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예레미야산책3 2016년 04월 28일
작성자 김기석

 예언자적 상징행위

본문 / 렘16:1-21


예언자는 말 뿐만 아니라 삶 자체가 메시지인 사람이다. 그들은 메시지를 충격적으로 또 가시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상징 행동을 하기도 했다. 이사야는 3년 동안 벗은 몸과 맨발로 지냈고(사20:3), 호세아는 음란한 고멜과 결혼생활을 유지했다. 에스겔은 예리한 칼로 머리카락과 수염을 잘라 일부는 불태우고, 일부는 칼로 내려치고, 일부는 바람에 날려 흩어지게 했다(겔5:1-2). 물론 그들의 행동은 미구에 닥쳐올 재난을 예고하기 위한 것이었다.


세 가지 금지

오늘 본문에서 여호와는 예레미야에게 세 가지를 금지하신다. 첫째, 아내를 맞아 들이지도 말고, 자녀를 두지도 말라는 것이다. 죄로 가득 찬 그 땅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물론이고 그들의 부모까지도 칼과 기근에 망하게 될 것이고, 그보다 더 비극적인 것은 그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이도 없고 주검을 땅에 묻어줄 사람도 없어 결국은 새와 짐승의 밥이 되고 말 것이라는 것이다(2-4). 둘째, 초상집에 들어가지도 통곡하지도 말라는 것이다. 그들이 그 지경이 된 것은 여호와께서 평강을 빼앗고, 인자와 사랑을 제거했기 때문이다. 이 말은 여호와와 그 백성 사이에 맺어진 언약이 파기되었음을 뜻한다. 셋째, 잔칫집에 가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철회되면 사람들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던 모든 것들이 무너지게 마련이다. 기뻐하는 소리, 즐거워하는 소리, 신랑과 신부의 소리가 끊어진 세상, 조금 더 보태자면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려오지 않는 세상은 디스토피아가 아닌가? 레이첼 카슨은 농약의 과다 사용으로 인해 빚어질 환경재앙을 <침묵의 봄>이라는 책 속에 담아냈다. 레이첼은 봄이 되어도 새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오지 않는 세상을 묵시록적으로 그려냈다. 예레미야가 그려 보이는 세상과 별반 다르지 않다.


깨달음은 언제나 너무 늦게 온다. 예언자의 말씀을 듣고도 백성들은 자기들의 죄를 자각하지 못한 채 묻는다.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큰 재앙을 선포하심은 어찌 됨이며 우리의 죄악은 무엇이며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범한 죄는 무엇이냐?"(10) 죄는 무지함과 연결되어 있다. 배우지 못한 무지함보다 더 심각한 것은 배우려 하지 않는 무지함이다. 욕망에 취해 살아가는 이들은 자기가 취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예언자의 대답은 간명하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 조상들이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따라서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고 나를 버려 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였음이라"(11). 문제는 우상숭배이다. 사람들이 우상을 좇는 까닭은 무엇인가? 우상이 더 매력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매혹하는 우상들은 대개 풍요와 다산과 깊이 관련되어 있었다. 우상들은 공익을 위한 자기 증여 혹은 자기 부정, 더 나아가 도덕적인 삶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우상의 길은 쉽다. 자기 삶의 방식을 바꾸지 않아도 괜찮기 때문이다. 


우상을 숭배하는 이들은 자기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신들을 동원한다. 하지만 참 신앙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아멘이 되기 위해 자기를 내려놓는다. "보라 너희가 각기 악한 마음의 완악함을 따라 행하고 나에게 순종하지 아니하였으므로"(12b)라는 구절 속에 우상숭배자들의 문제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우상숭배자들의 운명은 어떠한가? 자기 땅에서 뿌리 뽑혀 낯선 땅으로 옮겨질 것이고, 거기에 다른 신들을 섬기도록 강제될 것이다. 


절망과 희망 사이에서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징계하시는 것은 징계 자체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징계를 통한 정화 혹은 정상화를 지향한다. 하지만 재앙이 그렇게 쉽게 철회되지는 않는다. 여호와는 많은 어부들을 불러 그 백성을 낚게 할 것이고, 많은 포수를 불러다가 그 백성을 사냥하게 하실 것이다. 물론 이 대목은 힘센 이방 민족들의 침략을 예고하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택함받은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악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들, 하나님이 머무시는 거룩한 땅을 불결하게 만드는 이들을 심판하기 위해 하나님은 이방 민족들을 끌어들이신다. 그들의 죄와 악에 상응하는 벌을 내리시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희망이 완전히 소진된 것은 아니다. 인간의 희망이 끝난 곳에서 하나님의 희망이 시작된다. 절망의 어둠 속에서 예언자는 실낱 같은 희망의 빛을 본다. 그 빛이 마침내 점점 커져 온 누리를 밝힐 것이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미구에 일으키실 새로운 해방의 역사를 예고한다. '해방' 하면 누구나 출애굽 사건을 떠올리게 마련이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 일이 아니라 북방 땅에서 백성을 인도하신 하나님 이야기를 떠올릴 때가 올 것이라는 것이다(14-15). 


현실은 절망적이다. 하지만 삶이 지속되는 한 희망을 온전히 버릴 수도 없다. 절망과 희망 사이에서 예언자는 새로운 비전을 본다. "여호와 나의 힘, 나의 요새, 환난날의 피난처시여 민족들이 땅 끝에서 주께 이르러 말하기를 우리 조상들의 계승한 바는 허망하고 거짓되고 무익한 것뿐이라 사람이 어찌 신 아닌 것을 자기의 신으로 삼겠나이까 하리이다"(19-20). 지금은 비록 영락한 신세이지만, 땅이 온통 황폐하게 되는 날이 오겠지만, 때가 이르면 민족들이 주께 나아와 주님의 주권을 찬양하는 때가 반드시 온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없다면 우리는 이 어둠의 시대를 헤쳐나갈 수 없다. 


















물가에 심어진 나무처럼

본문 / 렘17:1-27


누구를 의지할 것인가?

여호와께서 유다의 죄를 지적하신다. "유다의 죄는 금강석 끝 철필로 기록되되 그들의 마음 판과 그들의 제단 뿔에 새겨졌거늘"(1). 이제는 어떻게 손을 써볼 수도 없을 정도의 고질병이 되었다는 말이다. 죄가 내면화되어 죄인 줄도 인식하지 못하는 단계이다. '제단 뿔'은 제단에서 가장 거룩한 곳으로 희생제물의 피를 바르는 곳이다. 그곳에까지 죄가 새겨졌다는 것은 종교조차 되돌릴 수 없을만큼 타락하였음을 나타낸다. 죄는 유전되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이들을 물들인다. 자녀들은 부모의 죄를 반복할 가능성이 많다. 예레미야는 그들의 자녀들이 산과 언덕 도처에 제단과 아세라 목상들을 세웠다고 말한다. 아세라는 가나안 토착 종교에서 최고신인 '엘'의 아내로 소개되고 있다. 사람들은 아세라가 풍요를 가져다 준다고 믿었다. 그러나 우상숭배가 초래하는 것은 풍요가 아니라 재앙이었다. 자기가 애집하고 있는 것들로부터 분리되고, 쫓겨나고, 끌려가고, 결국에는 원수를 섬기지 않을 수 없게 된다(3-4). 


우상 앞에 절하는 사람만이 아니다. 사람을 믿고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는 사람,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이들 역시 저주를 면할 수 없다(5). 그렇다고 하여 어떤 사람도 믿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어떤 유력한 사람이나 집단 혹은 나라를 우상화함으로 자기 불안감을 잠재우려는  인간의 뿌리 깊은 경향성을 경계하는 말씀이다. 힘을 숭상하는 이들의 운명은 사막의 떨기나무와 같아서 사람이 살지 않는 건조하고 간간한 땅에 머무는 것처럼 고달플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사람이 아니라 여호와를 의뢰하는 이의 삶은 다르다. "그는 물 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8). 떨기나무 같은 인생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여호와를 의뢰하는 사람이라 하여 고통과 시련이 없을 수는 없다. 하지만 그는 자기 속의 진액이 마르는 것 같은 절망감에 사로잡히지는 않는다. 자신의 생명이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신뢰하는 이들은 내면에 마르지 않는 샘 하나를 마련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인간은 신뢰와 불신,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늘 흔들린다. 하나님은 인간이 얼마나 허약한 존재인지를 잘 아신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행실대로 보응하나니"(9-10). 세상 만물은 영고성쇠의 순환 속에 있을 뿐 타락할 수는 없다. 타락은 자유의지를 부여받은 인간에게만 일어날 수 있다. 뱀의 유혹 이후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서의 자유는 오용되는 일이 많았다. 인간의 마음은 신뢰하기 어렵다. 하나님은 '심장'과 '폐부'(실은 콩팥)를 살피신다. 옛 사람은 '심장'에 인간의 지성이 머문다고 생각했고, 콩팥에 인간의 의지가 머문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은 인간의 지성과 의지를 꿰뚫어보시고, 그의 행위와 행실에 따라 갚으신다. 불의한 자는 인생으로부터 허망함을 거둘 뿐이다.


흙에 기록될 사람들

예레미야는 여호와께 무한한 신뢰를 보낸다. 여호와야말로 이스라엘의 희망이시다. 그렇기에 그는 단호하게 말한다. "무릇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이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니이다"(13). '흙에 기록된다'는 말은 '죽은 자들의 처소에 등록될 것'이라는 말이다.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눅10:20)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와 정반대인 셈이다. 예레미야는 분명히 하나님을 의뢰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의 마음 역시 그늘이 없다 할 수 없다. 사방에서 비난을 받고, 죽음의 위협을 겪으며 살았기에 더욱 그러하다. 그렇기에 그는 기도한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찬송이시오니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낫겠나이다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으리이다"(14). 그는 상처난 자기 마음을 치유해주실 하나님께 들어올린다. 


예레미야는 솔직하게 자기 속내를 털어놓는다. "그들이 내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어디 있느냐 이제 임하게 할지어다 하나이다"(15) 새번역은 이 대목은 더 직접적으로 번역해 놓았다. "백성이 저에게 빈정거리는 말을 들어 보십시오. '주님께서는 말씀으로만 위협하시지, 별 것도 아니지 않으냐! 어디 위협한 대로 되게 해보시지!' 합니다." 백성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 애쓰고 그들을 위해 중보해 준 자신이 조롱받는 것도 견디기 어렵지만 예레미야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조롱받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조롱하는 자들과 박해하는 자들이 치욕을 당하고 재앙을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18). 성경을 읽다가 누군가를 저주하는 기도를 만나면 당황스럽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편 기자들이 그러한 것처럼 예언자는 자기 마음에 떠오르는 부정적인 생각까지도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내놓는다. 스스로 보복의 주체가 되려 하지 않고 하나님께 그들을 맡김으로 그는 부자유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내홍을 안고도 그분의 일을 해야 하는 것이 예언자의 숙명이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평민의 문[출입이 잦은 문]과 예루살렘 모든 문으로 들어오는 이들에게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전하라 이르신다.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는 이해득실을 따지는 마음부터 내려놓아야 한다. '안식일 지킴'은 여호와에 대한 신뢰 회복의 출발점이다.


















토기장이의 집에서

본문 / 렘18:1-23


하나님의 절대 주권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지시에 따라 토기장이의 집으로 간다. 말씀이 임하기 전에 그는 토기장이가 작업하는 광경을 유심히 바라본다. 그는 녹로 위에 진흙을 올린 후 물레를 돌리며 그릇을 만들다가 흠집이 생기면 그것을 다시 뭉쳐 새로운 그릇을 만들곤 했다. 예언자는 그때 여호와의 장엄한 선언을 듣는다.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6b). 짧지만 강력한 메시지이다. '토기장이'를 뜻하는 히브리어 '요체르'는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고 할 때 사용된 단어 '야차르'에서 온 말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운명이 창조주이신 주님께 달려 있다는 사실이 아주 구체적인 이미지로 전달된 것이다. 


하나님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뽑거나 부수거나 멸하려 하다가도 돌이키시고, 건설하거나 세우려 했다가도 뜻을 돌이키시는 분이시다. 그것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속하는 것이지만 나름대로의 일관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백성들이 악한 일에서 돌이키고 말씀을 청종하면 멸하시려던 뜻을 거두시고, 그들이 악에 빠지면 세우시려던 뜻을 거두신다. 마침내 백성들에게 전해야 할 메시지가 임한다. "너희는 각기 악한 길에서 돌이키며 너희의 길과 행위를 아름답게 하라 하셨다 하라"(11b). 그러나 하나님은 백성들이 어떻게 반응할지도 이미 잘 아신다. "그들이 말하기를 이는 헛되니 우리는 우리의 계획대로 행하며 우리는 각기 악한 마음이 완악한 대로 행하리라 하느니라"(12). 바른 말씀, 살리는 말씀, 쓴 소리는 경청되지 않는다. 죄와 멸망의 경사로에 선 사람들은 돌이킬 줄 모른다. 단절적인 파국이 닥쳐오기 전까지 그들은 안온한 일상이 지속될 거라는 허탄한 신화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시간이 자기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며 사는 이들은 드물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의 반응을 답답해 하신다. 하나님이 공들여 만드신 이스라엘은 가증한 일을 행하면서도 임박한 재난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예언자들이 전하는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탄식하신다. "레바논의 눈이 어찌 들의 바위를 떠나겠으며 먼 곳에서 흘러내리는 찬물이 어찌 마르겠느냐"(14). '들의 바위'라는 말이 지시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분명치 않다. '들의 바위'(사다이)를 헤르몬 산의 옛 이름인 시르욘으로 읽는 번역본도 있다. 그렇다면 이 구절은 헤르몬 산 위를 뒤덮고 있는 흰 눈과 거기서 발원한 물이 세차게 흘러내리는 장면을 그린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척박한 땅에 사는 이들에게 흰 눈을 이고 있는 산과 거기서 흘러내리는 물은 신비 그 자체였을 것이다. 여호와는 늘 그곳에 계시면서 백성들을 사랑으로 돌보건만 사람들은 그 사랑에 등을 돌리기 일쑤이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맺은 굳은 언약을 저버리고 허무한 것을 따라 나서곤 했다. 옛부터 걸어온 바른길을 벗어나서 닦지 않은 길로 들어섰다. 욕망을 따르는 길은 이정표가 없는 길과 같다. 그 길은 휴식이 없는 길이요 이웃과의 따스한 교감이 없는 길이다. 하나님이 아니라 욕망이 추동하는 길로 나아간 이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다른 이들의 비웃음 뿐이다. 땅은 황량하게 변할 것이고, 그들은 마치 뜨겁고 세차게 불어오는 동풍에 흩날리는 낙엽처럼 원수들에게 쫓길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등을 보이고 얼굴을 보이지 아니하리라"(17b). 두려운 경고이다.  


예레미야를 죽이려는 음모

여호와의 쓴 소리를 들을 생각이 없는 이들은 그 말씀을 전달하는 자를 없앰으로 말씀조차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제사장에게서 율법이, 지혜로운 자에게서 책략이, 선지자에게서 말씀이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니 오라 우리가 혀로 그를 치고 그의 어떤 말에도 주의하지 말자"(18). 예레미야가 아니라도 자기들 곁에는 언제든 필요한 말을 전해 줄 제사장과 현자와 선지자가 있다는 것이다. 대중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을 전해주는 이들은 어디에나 있다. 가려운 데를 긁어주는 말, 욕망을 부추기는 말은 언제나 달콤하다. 하지만 달콤한 그 말에 취하는 순간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흐릿해진다.


사람들은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구덩이를 팠다. 주님의 분노를 돌이키기 위해 그들 편에 서서 중재를 했건만 백성들은 그를 용납할 생각이 없다. 안온한 일상에 자꾸 파문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예언자들이 외면당하고 박해받는 것은 늘 있는 일이지만 이런 일이 지속되면 누구라도 지치게 마련이다. 예레미야는 21절에서 자기 속에 일고 있는 거친 생각을 가감없이 격정적으로 하나님께 아뢴다. 그들의 자녀는 기근과 폭력에 시달리고, 아내들은 자녀를 잃고 또 과부가 되며, 장정들은 전장에서 죽임을 당하게 해달라는 것이다. 폭언이고 망언이다. 어찌 이리도 신랄한 저주를 할 수 있단 말인가? 예언자는 하나님의 분노를 내면화한 사람이다. 그는 하나님의 심정에 깊이 공감한다. 신실함이 없는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가 고스란히 예언자의 가슴에 서려 있다. 예레미야는 분노를 가슴에 담아두지 않고 하나님 앞에 다 쏟아낸다. '표현된 분노'를 통해 예언자는 자기 가슴을 짓누르는 압박감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다. 보복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예레미야는 초인이 아니다. 세상의 모든 불의와 어둠을 자기 속으로 끌어들여 녹여내는 존재가 아니다. 그도 지치고 낙심할 때가 많다. 그래서 자기를 죽이려는 흉계를 꾸미는 이들의 죄악을 용서하지 말아달라고, 그들의 허물을 가볍게 다루지 말아달라고 청한다. 



















옹기를 깨뜨리다

본문 / 렘19:1-15


죽임의 골짜기

여호와는 예레미야에게 토기장이의 옹기를 사서 백성을 대표하는 원로 몇 사람과 제사장 몇 사람을 대동하여 하시드 문[토기 문]을 통해 '힌놈의 아들 골짜기'로 가서 당신의 말씀을 전하라 이르셨다. 힌놈의 아들 골짜기는 '도벳 사당'이 있던 곳(렘7:31)이다. 도벳은 '화로' 또는 '제단'을 뜻하는 히브리어 '토프테'와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데 그곳에서 유다 백성들은 자기들이 자녀를 불살라 신에게 바쳤다. 인신공희(人身供犧) 전통은 거의 모든 문화권마다 발견되는데, 수렵·목축시대를 거쳐 농경시대까지 이어져 온 악습이다. 가장 귀중한 것을 바쳐야 신의 호의를 살 수 있다는 극단적 사고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심청전'이나 '성대대왕신종(에밀레종) 이야기' 등도 일종의 인신공희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아브라함의 이삭 번제 이야기(창22장)를 인신공희의 악습과 결별한 사건으로 보기도 한다. 


백성을 대표하는 이들과 예레미야가 함께 간 힌놈의 아들 골짜기는 바로 그런 끔찍한 폐습이 자행되던 현장이다.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울린다. 듣는 자의 귀가 떨릴 정도로 무서운 말씀이다. 유다의 왕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은 하나님을 버렸을 뿐만 아니라 정결해야 할 그곳을 불결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고 무죄한 자들의 피로 그곳을 채웠으며 바알 신당을 건축하여 자기 아들들을 번제로 불살라 드렸다. 이제 그곳은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 혹은 '도벳'이라고 불리지 않고 '죽임의 골짜기'로 불리게 될 것이다. 


'죽음'과 '죽임'은 다르다. 죽임은 생명의 폭력적 단절이다. 죽임을 당하는 이들은 대개 보복의 능력이 없는 약자들이다. 절박하다고 하여 누군가를 희생시킴으로 그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이나 사회는 불의하다. 하나님은 그런 행위를 용납하실 수가 없다. 하나님은 거룩한 땅을 피로 물들인 유다와 예루살렘에 진노하신다.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가 장엄하게 울려퍼진다. 


"내가 이 곳에서 유다와 예루살렘의 계획을 무너뜨려 그들로 그 대적 앞과 생명을 찾는 자의 손의 칼에 엎드러지게 하고 그 시체를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의 밥이 되게 하며 이 성읍으로 놀람과 조롱 거리가 되게 하리니 그 모든 재앙으로 말미암아 지나는 자마다 놀라며 조롱할 것이며"(7-8) 


난공불락이라 여겼던 예루살렘, 놋성벽처럼 든든하리라 여겼던 예루살렘,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전이 있기에 무너질리 없다고 여겼던 예루살렘이 무너질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을 자처했던 이들이 속절없이 죽임을 당한다. 외적들이 침입하여 장기간 성읍을 에워쌀 때 성 안에서 벌어질 일은 참담하기 이를 데 없다. 먹을 것이 다 떨어져 죽음의 그림자가 모두를 감쌀 때,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모든 가치관이 허물어지고 오로지 살아남아야 한다는 야수적 본능만이 남아 있을 때, 자식들을 잡아 먹는 반인륜적인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것이다.


최종적 심판 예고

이야기가 이 대목에 이를 때 여호와는 예레미야에게 토기장이에게서 사 온 옹기를 깨뜨리라 말씀하신다. 바닥에 내던져져 산산조각나는 옹기, 그것은 시각적 충격인 동시에 청각적인 충격이었을 것이다. 예언자의 이야기를 듣는 이들은 바로 파쇄된 옹기가 자신들임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렸을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그렇게 신속하고 최종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쨍그랑 옹기 깨지는 소리가 들려와도 무덤덤한 사람, 조각난 옹기 조각을 보고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희망이 없다. "사람이 토기장이의 그릇을 한 번 깨뜨리면 다시 완전하게 할 수 없나니 이와 같이 내가 이 백성과 이 성읍을 무너뜨리리니 도벳에 매장할 자리가 없을 만큼 매장하리라"(11). 하나님은 예루살렘의 임박한 멸망을 예고하신다. '성읍'이 '도벳'처럼 변할 날이 온다. 도벳을 '화로'와 관련된 것으로 본다면 이 말은 전쟁으로 인해 성읍이 불탈 것임을 암시한다. 도벳이 죽임의 계곡이었던 것처럼 안전하리라 믿었던 예루살렘 성도 죽임의 자리가 될 것이다. 그 까닭은 명백하다. "예루살렘 집들과 유다 왕들의 집들이 그 집 위에서 하늘의 만상에 분향하고 다른 신들에게 전제를 부음으로 더러워"(13)졌기 때문이다. 


예레미야는 이제 선포의 장소를 옮긴다. 도벳에서 돌아와 여호와의 집 뜰에 서서 모든 백성에게 외친다. 백성의 대표자들만이 아니라 모두가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이 성읍에 대하여 선언한 모든 재앙을 이 성읍과 그 모든 촌락에 내리리니 이는 그들의 목을 곧게 하여 내 말을 듣지 아니함이라 하시니라"(15). 이 모든 재앙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려는 완악한 마음과 자기에 대한 과신이 있다. 말씀에서 멀어지는 순간 이웃들과도 멀어진다. 대신 재앙이 다가온다.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본문 / 렘20:1-18


예레미야에 대한 신체적 폭력이 시작된다. 성전의 총감독인 제사장 바스훌은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집 뜰에서 예루살렘에 임할 재앙을 선포했다는 말을 듣고 그를 붙잡아 베냐민 문 위층에 묶어 두었다. 그곳은 누구라도 볼 수 있는 공공장소였다. 대중들 앞에서 예레미야에게 모욕을 가함으로 그가 전하는 말의 신빙성을 훼손하려는 계책이었을 것이다. 다음날 바스훌이 다시 등장해 예레미야를 풀어준다. 그만하면 본때를 보여주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예레미야는 전혀 주눅들지 않은 목소리로 그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전한다. "여호와께서 네 이름을 바스훌이라 아니하시고 마골밋사빕이라 하시느니라"(3b). 마골밋사빕은 '사방으로 두려움'이라는 뜻이다. 중의적 의미를 지닌 호칭이다. 그의 이름 자체가 사람들에게 공포와 더불어 기억될 것이라는 뜻과 아울러 그 또한 공포에 둘러싸이게 될 것이라는 뜻 말이다. 바스훌은 가까운 친구들이 원수들의 칼에 엎드러지는 모습을 목도하게 될 것이다. 유다 사람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갈 때 그의 집 식솔들도 다 포로로 잡혀가 거기서 죽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힘으로 누르려는 자와 그에게 속한 이들의 비참한 말로이다.


7절부터는 예언자의 탄식이 이어진다. 적대자들 앞에서는 당당하게 할 말을 다하지만 그의 가슴에도 모욕당한 상처의 흔적은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하나님께 불평을 털어놓는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 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7). '권유하셨다'와 '이기셨다'는 표현은 지나칠 정도로 순화시킨 번역이다. 권유하셨다고 번역된 '파타'(patah)는 "성경에서 여자에게 결혼 전에 성행위를 승낙하도록 설득, 유도하는 것을 의미할 때 사용된다" 그리고 '이기셨다'고 번역된 '하자크'(hazak)는 여자에게 혼외정사를 강요하는 것으로서, 그녀의 의사에 반(反)하여 이루어지는 것을 뜻할 때 사용된다."(아브라함 J. 헤셸, <예언자들>, 이현주 옮김, 삼인, 2004년 4월 28일, p.196) 헤셸은 이 대목에 주목하면서 예언자의 소명을 이렇게 설명한다.


"예언자가 되라는 소명은 단순한 초청 이상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유혹받고 승낙하는 혹은 기꺼이 몸을 허락하는 그런 것이다. 그러나 이런 매력있는 부분은 예언자가 경험한 것의 한쪽일 뿐이다. 이번에는 폭력에 의하여 강탈을 당하고 자신의 의사에 반하여 막강한 힘 앞에 무릎을 꿇고 마는 그런 국면이 있다."(앞의 책, p.196)


달콤한 시간은 지나갔고 소태처럼 쓴 시간이 다가왔다. 그렇기에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자기 괴로움을 토로한다.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파멸과 멸망을 선포하므로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 거리가 됨이니이다"(8). 대중들의 귀에 단 말을 했더라면 이런 괴로움은 없었을 것이다. '파멸'과 '멸망'을 예고하자 사람들은 벌떼처럼 일어나 그를 조롱하고 박해했다. 예레미야는 그래서 속으로 다짐한다.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9a). 여호와의 말로 인해 빚어진 현실이니 그 말을 더 이상 입에 담지 않으면 괴로움의 시간도 지나가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는 입을 다물고 있을 수가 없다.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9b). 이것이 말씀에 사로잡힌 자의 운명이다. 예언자란 가슴에 불이 붙은 사람이다. 하나님의 마음에 사로잡힌 사람은 외치지 않을 수 없다. 세상은 여전히 적대적이다. 파멸과 멸망을 예고하는 예언자를 사람들은 불길하게 여긴다. 그래서 그를 고소하자고 서로를 부추긴다. 유혹이라는 덫을 놓고는 예언자가 걸려들기를 기다리는 이들도 있다. 한때 친했던 이들조차 그에게 다 등을 돌리고 예레미야가 실족하기만을 기다린다. 절망의 어둠이 점점 짙어진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그렇게 무너지지 않는다. 하나님의 마음과 깊이 접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 예레미야는 유혹이나 박해 앞에서 잠시 흔들릴 수 있지만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으신다. "여호와는 두려운 용사 같으시며 나와 함께 하시므로 나를 박해하는 자들이 넘어지고 이기지 못할 것이오며 그들은 지혜롭게 행하지 못하므로 큰 치욕을 당하오리니 그 치욕은 길이 잊지 못할 것이니이다"(11). 두려운 용사 같으신 주님이 계시기에 박해자들의 도모는 성공할 수 없다. 예레미야는 오로지 폐부와 심장을 보시는 하나님만 의지한다. 적대자들에 대한 심판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긴다. 그리고는 사람들을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리로 초대한다. "여호와께 노래하라 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 가난한 자의 생명을 행악자의 손에서 구원하셨음이니라"(13). 여기서 말하는 '가난한 자'는 물질적으로 궁핍한 자를 이르는 말이 아니라 억울한 일을 당하여도 하나님의 도우심 외에는 의지할 데가 전혀 없는 이들 곧 억압받는 이들을 가리킨다. 


14절부터 18절까지의 본문은 독자들을 매우 혼란스럽게 만든다. 그렇게도 당당하게 하나님을 신뢰하던 예레미야가 또 다시 의기소침해져서 자기가 태어난 날을 저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대목은 욥의 탄식을 연상시킨다. 자기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아버지에게 전해주었던 사람조차 원망한다. 그는 이렇게 수모를 겪으며 살 바에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거라고 불퉁거린다. 수모와 박해 앞에서도 당당하던 그 사람도, 삶이 힘겨워 죽기를 원하는 그 사람도 다 예레미야 속에 있다. 예언자의 길은 '찬양'과 '기쁨'만 있는 것이 아니다. '탄식'과 '울부짖음'도 품고 가야 하는 길이다.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

본문 / 렘21:1-14


1장 2절에 처음 소개됐던 시드기야가 다시 등장한다. 그는 바스훌과 스바냐를 예레미야에게 보내 기도를 부탁한다. 바스훌[말기야의 아들]은 20장에 등장했던 바스훌[임멜의 아들]과는 다른 사람이다. 스바냐 역시 예언자 스바냐와 동명이인이다. 그는 시드기야의 측근 인사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우리를 치니 청컨대 너는 우리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라 여호와께서 혹시 그의 모든 기적으로 우리를 도와 행하시면 그가 우리를 떠나리라 하니"(2). 본문은 바벨론 군대가 쳐들어와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열왕기하25:1-2절에 따르면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포위한 때는 주전 588년 1월이고, 예루살렘이 함락된 것은 주전 587년 7월이다. 왕이 예레미야에게 사람을 보낸 것은 그 무렵일 것이다. 그저 견디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절박한 상황에서 시드기야는 하나님의 기적적인 개입을 기대한다. '기적'이라 번역된 히브리어는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어려움 가운데서 건져낸 사건을 묘사할 때마다 등장하는데 그 기본적인 의미는 '놀라운 일들'이다. 


그러나 예언자를 통해 전해진 말씀은 실낱같던 왕의 기대를 저버렸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너희가 성 밖에서 바벨론의 왕과 또 너희를 에워싼 갈대아인과 싸우는 데 쓰는 너희 손의 무기를 내가 뒤로 돌릴 것이요 그것들을 이 성 가운데 모아들이리라"(4).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들고 있는 무기를 성 안쪽으로 돌릴 것이고, 그 무기들은 아무 쓸모없이 버려질 것이라는 것이다. 왕이 바라는 기적은 없다. 하나님은 더 이상 그들의 보호자가 아니다. "내가 든 손과 강한 팔 곧 진노와 분노와 대노로 친히 너희를 칠 것이며"(5).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 추켜들었던 손과 강한 팔이 이제는 그 백성을 치기 위해 들려졌다. 흥미로운 것은 이 대목이 출애굽 사건을 묘사할 때 흔히 사용되던 수식어[대개는 '강한 손'과 '편 팔'의 형태]를 살짝 비틀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유다 백성들이 직면한 현실은 뒤집힌 출애굽임을 암시하려는 것이었을까?


이제 백성들이 깨달아야 할 것은 그들을 멸망시키는 것은 바벨론의 강한 군대가 아니라 여호와 자신이라는 사실이다. 성 안에 있는 사람이나 짐승은 칼에 죽거나 설사 그것을 피했다 해도 큰 전염병이 돌아 죽음을 맞게 될 것이다. 가까스로 전염병과 칼과 기근에서 살아남았다 해도 형편이 더 나을 것은 없다. 시드기야나 그의 신하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잔혹한 느부갓네살에 의해 죽임을 당할 것이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보호는 철회되었다. 그러면 모든 것이 끝인가? 그렇지 않다. 아직 희망은 있다.


여호와는 백성들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제시하신다. 생명의 길이라고 하여 복된 길은 아니다. 가까스로 살아남는 길이다. 성 안에 머무르는 이들은 결국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말미암아 죽을 것이지만, 성 밖으로 나가 갈대아인들에게 항복하는 자들은 살아남을 수는 있다는 것이다. "그의 목숨은 전리품 같이 되리라"(9c). 위태롭기는 마찬가지이다. 어찌할 것인가? 치욕을 감수하며 살아남을 것인가, 아니면 성과 운명을 같이 할 것인가?


헛된 자만심

11절부터는 새로운 단락이 시작된다. 유다 왕가에게 내린 말씀이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다윗의 집이여 너는 아침마다 정의롭게 판결하여 탈취 당한 자를 압박자의 손에서 건지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의 악행 때문에 내 분노가 붙 같이 일어나서 사르리니 능히 끌 자가 없으리라"(12). 다윗 왕가의 본분이 명확하게 적시되고 있다. 그것은 정의로운 판결을 통해 사회적 약자들을 보호하는 것이다. 능동적으로 죄를 짓지 않는다 해도 약자 보호의 의무를 소홀히 하는 것,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된 직무를 회피하는 것은 그 자체로 악행이다. 타락한 권력은 자기에게 위임된 힘을 제 잇속을 차리는 데 사용한다. 기득권을 지키려는 강자들의 연대가 강고할수록 약자들의 신음소리는 경청되지 않는다. 본분을 잃은 권력을 하나님은 그냥 보아 넘기시지 않는다. 불 같이 일어나는 분노로 그들을 사르신다. 그 분노의 불을 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골짜기와 평원 바위의 주민아 보라 너희가 말하기를 누가 내려와서 우리를 치리요 누가 우리의 거처에 들어오리요 하거니와 나는 네 대적이라"(13). '골짜기와 평원 바위의 주민'이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왕가에 대한 신탁 대목 가운데 나온 것으로 볼 때 성전 아래쪽에 있었던 왕궁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왕궁은 어떤 경우에도 훼손되지 않을 것이라 기대하지만 그것은 단지 바람일 뿐이다. "나는 네 대적이라"는 한 마디 속에 그들의 운명이 담겨 있다.


"내가 너희 행위대로 너희를 벌할 것이요 내가 또 수풀에 불을 놓아 그 모든 주위를 사르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4). 예루살렘에는 수풀이 없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수풀'은 왕궁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들과 왕궁 건축에 쓰인 레바논 숲의 목재들을 암시하는 것 같다(한국천주교주교회의가 발간한 <주석성경> 참조). 불타오르는 왕궁은 한 나라의 운명이 다했음을 보여주는 징표이다. 하나님께 등을 돌린 백성의 운명이 그러하다.




















정의를 저버린 자들의 운명

본문 / 렘22:1-30


왕의 책무

22장은 왕들에게 맡겨진 소명이 무엇인지를 밝힌다. "너희가 정의와 공의를 행하여 탈취 당한 자를 압박하는 자의 손에서 건지고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말며 이 곳에서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3). 왕은 자기 의사를 백성들에게 강제하는 자가 아니다. 공평함이 없는 세상에서 늘 당하며 살 수 밖에 없는 이들을 보호해야 한다. 그들의 시선은 늘 사회적 약자를 향해 있어야 하며, 법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이들의 횡포를 막고, 스스로 일어설 능력이 없는 이들이 일어서도록 도와야 한다.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는 사회적 약자의 대명사이다. 이방인이 가장 앞에 나온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이방인은 전쟁, 기근, 가난으로 인해 자기 땅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이다. 뜨내기인 그들은 언제라도 정착민들의 폭력에 노출되기 쉬웠다. 하나님은 그런 이들에게 관심이 많으시다.


한 나라의 번성과 왕가의 번영은 하나님의 그 명령을 성실하게 수행했느냐에 달려 있다. 명령을 지키지 않으면 왕궁은 황무지로 변한다. "네가 내게 길르앗 같고 레바논의 머리이나 내가 반드시 너로 광야와 주민이 없는 성읍을 만들 것이라"(6b). '길르앗'과 '레바논'은 풍요로움과 아름다움의 상징이다. 그러나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보호 의무를 게을리하는 순간 그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은 재로 변하고 많다. 나중에는 수많은 민족이 그 성읍을 스쳐 지나가며 왜 이 성읍이 황폐하게 되었느냐고 물을 것이고 사람들은 마치 오래된 전설을 전하듯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저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겼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약자들에 대한 사랑의 실패는 결국 우상 숭배와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10절부터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지 않은 왕들의 운명을 전하고 있다. 여호아하스라고도 알려진 살룸은 요시야 임금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사람이다. 기원전 609년 경 백성들의 신망이 두터웠던 요시야가 므깃도 전투에서 사망하자(왕하23:28-30) 온 백성이 그 죽음을 애도했다. 그런데 그러한 국가적 애도 기간이 끝나기도 전에 하나님의 말씀이 백성들에게 내렸다. "너희는 죽은 자를 위하여 울지 말며 그를 위하여 애통하지 말고 잡혀 간 자를 위하여 슬피 울라 그는 다시 돌아와 그 고국을 보지 못할 것임이라"(10). 살룸은 포로로 잡혀 가 다시는 고국 땅을 밟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여호야김 왕은 "불의로 그 집을 세우며 부정하게 그 다락방을 지으며 자기의 이웃을 고용하고 그의 품삯을 주지 아니하는 자"(13)로 소개되고 있다. 그는 예레미야의 신탁을 모아 기록한 첫번 째 두루마리를 자기가 머물던 겨울 궁전의 화로에 소각한 인물이다(렘36:22). 그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변호하고, '정의와 공의'를 세우기 위해 노력했던 아버지 요시야 임금과는 달리 자기 왕궁을 화려하게 꾸미는 일에 몰두하면서 백성들의 고혈을 짜냈다. 여호야김은 탐욕과 무죄한 피를 흘리는 일과 압박과 포악에 인이 박혔다. 그는 적들에게 사로잡혀 예루살렘 성 밖에 던져질 것이고 나귀처럼 매장당할 것이지만, 아무도 그의 죽음을 슬퍼하거나 애도하지 않을 것이다. 백성의 마음에서 멀어진 전제군주의 최후가 그러하다. 


예루살렘아 통곡하라

20절부터 23절은 의인화된 예루살렘에게 통곡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너는 레바논에 올라 외치며 바산에서 네 소리를 높이며 아바림에서 외치라 이는 너를 사랑하는 자가 다 멸망하였음이라"(20). 레바논, 바산, 아바림은 모두 예루살렘 인근의 산악지대이다. 그곳에서 소리를 지르고 통곡하라는 것이다. '너를 사랑하는 자'는 유다가 동맹을 맺었던 나라들을 가리킨다. 유다가 의지했던 나라들이 다 망하고 말았다. 사람의 힘을 의지하려던 그들의 시도가 수포로 돌아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할 생각이 없었던 이들에게 닥쳐온 참극이다. 백성의 지도자들은 몰아치는 바람에 휩쓸려 갈 것이고, 동맹국 백성들은 포로가 되어 잡혀 갈 것이다. 백향목으로 만든 궁궐에서 거들먹거리고 사는 자도 수치와 욕을 당할 것이고 해산하는 여인처럼 고통을 겪을 때가 곧 온다. 


24절부터는 여호야김의 아들 고니야['여호야긴' 또는 '여고냐'라고도 부른다]에 대한 예언이다. "나의 삶으로 맹세하노니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고니야가 나의 오른손의 인장반지라 할지라도 내가 빼어 네 생명을 찾는 자의 손과 네가 두려워하는 자의 손 곧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의 손과 갈대아인의 손에 줄 것이라"(24-25).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한다는 것은 이제는 재앙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음을 의미한다. '인장반지'는 공문서나 임금의 명령을 담은 문서에 서명할 때 사용하는 것으로, 그것을 뺀다는 것은 왕으로서의 자격이 박탈되었음을 뜻한다. 왕은 물론이고 그의 어머니까지도 낯선 땅에 내던져질 것이고 죽는 날까지 귀환을 허락받지 못할 것이다. 그의 처지는 마치 보잘 것 없어 버림받은 그릇 혹은 깨진 그릇과 같다. "땅이여, 땅이여, 땅이여, 여호와의 말을 들을지니라"(29). 여호와는 이 비극적인 사태에 대해 땅을 증인으로 초대하고 있다. 고니야는 자식이 없는 사람으로 또한 "평생 동안 형통하지 못할 자"라고 기록되리라는 것이다. 살룸, 여호야김, 고니야가 연이어 맞이하게 되는 참극은 사회적 약자들을 보호하지 않은 그들의 태만의 결과이다.




















거짓 예언자들에 대한 경고

본문 / 렘23:1-40


한 나라가 몰락하는 데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자는 누구일까? 정치 지도자와 종교 지도자들이 아닐까? 23장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돌봄의 사명을 소홀히 한 이스라엘의 목자들에 대한 준엄한 꾸짖음과 사람들을 오도하는 거짓 예언자들에 대한 신랄한 경고가 담겨있다. 자기에게 위임된 일을 방기한 왕들은 "내 목장의 양 떼를 멸하여 흩어지게 하는 목자"(1)라 지칭되고 있다. 그들이 양 떼를 흩고 돌보지 않은 까닭은 제 욕심을 채우는데 급급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친히 남은 양 떼를 모아 목장으로 데려온 후, 참다운 목자들을 세울 것이라 말씀하신다. 그는 다윗에게서 난 한 의로운 가지인데 백성들을 지혜롭게 다스리면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때가 온다(5). 정의와 공의야말로 한 나라를 굳건히 세우는 토대임이 또 다시 강조되고 있다.


주님의 이름을 잊게 하는 자들

예레미야는 주님의 말씀에 취한 사람이다. 그렇기에 음행이 가득한 세상에 깊이 절망한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저버리고 우상숭배에 빠지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음행에 몰두하는 이들로 인해 땅이 슬퍼하고 광야의 초장들이 말랐다(10). 예언자와 제사장들도 예외는 아니다. 예언자는 언약 공동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가리키는 이정표이다. 이정표가 그릇된 곳을 가리키면 모두가 위험에 처할 수 밖에 없다. 벼랑 끝에 설 수도 있고, 어둠 속에서 길을 잃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 땅의 예언자라는 사람들이 백성들과 똑같은 죄에 빠져 있다. 예루살렘의 예언자들은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하며 백성들을 오도했던 사마리아의 예언자들과 다를 바 없다. 스스로 간음, 악행, 거짓말을 하면서 백성들의 악을 부추겼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쓴 쑥과 독한 물을 마시게 하실 것이다. "이는 사악이 예루살렘 선지자들로부터 나와서 온 땅에 퍼짐이라"(15b). 두렵고 떨리는 말씀이다. 예언자들의 타락이 백성들의 타락의 뿌리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오늘의 목회자들은 이 말씀을 거울 삼아 스스로를 돌아볼 일이다.


여호와는 헛된 말로 사람들을 가르치고, 자기 마음에서 빚어진 환상을 하나님의 계시인 양 전하는 사람들, 주님의 말씀은 멸시하면서 백성들에게 "너희가 평안하리라", "너희에게 재앙이 임하지 아니하리라"(17) 하는 사람들에게 분노하신다. 거짓 예언자들은 결국 백성들로 하여금 주님의 이름을 잊게 하는 자들이다(27). 폭풍과 회오리바람처럼 강력한 분노가 그들에게 임할 것이다. 모름지기 예언자는 받은 바 말씀을 성실하게 전해야 한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말이 불 같지 아니하냐 바위를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29). 하나님의 말씀은 허섭쓰레기들을 태우는 맹렬한 불이요, 허위의식과 죄 그리고 안일한 마음을 타격해 깨뜨리는 방망이이다. 오늘 이런 말씀은 어디에 있는가? 거짓과 위선과 탐욕을 부추기거나, 불의를 그럴싸한 말로 덮어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30-32절에는 말씀을 도둑질하는 선지자들, 거짓과 허황된 말로 백성을 미혹하는 자를 치겠다는 하나님의 단호한 결의가 거듭 나온다. 바른 말씀을 버리고 자의적으로 말씀을 전하는 자들은 하나님과 맞서는 자들이다. 그들은 난파가 예정된 배와 다를 바 없다.


짐이 되는 주님의 말씀

"이 백성이나 선지자나 제사장이 네게 물어 이르기를 여호와의 엄중한 말씀이 무엇인가 묻거든 너는 그들에게 대답하기를 엄중한 말씀이 무엇이냐 묻느냐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너희를 버리리라 하셨고"(33). '엄중한 말씀'을 묻는 이들에게 '버리리라' 하는 응답은 다소 의외이다. 엄중(嚴重)은 몹시 엄함을 이르는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는 게 문제지 무겁게 여기는 게 문제는 아니지 않은가? 사실 이 대목에는 일종의 말놀이가 숨어 있다. '엄중한 말씀'이라 번역된 히브리어 '마싸'는 '짐'이라는 뜻과 아울러 '신탁'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 대목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이 짐스럽게 여기는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새번역은 이 대목을 이렇게 번역했다. "이 백성 가운데 한 사람이나 예언자나 제사장이 너에게 와서 '부담이 되는 주님의 말씀'이 있느냐고 묻거든, 너는 그들에게 대답하여라. '부담이 되는 주님의 말씀'이라고 하였느냐? 나 주가 말한다. 너희가 바로 나에게 부담이 된다. 그래서 내가 이제 너희를 버리겠다 말하였다고 하여라." 


사실 '엄중한 말씀'이라는 말은 늘 불길한 재앙을 예고하는 예레미야의 예언을 조롱하기 위해 적대자들이 사용한 것이다. 말씀을 부담스럽게 여기는 자들이야말로 주님께 부담이 되는 자들이다. 사람들은 애써 감춰두었던 자신의 비열한 욕망을 드러내고, 대면하고 싶지 않은 현실 앞으로 그들을 이끌어가는 말씀을 부담스러워 한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현실은 동일하다. 그렇기에 설교단에서 불의 언어, 망치의 언어는 점점 사라지고 미풍의 언어만이 난무하고 있다. 사람들의 욕망을 부드럽게 감싸는 언어 말이다. 회중의 눈치를 보며 그들이 듣고 싶은 말만 선포하는 이는 결국 사람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이들이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지식인의 표상>에서 "당신이 당신의 후원자를 계속 의식한다면 지식인으로서 사고할 수 없으며, 그저 신봉자나 시종으로 사고할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말씀을 전하는 자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엄중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은 결국 하나님의 버림을 받게 마련이다. "내가 너희를 온전히 잊어버리며 내가 너희와 너의 조상들에게 준 이 성읍을 내 앞에서 내버려 너희는 영원한 치욕과 잊지 못할 영구한 수치를 당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39-40).



















무화과 두 광주리

본문 / 렘24:1-10


24장은 예레미야가 직접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1절의 원문은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셨다"는 구절로 시작된다.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성전 앞에 놓인 무화과 두 광주리를 보았다. 그가 비전으로 본 것인지 실제로 본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 일이 벌어진 것은 느부갓네살의 침공으로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냐와 유다 고관들과 목공들과 철공들을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옮긴 후"(1a)였다. 아직 나라가 완전히 멸망하기 전이다. 느부갓네살이 유다의 왕과 고관들을 잡아간 것은 그들을 볼모로 잡아둠으로써 반란의 싹을 도려내려는 것이었고, 목공과 철공들을 데려간 것은 써먹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지금도 남아 있는 바벨론의 찬란한 유적들 속에는 식민지 도처에서 끌려온 장인(匠人)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배어 있다.


네가 무엇을 보느냐

예레미야가 본 것은 무화과 두 광주리였다. 한 광주리에는 처음 익은 듯한 극히 좋은 무화과가 담겨 있었고, 다른 한 광주리에는 나빠서 먹을 수 없는 극히 나쁜 무화과가 담겨 있었다. 무화과나무는 포도나무·감람나무와 더불어 유대인들에게 매우 사랑받던 나무이다. 사사기 9장 8절 이후에 나오는 요담의 우화는 그러한 사실을 잘 반영하고 있다. 무화과는 음식의 단맛을 내는데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종기를 치료할 때도 사용되었다(왕하20:7절 참조). 예레미야가 성전 앞에서 본 무화과 두 광주리는 두 부류의 유다 백성을 가리킨다.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3a). 예레미야는 자기가 본 대로 대답한다. 그후에 여호와께서 그가 본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밝혀주신다. "내가 이 곳에서 옮겨 갈대아인의 땅에 이르게 한 유다 포로를 이 좋은 무화과 같이 잘 돌볼 것이라"(5). 극히 좋은 무화과는 여고냐와 함께 포로로 잡혀간 이들을 가리킨다. 아니, 이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본문은 포로민들의 이주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일어난 일이라고 명확하게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옮기다'와 '이르게 하다'라는 동사를 가능케 한 행위주체는 바벨론이 아니라 여호와라는 것이다. 절망의 어둠 속에서도 희망을 견지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그렇게도 신랄하게 지도자들의 죄를 공박했던 예언자의 언어가 이 지점에서 이렇게 바뀐 까닭이 무엇일까? 잡혀간 이들이 죄가 없다는 말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여호와께서 예언자를 통해 전하려는 것은 그들의 죄상에 대한 고발이 아니라 회복의 메시지이다. 그들이 신앙적으로나 도덕적으로 깨끗한 사람들이었기에 '극히 좋은 무화과'라 일컬으신 것은 아니다. 그동안 감내해왔던 시련과 고통이 그들의 낡은 생각과 헛된 자부심을 깨뜨렸기에 비로소 새롭게 빚어질 준비가 되었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 


"내가 그들을 돌아보아 좋게 하여 다시 이 땅으로 인도하여 세우고 헐지 아니하며 심고 뽑지 아니하겠고 내가 여호와인 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이 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6-7)


여호와는 남의 땅에서 포로살이를 하는 이들을 잘 지켜 보면서 잘 되게 하겠다 이르신다. 그리고 그들을 본토로 인도하시어 새로운 나라를 이루게 해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세우다' '헐다', '심다'와 '뽑다'는 이미 1장 10절에서도 사용된 단어군들이다. 45장 4절에도 등장한다. 예레미야서에서는 이 단어 짝들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호와는 그들에게 당신을 주로 알아볼 수 있는 마음을 주겠다고 약속하신다. 히브리어에서 '안다'는 단어는 객관적 지식이나 정보를 이르는 말이 아니라 아주 친밀한 사귐을 이르는 말이다. 하나님이 더 이상 추상이나 관념이 아니라 가슴 떨리는 현실이 될 때, 그래서 그들이 전심을 다하여 여호와께 돌아올 때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다.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는 문장은 시내산 계약이 맺어질 때에 사용된 구절의 변형태이다. 이로써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바벨론으로부터의 구출을 예레미야가 제2의 출애굽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시드기야와 그 고관들과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사람들과 애굽으로 삶의 터전을 옮겨 살고 있는 이들은 나빠서 먹을 수 없는 무화과처럼 버려질 것이다. 본토에 남은 이들은 헛된 자만심에 사로잡힌 채 살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살육이나 포로생활을 면하고 자기 땅에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무죄의 증거로 받아들이고 싶었을 것이다. 자기에게 철저히 절망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희망이 유입되기 어려운 법이다. 애굽으로 이주한 이들은 바벨론이 세웠던 그다랴 암살 사건 이후에 바벨론의 보복이 두려워 달아난 자들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당신의 뜻을 거스른 채 제 살 길을 찾아나섰던 이들을 여호와는 나쁜 무화과라 이르신다. 제 잘못을 참회할 줄 모르는 이들, 제 살 길을 찾아 나선 이들이 맞이할 운명은 역설적이다. 그들은 세상 여러 나라 가운데 흩어져 살면서 환난을 당하게 될 것이다. 머무는 곳이 어디든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고 조롱과 저주를 받게 될 것이다. 칼과 기근과 전염병에 시달리다가 결국에는 멸절되고 말 것이다. 


살 길을 찾아 나선 것이 그렇게도 큰 죄인가? 학자들은 이 본문이 바벨론 포로민 공동체에서 형성된 자료를 바탕으로 재구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한다. 자기를 돌아보지 않고 항상 문제를 타자에게서 찾는 이들이 있는 곳에는 평화가 깃들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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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청자(16 05-01 10:05)
귀한 글 때문에 예레미야를 깊이 읽고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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