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도취에서 벗어난 후의 일상 2016년 04월 13일
작성자 김기석

 도취에서 벗어난 후의 일상


미세 먼지가 여러 날 지속되면서 태양조차도 빛을 잃은 듯 뿌옇게 보였다. 거리를 걷노라면 마치 묵시문학적 풍경 속으로 진입하는 것 같아 암담했다. 알 수 없는 우울함이 점령군처럼 우리 마음을 파고 들었고, 사람들의 표정은 눈에 띄게 어두웠다. 청명 절기에 맑음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이리도 힘겨울 줄 몰랐다. 요 며칠 마치 거짓말처럼 미세 먼지가 걷히고 대기가 환해졌다. 꽃들은 더욱 화사하게 보이고 기분 탓인진 모르겠지만 거리를 걷는 이들의 표정도 한결 밝아졌다. 문득 가슴 가득 이상한 안도감이 밀려왔다. 맑음에 대한 갈망은 모든 사람 속에 내재한 것임을 새삼스럽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선을 사람살이의 현장으로 돌리는 순간 가슴이 다시 답답해진다.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얼굴에 드리운 그늘이 참 깊고도 깊다. 어떤 얼굴에는 시름이 어떤 얼굴에는 독살이 배어 있다. 맑고 따뜻한 얼굴을 만나기 참 어렵다. 몰강스러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동안 그리 변한 것이리라. 어쩌겠는가? 자기 확장의 욕망에 사로잡히는 순간 맑음에 대한 지향은 가뭇없이 스러지게 마련이다. 그 순간 함께 살아야 할 이웃은 잠재적 경쟁자로 변하고, 우정과 인정의 자리에 미움과 적대감이 자리잡는다.


지난 몇 달 동안 우리는 총선을 앞두고 정치인들이 벌이는 이전투구를 지켜보아왔다. 공천을 둘러싼 잡음이 끊이지 않았고, 비례대표의 순번을 놓고도 다툼이 치열했다. 공식적인 선거 운동이 시작되면서 상대의 흠결을 도드라지게 만들기 위한 부정의 서사가 난무했다. 지지하는 정당이나 후보에 따라 국민들의 마음도 찢겼다. 냉소와 비방, 조롱과 저주의 담론이 괴덕스럽게 유포되었다. 상대방을 우리 사회의 금기를 위반한 인물로 규정하고 그에게 특정한 색깔을 덧씌우려는 시도도 끊이지 않았다. 수치심을 자극하고 혐오감을 유포하는 일도 서슴치 않았다. 마치 상대방을 부정하기 위한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사람들 같았다. 


이제 오늘 저녁이면 이 집요하고도 열광적인 싸움의 결과가 드러난다. 어떤 이는 기쁨의 탄성을 지를 것이고, 또 어떤 이는 패배의 쓰라림에 몸부림 칠 것이다. 문제는 선거라는 도취에서 깨어난 후의 일상이다. 열정이 숙지근해지고나면 그 치열한 싸움터를 통과하느라 입은 내상과 외상이 아프게 자각될 것이다. 그 아픔을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참 중요하다. 이기든 지든 삶은 계속될 터이니 말이다.


분주함 속에서 부유하던 영혼은 침묵의 강에 깊이 잠길 때만 고요해지고, 이리 채이고 저리 채여 거칠어진 영혼은 분노와 원망의 사슬에서 풀려날 때 회복되기 시작한다. 어떻게 해야 할까? 아웅산 수치는 "희망이 없다는 생각이 들 때는 누군가를 도우라"고 했다. 절망의 심연에 잠겨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조언이다. 참 사람됨은 누군가의 요구에 책임적으로 응답함을 통해 현전한다.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권태로운 기다림에 지쳐가던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을 깨운 것은 '살려달라'는 포조의 외침이었다. 둘은 망설인다. 살려달라는 외침은 불특정한 인류를 향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블라디미르는 마침내 그의 청에 응하자며 에스트라공에게 말한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엔 우리들 뿐이니 싫건 좋건 그 인간이 우리란 말이다. 그러나 너무 늦기 전에 그 기회를 이용해야 해. 불행히도 인간으로 태어난 바에야 이번 한번만이라도 의젓하게 인간이란 종족의 대표가 돼보자는 거다."


누군가를 돕기 위해서는 자기의 안온한 일상이 교란되는 것을 용납해야 한다. 도처에서 '살려달라'는 신음이 들려오는 데도 사람들이 반응하지 않는 것은 영혼이 자아 속으로 구부러져 있기 때문이다. 이제 며칠 후면 세월호 참사 2주기가 다가온다. 2년 전 '살려달라'는 희생자들의 외침은 경청되지 않았다. 그 비통한 죽음 때문에 지금도 눈물을 흘리고 있는 이들이 많다. 죽은 이들을 산 자의 땅으로 되돌릴 수는 없다. 그렇기에 더욱 그들의 죽음이 무의미하게 허비되어서는 안 된다. 다시는 그런 참극이 이 땅에서 되풀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물었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었다고 하면, 그는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다 남겨 두고서, 길을 잃은 그 양을 찾아 나서지 않겠느냐?"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비틀거린다. 우리 사회는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찾는 일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그 한 마리를 소홀히 하는 사회는 나머지 아흔아홉도 귀히 여기지 않는 법이다. 우리 시야를 가리고 있는 이 무정함의 미세 먼지가 걷힐 날은 언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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