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희망과 절망의 갈림길 2016년 06월 16일
작성자 김기석

 희망과 절망의 갈림길


스페인 북부에 있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삼십 여일 동안 걷고 돌아온 지인의 얼굴은 건강한 구릿빛이었다. 어떤 그리움이 그를 이끌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처리해야 할 일상의 많은 일들을 내려놓고 홀가분하게 떠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부럽기만 했다. 길 위에 선다는 것은 수많은 위험 앞에 자기를 노출하는 것이고, 따라서 취약해지는 일이다. 그 취약함이야말로 사람을 겸허하게 만든다. 자신이 모든 상황을 통제할 수 없기에 신의 은총을 구하지 않을 수 없고,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여러 위험이 예기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순례길에 나서는 것은 지긋지긋한 일상의 인력에서 벗어나 자신의 진면목을 되찾고 싶다는 바람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순례자는 다시 후터분한 일상의 자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지인에게 순례를 마치고 돌아온 느낌이 어떠한가 물으니 마치 중력이 세 배 쯤 되는 공간에 들어온 것 같다고 말했다. 지금 대한민국의 현실을 그보다 더 실감나게 표현하는 말은 없을 것 같다. 굵직굵직한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 현실을 대면하며 사는 동안 우리 발은 점점 진창 속에 빠져들고, 영혼에는 시퍼런 멍이 들었다. 타자를 받아들일 내적 여백이 줄어들면서 사람들은 언제든 화를 낼 준비를 갖추고 산다. 묻지마 범죄, 혐오 범죄가 늘어나면서 세상은 점점 위험한 곳으로 변하고 있다. 그런 범죄는 언제나 사회적 약자들에게 집중된다. 사람들이 세상을 적대적 공간으로 인식할 때 평화는 교란되게 마련이다. 디스토피아가 열리고 있는 것일까?


인류 최초의 살인자인 가인은 에덴의 동쪽 놋 땅으로 이주하였다고 한다. 놋은 히브리어로 '유리하다', '방황하다'라는 뜻이다. 함께 살아야 할 형제를 경쟁 대상으로 보아 제거한 인간의 운명이 그 지명 속에 반영되어 있다. 사랑의 관계가 무너진 자리에 들어서는 것은 근원적인 불안감이다. 그 불안감을 떨치고 살아가지 못하는 모든 이들은 놋 땅의 주민이다. 급격하게 적대적 공간으로 변하고 있는 이 세상의 흐름을 돌이킬 수는 없는 것일까? 많은 이들이 그런 절망감에 빠져들고 있다. 이제는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희망은 있는 것일까?


희망은 하늘에서 내려오거나 땅에서 솟아나는 것이 아니라 검질기게 희망의 씨를 뿌리는 이들을 통해 이 땅에 유입된다. 프랑스인들이 가장 존경한다는 아베 피에르 신부는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구분은 '믿는 자'와 '안 믿는 자'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홀로 만족하는 사람과 공감하는 사람 사이에, 다른 사람들의 고통 앞에서 등을 돌리는 사람과 고통을 나누려는 사람 사이에 있다고 말한다. 믿는 사람 가운데도 홀로 만족하는 이들이 많고, 믿지 않는 이들 가운데도 다른 이들의 고통을 덜어주려고 애쓰는 이들이 있다. 누가 참 사람인가? 적대의 공간을 환대의 공간으로 바꾸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 아닐까?


지금 인천공항 송환 대기실에는 시리아 난민 28명이 머물고 있다. 내전 상황에 돌입한 고국을 떠나 안심하며 살 수 있는 땅을 찾아 떠돌던 이들이다. 그들은 지난 11월에 이 땅에 도착했지만 아직 입국 허락을 받지 못한 채 그곳에서 난민 생활을 하고 있다. 아랍권에서 오랫동안 살았던 김동문 목사는 그들의 처지를 딱하게 여겨 필요한 것을 공급하려고 애쓰고 있다. 떠나온 땅에 대한 그리움에 시달릴 이들의 마음을 헤아려서 시리아 사람들이 즐겨 먹는 말린 대추야자와 양젖으로 만든 음류수 아이란 등을 제공했고, 시리아 사람들이 찻집에 앉아 체스를 두던 풍경을 떠올리며 체스를 공급하기도 했다. 세심한 배려이다. 희망은 낯선 이들의 시린 마음을 품어 안으려는 마음에서 발생하고, 절망은 그들에 대한 혐오와 배제에서 움터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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