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꽃 진 자리에 열매가 맺힙니다 2020년 04월 11일
작성자 김기석
 
꽃 진 자리에 열매가 맺힙니다

“우리가 걷는 길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이면, 우리의 발걸음을 주님께서 지켜 주시고, 어쩌다 비틀거려도 주님께서 우리의 손을 잡아 주시니, 넘어지지 않는다.”(시37:23-24)

생명의 빛으로 우리 가운데 오시는 주님의 이름을 찬미합니다. 한 주간 동안도 평안하셨는지요? 사실 평안하시냐고 묻는 그 자체가 상투적으로 들리긴 합니다. 이 시대에 우리가 어떻게 평안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인사를 여쭙는 것은 세상이 아무리 어두워도 어둠에 사로잡히지는 말자는 무의식적 제안입니다. 재의 수요일로부터 시작된 사순절이 다 지나가고 이제 부활절을 앞두고 있습니다. 목구멍까지 차오른 그립다는 말을 삼키며 우리는 40일을 만나지 못한 채 지나왔습니다.

격리를 뜻하는 영어 단어 ‘쿼런틴quarantine’은 14세기 유럽에서 흑사병이 유행할 때 이탈리아 항구를 통해 들어오는 사람들을 40일간 격리했던 데서 유래한 말이라고 합니다. ‘콰란타 기오르니Quaranta giorni’는 이탈리아 말로 40일을 뜻하는 말입니다. 청파 신앙 공동체가 한자리에 모이지 못한 격리의 기간이 벌써 40일을 넘겼습니다. 얼굴을 마주보지도 서로의 온기를 나누지도 못하지만 영적으로 우리는 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부활주일에는 온 교우들이 함께 모여 부활의 기쁨을 한껏 나누고 싶었습니다. 서로 부둥켜안으며 ‘잘 지냈지요?’ 안부를 나누고, 우리 가운데 함께 하셨던 주님의 은총을 피차 고하고, 무덤의 시간이 지나간 후에 우리를 찾아온 새로운 빛을 맘껏 노래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조금 더 기다려야 합니다. 안타깝지만 이것은 우리가 수용해야만 하는 현실입니다.
어제 저녁 무렵 집으로 가려고 교회를 나서는데, 어디선가 아주 맑고 기분 좋은 향기가 풍겨왔습니다. 예배당 뒤편에 있는 수수꽃다리가 풍기는 향이었습니다. 우리 교우들이 이 향기를 함께 맡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서글펐습니다. 이재무 시인은 ‘출석부’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이번 주말에는 시외로 나가 들판에 서서 큰소리로 출석을 부르려 한다/매화 개나리 쑥 나싱개 원추리 산수유…/네네네네네네…/봄날이 왁자지껄 시끌시끌 반짝이겠지”. 저도 길가에 서서 여러분의 이름을 부릅니다. 다들 대답하셨지요?

저는 마음의 환기가 필요할 때면 가끔 예배실에 올라가 스테인드글라스와 달항아리를 물끄러미 바라보곤 합니다. 정호승 시인은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저녁햇살의 눈부신 아름다움을 보면서 ‘모든 색채가 빛의 고통’이라는 사실을 아직 알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알지 못함’이 오히려 앎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신기하지요?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빛이 달항아리를 비추고, 달항아리 또한 그 빛을 되비추고 있더군요. 완벽한 대칭을 이루지 않는 형태이기에 더욱 푸근합니다. 완벽함은 다른 이들을 품기 어렵습니다. 우리 마음도 그렇게 원만해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교회 뒤꼍에 찔레나무 세 그루를 심었습니다. 군산에 계신 전영린 권사님이 택배로 보내온 것입니다. 올해 안에 하얀 찔레꽃을 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고난주간 묵상 자료를 만들어 보내드렸습니다. 많은 분이 접속하여 듣고 차분하게 한 주간을 보내고 계신 줄로 압니다. 카메라 앞에서 말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기에 다들 난감해하면서도 목회자들은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저는 요즘 조금 더 다양한 소통의 방식을 찾아야 할 필요를 느껴서 많은 이들이 강의에 활용하고 있는 ‘줌zoom’을 익히고 있습니다. 제가 가끔 기웃거리는 어느 단체의 온라인 게시판 타이틀을 보고 피식 웃었습니다. “Let my people zoom”. ‘나의 백성으로 하여금 줌을 하게 하라’. 짐작하시겠지만 이것은 모세가 바로에게 전했던 하나님의 말씀 곧 “나의 백성을 보내라 Let my people go”라는 구절을 패러디한 것입니다. 심각한 시대이지만 가끔은 이런 유머 감각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zoom을 활용하여 속회나 선교회, 부서와 서로 소통하는 시간을 가져보려 합니다. 얼굴을 마주보며 나누는 대화를 대신할 수야 없겠지만 그래도 이렇게라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수요일 성경 공부를 하지 못하는 아쉬움도 큽니다. 그래서 다음 주부터 기독교 고전을 낭독하며 제가 간략하게 해설을 덧붙이는 영상을 교우들과 나눌까 생각 중입니다. 1주일에 한 편씩 매주 화요일에 올릴 예정입니다. 시간이 되실 때 언제라도 보실 수 있습니다. 

교회가 그리워 슬쩍 와서 화단을 둘러보고 가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 마음이 암암하게 떠올라 마음이 아팠습니다. 사회적 격리 기간이긴 하지만 잠시 동안의 만남이야 못 갖겠습니까? 꼭 제 방에 들렀다 가시길 바랍니다. 매실나무에 꽃이 다 지더니 엊그제부터 조그만 열매를 맺고 있는 모습이 대견하기만 합니다. ‘낙화착실종추성落花着實終秋成’이란 말이 생각납니다. 난분분 떨어지는 꽃잎은 아쉬움을 자아내지만 그 자리에 맺히는 열매가 있으니 고마울 뿐입니다. 그 열매는 현실이 어렵다 하여 앙앙대지 말고 조용히 성숙을 모색하라고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감내하고 있는 이 시간도 보다 귀한 열매를 맺기 위한 암중모색의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포도나무에도 붉은색 잎이 돋아나기 시작했습니다. 이 여린 잎들이 교우 여러분께 문안 인사 여쭙습니다. 모두 무탈하게 잘 지내시기를 빕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생명을 받았으니, 우리 또한 생명의 빛을 세상에 가져가는 기쁨을 누리며 살면 좋겠습니다. 부활은 살아내야 하는 과제이기도 하니 말입니다. 영상을 통해 드리는 예배이긴 하지만 부활절 예배에는 온 가족들이 함께 부활의 기쁨과 감격을 나눌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평강이 교우 여러분의 가정과 일터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2020년 4월 11일
김기석 목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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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희(20 04-18 07:04)
목사님!!
목사님의 칼럼은 우리에게 살아가야 하는 삶의 쉼을 느끼게 해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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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희(20 04-18 07:04)
목사님의 칼럼은 오늘도 우리가 살아내야 하는 삶에서 잠시 쉼을 느끼게 해주십니다.
저도 수수꽃다리 향기 너무나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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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주(20 05-09 01:05)
여긴 창원입니다.
혼자 까페에서 따듯한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그동안 제 삶의 힘겨움 때문에 감히 꺼내 보지 않았던 김기석 목사님의 칼럼을 꺼내어 읽어 가고 있습니다. 마음이 참 따듯해 집니다. 다시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 묵상합니다. 늘 우리들의 삶에 지표를 주시는 목사님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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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ita(20 10-22 07:10)
미디어에 나온 각종 강의와 설교를 거의 다 보고 들은 후, 그리고 보고 들은 것을 또 보고 들으며, 늘 새롭게 다가오는 목사님의 말씀에 깊은 감동과 감사를 느끼고 있습니다. 청파교회 홈 페이지를 찾아 목사님 column 부분을 맨 뒤 혹은 맨 앞에서 부터 차례로 읽고 있습니다. 글을 보아도 또 강의나 설교를 들어도, 목사님의 따뜻한 마음과 매 시간 울림을 주시는 말씀에 늘 숙연하고 Christian 으로서 저의 정체성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늘 감사드립니다. 청파교회 출선 교인은 아니지만 목사님의 건강을 위해 늘 기도드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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