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목회서신] 세 겹 줄처럼 든든하게 2020년 11월 13일
작성자 김기석

세 겹 줄처럼 든든하게

“혼자 싸우면 지지만, 둘이 힘을 합하면 적에게 맞설 수 있다.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전4:12)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
가을의 막바지인 지금 형형색색의 단풍이 참 아름답습니다. 아침에 집을 나서다가 다양한 색이 어울려 꽃보다 화려한 자태를 자랑하는 나무들을 바라보며 저절로 ‘야, 좋다’라는 감탄이 터져나왔습니다. 어쩌다 보니 올해는 가을 산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붉나무를 보지 못한 것이 참 아쉽습니다. 도봉산 오르는 길에 만나곤 했던 나무들도 떠오릅니다. 계절을 낭비한 것 같아 속이 상합니다.

돌아가신 박 목사님께서 웃으며 하신 말씀이 가끔 떠오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면 하나님이 이렇게 물으실 거랍니다. “그대는 어디에서 왔소?“ “예, 저는 한국에서 살다 왔습니다.“ “어떤 일을 했소?“ “목회자로 살았습니다.“ “그러면 설악산 단풍을 보았소?“ “아니오, 너무 바빠서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화를 내시면서 “그걸 보라고 그대를 거기로 보낸 건데, 보지 않았다니 실망이오”라고 책망하실 거라는 것이었습니다. 농담처럼 하신 말씀이지만 그 말 속에는 생태신학의 멋이 깃들어 있습니다. 아름다운 것을 보고 찬탄하고 기뻐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에 대한 찬미가 아니겠습니까?

1930년에 제정된 감리교회 교리적선언 제1조는 “우리는 만물의 창조자시요 섭리자시며 온 인류의 아버지지요 모든 선과 미와 애와 진의 근원이 되시는 오직 하나이신 하나님을 믿으며”라는 고백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칭하는 서술어 하나가 눈에 띕니다. 하나님을 ‘미’ 즉 아름다움의 근원이라 고백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저는 이 말을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길이 될 수 있다고 받아들입니다. 아름다움을 빚는 이들은 그러니까 구도자라 할 수 있습니다.

요즘 저의 재미 가운데 하나는 딱딱한 감이 홍시로 변하기를 기다리는 일입니다. 딱딱하던 조직이 풀어지면서 떫은 기가 가시고 단맛으로 변하는 그 과정을 화학적으로 설명할 능력은 없지만, 그 결과를 누릴 때마다 왠지 모를 행복감이 몰려옵니다. 어린 시절 채 익지 못하고 땅에 떨어진 퍼런 감을 소금물에 담가두거나 쌀독에 묻어두었다가 먹던 생각도 납니다. 그 기다림의 시간이 참 달달했습니다. 소소하지만 이런 행복한 기억을 되살리며 일상 속에서 행복을 찾는 지혜를 발휘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지난 주 설교를 기억하시는지요? 어떤 분들은 말씀을 반추하며 지내기도 하시지만 대개는 분주한 일상 속에서 무심하게 지내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설교 거의 마지막 부분에서 저는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는 전도서의 말씀을 인용했습니다. 서둘러 마무리 하느라 그 말 속에 담긴 뜻을 푸는 데 소홀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주중에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의 책 <신도의 공동생활>이라는 책을 꺼내 읽었습니다. 그 가운데서 만난 한 대목입니다. 

“그리스도인 공동체에서 중요한 것은 모든 개인이 하나의 사슬을 잇는데 반드시 필요한 지체들이라는 사실이다. 가장 작은 지체라도 꼭 맞물려지면 사슬이 끊어지지 않는 법이다.“(디트리히 본회퍼, <신도의 공동생활/성서의 기도서>, 정지련·손규태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p.98)

공동체를 구성하는 이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들을 이어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이들의 상호 신뢰입니다. 내가 소중한 사람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을 때 우리 몸과 마음의 긴장이 풀어지고 창조적인 삶이 시작됩니다. 어떤 사람이 우리가 하는 말과 행동을 자기 기준에 따라 판단하고 비판하고 교정하려 할 때 우리도 방어태세를 갖추게 마련입니다. 율법주의의 문제가 바로 그런 데 있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생명을 낳지 못합니다. 온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상대의 아픔과 슬픔과 연약함을 헤아리려는 섬세한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는 삶 속에서 하나님의 자비의 은총을 경험한 사람들은 다른 이들을 섬기려 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섬김은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하는 것이지만 배워야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본회퍼는 “섬기는 것을 배우려는 사람은 먼저 자신을 낮게 평가하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앞의 책, 99쪽)고 말합니다. 이웃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뜻이 꺾이는 경험을 한 사람이라야 진실로 섬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섬김은 빚지고 있음을 자각할 때 시작됩니다. 그가 말하는 섬김 몇 가지를 꼽아보겠습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주는 것이 섬김의 첫 단계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그분의 말씀을 듣는 데서부터 시작되듯이, 형제에 대한 사랑도 형제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는 것을 배우는 데서부터 시작된다“(같은 책, 101쪽)는 것입니다. 적극적 경청은 치유의 시작인 동시에 평화의 시작입니다.

섬김의 둘째 단계는 “기꺼이 다른 사람을 돕는 것“(같은 책, 103쪽)입니다. 그것이 설사 사소한 일이라 해도 무시하면 안 됩니다. 마음은 있지만 몸이 굼뜰 때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의도적인 훈련이 필요합니다. 섬겨야 할 때 손을 아끼지 않을 수 있어야 합니다. 누군가를 돕는 일은 번거로울 수 있지만, 그 일에 동참할 때 우리 속의 무기력과 무의미도 스러집니다. 성도들 간에 도움을 주고받는 일은 그래서 소중합니다.

섬김의 셋째 단계는 다른 사람의 짐을 짊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서로 남의 짐을 져 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실 것입니다“(갈6:2). 남의 짐을 진다는 것은 그를 형제자매로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짐을 나눠질 때 비로소 사랑의 친교가 시작됩니다. 그러나 할 수 있으면 다른 이들에게 짐이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사랑의 친교를 빙자하여 무작정 자기 짐을 남에게 전가하려는 이들은 친교의 걸림돌이 될 때가 많습니다. 이런 섬김이 우리 가운데 자리잡을 때 교회는 든든하게 서고, 연대의 끈은 더욱 굳건해질 것입니다. 

여전히 코로나19가 잡히지 않고 있습니다. 모처럼 열린 교회 문이 다시 닫히는 일이 없기를 소망하고 기도할 뿐입니다. 몸에 조금이라도 이상이 느껴지시는 분들은 가정에서 영상예배로 동참하시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언제 어디서나 그리스도인“이어야 하는 까닭은 우리가 선 자리가 바로 하나님이 계신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수요일부터 ‘웨슬리 설교 읽기’를 대면으로 재개했습니다. 눈 앞에 이야기를 경청해주시는 분들이 계시고, 칠판이 있으니 한결 마음이 수월했습니다. 작으나마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서 속히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기온이 고르지 않습니다. 환절기에 컨디션 유지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저도 생각날 때마다 따뜻한 물을 마시고, 가급적이면 무리하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모든 교우들이 계절에 맞는 은총을 한껏 누리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변함없는 주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2020년 11월 12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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