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마음 둘 곳이 없다 2021년 03월 17일
작성자 김기석
마음 둘 곳이 없다

봄철의 불청객인 미세 먼지로 뒤덮인 도시를 보고 있자니 우울감이 밀려온다. 저 멀리 우련히 모습을 드러내는 산들도 왠지 슬퍼 보인다. 봄이 되어 꽃들은 무심코 피어나 대지를 밝히지만, 인간 홀로 유정하여 우울과 쾌활함 사이를 오간다. 눈을 감고 귀를 닫고 산다면 모르겠지만 세상 도처에서 벌어지는 일에 도무지 무심할 수 없는 게 우리 삶이다. 수많은 사건 사고는 알게 모르게 우리 정신의 풍경을 결정한다. 미얀마에서 벌어지고 있는 살육 사건들, 신도시 예정지에 대한 정보를 미리 입수한 후에 하이에나처럼 달려가 이득을 챙긴 사람들 이야기, 선거를 앞두고 정치인들이 쏟아내는 막말과 상대 깎아내리기. 이런 것들은 또 다른 미세 먼지가 되어 우리 정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런 현실에 자주 노출되다보니 마음은 점점 굳어지고, 타인을 맞아들일 여백도 줄어든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외로움이 안개처럼 피어올라 확고하게 우리를 사로잡는다. 다른 이들과 우리를 이어주던 결속감이 느슨해지면서, 어디에도 마음 둘 곳이 없다는 적막함이 깃든다. 적막함을 떨쳐보려 이것저것 손을 대보지만 영혼의 움푹 팬 자리는 좀처럼 메워지지 않는다. 그럴수록 숙성되지 않은 욕망은 더욱 집요하게 우리 옷자락을 잡아 끈다. 악순환이다. 그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있을까?

마음 둘 곳이 있어야 한다. 그곳에 가면 효율성이나 생산성과 결부되지 않은 시간을 오롯이 누릴 수 있는 곳 말이다. 미국 시인 메리 올리버는 자연 속에 머물 때 자신의 삶이 더욱 풍성해졌다고 말한다. 그곳에서는 잠깐 동안 빛나다가 스러지는 달빛의 슬픔도 헤아리게 되고, 곱게 갈려 더 활기찬 뭔가의 일부가 되고 싶은 돌의 조급한 갈망도 헤아리게 되고, 맑은 근원을 무거운 마음으로 기억하는 강의 심정까지 상상하게 된다(‘이끼, 산들, 강들’ 중에서). 시인도 그게 이상한 질문이요 상상이라는 사실을 잘 안다. 그러나 그런 쓸데없는 상상이 우리 정신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은 사실이다.

소비사회가 우리에게서 빼앗아간 것은 경탄의 능력이다. 어린 아이들에게 세상은 신비의 장소이다. 무엇 하나 당연한 것은 없다. 그러나 주변의 것들에 익숙해지면서 우리는 사물이나 자연 속에 깃든 신비를 보는 눈을 잃어버렸다. 뭘 보아도 심드렁하다. 땅의 인력에 이끌리는 동안 하늘을 잃어버린 것이다. 예수는 먹을 것, 입을 것에 대한 걱정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문제를 풀어주기는커녕 들에 핀 꽃들과 하늘을 자유롭게 나는 새를 보라 하셨다. 그것들 속에 깃든 하나님의 솜씨와 마음을 읽을 때 우리 마음을 온통 사로잡는 걱정과 근심의 무게는 줄어든다. 삶의 여건은 달라지지 않아도 삶을 대하는 자세는 달라질 수 있다. 그 눈이 열리는 순간 더 이상 세상을 경제적 논리에 따라서 볼 수 없다.

19세기 영국 시인 제라드 홉킨스는 ‘빈지의 미루나무들’이라는 시를 통해 인간의 욕망 때문에 파괴되는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옥스포드 북서쪽 템즈 강변에 있는 조그마한 마을 빈지는 열지어 선 미루나무들로 인해 풍광이 그윽했다. 어느 날 그 미루나무들이 남김없이 베어졌다. 명분은 개발이었다. 시인에게 그 나무들은 ‘공중의 새장’이었고, 나뭇잎들은 뛰어오르는 해를 누그러뜨리는 손길이었다. 무수한 도끼질과 함께 아름답고 특별했던 그 장소는 사라지고 말았다. 장소는 기억의 저장소인 동시에 우리의 애틋함이 녹아든 곳이다. 언제라도 우리가 찾아가 잠시 머물고, 숨을 고를 수 있는 곳이라는 말이다. 그런 장소가 하나 둘 사라질 때 정신은 황폐해지기 쉽다.

사람도 누군가에게 아름다운 장소가 될 수 있을까? 세상에는 고향과 같은 사람이 있다. 어떤 경우에도 나를 내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사람과 만나면, 새로운 삶의 용기가 가만히 스며들지 않던가.

(2021/03/17 자 국민일보 컬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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