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청년편지4 2016년 05월 22일
작성자 김기석

 

 

 

 푸른언덕에서 보내는 편지4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한 계절 두 계절 미세먼지와 황사로 인해 뿌옇게 변한 대기를 머리에 이고 살다보니 조금 울울한 느낌이 드는 나날입니다. 가끔 푸른 하늘을 만날 때면 마치 잊고 지내던 고향 친구를 만난듯 반가운 것을 보면 너무 오랫동안 흐린 하늘 밑을 걸어온 때문일까요? "모든 이론은 회색이고 푸르른 것은 오직 삶의 황금나무일 뿐"이라고 말했던 게 파우스트일 겁니다. 나이 탓일까요? 이론보다는 삶의 황금나무에 기대 살고 싶은 나날입니다. 


가끔 탄식하듯 신동엽의 시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를 낭송합니다. 아시지요?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하늘을 보았다 하는가"로 시작되는 시 말입니다. '누가 ~ 보았다 하는가'라는 구절 속에 이미 '보지 못했다'는 판단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어지는 연에서 시인은 '네가 본 건, 먹구름', '네가 본 건, 지붕 덮은/쇠항아리'라고 말합니다. 먹구름과 쇠 항아리를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았다는 것이지요. 1960년대를 살았던 시인은 억압이 일상화된 세상에 살면서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동시대인들의 몽롱한 의식을 조금씩 흔들고 있습니다. 당연의 세계에 갇힌 이들은 다른 세계를 상상할 수 없습니다. 우물 속의 개구리와 같은 것이지요. 좋은 시인은 다른 세계를 보는 사람입니다. 일상에 깃든 영원을 보고, 일상 너머의 더 큰 질서를 보았기에 그들은 다른 이들을 그 세계 속으로 초대합니다. 시인은 마음 속 구름을 닦으라고, 머리 덮은 쇠항아리를 찢으라고 말합니다. 그걸 찢어야 티없이 맑은 영원의 하늘을 볼 수 있고, 그 하늘을 볼 때 비로소 사람들은 삶이 광대한 신비임을 알게 되고, 연민과 삼감과 경외심을 품고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없는 맑음 혹은 깊음 앞에 설 때 사람들은 누구나 말을 잊습니다. 세상에는 차마 더럽힐 수 없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자각할 때 우리 삶은 조심스러워지게 마련입니다. 시의 마지막 연은 "살아가리라"라는 구절로 시작됩니다. 그것은 구름을 닦으며, 쇠항아리를 찢으며 살겠다는 시인의 강고한 결의를 보여줍니다.


참 어려운 시절입니다. 신실한 기독교 대중들 앞에 설 때마다 내 속에서는 조금 심술궂은 열정이 피어오릅니다. 그들이 강고하게 유지하고 있는 신앙적 자기 동일성을 가만히 흔들어보고, 경건해 보이는 외양 저 뒷편에 숨겨진 아픔과 그늘을 드러내보고 싶은 것입니다. 삶은 모호하기 이를 데 없는 데, 신앙은 아주 쉬운 해답을 제시합니다. 교회 안에서 도마적 존재는 허용되지 않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고 했을 때 도마는 "나는 내 눈으로 그이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 보고, 또 내 손을 그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소"(요20:25)라고 말했지요? 자기 속에 일고 있는 의심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도마는 당연의 세계에 갇힌 이들이 보기엔 불편한 존재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의심을 슬그머니 숨겨둔 채 확신의 표정을 짓고 사람들 앞에 서곤 합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면 자기 불화가 심화되고, 결국은 위선적 태도로 나타나게 됩니다. 


혹시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화가 카라바지오(Caravaggio, 1571-1610)의 '의심하는 도마'라는 그림을 보신 적이 있나요? 그 그림은 중세기의 성화에 나타나는 성스러움이나 초연함이 별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상의를 반쯤 내려 가슴을 드러내신 예수님은 왼손으로 도마의 팔을 잡고 당신의 옆구리에 난 상처에 손을 넣어보도록 이끌고 계십니다. 가슴은 다소 창백하게 보이고, 얼굴은 조금 피로한 기색을 띠고 있습니다. 어떤 성스러운 느낌도 들지 않습니다. 후광도 없습니다. 이마에 깊은 주름이 잡힌 도마는 왼손을 허리 위에 얹은 채 오른손을 뻗어 예수의 상처자국에 손가락을 깊숙이 찔러 넣고 있습니다. 그는 마치 부검의처럼 예리한 눈빛으로 그 상처를 살피고 있습니다. 경외심이나 주저함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실증적인 태도가 도드라집니다. 도마 뒤에 서 있는 두 제자 역시 주체할 수 없는 호기심을 내보입니다. 그들은 고개를 깊이 숙인 채 예수의 상처를 들려다보고 있습니다. 카라바지오는 제자들을 르네상스적 인간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회의는 비신앙의 표현이 아니라 더 깊은 인식에 이르기 위한 통로입니다.


회의를 허용하지 않는 믿음은 불안정합니다. 오랫동안 확고한 믿음과 주저없는 순종을 요구하는 교회의 가르침에 순치된 이들에게 이 말은 매우 불경스럽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회의라는 통과제의를 거치지 않은 신앙은 마치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아서 단 한 번의 타격으로도 무너질 수 있습니다. 교리 혹은 교회의 가르침은 누군가의 머리를 덮는 쇠항아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때로는 우리를 보호해줄 때도 있지만 항아리를 쓴 채 살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것을 찢어야 비로소 더 광대하고 맑은 세계가 열립니다. 늘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보라거나 기존의 가르침을 다 부정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사유를 통해 신앙적 주체가 되어 살라는 말입니다. 도쿄 대학교의 명예교수인 강상중 선생은 <고민하는 힘>에서 해답이 없는 질문을 던지고 고민하는 청춘들의 모습을 긍정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해답이 없는 물음을 가지고 고민한다. 그것은 결국 젊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달관한 어른이라면 그런 일은 애초에 시작도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나는 청춘이란 한 점 의혹도 없을 때까지 본질의 의미를 묻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자기에게 도움이 되든 그렇지 않든, 사회에 이익이 되든 그렇지 않든 '알고 싶다'는 자기의 내면에서 솟아나는 갈망과 같은 것을 솔직하게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거기에는 좌절과 비극의 씨앗이 뿌려져 있기도 합니다. 미숙하기 때문에 의문을 능숙하게 처리하지 못하고 발이 걸려 넘어지기도 합니다. 위험한 곳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것이 청춘이라고 생각합니다."(강상중, <고민하는 힘>, 이경덕 옮김, 사계절, 2009년 4월 3일, p.85)


본질에 이르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 청춘의 모습입니다. 물론 이러한 이야기에 저항감을 느낄 이들이 있을 겁니다. 한눈 팔지 않고 치열하게 노력해도 남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을까 말까한 형편인데, 그렇게 한닥거릴 여유가 어디 있냐고 불퉁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합니다. 나 역시 오늘의 젊은이들이 참 어려운 여건 속에 있다는 사실을 조금은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눅진한 현실에 붙들린 채 사유의 주체가 될 생각이 없는 이들에게 공감할 수 없습니다. 현실이 어려우면 왜 현실이 그 모양이 되었는지를 살펴야 하고, 그것이 불의한 구조 때문에 발생한 문제라면 구조를 바꿀 수 있는 용기를 내야 합니다. 세계가 신자유주의 경제질서에 확고하게 편입된 이후에 우리가 상실한 것이 무엇일까요? 새로운 세계를 상상하는 능력이 아닐까요? 다른 이들이 설정해 놓은 경계 안에서 사고하고 경쟁한다면 우리는 늘 존재의 피로를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다른 세계를 상상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당신이 속해 있었던 사회적 세계가 당연하게 여기던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종교의 본질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마음에 붙들어매는 것인 동시에, 삶의 준거점을 '욕망'이 아니라 '사랑'에 두고 살도록 사람들을 인도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 율법학자들이 중심이 된 성전 체제는 스스로 특권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사람들을 지배하려 했습니다. 신앙이 무거운 짐이 된 것입니다. 예수는 그러한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성전 체제와 대립했습니다. 아름다운 것이 썩으면 악취가 나는 법입니다. 탐욕과 결합한 종교는 생명을 풍성하게 하기는커녕 생명을 위축시키는 기제가 됩니다. 그런 성전 체제는 무너지는 게 순리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을 공생애의 초기에 배치하고 있습니다. 노끈으로 만든 채찍으로 양과 소를 쫓아내시고, 돈 바꾸어주는 이들의 상을 둘러 엎으신 주님을 보며 당혹감에 사로잡힌 이들이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합니다. 그 때 주님이 하신 말씀 기억나세요?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요2:19) 제가 잘 아는 어느 목사님은 교회 봉헌식 때 이 본문을 텍스트로 삼아 '이 성전을 허물어라'라는 제목의 설교를 했습니다. 경사스러운 날 '이 성전을 허물어라'라니요? 그 목사님은 본질을 잃어버리면 교회는 무너지는 게 마땅하다는 사실을 교인들에게 각인시켜주고 싶었던 것일 겁니다.


예수님은 로마 제국이 지배하는 세상 한 복판에서 하나님 나라를 꿈꾸셨습니다.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갈리는 세상, 폭력과 착취가 일상이 된 세상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세상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기존의 질서가 생명을 질식시키려 할 때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 그러한 세상을 열기 위해 땀흘리는 이들을 통해 세상은 조금씩 진보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진보의 길로 초대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십자가란 바로 그 길을 선택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시련인 동시에 영광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서있는 신앙의 토대는 확고합니까? 주제넘은 질문을 던지는 까닭은 자기가 믿는 것이 무엇인지, 또 주님이 우리를 어느 길로 인도하시는지 알지 못하는 이들이 많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18세기 독일의 작가인 고트홀트 레싱은 <현자 나탄>이라는 희곡 작품을 통해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는 상황에서 참된 종교를 분별하는 법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레싱은 그 희곡을 발표하기 전에 격렬한 신앙 논쟁에 휘말려 곤욕을 치뤘습니다. 한바탕 광풍이 몰아친 후에 그는 자기의 입장을 분명히 드러내기 위해 이 작품을 썼습니다. 이 희곡에서 가장 유명한 대목은 나탄이라는 현자가 들려주는 '반지 비유'입니다. 이 반지 비유는 레싱의 창작이라기보다는 이미 사람들 사이에 전승되고 있던 이야기였습니다. 레싱은 그것을 더 정교하게 다듬어 사람들에게 들려주었습니다. 옛날 옛적에 동방의 어느 나라에 살던 한 남자는 아주 귀한 반지를 손에 넣게 되었습니다. 영롱한 빛을 내는 그 반지는 신통력이 있어서 그 반지를 끼고 있는 사람은 신과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는 그 반지를 손에서 빼지 않았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날 무렵 그 반지는 출생 순서에 관계없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에게 전해졌고, 그것이 대대손손 이어오는 하나의 전통이 되었습니다. 그 반지가 아들 셋을 둔 아버지에게 넘어왔는데 그 아들들은 하나같이 신실했습니다. 아버지는 세 아들에게 공히 그 반지를 물려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세상을 떠날 날이 가까워지자 아버지는 깊은 고뇌에 빠졌습니다. 반지는 하나이고, 아들은 셋이었으니 말입니다. 고민 끝에 아버지는 세공사를 불러 그 반지와 똑같은 반지를 두 개 만들어달라고 부탁합니다. 세공사는 일을 정말 잘 해냈습니다. 아버지조차 어느 것이 진품인지를 구별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세 아들을 각각 불러 축복의 말과 함께 그 반지를 손에 끼워주었습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세 아들은 자기 반지가 진짜라고 주장했습니다. 다투던 그들은 결국 재판관에게 가서 판결을 요구합니다. 난감하기는 재판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솔로몬과 같은 명판결을 합니다. 그는 "너희가 각각 반지를 아버지에게서 받았다면, 자기 반지가 진짜라고 확실히 믿"으라면서 이렇게 권고합니다.


"아버지는 너희 삼형제를 모두 사랑했고 또 똑같이 사랑했다. 그래서 하나를 편애해 다른 두 형제한테 서운한 일이 없도록 한 것이다. 그러니 각자 아버지의 공평하고 편견 없는 사랑을 본받도록 노력하라. 자기 반지에 박힌 보석의 신통력을 현현시키려고 경쟁하라. 온유함과 진정한 화목과 옳은 행동과 신에 대한 진정한 순종으로써 그 신통력을 돕도록 하라."(고트홀트 레싱, <현자 나탄>, 윤도중 옮김, 지식을만드는지식, 2011년 9월 30일, p.127-128)


레싱은 이슬람과 유대교와 기독교가 각기 자기야말로 참 종교라고 다투는 상황을 염두에 두고 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맥락을 떠나더라도 이 이야기는 의미심장합니다. 우리 믿음의 진정성은 우리의 삶을 통해 입증되어야만 합니다. 삶으로 번역되지 않은 신앙고백은 공허한 말놀이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째 이야기가 가리산지리산 어지럽게 진행된 것 같네요.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신앙을 방편으로 삼을 것이 아니라 우리 존재의 기반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세먼지 자욱한 하늘 아래 사는 것처럼 답답한 현실 속에서 대개 사람들은 푸른 하늘을 잊고 삽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구름을 닦는 성실함으로, 쇠항아리를 찢는 열정으로, 기어코 티 없이 맑은 구원의 하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삶이 아무리 각박하고 힘겨워도 저 무성한 초목에 눈길을 주며 살면 좋겠습니다. 평안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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