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청년편지5 2016년 07월 29일
작성자 김기석

 푸른 언덕에서 보내는 편지5


평안하신지요?

그 동안도 참 다양한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옥시 사태로 통칭되는 가습기 살균제 사건, 구의역 스크린 도어 작업 중이던 20세 젊은이의 때 이른 죽음, 남양주 지하철 공사장 붕괴 사고, 철없는 한 연예인의 성 폭행 사건 등.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이런 일들은 망각의 강물에 떠밀려 포말조차 남기지 않은 채 사라지곤 합니다. 대중의 관심이 이런 일에 집중되는 동안 그보다 더 크고 엄중한 구조적 죄악들은 슬그머니 은폐되고 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바르게 산다는 게 어렵다는 절망감에 사로잡히는 것 같습니다. 알베르 카뮈의 말이 떠오릅니다. "동양의 한 현자는 흥미로운 시대에 살지 않도록 자기를 구원해 달라고 늘 신께 기도했다. 우리는 현명하지 못하므로 신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시지 않았고, 그래서 우리는 흥미로운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흥미로운 시대'라는 표현은 관찰자의 입장에서 나온 말이겠습니다만, 그 한복판에서 살아가야 하는 이들에게는 고통스럽기 이를 데 없는 시대입니다. 브렉시트 찬반을 묻는 투표에서 영국인들은 EU 탈퇴를 선택했습니다. 지리한 협상 과정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전 세계는 깊은 충격을 받은 것 같습니다. 신자유주의 경제질서가 만들어놓은 질서의 한 축에 균열이 생긴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마다의 셈법에 따라 이득과 손해를 계산하느라 경제학자들과 정치가들 그리고 사회학자들이 분주합니다. 절망, 냉소, 파괴, 공포가 가득 찬 세상에서 벗어날 길을 과연 찾을 수 있을까요?


이런 현실을 정치하게 분석할 능력은 부족하고, 장차 세계가 어디로 갈지 도무지 알 수 없으니 참 답답한 노릇입니다. 가슴이 답답할 때마다 나는 시인들의 눈을 빌어 세상을 다시 살펴보곤 합니다. 장마철의 시작을 알리는 빗소리가 요란하던 어느 날, 뒷머리에 무지근한 통증이 느껴져 아무 일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서가에 있는 옛 시인들의 시집을 꺼내 한 편 두 편 읽어나갔습니다. 옛 시인이라는 말이 그분들에게는 실례가 될지도 모르겠네요.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하는 분들이 많으시니까요. 하지만 굳이 옛 시인이라 말한 것은 그분들의 시가 젊은 날 내 영혼의 자양분이 되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분들의 이름을 떠올리고, 그분들의 시를 읽는다는 것 그 자체가 지난 시절의 내 모습과 조우하는 것과 같은 감흥을 주었습니다. 누렇게 변색되어 버린 시집을 어루만지면 칠흑같은 세월을 헤치며 걸어온 나의 남루한 세월이 부끄럽게 상기되었습니다. 


양성우 시인의 시집 <북치는 앉은뱅이>(창작과 비평사, 1980년 4월 25일)와 <靑山이 소리쳐 부르거든>(실천문학사, 1982년 2월 20일)을 꺼내들고 한편 한편 읽어나가다 보니 비감한 느낌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역사의 덫에 치여 신음하는 이들의 혼에 사로잡힌 시인은 마치 접신한 무당처럼 노래를 읊조립니다. '저녁 종소리를 들으며'라는 시를 들어보세요.


그곳에 아득히 계시는 이여

도대체 이 세대를

어찌하시렵니까?

당신의 깊은 잠, 먹구름 하늘 밑

우리 허리굽고

간도 쓸개도 다 녹았습니다

오늘도 아이들 어디선가

비싸게 울고,

그 눈물 진눈깨비로

빈 땅을 적시며

오오, 무수한 아픔이

우리를 누르니

주여. 도대체 당신은 이 세대를

어찌하시렵니까?


시인은 눈물이 빈 땅을 적시고, 무수한 아픔이 우리를 짓눌러, 허리는 굽어지고 간도 쓸개도 다 녹아버린 세태를 탄식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그 시대의 모순을 그렇게 앓아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간과 쓸개가 녹아내린 줄도 모른 채 하루하루 밥벌이에 여념이 없는 이들에게는 조금 불편한 시일 수도 있겠습니다. <25시>의 작가 비르질 게오르규는 1974년 한국에서 열린 한 문학강연에서 작가들을 잠수함 속의 토끼에 빗대 말한 적이 있습니다. 20세 때 잠수함 수병으로 근무했던 자기의 경험을 반추하면서, 잠수함 한 가운데 있었던 통 속에 토끼가 들어 있었다고 말합니다. 토끼는 잠수함 내의 산소 함량을 진단하는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산소가 모자라면 토끼는 대략 사람보다 7시간 먼저 죽는다는 것입니다. 게오르규는 시인이란 잠수함 속의 토끼와 같은 존재라고 말했습니다. 시인이 괴로워하면 그 사회는 병들어 있다는 것이지요. 그에게 있어 시인이란 임박한 위험을 경고하는 사람입니다. 사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깊이 수긍했지만, 그 역할이 사실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해야 하는 역할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습니다. 예언자란 하나님의 눈으로 역사를 주석하는 존재들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수평적인 사고에 머물 때 예언자들은 수직적인 눈으로 역사를 바라보고, 경고의 나팔을 울려야 했습니다. 그들은 일상의 평온을 깨뜨리는 존재이기에 늘 불편한 존재였습니다. 


오늘의 개신교회를 생각해봅니다. 경고의 나팔소리를 제때에 불고 있나요?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토끼의 숨이 정상에서 벗어난지 벌써 여러 시간이 지났는 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별 일 없는 것처럼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현실에 길들여진 채 저항을 포기한 젊음처럼 슬픈 게 또 있을까요? <서준식 옥중서한>을 읽다가 믿음이 좋다는 젊은이들이 빠지기 쉬운 허위의식의 실체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일단의 젊은 기독교인들이 감옥에 와서 수형자들을 위로하기 위해 찬송가도 부르고 무언극도 상연했답니다. 무언극의 내용은 단순했습니다. 신이 창조한 인간이 뭔가 삶다운 삶을 찾아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술이나 담배나 춤 혹은 도박이나 우상숭배에 젖어 보지만 결국은 참다운 삶의 의미를 찾아내지 못해 절망하고 맙니다. 그것을 지켜보던 신이 참 삶의 의미를 가르쳐주기 위해 예수를 보내는데, 결국 그는 술, 담배, 춤, 도박, 우상숭배에 열을 올리던 무리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히더라는 것입니다. 서준식은 그들의 순수한 의도를 모르지 않지만 그들이 보여준 무언극은 성서의 왜곡이라고 지적합니다. 음주, 흡연, 도박 등으로 대표되는 방탕과 우상숭배에 대한 금지는 오히려 사두개파 사람들이나 바리새파 사람들이 더욱 강조하던 가르침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가난해서 안식일에 노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사람들, 고달픈 나날을 잊기 위하여 때로는 폭음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사회적 약자들 편에 철저히 섰던 사람이 바로 예수였다. 음주라거나 흡연, 우상숭배 따위의 자잘한 도덕문제를 강조함으로써 보다 근본적인 악을 은폐하기 위한 거대한 자금을 동원하는 현대의 바리새파들에 의하여 예수 죽음의 참된 뜻이 끊임없이 거짓 꾸며지고 있는 것이다."(서준식, <서준식 옥중서한>, 노사과연, 2015년 3월 24일, p.207)


예수님도 그런 말씀을 하셨지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와 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들은 버렸다. 그것들도 소홀히 하지 않아야 했지만, 이것들도 마땅히 행해야 했다."(마23:23) '뿌리(根)'를 붙잡을 생각도 능력도 없는 사람일수록 '열매(末)'에 집착하는 법입니다. 믿음을 빙자하여 자신에게는 너그럽고 다른 이들에게는 한없이 매몰찬 사람들이 많습니다. 가끔 교회 안에 있는 순치된 젊은이들을 볼 때마다 마음 한 구석이 허해지는 것을 금할 수 없습니다. 묻고 또 물으며 진리의 알짬에 당도하기 위해 눈이 빛나는 젊은이들이 보고 싶습니다. 좋은 교인, 좋은 청년이라는 평가에 만족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 '좋다'는 평가가 우리 영혼의 올무가 될 때가 많습니다. 잘못된 것을 보면 분노할 줄 알아야 합니다. '아니오'라고 말해야 할 때 사람들의 눈치나 보고 있다든지, 강자에 자신을 합일화하여 '예'라고 말하는 것처럼 비극적인 일이 또 있을까요? 양성우 시인은 '해마다 이날이 오면'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해마다 이날이 오면 아기야.

나는 황매천의 절명시를 읽는다.

해마다 이날이 오면,

흰눈 쌓인 남북 만주 주린 말 달리며

나라 잃은 분노를 죽음으로 달래던

독립군의 함성을 되새겨 듣고,

오오, 서울에서도 인천에서도

시골 장터에서도 왜놈 총에 맞서서

맨손으로 외치던 만세소리를 듣는다.

('해마다 이날이 오면' 부분)


'이날'은 아마도 독립 기념일일 겁니다. 장엄하지 않습니까? 견결한 정신의 푸른 서슬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장엄이 무슨 밥을 먹여주냐고 묻지 마십시요. 시인은 국권이 일본에 넘어가자  "등잔 앞에 책을 덮고 지난 역사 헤아리니/글을 아는 사람 구실 정녕 어렵구려"(매천 황현의 절명시 제3수 일부) 노래한 후 스스로 목숨을 끊은 매천과 독립군, 그리고 독립을 희구하던 장삼이사들을 눈물겹게 떠올리고 있습니다. 다른 시에서 시인은 "절망이 어찌 죄가 아니랴./내 손에 비록 가진 것 없지만 목마른 풀잎으로 바람 앞에 일어서며," "또 다시 폐허 위에 씨를 뿌리며/남모르는 노래를 입속으로" 부르겠다고 다짐합니다('赤貧' 부분). 희망은 폐허 위에 움씨를 뿌리는 이들의 고단한 노고를 통해 발아하는 법입니다.


이 '흥미로운 시대'에 대해, '하나님의 형상'이 가뭇없이 스러지는 시대에 대해 분노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만 살덩이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첫 번째 임금이었던 사울은 사무엘에 의해 기름 부음을 받은 후, 제비뽑기를 통해 왕으로 지명되었습니다. 역사의 대의 앞에 한 번도 나선 적이 없던 사람이었기에 불량배들은 그를 조롱했습니다. 사울도 어찌 할 바를 몰랐을 겁니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우뚝 일어서게 된 일이 발생했습니다. 암몬 사람 나하스가 길르앗 야베스를 침공하였던 것입니다. 자기를 지켜낼 힘이 없다고 판단한 길르앗 야베스 주민들은 사신을 보내 항복 의사를 밝힙니다. 그러나 나하스는 그들의 항복을 순순히 받아주지 않습니다. 주민들의 오른쪽 눈을 모조리 빼는 모욕을 가한 후에 조약을 맺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길르앗 야베스 주민들은 사신을 보내 자기들의 처한 곤경을 알립니다. 밭에서 소를 몰고 돌아오던 사울도 그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때의 일을 사무엘서 저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울에게 하나님의 영이 세차게 내리니, 그가 무섭게 분노를 터뜨렸다."(삼상11:6) 하나님의 영은 사울로 하여금 불의에 대해 분노하고 그 불의를 척결하기 위해 일어서게 만듭니다. 


엘라 평지에서 역사 앞에 몸을 드러냈던 다윗 이야기를 잘 아시지요? 블레셋의 거인 장수 골리앗이 나타나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섬기는 군인들을 모욕했지만 그 기세에 눌려 어느 하나 일어서지 못할 때 다윗이 분연히 떨쳐 일어났습니다. 호랑이 굴에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속담처럼 하나님의 분노에 사로잡힌 다윗은 두려움 없이 나가 골리앗을 물리쳤습니다(삼상17장)


타락한 성전체제가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가련한 백성들의 등골을 빼먹는 도구로 전락한 것을 보았을 때 예수는 성전을 가리켜 '강도의 굴혈'이라 말했습니다. 그보다 충격적인 말이 또 있었을까요? 물론 예수는 선배인 예레미야의 말을 빌기는 했지만 그가 아니라 해도 이런 말을 쏟아내고도 남을 분이십니다. 종교가 타락하면 그 악취를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하고 말씀하신 주님의 마음이 되짚여오는 요즘입니다. 하나님의 분노, 예수님의 분노가 우리 속에도 일어나야 합니다. 뜨거운 숨을 몰아쉬며 양성우의 시 하나를 더 읽어봅니다.


당신의 아궁이에 마른 들풀로

주여, 차라리 나를 불태우소서.

옴붙은 세상만사 일마다 꼬이고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지며

황음무도 팔도 잡놈 능구렁이들

개털에 벼룩 끼듯 하였으니,

당신이 버리신 돌자갈밭

더럽고 구역질나서 못살겠습니다.

차라리 당신 발끝에 으스러지고,

주여, 당신 뒤척이는 새벽바람에

억겁을 떠도는 작은 티끌로

이 몸 부서져 흩어지게 하소서.

(<북치는 앉은뱅이> 중에서 '새벽기도' 전문)


이런 기상이 우리에게 회복될 수 있을까요? 이 몸 부서져 흩어져도 괜찮은 결기, 지금 역사는 그런 이들을 부르고 있습니다. 이만 줄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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