 이런 기쁨과 고요를 맛보지 못하는 이들이 하나 둘 교회를 떠나고 있다. 교회 공동체는 오늘 해체의 위기 앞에 몰려있다. 
교회 공동체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본성을 원형으로 해야 한다. 신적 위격들이 상호 내주, 상호 침투하며 통일을 이루듯이 교회는 그런 대안적 삶의 가능성을 세상 앞에 드러내야 한다. 다양한 이들을 하나로 묶는 끈은 그리스도의 마음이다. 마커스 보그는 주후 1세기의 유대교 사회적 세계의 특징을 ‘거룩의 정치학’(politics of holiness)이라는 말로 요약했다. 여기서 정치학이란 정치적 행위를 가리킨다기보다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작동되는 미세한 권력 관계를 지칭한다. 거룩의 정치학은 사람들을 의인과 죄인, 유대인과 이방인, 남자와 여자로 가른다. 가름은 차별을 낳고, 차별은 원한감정을 낳는다. 그런 시대에 예수는 ‘자비의 정치학’(politics of compassion)을 가르치셨다. 자비는 타인의 슬픔 혹은 고통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내포한다. 자비는 품어 안는다. 예수 안에서 모든 차별은 사라졌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3:28). 아가페적 사랑은 불가능해 보이는 그러한 과제를 가능케 한다. 바울은 ‘서로 지체됨’(롬12:5)이야말로 공동체의 기초라 했다. 서로 지체가 된다는 것은 서로를 소중한 사람으로 대하고 환대한다는 말일 것이다. 
인류학자인 김현경 선생은 '인간'과 '사람'을 구별해서 설명한다. '인간'은 자연적 사실의 문제이다. 즉 생명을 받아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다 인간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사람'은 '사회적 인정의 문제'이다. 인간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고, 그가 머물 자리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 설 자리를 배정받지 못한 이들, 사회나 집단이 어떤 선택을 하든 늘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 이들은 '사람'으로 취급받지 못한다고 할 수 있다. 누군가에게 설 자리를 마련해주는 것이야말로 환대이다. 그 집단에서 가장 연약한 사람, 자기 목소리를 갖지 못한 사람이 안심하며 머물 수 있도록 배려하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이다. 이것은 고스란히 교회에도 적용되는 통찰이다. 바울 사도도 몸의 가장 연약한 지체가 가장 소중하다고 말했다. 시인들은 이것을 고통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말로 요약한다.
교회가 환대의 장소가 된다는 말은 단자처럼 외로운 이들을 관계의 그물망 속으로 이끌어 들인다는 말이기도 하다. 어느 사회에서나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과 같은 처지에 떨어진 이들이 있다. 가난하거나, 몸이 아프거나, 두려움에 사로잡혔거나, 변화하는 세상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어 스스로 외톨이가 된 이들 말이다. 그들의 특색은 사회적 연결망이 취약하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나눌 사람도, 아픔을 함께 나눌 사람도 없을 때 소외감은 극대화되고, 그들은 삶의 벼랑 끝으로 떠밀린다.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증인이 되라 하셨다. 우리 시대의 땅 끝은 저 먼 땅 어디가 아니다. 벼랑 끝에 선 듯 삶이 위태로운 이들이야말로 우리가 다가가야 할 땅 끝이 아닐까? 라르쉬 공동체의 설립자인 장 바니에는 “공동체가 본래의 사명에 충실하고 있는지 여부를 알려면 대수롭지 않은 사람들, 공동체 주변에 살면서 궁핍을 느끼고 있는 이들에게 물어보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그런 이들이야말로 교회 공동체가 충실하게 생활하고 있는지, 그 이름에 합당한 역할을 하고 있는지를 누구보다 예민하게 감지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는 돈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소비자로 전락한 사람들을 향해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증언하는 동시에 삶으로 입증해야 한다. 로마 제국의 압도적인 군사력 앞에서 숨죽이고 있던 사람들에게 비폭력적인 평화를 가르치고 실천했던 예수처럼 말이다. 교회는 지배와 피지배로 갈리는 세상의 질서를 넘어서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이 땅에 끌어들여야 한다. 교회는 세상에 하나님의 복을 매개하는 통로가 되려 할 때 든든히 서고, 자기 확장에 몰두할 때 쇠퇴할 것이다. 지금은 유예의 시간이다. 하나님이 우리 촛대를 옮기시지 않기를 빌며 두렵고 떨림으로 교회 공동체를 세워나가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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