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직박구리의 아침 인사 2020년 03월 19일
작성자 김기석


직박구리의 아침 인사

영상으로 예배드리기 시작한지 근 한 달이 되어간다. 사순절 기간을 이렇게 보내야 할지도 모르겠다. 교우들에게 나눠 주려고 공들여 제작했던 사순절 달력은 탁자 위에 놓인 채 주인과 만나지 못했다. 주일이면 늘 붐비던 교회 마당을 잠시 거닐다가 살피꽃밭을 유심히 살폈다. 비비추, 수선화, 수국, 매발톱꽃과 산옥매나무에도 여린 새싹이 돋아나고 있었다. 영상예배로 대치한다는 공지문을 게시할 무렵 팝콘같은 꽃망울을 맺고 있던 매화가 이제 만개했다.

시간은 그렇게 무심히 흘러가고 있었지만 인정은 그게 아니어서 쓸쓸함을 금할 수 없었다. 어느 순간 새소리에 놀라 눈을 드니 매화나무에 직박구리 한 마리가 앉아 꽃술을 더듬고 있었다. 헤덤비며 이 꽃 저 꽃에 입을 맞추는 녀석의 몸놀림이 여간 경쾌한 게 아니었다. 나의 시선이 순간의 희열을 앗아갔음인지 직박구리는 곧 제 갈 곳으로 가고 말았다. 그러나 그 새는 날아가며 내 마음에 햇살 한 줌을 남겼다.

로버트 브라우닝의 ‘피파의 노래’가 떠올랐다. “때는 봄/날은 아침/아침 일곱 시/산허리는 이슬 맺히고/종달새는 날고/달팽이는 아가위나무에서 기고/하느님 하늘에 계시옵나니/세상은 무사하여라”. 코로나19로 인간 세상은 온통 혼돈에 빠져 있지만, 자연은 그저 제때에 따라 변화한다.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은 브라우닝의 시구에 감동하는 것은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일상이 은총의 순간임을 알기 때문이다. 일상을 박탈당해 보기 전까지는 알 수 없었던 세계가 느닷없이 출현하여 우리 마음을 뒤흔들 때가 있다. 교우들과 만나 미소를 건네고, 손을 잡고, 함께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바치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놀라운 일인지 새삼 깨닫는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과의 언약을 헌신짝처럼 저버린 유다의 파멸을 예고한다. 인간의 죄로 인해 땅은 황폐하게 변하고, 거리에는 인적이 끊어지고, 짐승조차 살 수 없는 불모의 땅이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아주 버리지는 않으신다. 회복의 약속이 주어진다. 예레미야는 유다의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즐거워하는 소리, 기뻐하는 소리, 신랑의 소리, 신부의 소리와 및 만군의 여호와께 감사하라,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하는 소리와 여호와의 성전에 감사제를 드리는 자들의 소리“(렘33:11)가 다시 들릴 것이라 말한다. 가끔은 시끄럽다고 여겼던 일상의 소음이 은총임을 우리는 왜 잊고 사는 것일까?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는 악다구니 때문일 것이다. 생각이 다르고 지향이 다르다 하여 비난하고 비방하고 기어코 흠집을 내고야 말겠다는 폭력적 열정에 사로잡힌 이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악의와 협잡과 조롱과 혐오가 만연한 세상에서 산다는 것은 참 피곤한 일이다. 일찍이 이청준 선생은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말을 하여, 말들을 혹사시킴으로 기진맥진하게 만들었다고 탄식했다. 말들은 결국 자기 고향을 잃어버렸고 깃들 곳을 찾아 정처없이 떠돌다가 이제는 자신들이 당해온 학대와 사역에 대한 무서운 복수를 시작한다는 것이다. 지금이 바로 그런 때가 아닌가 싶다. 바벨탑 이후에 벌어진 언어의 혼잡이 요즘처럼 실감나는 때가 없다.

지금은 부질없는 말을 잠시 멈추어야 할 때이다. 혹사당하던 말들이 다시 제집을 찾을 수 있도록 기다려줘야 한다. 코로나19 시대에 말을 넘어선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보여주는 이들이 있다. 아픔의 자리, 고통의 자리, 우리 시대의 갈릴리로 달려가 어려움에 처한 이들의 곁이 되려는 이들을 본다. 자신의 안일한 행복을 잠시 내려놓고 누군가의 눈물을 닦아주고 있는 이들을 본다. 거룩함이란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그들이야말로 혼잡해진 인간의 언어를 정화하고 있는 이들이다. 마음을 짓누르던 무거움을 일시에 소멸시켜버린 직박구리의 몸짓처럼, 세상의 무거움을 가벼움으로 전환시키는 사람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람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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