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청년편지16 2018년 12월 05일
작성자 김기석
미제레레(Miserere)

그동안 평안하셨는지요? 
저는 오늘 새벽에 후둑후둑 비가 내리는 공원을 홀로 걸었습니다. 우산을 받쳐 들고 질척거리는 바닥에 신경을 집중한 채 조심조심 걸었습니다. 공원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빗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적요로움이 참 좋았습니다. 공원은 내게 무한한 사유의 공간을 열어주었습니다. 사람들이 보이지 않자 ‘있음‘의 신비가 돌올하게 떠올랐습니다. 피할 생각조차 없이 내리는 비를 다 맞으며 푸른빛을 뿜어내는 풀들은 장엄해보였고, 물웅덩이에 내리는 빗방울이 동심원을 그리며 연꽃처럼 번져가다 소멸하는 모습 또한 아름다웠습니다. 마츠오 바쇼의 하이쿠 한 수가 떠올랐습니다. “오래된 연못/개구리 뛰어드네/물 소리”. 공원 한복판에 있는 광장에는 비둘기 한 마리가 어깻죽지에 고개를 파묻은 채 비를 맞고 있었습니다. 마치 생의 권태와 비애를 그렇게 견디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반가운 빗소리에 이끌려 나들이 나온 지렁이 한 마리도 길을 잃은 채 머뭇거리고 있었습니다. 저 지렁이도 이렁저렁 한 세상 사는 것이겠지요? 아마 그 몸짓의 적막함 때문이었을 겁니다. 이성선 시인의 ‘고요하다’라는 시가 떠올랐습니다. “나뭇잎을 갉아먹던/벌레가//가지에 걸린 달도/잎으로 잘못 알고/물었다//세상이 고요하다//달 속의 벌레만 고개를 돌린다”. 우리 눈에 잘 띄지 않아 그렇지 세상 도처에서 이런 신비스러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을 겁니다. ‘탄생‘과 ‘소멸‘ 사이, ‘있음’과 ‘없음’ 사이에 생명이 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저마다 있는 모습 그대로 아름답습니다. 그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직관할 수 있을 때 삶은 풍요롭습니다. 그 아름다움을 볼 눈을 잃으면 삶은 무거워지고, 결핍을 채우려는 욕망이 우리 삶의 주인이 되기 쉽습니다. 

비가 내려 더욱 적적하고 호젓한 공원은 생명의 아름다움을 그렇게 드러내 보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걸음만 벗어나도 세상은 아찔한 절벽입니다. 적대감과 위험이 넘칩니다. 가만히 조릿대를 흔드는 비의 타격을 보고 있자니 문득 비감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난 봄, 바람결에 난분분 흩날리는 벚꽃을 보며 흔감해 하다가, 시리아의 동구타 지역에 살포된 독가스로 인해 입에 거품을 물고 죽어간 어린 아이들의 모습이 떠올라 정신이 아뜩해졌던 기억이 떠올랐던 것입니다. 아무에게도 작별의 말 한 마디 남기지 않고 세상을 등진 이들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습니다.

공원을 벗어나 거리로 나가자 한 늙수그레한 사내가 허섭스레기 같은 짐들을 양손에 가득 들고 내리는 비 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은 채 혼자 중얼거리며 휘뚝휘뚝 걷고 있었습니다. 그의 추레한 모습이 비애감을 자아냈습니다. 허리 굽은 한 노인이 비에 젖은 골판지 박스를 차곡차곡 손수레에 쌓고 있었습니다. 삶의 고달픔이 고스란히 전달되는 풍경이었습니다. 엊그제 식당에서 본 광경이 떠오릅니다. 젊은 엄마들 몇 사람이 낮술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식당 안팎을 운동장 삼아 이리 뛰고 저리 뛰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엄마들은 수다삼매경에 빠져 있다가 조금 과하다 싶으면 더 큰 소리로 아이들을 나무랐습니다. 불쾌한 생각이 들었지만 굳이 제지하지 않은 것은 고단하게 살고 있는 그들의 일상이 얼핏 떠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늘 접하고 사는 일상의 풍경들인데 오늘 따라 비감한 느낌이 사무치는 것은 왜일까요? 

생명이 넘실거리는 세상은 이리도 아름다운데, 인간의 마을에서 벌어지는 일들과 풍경들은 왜 이리 참혹한지 모르겠습니다. 가끔 생의 무게를 견디기 어렵다는 생각에 사로잡힐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꼴저꼴 안 보고 어디 숨어 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염세주의자가 된 것은 분명 아닌데,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을 보면 삶에 조금쯤 지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달아나서는 안 됩니다. 사실 달아날 수도 없습니다. 인생은 지지고 볶으며 사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간혹 시적 황홀경이 우리 삶을 빛나게 만들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산문적입니다. 공중에 나는 새와 들에 핀 꽃을 보면서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 깊이 접속하는 것도 우리 삶이고,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을까 염려하는 것도 우리 삶입니다. 사람이 몸을 가지고 사는 한 욕망으로 인해 질척거리는 일상을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그 일상 속에서 빛나는 순간을 발견하거나 빚어내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소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이 들려주신 하나님 나라의 비유는 늘 저를 놀라게 만듭니다. 하나님 나라라는 어찌 보면 가장 비일상적인 현실을 가르치면서도 주님은 종교적인 용어는 단 한 마디도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일상적인 삶의 현장에서 우리가 흔히 경험하는 일들을 통해 주님은 하나님 나라의 오묘함을 드러내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비유는 성사적(聖事的)입니다.

전쟁과 폭력이 그칠 사이 없는 세상, 악다구니를 써대는 사람들의 목소리와 거친 표정에 지칠 즈음이면 습관처럼 피에타(Pieta)가 떠오릅니다. 피에타는 이탈리아어로 ‘슬픔‘ 혹은 ‘비탄’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도상학적으로는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의 시신을 어머니 마리아가 안고 있는 모습이 일반적입니다. 사람들에게 제일 잘 알려진 것은 성 베드로 대성당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일 것입니다. 미켈란젤로가 그 조각을 제작한 것이 대략 1499년 어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는 24세였습니다. 혼란스럽던 당시의 유럽 상황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일까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는 오히려 고요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어머니 마리아의 모습은 주름 하나 없는 성 처녀 그 자체입니다. 시간 속에서 겪었을 풍상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작품은 슬픔과 비탄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기보다는 범접하기 어려운 영원성 혹은 초월성 앞으로 우리를 이끌어갑니다. 감히 그 앞에서 나/우리의 상처를 드러내 보이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것 같은 완벽함이 거리감을 만들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는 그것 외에도 여러 점이 전해집니다. ‘피렌체 피에타’도 놀랍지만 내 마음을 가장 크게 뒤흔든 것은 ‘론다니니 피에타’입니다. 밀라노의 스포르체스코 성 박물관에 있는 그 피에타상과 만나는 순간 나는 뭔가 주체할 수 없는 슬픔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혔습니다. 이 작품은 미켈란젤로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까지 매만지던 것으로 미완성작입니다. 그래서 투박해 보입니다. 하얀색 대리석 마띠에르가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 미학적 이상에 따라 작품을 만들던 미켈란젤로가 말년에 그렇게 투박한 작품을 만든 것은 인생의 쓴맛과 단맛을 다 겪고 난 후였기 때문일 겁니다. 미학적 형식과 법도를 다 내려놓고 그는 인간 삶의 실상을 드러내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머니 마리아는 시신으로 변한 아들 예수를 뒤에서 부둥켜안고 있습니다. 저절로 굽은 등은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슬픔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등도 슬픔을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저는 처음 알았습니다. 일부러 드러내지 않았기에 그 슬픔은 강물이 되어 우리 마음으로 흘러듭니다. 그리고 우리 속에 숨겨진 아픔과 상처를 슬쩍 건드립니다. 론다니니의 피에타는 그렇게 세상의 아픔을 품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작품 속에서 역사의 무대에서 스러져간 아들딸들을 품에 안은 채 울고 있는 어머니들을 보았고, 어처구니없는 사고로 자식을 잃고 울부짖는 우리 시대의 라헬들의 울음소리를 들었습니다.

아, 그런데 그 작품을 가만히 보면 마치 죽은 예수가 슬픔에 잠긴 어머니를 업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미켈란젤로가 의도한 것이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을 부둥켜안아 일으키려 하고, 아들은 어머니의 슬픔의 무게를 오히려 짊어지고 있습니다. 나는 이것이 십자가의 신비라고 생각합니다. 론다니니의 피에타를 볼 때 페르골레시(Pergolesi, 1710-1736)의 ‘Stabat Mater’의 선율이 떠오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불과 26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페르골레시는 죽기 직전에 이 곡을 썼다고 합니다. 마지막 기력을 모아 그는 자기 삶을 성모의 슬픔 앞에 내려놓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세상의 아픔과 설움을 등에 짊어지고 계십니다. 그분은 사람들이 쌓아올린 분리의 장벽들을 철폐하기 위해 우리 가운데 오고 계십니다. 장벽을 쌓아올리고, 누군가를 배제하고 미워하면서 예수를 믿을 수는 없습니다. 피부색, 인종, 문화, 종교, 경제력의 차이조차 사람들을 갈라놓는 빌미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 한국 개신교회가 중병에 걸렸다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단순히 신자 수가 감소한다는 측면에서 하는 말은 아닙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이 교회에 대해 아무런 기대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야말로 위기의 징조입니다. 시민 사회는 다양한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조금씩 성숙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지만, 교회는 자폐의 담장 안에 머물며 완강하게 변화를 거부합니다. 

교리적인 언어는 이미 생명력이 다했는데도 사람들은 한사코 그 언어에 집착합니다. 불교의 가르침 가운데 언어도단(言語道斷)·불립문자(不立文字)라는 것이 있습니다. 진리의 세계는 언어가 끊어진 자리에서 드러나기에 문자로 그것을 다 드러낼 수 없다는 말일 겁니다. 그렇다고 하여 언어를 포기할 수도 없습니다. 언어로 전달할 수 없는 데도 언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는 딜레마가 우리를 괴롭힙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언어가 언어 너머를 가리키는 기호라는 사실입니다. 달을 가리키면 달을 봐야지 왜 손가락만 바라보냐는 말이 있지요? 교리적 언어는 존중해야 하지만, 자칫 잘못하면 그 언어가 족쇄가 될 수도 있습니다. 언어를 취하되 그 언어가 가리키는 진실을 포착하기 위해서는 상상력을 동원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율법 너머의 세계로 우리를 안내했습니다. 율법이라는 문자가 가리키고 있는 생명에 주목했기 때문입니다. 그 생명은 곧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마음과 늘 접속되어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말이 가리키는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과 접속된 이들은 그분의 눈으로 세상을 봅니다.

저는 조르주 루오(Georges Henri Rouault, 1871-1958)의 그림을 좋아합니다. 윤곽이 뚜렷해서인지 그의 그림이나 판화를 볼 때마다 마치 스테인드글라스의 한 조각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판화 연작인 ‘미제레레’(Miserere)를 볼 때마다 고단한 운명을 견뎌야 하는 인간의 비애가 떠올라 가슴이 무지근해지곤 합니다. 그런데도 그의 그림과 판화가 인간의 절망과 고단함만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무거움 속에 가벼움이 있고, 고통 속에 따뜻함이 있고, 어둠 속에 빛이 있고, 투박하지만 천박하지 않고, 격렬한 현실을 반영하는 데도 고요하고, 슬픈 인간 현실을 그리는 데도 비관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의 시선은 화려하고 웅장한 것에 붙들리지 않습니다. 변두리로 밀려난 사람들, 광대나 창녀들이 그의 그림에 자주 등장합니다. 발터 니그는 루오가 그린 창녀 그림은 우리 시대에 대한 고발이라고 말합니다.

“루오의 그림들에는 그리스도교 사회에 대한 명백한 탄핵이 들어있다. ‘너희가 어떻게 했기에 너희 이웃이 이렇게 되었느냐?’ 그리스도교 사회 속에서 수많은 사람이 이토록 비인간적으로 짓밟히고 있는데, 어떻게 이런 그리스도교가 있을 수 있는가? 루오는 창녀들에게 인격의 존귀함이 철저히 박탈당했음을 보았다. 인간의 존귀함이 이토록 무자비하게 짓밟힐 수는 없다. 욕정을 채우기 위해 한 여자의 몸을 착취하는 행위는 여성으로서의 존귀함을 가장 추악하게 모욕하고 더럽힌다. 루오는 창녀 그림들을 통해 썩을 대로 썩어 이름뿐인 그리스도교가 드러내는 잔인함과 경직성에 항거했다.”(발터 니그, <조르주 루오>, 윤선아 옮김, 분도출판사, p.86)

발터 니그의 이 문장은 자기 연민에 빠져 세상의 불의를 보고도 분노할 줄 모르는 우리들의 영혼을 타격하고 있습니다. 분노해야 할 때 분노할 줄 모르는 것은 늙음의 징후입니다. 우리 속에 하나님의 숨결이 머물러 있다면 인간을 도구화하고, 물화시키는 현실에 저항해야 합니다. 참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현실을 외면하거나 초월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지금 벼랑 끝에 선 듯 삶이 위태로운 이들 곁에 다가가 그들의 설 땅이 되려 할 때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무력감과 비애는 줄어들 것입니다. 들과 산에 무성하게 번져가는 저 초록의 물결은 마치 생명은 죽지 않는다고 말하는 듯합니다. 우리도 그 생명의 물결 속에 몸을 풍덩 던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평안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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