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청년편지18 2018년 12월 05일
작성자 김기석
호랑이는 당나귀가 아니다

주님의 평안을 빕니다. 무더웠던 여름이 지나고 짧은 가을이 오는가 싶더니 벌써 겨울의 초입입니다. 수상하기 이를 데 없는 세월의 강을 건너느라 얼마나 애쓰셨습니까? 그래도 산 자의 땅에 있다는 사실이 은총의 지속이라 여기며 스스로를 안위할 뿐입니다. 오늘은 3년 동안 이어온 편지를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긴 시간 동안 제 편지를 받아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수신인을 특정하지 않은 편지를 쓴다는 게 사실은 퍽 난감한 일입니다. 노랫말처럼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라는 기분으로 이 편지를 써왔습니다. 

편지를 쓰면서도 청년의 시절로부터 너무 멀어진 제가 이런 편지를 쓴다는 게 참 주제넘은 짓이라는 생각이 시도 때도 없이 들었습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이 느끼는 불안과 공포를 이해해보려고 노력했지만, 서 있는 자리가 다르다보니 참된 이해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나의 말이 허공을 치는 것은 아닌지, 재수 없는 꼰댓짓을 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가 많았습니다. 그래도 굳이 이 편지를 이어온 것은 현실로부터 다소 떨어진 자리에서 우리 삶을 바라보는 여유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습니다. 

오시다 시게또 신부는 신앙을 ‘먼 빛의 눈길’이라고 설명한 바 있습니다. 눈 앞의 일에만 급급하다보면 우리의 전망은 협소해지고, 현실의 장악력은 점점 강해져서 우리는 다른 삶을 상상하지 못하게 됩니다. 삶이 힘겨울수록 거리를 두고 현실을 바라보아야 틈과 여백이 생기는 법입니다. 저의 편지가 그런 세계를 가리키는 손가락이라고 생각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저명한 신학자 한스 큉은 <왜 그리스도인인가?>라는 방대한 책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인 것은 참으로 인간이기 위해서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참 사람’의 길을 찾는 이들은 누구나 길벗이라 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남녀노소의 구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글을 쓰는 이들은 마치 편지를 써서 유리 병 속에 넣어 바다에 던지는 사람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쓴 글을 누군가가 읽고, 이 곤고한 세월을 살아낼 수 있는 한 줄기 희망의 빛을 발견했다면, 안일한 삶에서 화들짝 깨어났다면, 먹구름 혹은 쇠항아리를 하늘이라 여기고 살았던 삶을 반성할 단초를 얻었다면 더 나은 삶을 향해 한 걸음 내디딜 힘을 얻었다면 무한한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암울한 일제시대에 등불 하나 밝히는 마음으로 사셨던 김교신 선생님은 <성서조선>을 창간하면서 그 잡지를 세상에 보내는 마음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성서조선’아, 너는 우선 이스라엘 집집으로 가라. 소위 기성신자의 손을 거치지 말라. 그리스도보다 사람(外人)을 예배하고 성서보다 예배당을 중요시하는 사람의 집에서는 그 발의 먼지를 털지어라./‘성서조선’아, 너는 소위 기독교 신자보다는 조선의 혼을 가진 조선 사람에게 가라. 시골로 가라, 산골로 가라, 거기에서 나무꾼 한 사람을 위로함을 너의 사명으로 삼으라./‘성서조선’아, 네가 만이리 그처럼 인내력을 가졌거든 너의 창간 일자 이후에 출생하는 조선인을 기다려 면담하라. 서로 담론하라. 한 세기 후에 동지가 생긴들 무엇을 한탄하겠는가.” 감히 김교신 선생님이 담당하셨던 역할을 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이런 마음을 담아 편지를 썼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을 뿐입니다.

예수님과 만났던 한 젊은이가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나아와 영생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냐고 물었습니다. 주님의 대답은 간명했습니다. “네가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마19:17). 이어진 문답을 우리는 압니다. 그는 어느 계명을 지켜야 하냐고 물었고, 주님은 십계명의 5계명부터 9계명까지를 언급하신 후에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이르셨습니다. 젊은이는 그 계명을 다 지켰다면서 자기에게 부족한 것이 있으면 또 지적해 달라고 합니다. 주님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마19:21) 이르셨습니다. 재물이 많았던 그 젊은이는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그 현장을 떠났습니다.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말씀입니다. 

신앙생활의 목표는 남들보다 더 선한 사람 혹은 도덕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것도 중요하지만 그게 핵심은 아닙니다. 신앙의 보람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철저하게 무너지고 재구성되는 데 있습니다. 야곱은 환도뼈가 맥없이 무너지고서야 비로소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었고 삶이 위로부터 주어진 선물임을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라’ 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죽음의 상징이 아니라 죽음입니다. 죽지 않기에 우리는 무기력합니다. 

우리는 그럴듯한 자기 동일성이 무너지지 않는 범위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려는 경향이 많습니다. 하시디 이야기 가운데 나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제자가 랍비에게 묻습니다. “토라는 왜 우리에게 ‘이 말씀을 네 마음 위에 두라’고 말하나요? 왜 이 거룩한 말씀을 우리 마음속에 두라고 말하지 않나요?” 랍비는 우리 마음이 닫혀 있기에 말씀을 우리 마음속에 둘 수 없다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우리 마음 꼭대기에 둔다. 그리고 말씀은 거기에 머물러 있다가 어느 날 마음이 부서지면 그 속으로 떨어진다.”(파커 J. 파머, <모든 것의 가장 자리에서>, 김찬호·정하린 옮김, 글항아리, p.217) 파커 파머는 마음이 부서져 조각나는 이들도 있지만 부서져서 열리는 이들도 있다고 말합니다. 신앙의 신비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자기에 대해 절망해 보지 않은 이가 십자가를 이해할 수 있을까요? 철저한 절망이야말로 은총으로의 입구일 때가 많습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잘 아시지요? 한 율법교사가 예수를 시험하기 위해 질문을 합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부자 젊은이의 질문과 동일합니다. 주님이 “율법에 뭐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고 물으시자 그는 자신있게 대답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님은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간결합니다. 믿음은 교리에 대한 동의 혹은 시인이 아닙니다. 믿음의 고백은 삶으로 번역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고백이 문제가 아니라 삶이 문제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고백을 삶으로 번역한다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게 살기 어려운 이유가 백 가지도 더 됩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길이라 고백하면서도 정작 그 길을 걷지는 않습니다. 그 길을 걷기 위해서는 포기해야 할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대개 그 길을 걷지 않으면서도 괜찮은 교인으로 평가받고 싶어합니다. 교회 출석도 열심히 하고, 헌금 생활도 잘 하고, 전도 혹은 선교도 게을리 하지 않고, 가급적이면 봉사활동에도 빠지지 않으려 합니다. 이만하면 좋은 신자라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감리교 창시자인 존 웨슬리는 이런 이들을 일러 ‘명목상의 기독교인’(almost Christian)이라 말합니다. ‘명목상‘이라고 번역된 ‘almost’는 사실 ‘거의, 대체로’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보면 꽤 긍정적 평가처럼 들리지만, 명목상의 기독교인 곧 ‘거의 기독교인’은 진정한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웨슬리는 명목상의 기독교인에 대비되는 참 기독교인(altogether Christian)의 징표가 있다고 말합니다. 전심전력을 기울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과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일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자기를 초월합니다. 십자가야말로 사랑의 궁극적 표상입니다. 

영생을 누리고 싶지만 자기를 내려놓고 싶지 않았던 그 율법교사는 “누가 나의 이웃이냐?”고 묻습니다. 이때 들려주신 이야기가 바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제사장이 그곳을 지나갔지만 모른 체 하고 지나갔습니다. 레위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종교인이라고 하는 자기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불편한 일에 연루되지 않기 위해 수없이 많은 핑곗거리를 떠올렸을 겁니다. 하지만 유다인들에게 천대받던 사마리아 사람 하나가 그를 발견하고는 가까이 다가가 그의 상처에 올리브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여관으로 데려가서 돌보아 주었습니다. 동기는 하나입니다. 측은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명목상의 신앙보다 중요한 것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부조리극의 대가인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언제 올지 모르는 고도를 막연하게 기다리는 두 사람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를 등장시킵니다. 그들은 시간의 권태를 견디기 위해 안간힘을 다합니다. 삶의 의미를 발생시킬 수 있는 어떤 사건도 벌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들은 “살려달라”는 외침을 듣습니다. 어찌 된 일인지 눈이 멀어버린 포조의 외침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그를 도울지 말지에 대해 긴 토론을 벌입니다. 그러다가 블라디미르가 자기 같은 사람들을 필요로 하는 일이 항상 있는 것은 아니니, 기회가 왔을 때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일을 하자고 결론을 내리듯 말했습니다. 블라디미르도 포조의 외침이 꼭 자기들을 향한 것이 아니라 인류를 향한 것임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의 다음 말이 참 중요합니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엔 우리들뿐이니 싫건 좋건 그 인간이 우리란 말이다. 그러나 너무 늦기 전에 그 기회를 이용해야 해. 불행히도 인간으로 태어난 바에야 이번 한 번만이라도 의젓하게 인간이란 종족의 대표가 돼보자는 거다.”(사무엘 베케트, [고도를 기다리며], 오증자 역, 민음사, p.133)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돕는 행위는 개인의 개별적 행위이지만 그것은 인류를 대표한 행위라는 것입니다. 20세기에 일어난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인간에 대한 낙관론을 송두리째 무너뜨렸습니다. 사람들은 ‘인간은 인간에 대해 늑대‘라던 홉스의 말을 실감했습니다.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시가 가능한가?’를 고통스럽게 물었습니다. 시 뿐만이 아닙니다. 신학도 철학도 인간의 악마성 앞에서 침묵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엘리어트의 ‘황무지‘는 더 먼 불모의 땅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현실 그 자체였습니다. 이때 베케트는 그러한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한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인간됨은 ‘살려 달라’고 외치는 이들의 부름에 응답할 때 발생합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 부름을 외면했기에 스스로의 인간다움에서 멀어졌습니다. 그들이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거룩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맙니다. 예수님은 율법교사에게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물으십니다. 누가 이웃이냐는 질문이 누가 이웃이 되었느냐는 질문으로 전환되고 있습니다. 율법교사는 마지못해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주님은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명하십니다. 우리도 ‘이와 같이 하라’는 명령 앞에 서 있습니다. 또 다시 그렇게 살 수 없는 여러 가지 이유가 떠오르나요?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이 세대를 닮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삶의 문법을 충실히 따르다보면 우리는 점점 무기력해집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잊게 됩니다.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은 ‘원본으로 태어나 사본으로 살아가는 것이 곧 타락’이라고 말했습니다. 

스펙 쌓기에 몰두하느라 안색이 파리하게 변한 젊은이들을 볼 때마다 시리아 작가인 자카리아 타메르의 단편소설 '열 번째 날의 호랑이'가 떠오릅니다. 숲에서 잡혀와 우리에 갇힌 호랑이는 창살을 물어뜯으며 사납게 저항했습니다. 그러나 여러 날 지속된 굶주림으로 인해 호랑이는 숲의 기억조차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호랑이는 먹을 것을 얻기 위해 조련사의 요구대로 고양이처럼 야옹거렸습니다. 그러나 조련사는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호랑이에게 당나귀처럼 히힝거리라고 요구했습니다. 자존심 때문에 거절하던 호랑이는 결국 굶주림에 굴복했고 당나귀처럼 히힝거렸습니다. 우리에 갇힌 지 열흘 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하지만 조련사가 그에게 준 것은 고기가 아니라 건초 한 다발이었습니다. 히힝거리는 호랑이는 더 이상 호랑이가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게 우리의 현실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숲의 기억을 잊고 히힝거리는 순간 우리는 확고하게 현실에 종속되고 맙니다. 하지만 신앙은 종말론적 미래를 이 땅에서 선취하는 것입니다. 무릎을 꿇고 사느니보다 서서 죽기를 원한다고 말했던 까뮈의 ‘반항인’처럼 대지에 굳건히 발을 딛고 하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순정한 생의 여정에 주님이 동행해주실 것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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