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죽어도 죽지 않는다 2019년 04월 15일
작성자 김기석
죽어도 죽지 않는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다”(요11:25-26)하신 주님, 
우리가 주님을 믿습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영생에 속한 사람답게
땅의 인력이 아니라 은총에 이끌려 살게 해주십시오. 아멘.

만물이 역동적으로 피어나는 4월을 우리는 아픔 없이 맞이하지 못한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는 T.S. 엘리어트의 말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4월을 기쁨으로만 영접하지 못한다. 아직도 온전히 해원되지 못한 제주 4.3 항쟁, 5년 전 4월 16일에 일어난 세월호 침몰 사고, 4.19 혁명이 연이어 우리 마음을 사로잡는다. 일찍이 이영도는 산에 들에 눈부신 자태로 피어나는 진달래꽃을 ‘그날 스러져간 젊은 같은 꽃사태’로 표상한 바 있다. 생명이 가장 왕성한 계절에 죽음을 추억해야 하는 운명은 잔인하다. 하지만 아파도 기억할 것은 기억해야 한다. 반성되지 않은 역사는 반복되게 마련이니 말이다.

30대 초반의 젊은 예수는 왜 죽음을 피하려 하지 않았을까? 마음만 먹으면 피할 수도 있었을 죽음을 향해 왜 뚜벅뚜벅 걸어갔는가? 제자들조차 그 행보를 이해할 수 없었다. 베드로는 여러 차례 수난을 예고하는 스승의 앞길을 막았고, 낙심한 유다는 주님께 등을 돌렸다. 죽음으로는 아무 것도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죽음은 빛과 희망의 무덤이 아니던가? 예수는 자기 앞에 열린 죽음이라는 심연을 피하지 않았다.

십자가는 인간들 속에 내재한 모든 죄성이 드러나는 현장이었다. 생살에 못을 박는 군인들, 피를 흘리며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을 조롱하는 사람들, 눈엣가시같은 사람을 제거했다고 생각하며 쾌재를 불렀을 사람들, 자기는 그의 죽음과 무관하다며 손을 씻는 사람들…. 예수는 그들이 노정한 악마성과 죄성까지도 품에 안으셨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는 폭력을 폭력으로 되갚기보다는 그것을 자기 속으로 끌어들여 폭력을 내파(內破)하는 사랑을 드러내셨다. 

김달진은 이것을 간명하게 요약했다. “십자가 위의 예수의 사형!/이때처럼 인간의 잔학성을 보인 일은 아직 인류의 역사에 없었으리라./그러나 이때처럼 인간의 깊은 사랑과 신뢰를 세상에 보인 일은 역사의 어느 곳에도 보이지 않으리라.”(김달진, <<山居日記>>, 세계사, 98쪽) 가장 잔인한 형벌의 도구인 십자가가 인간의 가장 숭고한 모습을 드러내는 장소가 되었다. 죽음의 문인 줄 알았던 십자가가 부활과 영생의 문이 된 것이다. 십자가는 참 생명은 결코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기표이다. 

우리 삶이 누추한 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이다. 모든 살아있는 것은 죽는다. 예외가 없다. 앨버트 슈바이쳐는 ‘모든 생명은 살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자각하면서 생명경외라는 가치관 위에 자기 인생의 집을 지었다. 그런데 인간은 살기를 원하지만 죽을 수밖에 없다는 존재론적 한계를 자각하는 존재이다. 살고 싶다는 원초적 욕망 때문에 우리는 죽음의 위협 앞에서 의연하지 못하다. 죽음을 두려워할수록 죽음의 힘은 강해진다. 그러나 누추한 생존보다 존엄한 죽음을 선택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촛불이 된 사람들이다. 알베르 까뮈는 <반항적 인간>에서 ‘무릎을 꿇고 살기보다는 서서 죽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겠다는 이 오연한 결의는 비장하다. 그런데 이것이 곧 십자가 정신인가? 유사하지만 아니다. 십자가 정신은 인간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사랑과 하나님에 대한 깊은 신뢰에 기초한 것이기 때문이다.

믿음이란 우리 정신의 곧추세움이다. 흔들리면서도 기어코 중심을 찾는 팽이처럼 우리는 하나의 중심을 얻기 위해 애써야 한다. 정신이 바로 서면 여간한 무게가 그 위에 얹혀도 주저앉지 않는다. 주기철 목사는 ‘일사각오’라는 설교에서 “그리스도의 사람은 살아도 그리스도인답게 살고 죽어도 그리스도인답게 죽어야 한다”면서 죽음이 두려워 예수를 버리지 말자고 말한다. 

“풀의 꽃같이 시들어 떨어질 목숨을 아끼다가 지옥에 떨어질까 두렵습니다. 더럽게 무릎을 꿇고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고 또 죽어 주님을 향한 각오와 다짐과 정절을 지켜 나갑시다. 다만 나에게는 일사각오의 결의가 있을 뿐입니다. 소나무는 죽기 전에 찍어야 시퍼렇고 백합화도 시들기 전에 떨어져야 향기롭습니다. 이 몸도 시들기 전에 주님 제단에 드려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세례 요한도 스데반도 청장년의 때에 뜨거운 피를 흘려 주님을 향한 그의 다짐을 지켜 나갔습니다.”

주님의 생명 안에 있는 사람은 죽어도 죽지 않는다. 살아서 믿는 이들은 영원히 죽음에 이르지 않는다. 육체적 생명이 지속된다는 말이 아니다. 강이 바다에 이르러 개체로서의 이름을 버리지만 더 큰 생명의 일부가 되듯이, 믿는 이들의 생명도 영원한 생명에 안김으로 영원에 이르는 것이다.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그 종말론적 희망을 현재화하며 사는 것이다. 생명은 생기이다. 봄볕을 받은 대지가 잠에서 깨어나듯 하나님의 사람들은 다른 이들보다 먼저 깨어나 봄이 멀지 않았음을 알리는 전령이 되어야 한다. 욕망의 전장으로 변해버린 탓에 결국 묵정밭이 된 이 땅에 생기를 불어넣어 생명이 자라는 땅으로 만들어야 한다. 새 생명의 꿈틀거림 속에서 역사의 새벽은 밝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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