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죽음에 이르는 욕망9 2018년 12월 05일
작성자 김기석
운명에 저항했던 사나이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삶의 저자이다. 각자에게 분유(分有)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우리는 삶의 이야기를 써간다. 무심하고 초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노인들에게 다가가 그동안 살아오신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부탁해보라. ‘내 이야기를 다 털어놓자면 소설로 써도 몇 권일 거‘라고 말하는 분들이 많다. 삶은 그렇게 기가 막힌 것이다. 남들이 보기에 평범해 보이는 이들도 벼랑 끝에 서서 심연과 마주한 경우가 한 두 번은 다 있다. 그 절절한 삶의 이야기가 그의 지금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람들이 드라마나 영화에 탐닉하는 까닭은 그 속에서 자기의 흔적을 보기 때문이다. 그 흔적은 어떤 시기에 그를 사로잡았던 감정이나 정서일 수도 있고, 상처나 영광의 기억일 수도 있다.

사람들은 이야기를 좋아한다. 사람들이 진리와 이성의 언어인 로고스보다 아득한 과거에 대한 집단적 기억을 떠올리게 해주는 신화적 언어인 뮈토스를 더 좋아하는 까닭은 그 이야기를 통해 자기가 써가야 할 삶의 이야기를 유추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고하고, 상기하고, 상상하는 것은 과거에 지각하고, 이해하고, 실행하고, 경험한 것을 정신적으로 모방하거나 재가동하는 것”(브라이언 보이드, 이야기의 기원, 남경태 옮김, 휴머니스트, 2013년 1월 28일, p.225)이라지 않던가? 이야기는 서로 교차하고, 합류하고, 변형되면서 확장되는 법이다.

형제 간의 갈등 이야기
창세기는 원-역사 부분과 아브라함에서 요셉에 이르는 성조들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에덴 이후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 곧 불안이라는 숙명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이 걸어간 흔적이 그 속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창세기를 형제간의 경쟁(sibling rivalry)의 역사로 보는 이들도 있다. 실제로 창세기는 가인과 아벨, 이삭과 이스마엘, 야곱과 에서, 요셉과 다른 형제들이 빚어낸 삶의 이야기는 긴장과 아픔이 진하게 배어있다. 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형제들이 사랑의 협력 관계를 유지하며 산다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형제간의 나이 차가 별로 나지 않을 때 상황은 훨씬 심각해진다.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아이는 어느 날 느닷없이 등장한 동생에게 부모의 사랑이 집중되고 있음을 자각하면서 큰 상실감에 빠진다. 그래서 부모 몰래 동생에게 공격적인 행동을 보이거나, 부모의 관심을 끌기 위해 퇴행적인 행동을 하기도 한다.

가인과 아벨 이야기는 그 극단적인 예이다. 에덴 이후에 태어난 최초의 인간이 나중에 형제 살해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 이야기는 일종의 인정투쟁 이야기이다. 둘은 모두 하나님께 귀한 것을 바쳤다. 하나님은 아벨이 바친 제물은 받으셨지만, 가인이 바친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 제물의 문제였을까? 아니면 제물을 바치는 사람이 문제였을까? 사람들은 이 딜레마를 풀기 위해 다양한 해석을 내놓는다. 인류사적 관점에서 유목 문화에서 정착 문화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발생한 갈등을 반영한다고 보는 이들이 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이 받으실 수 없었던 것은 제물 자체가 아니라 가인이라는 사람이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이런 해석은 가인은 악인이고 아벨은 선인이라는 이분법에 기대고 있다. 문제는 악인인 가인은 살아남고 선인인 아벨은 죽임을 당했다는 데 있다. 이것이 어쩔 수 없는 세상 현실이라고 보아야 할까?

요람 하조니의 관점은 조금 다르다. 그에 따르면 농부인 가인은 “전통적이며 우상숭배적인 사회(이집트와 바빌로니아)를 대표한다. 그런 사회가 가르치는 최고 가치는 복종이다.” 반면 목동인 아벨은 “참된 선을 자유롭게 추구하는 자유로운 지성을 대표한다”. 더 나아가 “목동은 개인의 자유를 위해, 그리고 보다 고상한 것을 추구하기 위해 거대 문명들의 권력과 부를 기꺼이 버리는 모든 개인이나 사회를 대표한다.”1) 요람 하조니에 따르면 아벨은 반항아이다. 기존 질서에 동화되기를 거절하면서 인류의 참된 선, 하나님의 깊은 뜻을 헤아리며 창조적 삶을 영위하려 한 자유인이다. “하나님은 더 나은 선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 즉 남이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무엇인가를 좋게 만들려는 사람의 제물을 받으신다.”(140) 물론 이것조차 성경을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해석일 뿐이다. 단 하나의 옳은 해석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떠한 경우에도 이야기는 단일한 해석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오히려 다양한 해석을 향해 열려 있기에 모든 사람에게 의미 있게 다가갈 수 있다. 

형제간의 경쟁과 갈등은 운명적인 것인가? 인류학자인 메리 더글러스는 성서 기자가 “형제들의 배반과 추방에 대한 오래된 이야기를 기록한 까닭은 종종 전쟁으로까지 비화되는 해묵은 정치적 불화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서”2)라고 말한다. 인접한 나라들이 한편으로는 친밀하지만 그보다 더 자주 반목하는 까닭을 원인론적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애로운 형제들
형제 관계가 늘 경쟁이나 폭력으로 귀착되는 것은 아니다. 경쟁이 아니라 협동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형제자매들도 있으니 말이다. 유대인의 전설 가운데는 솔로몬이 성전 지을 터를 어떻게 결정했는지를 들려주는 이야기가 있다. 우리가 어린 시절부터 들어왔던 ‘의좋은 형제’이야기와 거의 동일하다. 이미 여러 개의 궁전을 지은 솔로몬은 하나님의 영광을 모실 성전을 짓지 못한 것에 대해 죄책감을 갖고 있었다. 어느 날 자정이 지날 때까지 잠을 이룰 수 없었던 그는 조용히 궁전을 빠져나와 예루살렘 거리와 모리아 산 근처를 거닐었다. 다리 쉼을 할 겸 올리브나무에 기댄 채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는데, 발자국소리가 들려왔다. 가만히 바라보니 어떤 사람이 달빛 아래서 밀짚단을 운반하고 있었다. 솔로몬은 도둑임을 직감했지만 그가 하는 일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도둑은 가까운 밭의 가장자리에 밀짚단을 옮겨놓기를 반복했다. 그를 처벌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두 번째 남자가 나타나 앞의 사람과 똑같은 일을 했다. 다음 날 솔로몬은 두 밭의 주인을 각각 불러 문초를 했다. 그러자 그 첫 번째 사람은 자기 밭의 밀을 형님 밭으로 옮겨놓았다면서, 형님은 자기보다 가족이 많기에 식량이 더 필요한데도 한사코 자기 도움을 받으려 하지 않기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고 대답했다. 솔로몬은 그를 옆 방으로 물러가게 한 후에 두 번째 사람을 불러 “너는 왜 이웃의 재산을 훔쳤느냐?”고 물었다. 그 사람은 자기 밭의 밀짚단을 동생 밭으로 옮긴 거라며, 자기는 가족이 많아 함께 일할 수 있지만 동생은 가족이 없어 일꾼들을 사야 하니 돈이 많이 들 것 같아 짚단을 가져다 놓았다고 대답했다. 솔로몬은 옆방에 있던 동생을 불러 두 형제의 우애에 깊이 감동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청한다. “내게 그 밭을 팔도록 하라. 너희들이 이미 두터운 형제애로 그 땅을 신성하게 했기 때문에 나는 거기에다 하나님의 사원을 짓겠다. 그보다 더 가치 있는 곳은 없을 것이며 건전한 초석을 가질 수는 없을 것이다”3). 성전을 지을 땅으로 그보다 나은 곳을 찾기 어려울 것이다. 형제간의 우애는 이렇게도 어려운 것일까?

장자로 산다는 것
에서와 야곱 이야기는 매우 전형적이다. 한 배에서 나왔지만 둘은 사뭇 다르다. 살결이 붉고 온몸이 털투성이였던 에서는 호방하고 사냥을 좋아하는 들사람이었다. 그는 서양 회화사에서 대개 활을 든 모습으로 형상화 된다. 성격이 차분했던 야곱은 주로 집에서 지냈다. 에서는 외향적이었고, 야곱은 내향적이었다. 외향적인 사람은 에너지가 밖으로 흐르고, 내향적인 사람은 에너지가 안으로 흐른다고 한다. 성격은 에너지의 방향과 관련되기에 우열을 가릴 수 없다. 에서는 아버지 이삭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리브가는 상대적 약자인 야곱에게 더 마음을 두었다. 어머니의 본능일 것이다. 가부장적 문화권에서 장자의 지위는 특별하다. 책임과 의무에 따른 보상이 컸기 때문이다. 재산이 쪼개지는 걸 막기 위해 유산의 상당 부분은 장자에게 귀속되었고, 아버지의 축복을 받을 권리가 주어졌다. 태어남의 순서가 뭐 그리 중요한가 싶지만 고대 세계에서 장자는 아버지의 ‘기력의 시작‘(firstfruits of his strength)이라는 각별한 의미를 부여받았다. 

장자는 특권만 누리는 게 아니라 엄중한 책임도 져야 했다. 아버지의 부재시에 아버지를 대신하여 가족을 통솔해야 했던 것이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르우벤은 야곱의 장자였지만 장자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하지 못했다. 요셉에 대한 형제들의 미움이 커질 때 그는 형제들을 잘 다독거려 형제간의 갈등이 살의로까지 이어지지 않도록 해야 할 책임이 있었다.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던 요셉이 홀로 들로 나왔을 때 다른 형제들은 절호의 기회가 왔다며 요셉을 제거하려 했다. 르우벤은 어찌 했던가? 그는 요셉의 생명을 직접 해하지 말자고 동생들을 설득하는 한편 그를 물 없는 구덩이에 던지도록 유도함으로 면피성 행동을 취했다. 아버지의 무서운 책임 추궁으로부터 회피하는 동시에 다른 형제들과 척지지 않기 위한 처신이었다. 그는 책임을 지기 위해 모험을 하지 않는다. 해야 할 일을 철저히 외면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여 다른 이들과 긴장 관계 속에 머물기도 원치 않는다. 그는 어중간한 겁쟁이이다. 르우벤의 모습은 그리스도의 몸이라 일컬음받는 교회 곧 우리들의 자화상인지도 모르겠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돕기 위해 모금을 하고 또 때가 되면 봉사활동도 전개하지만, 그들이 처하여 있는 구조적인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는 교회, 불의와 싸우려 하지 않는 교회는 르우벤적 교회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장자가 된다는 것은 그렇게 엄중한 일이다. 야곱은 나중에 애굽에 내려가 바로를 알현했을 때 나이를 묻는 바로에게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창47:9) 하고 대답한다. 그는 자기 삶을 ‘험악한 세월’이라는 말로 요약한다. 어쩌면 그의 망막에는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쳤을지도 모르겠다. 장자권을 둘러싼 형 에서와의 갈등, 도주,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머슴처럼 지내야 했던 나날, 치열했던 얍복강 나루의 기도, 에서와의 화해, 라헬의 죽음, 아들을 잃었던 순간의 고통, 그때부터 삶에 짙게 드리워진 그늘, 그리고 믿어지지 않는 요셉과의 재회……. 야곱 이야기는 태중에서부터 형과 싸워 어머니의 애를 태운 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야곱이라는 존재의 성격이 전형적으로 드러난 것은 팥죽 한 그릇을 주고 형 에서로부터 장자의 명분을 사들인 사건이다. 아버지의 승인도 받지 못한 장자의 명분 팔고사기가 과연 의미가 있는가? 많은 이들이 이 사건을 두고 야곱은 장자의 명분 속에 깃든 하나님의 은총을 알아차린 눈 밝은 사람이고, 에서는 작고 사소한 것에 집착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질 은총의 미래를 소홀히 한 속물적 존재라고 말한다. 정말 그런가? 

문명사적 전환 이야기(?)
창세기 27장과 33장에 등장하는 에서는 하나님의 은총을 무시하는 사람도, 속물적인 사람도 아니다. 눈이 어두운 아버지 이삭이 동생을 축복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는 울면서 ”아버지께서 나를 위하여 빌 복을 남기지 아니하셨나이까”(창27:36) 하고 여쭙는다. 고향을 떠난지 이십 년 만에 귀향한 동생을 맞았을 때 그가 보인 흔연한 용서는 감동적이지 않던가. 그는 저열한 욕망에 사로잡힌 무분별한 사람도 아니고, 거칠기만 한 무도한 사람도 아니다. 에서를 속물적 존재로 그린 것은 이스라엘과 에돔이 겪었던 반목의 세월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에서는 팔에 붉은 털이 난 야만적인 이미지로 소비되고 있다. 클라우스 베스터만은 장자권 양도 이야기를 ‘새롭게 떠오르는 문화의 자기 진술적 음성(self-assertive voice)‘으로 본다4). 사냥꾼에 비해 점차 우월적 지위를 차지하게 된 유목민과 농사꾼들 이야기 곧 문명사적 전환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야곱으로 상징되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반복하면서 에서에게 경솔한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덮어씌우고 싶었을 것이다. 팥죽 이야기 속에는 어쩌면 식민주의자들의 태도와 유사한 것이 감춰져 있는지도 모르겠다.

정치학자인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뿌리를 19세기에 발흥한 제국주의로 본다. 제국은 공산품을 만들기 위한 원재료 산지를 확보하고 제품 판매 시장을 얻기 위해 식민지를 획득하는 일에 매진했다. 식민지 경영에 동원된 사람들 가운데는 본국에서 일자리를 얻지 못했거나 잉여적 존재로 취급받는 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식민지에서 그들은 새로운 정체성을 획득한다.

“식민지로 보내진 사람들은 외모도 전혀 다르고 풍습도 이질적일 뿐 아니라 언어를 거의 이해할 수 없는 현지 사람들(=타자)과 만남으로써 자신의 ‘동일성’을 새삼 확신하기에 이른다. 거기에는 당연히 자신이 ‘국민국가’의 일원이라는 의식뿐 아니라 ‘우리=백인’은 이성적인 문명인이고 ‘그들=백인이 아닌 자’는 미개한 야만인이라는 우월감과 차별의식도 덧붙여진다. 식민지의 지배자라는 자리에 서서 지배를 당할 만한 존재인 ‘그들‘과 접촉하는 가운데 우월감과 차별의식은 점점 더 증폭된다.”5)

식민주의자들은 언제나 자기들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서사를 만들곤 한다. 그 서사에서 타자화된 사람들은 늘 열등한 존재들이다. 이것이 잘 드러난 책이 조지 오웰의 소설 <버마시절>이다. 이 책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식민지 경찰로 인도차이나에서 근무했던 작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소설에는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영국인이면서도 제국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이(플로리)도 있고, 아시아에 대한 혐오와 멸시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이(엘리자베스)도 있다. 제국주의 체제를 미워하지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 순종하는 척하는 현지인(우 포킨)이 있는가 하면, 선진문명에 대한 선망 때문에 제국주의에 자기를 동화하려는 이(베라스와미)도 있다.6)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각자 자기 세계를 구축하며 살아간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를 판별하는 것은 소설가의 몫이 아니다. 그들은 단지 그런 복잡한 상황 속에 놓인 인간을 보여줄 뿐이다. 서 있는 자리가 다르면 세상도 달리 보이게 마련이다.

많은 설교자들이 야곱에 대한 하나님의 배타적 사랑을 입증하기 위해 에서에게 덧씌워진 부정적인 이미지를 반성조차 없이 소비하곤 한다. 말라기서도 마찬가지다. 말라기서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변증하기 위해 에서에 대한 하나님의 미움을 언급한다.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폐하게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이리들에게 넘겼느니라”(말1:2-3). 에서가 왜 미움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다. 하나님의 선택일 따름이다. 그러나 우리는 인과관계를 만드는 데 익숙하다. 에서에게는 분명히 어떤 문제가 있다고 가정한다. 사람들은 에서가 하나님의 은총과 약속을 소홀히 여겼다고 단정한다. 장자의 명분을 팔아버린 것이 그 증거라는 것이다.

운명에 저항하다
이 이야기를 문명사적 전환에 대한 담론으로 보는 관점을 뒤로 하고 잠시 상상력을 발휘해 보자. 이 이야기를 언급하는 이들은 개역 개정판에 나오는 ‘장자의 명분‘이라는 용어보다는 ‘장자권’이라는 용어를 더 자주 사용한다. 공동번역과 새번역은 각각 이것을 ‘상속권’과 ‘맏아들의 권리’라고 번역하고 있다. 뉘앙스는 조금씩 다르지만 일단 개역 개정판을 따라 이야기를 전개하기로 한다. 야곱이 취한 것이 장자의 명분이라면 야곱은 왜 그 명분에 그렇게도 집착한 것일까? 그리고 에서는 왜 그 명분을 귀히 여기지 않은 것일까? 둘의 차이는 절박함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에서는 장자의 명분 유무와 관계없이 이미 강자이다. 누가 보아도 그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었고 자기 생을 주체적으로 이끌어갈 육체적 역량도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야곱은 어머니의 모태에서 분리되는 그 순간부터 약자였다. 약자의 제일 과제는 살아남는 것이다. 야곱은 주어진 삶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면서 근근이 살아갈 수는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숙명론자가 아니라 자기 운명과 맞서 싸우는 사람이었다. 앞서 소개한 요람 하조니는 성서 내러티브가 시종일관 에서를 축복하려는 아버지 이삭의 뜻을 거역한 야곱의 행위가 옳았음을 증언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야곱을 기뻐하신 이유는 그의 변명할 여지없는 거짓말 때문이 아니라, 쌍둥이 동생으로 태어난 우연이 그에게 강요한 운명에 야곱이 필사적으로 저항했기 때문이다.”7)

제국들이 각축하는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이스라엘이 야곱을 자신들의 모델로 삼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험악한 세월’을 살았다던 야곱의 일생은 바로 이스라엘의 사회 전기인 셈이니 말이다. 곤고한 역사의 격랑을 헤쳐나가면서 그들은 조상들로부터 전해들은 선조들의 이야기를 통해 살아갈 힘을 얻었을 것이다. 이때 ‘우리는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상징 자본(symbolic capital)은 그들이 어려움 속에서도 자기 정체성을 유지하며 살아가도록 한 멋진 상징 자본이었을 것이다. 야곱이 에서로부터 사들인 장자권도 일종의 상징 자본이다. 장자의 명분이 실제적으로 주는 유익은 크지 않지만 그 명분은 야곱의 내면에 우뚝 세워진 기둥이나 마찬가지이다. 기둥이 없거나 기울면 약간의 무게만 얹혀도 건물이 무너지지만, 기둥이 바로 서 있는 한 건물은 어지간한 하중을 견뎌낸다. 장자의 명분은 어두운 시절을 지날 때마다 야곱의 불확실한 미래를 밝혀주는 빛이 아니었을까? 하나님은 돌베개를 베고 잠을 청하던 도망자 야곱을 찾아가셔서 보호와 동행, 복과 귀환을 약속하셨다. 그 약속이야말로 그 상징 자본의 구체화였다. 

하지만 그 기둥은 여전히 야곱이라는 존재의 비루한 욕망으로 얼룩져 있었다. 기둥이 바로 서기 위해서는 그가 의지하고 있던 기둥이 먼저 무너져야 했다. 역설이다. 외가인 밧단아람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올 때 그는 이미 일가를 이루고 있었다. 여러 아내와 자식들을 두었고, 재산도 많이 불어났다. 그러나 귀향길이 흔연하지만은 않았다. 형 에서와의 갈등이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장자의 명분을 빼앗고 눈 어두운 아버지를 속여 형에게 돌아갈 축복까지 가로챘던 과거는 살아남기 위해서라는 명분에도 불구하고 어두운 그늘이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장례를 치르고 나면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 다짐했던 형의 표정을 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고향 땅이 멀지 않는 얍복강에 당도했을 때 그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이미 이런저런 상황을 예측하면서 나름대로 대책을 세웠다고는 하지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기에 초조했다. 한 밤중에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너게 하고 재산까지도 다 건너보낸 후 그는 홀로 남았다. 그는 ‘홀로’ 자기 운명과 마주하고 있었다. 그때 어떤 낯선 존재가 나타나 야곱을 붙들었고 그래서 그는 죽을 힘을 다해 그 낯선 존재와 씨름을 했다. 그 낯선 존재는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쳐서 뼈가 어긋나게 만들었다. 이 허벅지 관절의 어긋남은 매우 상징적이다. 지금까지 야곱은 그의 이름 뜻 그대로 남의 발목을 잡으며 살아왔다. 어머니의 모태에서부터 에서의 발목을 잡았고, 장자의 명분을 빼앗고, 축복까지 가로챘다. 친족관계를 이용해 그를 도구화하던 외삼촌 라반의 재산을 자기 것으로 바꾸기도 했다. 살아남기 위해서 그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자기 발로 든든히 서서 고단한 인생길을 헤쳐온 것이다. 그러던 그의 허벅지 관절이 어긋났다. 더 이상 옛 삶의 방식은 가능하지 않다. 

절박했기에 그는 그 낯선 존재에게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말한다. 그 사람이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묻자 “야곱이니이다”라고 대답한다. 자기 입으로 자기가 남의 발목을 잡는 자임을 실토한 것이다. 그때 그가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창32:28)이라고 말한다. 야곱은 이제 사람과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사람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 말을 승패라는 단순한 도식으로 보지 말아야 한다. 어제까지의 야곱은 죽었다. 그는 이제 남의 발목을 잡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으로 사는 새로운 존재 이스라엘이 되었다. 동녘 하늘에 아침 햇살이 번져갈 때 그는 절뚝이며 형 에서를 향해 나아간다. 기둥이 무너진 집처럼 그의 몸은  좌우로 흔들렸지만 그의 내면에는 흔들리지 않는 기둥 하나가 섰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아버지가 되었다. 장자의 명분은 더 이상 명분이 아니라 실재가 되었다. 운명에 저항했던 한 사나이의 서사는 이렇게 완성되었다.


주)
1. 요람 하조니, 구약성서로 철학하기, 김구원 옮김, 홍성사, 2016년 7월 11일, p.84-85
2. Mary Douglas, Jacob‘s Tears, Oxford University Press, 2012, p.14
3. 레오 파브라트, 불꽃, 현경미 옮김, 을지출판사, 1991년 12월 10일, p.91
4. Claus Westermann, Genesis, Eerdmans, 1987, p.184
5. 나카마사 마사키, 왜 지금 한나 아렌트를 읽어야 하는가?, 김경원 옮김, 갈라파고스, 2017년 3월 14일, p.57
6. 조지 오웰, 버마 시절, 박경서 옮김, 열린책들, 2010년 3월 25일 참조
7. 요람 하조니, 앞의 책,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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