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청년편지2 2016년 02월 16일
작성자 김기석

 푸른 언덕에서 보내는 편지(2)


세월 참 빠르지요? 우리 의지와는 상관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두고 사람들은 무심하다느니 빠르다느니 하면서 원망을 하곤 합니다. 농사가 산업의 본이 되던 옛 시절에는 24절기에 따라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이 어느 정도 정해져 있었습니다. 어른들은 굳이 달력을 보지 않아도 그 때를 가늠할 수 있었고, 그 때에 맞게 처신할 줄도 알았습니다. 철이 든다는 것은 바로 그런 이야기일 겁니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그런 우주의 리듬에 몸과 마음을 맞출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시간은 납작해졌고, 심심하게 변했습니다. 시간이 변했다기보다는 시간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변했다고 해야겠지요. 


그리스 사람들은 시간을 둘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하나는 계측 가능한 시간입니다. 하루는 24시간이고, 일년은 365일입니다. 내가 원한다고 하여 그 시간을 늘릴 수도 없고 줄일 수도 없습니다. 어떤 이는 이것을 수평적 시간이라고 말하더군요. 다른 하나는 느낌의 시간 혹은 질적인 시간입니다. 수직적인 시간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그것은 인간의 경험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시간입니다. 일각여삼추一刻如三秋라는 말은 이제나 저제나 좋은 소식이 오기를 기다리는 이들의 심정을 과장되이 일컫고 있습니다. 질적인 시간은 역사 속에서도 경험됩니다. 1517년에 일어난 종교개혁이나 1789년의 프랑스 혁명, 3.1운동이나 4.19혁명, 5.18광주민주화운동 등은 누가 의도하거나 기획해서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물론 도화선 역할을 한 사람들은 있지만, 그들이 그 사건을 일으켰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차라리 때가 무르익었다고 말해야 할 겁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도 '때'에 대한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하신 첫번째 말씀은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는 것이었습니다. 시간은 무심히 흘러가지만 하나님의 구원사는 정한 때를 향해 진행되는 법입니다. 혼인잔치가 벌어지던 가나의 어느 집에서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알아차린 어머니 마리아가 그 사실을 아들에게 알리자 예수는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요2:4) 하고 응답합니다. 예수를 붙잡으려는 음모가 착착 진행되고 있음을 전한 후에 요한은 슬쩍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라"(요8:20). 예루살렘 행을 결정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담담하게 이르십니다.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요12:23). 물론 '영광을 얻을 때'는 죽음의 때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를 보냄을 받은 자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보냄을 받은 자의 영광은 보내신 분의 뜻을 다 행한 후 보내신 분에게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역사의 이면에서 진행되고 있는 또 다른 흐름을 분별하는 것은 예수님만이 아닙니다. 거라사에 머물고 있던 귀신들도 예수님을 향해 불퉁거립니다.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마8:29).


때를 분별할 줄 아는 게 지혜입니다. 아무리 많은 책을 읽었다 해도 자기가 어느 때를 지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면 그는 무지한 사람입니다. 예언자들은 마음의 눈이 열려 하나님의 때를 예민하게 지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다른 이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듣지 못하는 것을 듣습니다. 그들은 시끄러운 나팔소리가 되어 사람들을 깨우려 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사람들은 재앙의 날이 닥치기 전까지는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에만 마음을 쓰고 살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들은 인간적으로 보면 가엾은 사람들입니다. 가까운 이들로부터는 따돌림을 받고, 다른 이들에게는 모욕과 박해를 받습니다.


카산드라 이야기를 아시는지요? 카산드라는 트로이 왕 프리아모스의 딸입니다. 아폴론은 미모가 출중했던 그녀를 유혹했습니다. 자신에게 예언의 능력을 주면 몸을 허락하겠다고 말하자 아폴론은 카산드라에게 예언의 능력을 부여합니다. 예지력을 갖춘 카산드라는 아폴론과 지내는 것이 자신을 불행하게 만들 것임을 알아차리고는 아폴론을 피해 달아납니다. 화가 난 아폴론은 그녀에게 벌을 내립니다. 그녀의 예언을 아무도 믿지 않게 만든 겁니다. 기가 막힌 역설입니다. 그리스 연합군이 트로이 성 앞에 목마를 놓아두고 떠났을 때 카산드라는 절대로 그 목마를 성에 들여서는 안 된다고 말하지만 사람들은 그녀의 말을 무시합니다. 결국 트로이는 그 목마에서 뛰쳐나온 군인들에 의해 무너지고 말지요.


테베 출신의 예언자 테이레시아스 이야기도 떠오릅니다.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드릴 수는 없습니다만 이 불행한 사나이는 제우스와 헤라 여신이 논쟁을 벌일 때 제우스에게 유리한 진술을 했다가 헤라의 미움을 받습니다. 화가 난 헤라는 그의 눈을 멀게 만듭니다. 신들이 한 일을 다른 신이 되돌리기는 어려운지라 제우스는 보상 차원에서 그에게 예언의 능력을 줍니다. 예언의 능력은 늘 어떤 상실과 연관됨을 알 수 있습니다. 의미가 조금 다르긴 하지만 이스라엘의 예언자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남들보다 앞서 시대를 통찰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지만 외로운 일이기도 합니다.


이야기를 우회하기는 했습니다만 제가 묻고 싶은 것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어떤 시대인가 입니다. 누구도 쉽게 대답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가 다이내믹한 시대에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시대에 태어났다는 것이 행운일까요, 불행일까요? 그건 각자 삶으로 답해야 할 문제입니다. 앞에서 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지금은 그야말로 분절된 시간을 살아낼 수밖에 없는 시대입니다. 이드거니 앉아서 뭔가를 생각하고 실천하는 여유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지속이 허락되지 않는 시대이기에 우리는 늘 새로운 것을 따라 가느라 숨을 헐떡입니다. 삶에서 시간의 향기는 사라지고 인공낙원의 휘황한 불빛이 우리에게 잠을 허락하질 않습니다.


며칠 전 일단의 청년 사역자들이 제 사무실을 찾아왔습니다. 저는 조금 장난기가 들어 다짜고짜 요즘 젊은이들의 최대 관심사가 뭐냐고 물었습니다. 어쩌면 나는 정치권의 이합집산, 난민 문제, 테러, 시리아 분쟁 등을 떠올리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정말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한 여성 사역자가 심드렁하게 한 마디를 툭 던졌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요." 전혀 예상 못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당혹스러웠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가 젊은이들의 최대 관심사일 수밖에 없는 시대는 정말 악한 시대입니다. 공적인 문제 혹은 구조의 문제에 대한 관심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할 때 누가 제일 좋아할까요? 지금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이들일 것입니다. 공적인 문제에 대한 무관심은 우리를 탈도덕적인 존재로 만듭니다. 타자에 대한 연민이 사라진 자리에 남는 것은 파편화된 욕망과 타자에 대한 적대감, 더 나아가 삶에 대한 멀미입니다.


얼마 전에 공무원 임용 시험에 거듭 낙방한 30대 청년이 시험에 합격했다고 가족들을 속이고는 일년 동안 거짓 출근을 하다가 지친 나머지 목숨을 끊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쓸모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세상에서 탈출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의 죽음을 옹호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그가 감내해야 했던 고통의 무게를 생각하면 말문이 막힐 뿐입니다. 지금 잘 나가는 사람들은 그런 이들을 가리켜서 게으르다느니, 치열하게 노력을 하지 않는다느니 하면서 비난합니다. 그들의 실패를 무능 탓으로 돌리는 순간 승자의 자리에 선 이들은 경멸의 미소를 짓습니다.


믿는 이들이 해야 할 일은 초월의 관점에서 현실을 보는 일입니다. 현실이 우리를 이끌어가는 대로 휘청거리며 따라가기보다는 잠시라도 멈추어 서서 이렇게 사는 게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인지를 물어야 합니다. 지금의 세계 상황은 변형된 애굽입니다. 우리 시대의 파라오는 힘들다고 투덜거리는 사람들에게 몸이 편해서 딴 소리를 한다고 말합니다. 좋은 작가는 사람들의 눈을 가리고 있는 휘장을 찢어 현실을 바로 보도록 해주는 사람입니다. 믿음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는 모든 사람들이 로마의 지배를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있던 시대에 그 체제의 악마성을 사람들에게 일깨우셨습니다. 힘으로 다른 이를 억압하고, 가차없이 빼앗고, 그것으로 소수의 사람들만이 풍요로움을 누리는 세상은 부정되어야 할 디스토피아였습니다. 예수님은 로마 제국에 하나님 나라를 맞세우셨습니다. 돈이 주인 노릇하는 세상은 우리에게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상상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행복을 구성하는 길은 수없이 많고, 행복의 가능성은 우리 주변에 널려 있건만 우리는 상품 생산자들이 만들어놓은 욕망의 매트릭스에서 벗어날 줄을 모릅니다. 시장은 종교가 되어 우리에게 숭배를 요구합니다. 많은 이들이 즐겨 시장의 신민으로 살아갑니다. 그만큼 길들여진 것입니다. 자유혼을 가진 사람을 만나기 어렵습니다.


소설가 이승우 씨에게서 나는 ‘서자의 당당함’이라는 말을 배웠습니다. 서자들은 피해의식 속에서 살기 쉽습니다. 눈치꾸러기가 되기 쉽습니다. 하지만 서자들이 살아남는 방법은 아버지나 적자嫡子의 호의에 기대지 않는 정신을 갖는 것입니다. 물질주의의 챔피언들이 만들어 놓은 게임의 법칙을 따르다가는 모두가 숨이 넘어가기 쉽습니다. 그들이 정해놓은 길을 따라 걷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길을 따로 만들려는 의지, 바로 거기에 서자의 당당함이 있습니다. 우리 생체 리듬에도 맞지 않는 삶을 요구하는 세상을 향해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독립의 길이요, 자유의 길입니다. 그것은 출애굽 공동체가 걸어간 길이요, 예언자가 걸어간 길이요, 예수가 걸어간 길이요, 예수의 꿈에 지핀 성도들이 걸어가는 길입니다. 행복을 누리는 방법을 바꾸십시오. 자기에게 의미있는 인생의 길을 개척하십시오.


대체 어떻게 살라는 말이냐고 되묻고 싶으시지요? 나는 예수님에게 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머무시는 곳 어디에서나 삶을 작은 축제로 바꾸셨습니다. 예수가 계신 곳에서는 식탁 공동체가 이루어졌습니다. 밥을 같이 나누어 먹는다는 것은 흉허물없이 서로를 용납한다는 말일 겁니다. 마음으로 용납할 수 없는 사람과는 한솥밥을 먹기 어렵습니다. 예수라는 존재 안에서 사람들은 상대에 대한 의구심과 낯섦을 극복하고 하나됨의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예수가 전한 하나님 나라는 백향목들처럼 우뚝 솟은 나무들의 천국이 아닙니다. 들판 어디에나 지천으로 피어있어 사람들이 눈길조차 주지 않는 겨자풀의 천국입니다. 소박하게나마 함께 삶을 경축하고, 어려운 일은 함께 거들어주고, 누군가 아파할 때는 말 없이 손을 잡아주는 곳, 바로 거기서 하나님 나라는 싹이 틉니다. 16세기에 만들어진 성탄 성가는 어둡고 추운 세상을 밝히는 빛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의 탄생을 이렇게 표현했다고 합니다. "차디찬 한겨울 깊은 밤에…새순이 돋아났네"(<발터 카스퍼 추기경의 자비>, 최용호 옮김, 가톨릭출판사, 2015년 12월 9일, p.123). 추운 겨울에 돋아나는 새순을 철 없다 꾸짖지 마십시오. 이것은 믿음에 대한 심오한 상징입니다. 우리가 정녕 믿음의 사람이라면 이 냉혹한 세상 한 복판에 봄 소식이 되어야 합니다. 리투아니아 출신의 사회학자 레오니다스 돈스키스는 지그문트 바우만과 함께 쓴 책에서 놀라운 통찰을 보여줍니다.


"인류의 진정한 지옥은 사회적 비전이나 꿈의 실패, 폭력과 잔인함의 폭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우리 공동체의 망가진 능력에, 우리의 옹색해진 인간적 유대에, 죽음을 부르는 고독함에, 배반, 증오, 더 심하게는 얼음 같은 무관심으로 변해버린 사랑의 죽음에 존재한다."(지그문트 바우만, 레오니다스 돈스키스, <도덕적 불감증>, 최호영 옮김, 책읽는수요일, 2015년 11월 27일, p.336)


공동체를 이루는 능력이 줄어들고, 인간적 유대가 옹색해지고, 차가운 무관심이 증대되는 세상은 점점 지옥으로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불러 이런 세상에 온기를 불어넣으려 하십니다. 그 길은 좁은 길이기에 그 길로 나아가는 이들이 적습니다. 하지만 그 길이야말로 생명의 길입니다. 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에 해야 하는 일도 있는 법입니다. 우리보다 앞서 그 길을 걸으신 분이 우리를 그 길로 부르십니다. 부디 그분을 외롭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럴 생각이 없었는데 이야기가 또 다시 설교투로 흘렀군요. 나이 든 목사의 어쩔 수 없는 한계입니다. 아직 찬 바람이 가시지 않았지만 이제 조금 있으면 산수유부터 시작해서 꽃들이 다투어 피어나겠지요. 우리 마음도 그렇게 피어나면 좋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목록편집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