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죽음에 이르는 욕망12 2018년 12월 05일
작성자 김기석
오만한 권력의 몰락
        -하만 이야기

2018년 10월 27일 오전, 일단의 유대인들이 미국 펜실베니아 주 피츠버그의 스쿼럴 힐에 있는 ‘생명수 회당’(Tree of Life Synagogue)에서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그때 46세의 백인 남성 로버트 바워스(Robert Bowers)가 뛰어들어 “모든 유대인은 죽어야 한다”고 외치며 총기를 난사했다. 11명이 숨지고 6명이 중상을 입었다. 저마다 성실하게 살던 이들이 창졸간에 닥쳐온 참화로 귀중한 목숨을 잃었다. 그들의 삶의 이야기는 미완성으로 끝나고 말았다. 경찰은 이 사건을 혐오범죄로 보고 있다. 트럼프의 취임 이후 미국에서는 이러한 혐오범죄가 늘어나고 있다. 미국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사람들은 희생양을 찾고 있었는데, 트럼프는 ‘타자’라 불릴 수 있는 사람들을 혐오하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었다. 유대인, 무슬림, 라틴계 사람들, 아프리카계 미국인들, 시크교도들, 이민자, 난민, 보호 시설을 전전하는 사람들을 악마화하는 일이 잦아졌다. 마치 무저갱이 열린 것처럼 자기들 속에 잠재되어 있던 폭력성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경제가 삶을 과잉 대표하는 시대의 끔찍한 실상이다. 인간적 존엄을 지켜주는 일, 타자에 대한 배려, 도덕 감정이 뒷전으로 밀릴 때 문명은 종언에 이르기 쉬운 법이다.

2001년 9월 11일 테러사건이 벌어졌을 때 소설가이자 문명비판가인 수전 손택은 뉴요커지에 기고한 글 ‘다같이 슬퍼하자, 그러나 다같이 바보가 되지는 말라’(Let’s by All Means Grieve Together, But Let’s Not Be Stupid Together)라는 글에서 사람들의 자신감을 부추기고, 슬픔을 조종하는 한편, 특정한 나라나 세력을 혐오하도록 부추기는 언론의 호들갑을 경계해야 한다면서 이렇게 말한다. “이번 사건은 ‘문명‘이나 ‘자유’, ‘인류’나 ‘자유 세계’에 가해진 ‘비겁한‘ 공격이 아니라, 미국이 맺은 특정 동맹관계와 미국이 저지른 특정 행위에 따른 당연한 귀결이자 스스로 초강대국이라고 자임하는 이 국가에 가해진 공격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목소리는 도대체 모두 다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1) 이 글의 말미에서 수전은 미국이 강하다는 사실은 누구도 의심하지 않지만 “그러나 꼭 강해지는 것만이 미국이 해야 할 일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미국 배우인 메릴 스트립이 2017년 1월에 있었던 골든글로브 시상식장에서 한 수상소감이 사람들에게 크게 회자되고 있다. 문학비평가 신형철은 “겨우 5분 30초 동안 진행된 그 연설은 구조적으로 완벽했고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2)고 평했다. 메릴은 먼저 지금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일곱 명의 배우들의 이름을 호명하면서 그들의 출신지를 밝힌다. 그런 후에 영화산업의 메카라 할 수 있는 할리우드는 “다양한 아웃사이더와 외국인들로 들끓는 곳“이라면서 이들을 다 내쫓으면 미국 문화는 초라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배우가 하는 유일한 일은 우리와 다른 사람의 삶 속으로 들어가서 그것이 어떤 느낌인지 관객들에게 전달하는 것”이라면서, 작년 최악의 연기로 트럼프가 장애인 기자를 흉내 내던 순간을 꼽았다. 타자에 대한 공감을 유도하는 것이 연기의 본질인데 트럼프의 연기는 정반대의 목적에 기여했다면서 메릴은 울먹였다. 메릴은 “혐오는 혐오를 부르고 폭력은 폭력을 선동합니다. 권력을 가진 자가 타인을 괴롭히기 위해 제 지위를 이용할 때, 우리는 모두 패배할 것“3)이라고 말했다. 그의 연설은 우리로 하여금 ‘권력이란 무엇인가?’를 되묻게 만들었다. 

니체는 “존재의 가장 내적인 본질이 권력에의 의지“4)라고 말했다. 권력은 나의 의지를 타자에게 부과함으로 그가 자기의 의지에 반하여 행동하게 하는 영향력이다. 권력의 폭압을 오랫동안 경험해 온 우리에게 권력은 늘 부정적인 의미로 다가온다. 권력과 폭력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권력이 무조건 나쁜 것만은 아니다. 잘 제어된 권력은 인간 사회가 무질서와 혼돈에 빠지지 않도록 지탱해주는 버팀목 역할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권력이 어떻게 작동되는지, 권력이 어떤 유혹에 빠질 수 있는지를 잘 살피는 것은 시민의 책임이다.

아하수에로의 잔치
페르시아 왕 아하수에로(기원전486-464에 통치)는 일반 역사에서 크세르크세스(Xerxes)로 더 잘 알려졌다. 그는 인도로부터 구스에 이르기까지 백 스물 일곱 지방을 다스리던 왕이었다. 그가 머물던 수산궁은 화려함의 극치를 구현하고 있었다. 그는 왕위에 오른 지 3년 만에 제국을 안정화시켰고, 각 지방의 고관들을 궁궐로 불러모아 잔치를 벌였다. 그 잔치는 무려 180일 동안 지속되었다. 그것은 전적으로 페르시아의 부요와 위엄을 만천하에 과시하기 위한 일종의 퍼포먼스였다. 그 잔치를 마친 후에 왕은 귀천을 막론하고 수산궁에 살고 있던 모든 백성을 불러들여 이레 동안 잔치를 벌였다. 왕의 너그러움과 활수(滑手)함을 보여줌으로 강자와 합일화하고 싶은 사람들의 바람에 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왕궁에서 벌어진 잔치의 화려함과 장려함을 에스더 기자는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백색, 녹색, 청색 휘장을 자색 가는 베 줄로 대리석 기둥 은고리에 매고 금과 은으로 만든 걸상을 화반석, 백석, 운모석, 흑석을 깐 땅에 진설하고 금 잔으로 마시게 하니 잔의 모양이 각기 다르고 왕이 풍부하였으므로 어주가 한이 없으며 마시는 것도 법도가 있어 사람으로 억지로 하지 않게 하니 이는 왕이 모든 궁내 관리에게 명령하여 각 사람이 마음대로 하게 함이더라”(에1:6-8)

한마디로 극진한 대접이다. 금잔에 어주를 따라 마시다니. 그것도 누구의 강제도 없이. 사람들은 자기들이 환대받고 있다고 느꼈을 게 분명하다. 그것이 비록 고도의 통치 전략에서 나온 것이라 해도 사람들은 왕의 손님이 되는 영광을 거부할 생각이 없었을 것이다. 아하수에로의 왕후였던 와스디도 왕궁에서 여인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고 있었다. 왕후는 여성들을 역사의 객체가 아닌 주체로 대한 셈이다. 그런데 사단이 벌어졌다. 술기운에 도취된 왕은 왕후의 미모를 사람들 앞에 드러내고 싶어졌다. 그래서 내관을 보내 왕후의 관을 정제하고 왕 앞으로 나아오라 일렀다. 그러나 왕후는 그런 부름을 단호히 거절했다. 자신을 꽃처럼 소비하려는 가부장적 질서에 대한 거부였다. 왕의 권위는 이 일로 상당한 손실을 입게 되었다. 체면이 구겨진 왕은 주변의 학자들에게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묻는다. 왕의 안색을 살핀 그들은 왕후의 행위가 제국 내에 전파되면 여성들이 남편을 멸시하게 될 것이라면서 왕후를 폐하고, 새로운 법을 제정하여 제국에 선포하라고 제안한다. “남편이 자기의 집을 주관하게 하고 자기 민족의 언어로 말하게 하라 하였더라”(에1:22). 왕은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

술이 깬 후에 왕은 자기의 성급한 조치를 후회한다. 하지만 돌이킬 수도 없었다. 왕의 심기를 눈치챈 이들은 왕의 적적함을 달래주기 위해 아름다운 여인들을 궁궐로 들인다. 바벨론에 의해 그곳으로 끌려와 정착했던 모르드개의 사촌 여동생 하닷사, 곧 에스더도 궁궐에 들어간다. 에스더는 모르드개의 충고대로 자기 신분과 민족을 숨긴다. 궁궐의 법도를 몸에 익힌 후에 마침내 에스더는 왕후로 간택된다. 와스디가 폐위된 후 4년이 지난 후였다. 왕은 새로운 왕후를 맞이한 기쁨을 숨기지 않는다. 에스더를 위해 성대한 잔치를 베풀었을 뿐만 아니라, 지방세를 면제하고 많은 이들에게 상을 내린다. 

오만한 권력의 초상
에스더서는 이후에 아하수에로에 대한 암살 음모가 어떻게 적발되었는지, 그 음모를 사전에 알아차리고 고지함으로 왕을 위험으로부터 구한 모르드개 이야기를 슬쩍 끼워넣는다. 귀한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모르드개는 중용되지 못한다. 오히려 그런 혼란의 시기에 하만이 기회를 잡아 높은 자리에 오른다. 하만 역시 소수민족 출신이다. 성경은 그가 아각 사람 함므다가의 아들이라고 소개한다. 아각 사람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아말렉의 임금이었던 아각의 후손인 셈이다. 사울 왕은 ‘진멸하라’는 명령을 어기고 아말렉 왕 아각을 살려줌으로써 하나님의 신뢰를 잃고 실각했다. 모르드개가 사울 왕의 후손이었다는 사실에 비춰보면, 이후에 전개되는 하만과 모르드개의 갈등은 오랜 과거에 뿌리내리고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하만이 왕의 측근이 된 것은 어쩌면 그가 많은 정치자금을 제공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중에 그가 모르드개와 유다인들을 죽이기 위한 조서를 얻으려고 은 일 만 달란트를 드리겠다고 왕에게 제안했던 것이 그 유추의 근거이다. 왕은 그 제안을 거절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고대의 거래 관행일 뿐 실제라고 볼 수는 없다.

소수민족 출신이라 해도 그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지위에 올랐다. 권력의 눈치를 보는 데 익숙한 사람들은 하만의 자긍심을 높여주기 위해 애쓴다. 권력 주위에 머물던 이들은 하만에게 꿇어 절함으로 충성심을 보인다. 하지만 오직 한 사람은 예외였다. 모르드개만은 하만 앞에 절할 수 없었다. 그가 우상으로 여겨졌기 때문일까?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식민지 출신인 그는 왕 앞에 부복했을 것임이 분명하다. 어쩌면 조상 적부터 원수였던 그에게 절할 수 없다는 결기 때문이었을까? 우리는 그저 이런저런 짐작을 해볼 뿐이다.

모르드개의 처신이 하만에게서 기쁨을 앗아갔다. 단 한 사람의 불복종이 거대한 체제에 균열을 내는 법이다. 이탈리아 작가인 이냐치오 실로네의 소설 <빵과 포도주>는 무솔리니 파시스트 정권 하에서 전쟁에 동원되는 사람들과 저항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애국주의 열풍이 이탈리아를 휩쓸 때 사람들은 그 전체주의의 물결에 속절없이 끌려 들어가고 있었다. 돈 파올로는 그런 광기를 깨뜨리기 위해 마을 곳곳에 ‘전쟁을 중단하라’, ‘자유 만세’, ‘평화 만세’ 등의 구호를 적는다. 돈 파울로를 흠모했던 마을 처녀 비앙키나는 그것이 돈 파울로가 한 일임을 눈치채고 전율한다. 그때 돈 파울로는 이런 말로 그를 격려한다. 

“독재란 만장일치에 기초를 두고 있는 거야. 한 사람만 아니다라고 말하면 전체가 산산조각이 나 버리지.” “그 어마어마하고 완강한 질서를 위태롭게 하는 데는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 아무것도 아닌 단 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족해.”5)

분노에 눈이 멀다
하만의 분노를 달래기 위해 신하들은 모르드개를 설득하려 한다. 모르드개는 그때 자신이 유다인임을 밝히면서 그에게 허리를 굽힐 수 없다고 말한다. 숨겼던 자기 정체를 그렇게 드러낸 것이다. 그 소식을 전하여 들은 하만은 모르드개 뿐만 아니라 온 나라에 있는 유다인을 다 멸할 계획을 세운다. 개인적 감정에 민족적 혐오까지 덧붙인 것이다. 통제되지 않는 권력은 ‘다른 소리’를 견디지 못한다. 도대체 권력이란 무엇인가?

“권력을 잡은 사람들은 우리가 그들의 권력을 경외하기를, 그래서 그들을 향해서는 좀 다르게 행동해 주기를 바란다.“6)
“인간은 게걸스레 자기만의 안녕을 탐하고 무한의 유혹에 끌려 자기 한계를 끊임없이 넘으려 하는 파우스트적 존재다. 인간이라는 피조물은 무한성과 오만한 불륜에 빠져 유한한 모든 것을 냉대한다.”7)

자기 한계를 설정하지 않는 권력은 독백적이다. 이해를 위한 대화 자체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런 권력은 악마적이다. 스스로 무한성을 참칭하려 하기 때문이다. 타락한 권력은 자기에게 위임된 이들을 사물화한다.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인 프리모 레비는 수용소에서의 경험에 근거해 이렇게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권력을 원했다. 특히 사디스트들이 권력을 원했다. 물론 숫자가 많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커다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특권의 지위란 밑에 있는 사람들에게 고통과 굴욕을 가할 기회를 제공했기 때문이다.“8)

하만은 자기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자기보다 더 큰 권력인 왕의 권력을 활용하려 한다. 그는 왕에게 나아가 제국의 법을 따르지 않고 자기들만의 법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면서 그들은 제국의 안위에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소수민족의 자치권을 인정하고 그들의 종교까지 인정했던 페르시아의 통치 전략에 비추어 볼 때 심각한 문제는 아닐 수도 있었다. 하만은 그런 이들을 용납하는 것이 무익하다면서 그들을 진멸할 것을 간청한다. 그리고 앞서 말한대로 은 일 만 달란트를 바치겠다고 말한다. 왕은 완곡하게 그 검은 제안을 뿌리치는 척 하지만 하만이 원하는 대로 해준다. 서기관을 소집하여 각지의 관원들에게 보내는 조서를 각 지방의 언어와 방언으로 쓰게 한 후에 왕의 반지로 인치게 함으로써 왕은 유다인들에 대한 민족말살정책을 승인한다. 조서의 내용은 조야하기 이를 데 없다. “열두째 달 곧 아달월 십삼일 하루 동안에 모든 유다인을 젊은이 늙은이 어린이 여인들을 막론하고 죽이고 도륙하고 진멸하고 또 그 재산을 탈취하라”(에3:13).

이 사실을 알아차린 모르드개는 자기로 인하여 빚어진 이 참극 앞에서 전율을 느낀다. 그는 굵은 베 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대궐 문 앞 성중에 나가 대성통곡했다. 그 소식이 에스더에게도 들려왔고 왕후는 하닥을 보내 자초지종을 묻게 한다.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왕 앞에 나아가 그 조치를 철회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하라고 요구한다. 하지만 그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주저하는 에스더에게 모르드개는 이렇게 말한다.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목숨을 건지리라 생각하지 말라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에4:13-14)

불의한 권력의 동조자들
이것은 신실한 믿음의 말인 동시에 일종의 겁박이다. 에스더는 모르드개에게 사흘 동안 금식하며 기도해 줄 것을 부탁하면서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나아가겠다고 말한다. 에스더도 며칠 금식 끝에 왕후의 복장을 갖추고 왕궁 뜰 어전 맞은편에 섰다. 그의 어여쁜 모습에 마음이 흔연해진 왕은 금규를 내밀어 에스더를 자기 가까이 오게 한다. 왕은 에스더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물으면서 왕후가 원한다면 왕국의 절반이라도 내주겠다고 말한다. 에스더는 즉각 자기 소청을 말하지 않는다. 다만 자기가 준비한 잔치에 하만과 함께 와달라고 청한다. 정성을 다해 준비한 잔치 자리에서 왕의 마음은 고조되었다. 하만 역시 자기의 특권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슴이 터질 것 같았을 것이다. 게다가 에스더는 내일도 와달라고 하지 않는가. 한껏 부푼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가던 그는 베옷을 입고 궁궐 문 앞에 있는 모르드개를 보는 순간 마음이 매우 언짢았다. 그는 친구들과 아내 세레스에게 자기가 누리고 있는 특권을 자랑스레 늘어놓았다. “왕후 에스더가 그 베푼 잔치에 왕과 함께 오기를 허락 받은 자는 나밖에 없었고 내일도 왕과 함께 청함을 받았느니라”(에5:12). 그러나 모르드개 때문에 기분이 상했던 그는 친구들에게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묻는다. 그들은 하만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높이 오십 규빗 되는 나무를 세우고 그를 매달게 해달라고 왕에게 청하라 한다. 어느 누구도 하만의 무리수를 지적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권력에 복종하는 자가 스스로 권력자가 원하는 행동을 하려고 하고, 권력자의 의지를 마치 자신의 의지처럼, 심지어 미리 알아서 따르려고 하는 것, 이것은 더욱 강력한 권력의 지표다. 이때 권력에 복종하는 자는 권력자의 의지 내용을 안 그래도 자기가 하려던 것이라고 내세우고, 권력자에게 공감하는 ‘네Ja’를 통해 그것을 수행한다.”9)

이런 음모가 진행되고 있을 때 아하수에로는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는 역대 일기를 가져오라 하여 그것을 살피다가 자기에 대한 역모 사건을 저지한 것이 모르드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에게 적절한 보상을 하지 않아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사람을 부르는 데 마침 하만이 들어왔다. 왕은 하만에게 왕이 존귀하게 하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하여야 하겠느냐고 묻는다. 하만은 그 대상이 자기라고 확신하며 짐짓 겸허한 척 하며 말한다. “왕께서 사람을 존귀하게 하시려면 왕께서 입으시는 왕복과 왕께서 타시는 말과 머리에 쓰시는 왕관을 가져다가 그 왕복과 말을 왕의 신하 중 가장 존귀한 자의 손에 맡겨서 왕이 존귀하게 하시기를 원하시는 사람에게 옷을 입히고 말을 태워서 성 중 거리로 다니며 그 앞에서 반포하여 이르기를 왕이 존귀하게 하기를 원하시는 사람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하게 하소서”(6:7-9).

하만은 왕복과 말을 가져다가 모르드개를 태우고 성중에 다니며 지시한 대로 외쳤다. 치욕스러웠다. 그럴수록 분노는 더 커졌다. 하만은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지만 에스더의 잔치에 참여하라는 지시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에스더의 잔치자리는 한계 없이 높아지려던 그의 몰락을 봉인하는 자리였다. 왕이 재차 에스더에게 소원을 묻자 그는 자기가 유다인임을 밝히면서 하만이 자기와 동족들을 죽이기 위해 꾸민 음모를 낱낱이 폭로한 후에 청한다. “내 생명을 내게 주시고 내 요구대로 내 민족을 내게 주소서”(7:3b). 대노한 왕이 잠시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 왕궁 후원으로 물러나자 하만은 에스더에게 생명을 구걸한다. 그 모습을 목격한 왕은 하만이 왕후를 욕보인다고 판단한 후에 그를 처형하도록 명한다. 내시 하르보나가 오십 규빗 되는 나무가 하만의 집에 섰다고 말하자 왕은 그 나무에 하만을 매달라 이른다. “함정을 파는 자는 거기에 빠질 것이요 담을 허는 자는 뱀에게 물리리라 돌들을 떠내는 자는 그로 말미암아 상할 것이요 나무들을 쪼개는 자는 그로 말미암아 위험을 당하리라”(전10:8-9)지 않던가.

왕은 하만의 집을 에스더에게 주었고, 하만에게 맡겼던 인장반지는 모르드개가 맡도록 했다. 철저한 역전이 일어난 것이다. 유다인들을 죽이라는 조서는 철회되었고, 유다인 말살 정책에 동조했던 이들에 대한 처벌이 즉각 시행되었다. 유다인들의 죽음이 예고되었던 아달월 십삼일은 오히려 그 적대자들의 죽음의 날이 되었다. 위험과 탄식의 날은 축제의 날로 변했다. 유다인들은 아달월 십사일에 하루를 쉬며 잔치를 베풀어 즐겼고, 서로 예물을 나누며 그 날을 경축했다. 

화석류, 그리고 별
에스더서는 부림절의 유래를 전하는 책이다. 해마다 부림절이 되면 유다인들은 억압과 수탈이 일상이 된 세상에 살면서 늘 생명의 위협을 받던 유다인들이 어떻게 구원을 받게 되었는지를 전하는 이 책을 낭독한다고 한다. 지금의 우리에게는 적대자들에 대한 처절한 보복을 신명나게 전하는 이 책이 영 불편하지만 에스더서는 흑암과 공포의 심연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종말론적 희망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지금은 비록 시련 가운데 있지만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재확인하면서 그들은 곤고한 생을 견뎠을 것이다. 아각의 후손인 하만과 그의 하수인들의 몰락은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이 뒤늦게나마 어떻게 시행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으로 받아들였을지도 모르겠다.

통제되지 않는 권력, 자기보다 높은 심급이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권력은 반드시 무너지게 마련이다. 하만의 주변에 있던 아첨배들은 하만의 몰락을 재촉하는 역할을 했다.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그릇된 권력에 복종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 모두가 ‘예’라고 말할 때 ‘아니오’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들이야말로 역사를 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견인차들이다. 불의 앞에서 침묵하는 이들은 불의와 공모하는 자들일 뿐이다.

“그들의 억압을 내면화한 사람들, 그 짐승에게 압도된 사람들, 그 힘을 수동적인 복종으로 겁내는 사람들, 그리고 그 힘의 위세를 경배하는 사람들은, 그 짐승에게 그 힘을 계속 확장할 필요에 모든 허가를 내준 사람들이다.”10)

종교 혹은 종교인들이 책무는 그릇된 권력에 제동을 걸고, 그 권력이 하나님의 뜻에 맞게 행사되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권력과의 긴장은 참된 종교가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오늘의 기독교는 어떠한가?

“집권자가 험악한 얼굴로 백성들에게 겁을 주면, 목사나 신부는 교활한 미소로 그들을 위로한다. 이리하여 양떼 같은 백성들은 늑대 같은 정치인과 여우같은 종교인 사이에서 찢기고 뜯기어 멸해진다. 지배자는 스스로를 법이라 하고, 성직자는 스스로 신의 사자라고 주장한다. 이 둘 사이에서 백성들의 육체가 고문을 당해 죽어가고, 백성들의 정신이 질식을 당해 숨통이 막힌 채 시들어버린다.”11)

하만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할 것인가? 에스더의 히브리식 이름인 하닷사는 ‘화석류化石榴나무‘라는 뜻으로 고난을 상징한다. 하닷사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그릇된 권력에 맞섰다. 그래서 그의 바뀐 이름 뜻 그대로 민족의 별이 되었다. 에스더는 별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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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 이재원 옮김, 도서출판 이후, 2004년 1월 26일, p.221
2.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한겨레출판, 2018년 9월 22일, p.213
3. 신형철, 앞의 책, p.213-4에서 발췌 인용
4. 프리드리히 니체, 권력에의 의지, 강수남 옮김, 청하 1993년 6월 30일, p.414
5. 이냐치오 실로네, 빵과 포도주, 최승자 옮김, 고래의노래, 2017년 3월 15일, p.354, 355
6. 월터 윙크, 사탄의 체제와 예수의 비폭력, 한성수 옮김, 한국기독교연구소, 2004년 10월 25일, p.170
7. 테리 이글턴, 악, 오수원 옮김, 이매진, 2015년 6월 25일, p.45ff
8. 프리모 레비,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이소영 옮김, 돌베개, 2014년 5월 12일, p.53
9. 한병철, 권력이란 무엇인가, 김남시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2년 7월 4일, p.16
10. 월터 윙크, 앞의 책, p.174ff
11. 칼릴 지브란, 반항하는 정신, 이경하 옮김, 도서출판 당그래, 1991년 7월 1일, p.37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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