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비록 정답 없는 삶이라 해도 2017년 09월 23일
작성자 김기석

 비록 정답이 없는 삶이라 해도


지금 이 세상 어디선가 울고 있는 사람은,

까닭 없이 이 세상에서 울고 있는 사람은,

나 때문에 우는 것이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엄숙한 시간' 중에서


• 회탁의 거리에서

  나이가 들면 삶이 쉬워질 줄 알았다. 그러나 누적되는 시간의 무게만큼 삶은 오히려 무거워진다. 한때 분명해 보이던 것들이 모호하게 보이고, 세상은 흑과 백으로 나눌 수 없다는 사실만 점점 뚜렷해진다. 돌아보면 시간 속을 뭉그적거리며 기어온 흔적이 어지럽다. 일상의 소음으로부터 잠시만 비껴 서 있어도 낯익은 손님인 허무감이 저만치에 서성이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삶은 아득하고 막막하다. 이상의 <날개> 중에 나오는 한 대목이 자꾸만 떠오른다. 미쓰코시 백화점 옥상에 올라간 '나'는 그곳에서 거리를 내려다본다.


"나는 또 회탁의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거기서는 피곤한 생활이 똑 금붕어 지느러미처럼 흐늑흐늑 허비적거렸다. 눈에 보이지 않는 끈적끈적한 줄에 엉켜서 헤어나지들을 못한다. 나는 피로와 공복 때문에 무너져 들어가는 몸동이를 끌고 그 회탁의 거리 속으로 섞여 들어가지 않는 수도 없다 생각하였다."


  일상을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이의 눈에 세상은 '회탁의 거리'이다. 잿빛으로 흐려 무엇 하나 선명하게 보이지 않는다. 희노애락애오욕의 칠정이 난무하는 세상이지만 권태에 사로잡힌 이의 눈에는 그 모든 게 잿빛으로 보인다. 눈에 보이지 않는 끈적끈적한 줄에 엉킨 채 살아가는 일상이 가끔은 가련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산정을 향해 돌을 밀어 올리는 시지프의 투쟁처럼 생기 없는 무의미가 확고하게 우리 삶을 사로잡기도 한다. 일단의 철학자들이 인간을 가리켜 세상에 내동댕이쳐진 존재라 말했던 것은 삶의 막막함을 달리는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에덴 이후 인간을 사로잡은 근본 기분은 '불안'이다. 불안은 자기와의 불화에서 비롯되는 감정이다. 불안은 일상에 몰두하여 살아가는 우리 앞을 벽처럼 막아선 채, 너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이냐고 묻는다. 그 낯선 질문 앞에서 우리는 휘뚝거린다. '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나는 왜 없지 않고 있는가?' '인간(human-being)의 과제는 인간이 되는 것(being-human)이라는 데, 인간이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짓궂기는 하지만 불안으로부터 비롯된 이러한 질문들이 우리를 본래적인 삶으로 유인한다. 16세기의 수도사인 십자가의 성 요한은 영혼의 여정에 올랐다가 좌절을 맛본 이들에게 이렇게 권한다.


"보다 쉬운 것보다 보다 어려운 것을,

보다 맛있는 것보다 보다 맛없는 것을

보다 즐거운 것보다 차라리 덜 즐거운 것을

쉬는 일보다도 고된 일을

위로 되는 일보다도 위로 없는 일을

보다 큰 것보다도 보다 작은 것을

보다 높고 값진 것보다 보다 낮고 값없는 것을

무엇을 바라기보다 그 무엇도 바라지 않기를

세상의 보다 나은 것을 찾기보다 보다 못한 것을 찾아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하여

온전히 벗고, 비고, 없는 몸 되기를 바라라."

(십자가의 성요한, <가르멜의 산길>, 최민순 옮김, 성바오로출판사, 1993년 12월 15일, p.90)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질문을 뒷전으로 밀어내고는 일상의 일에 몰두한다. 그런 물음은 예술가나 철학자들에게 맡기면 된다고 생각한다. 폴 고갱의 대작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를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바라보지만, 돌아서는 순간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를 염려한다. 먹고 사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 가끔 비참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 일상의 무게

  아, 그러나 삶이 그렇게 비장하고 우울하고 사소한 것만은 아니다. 시선을 바꾸기만 하면 삶은 또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신비하지 않은가? 내가 이 세상에 있다는 것, 이 광막한 우주 가운데 티끌에 불과한 내가 무한에 대해 묻고 생각한다는 것, 자기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 마침내 태초와 만나고 싶어한다는 것, 이게 기적이 아니면 무엇이 기적이겠는가. 삶이 비애감으로만 충일한 것은 아니다. 바닷물 속에 들어갔다가 아침이면 어김없이 말갛게 씻긴 얼굴로 떠오르는 해(박두진)처럼 기쁨과 즐거움도 그렇게 찾아온다. 성경은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당신의 뜻대로 지어진 세상을 보며 '좋다'고 하셨다고 말한다. 그 '좋음'이 모든 존재의 바탕이다. 마땅히 그러한(자연) 세상 속에는 신의 숨결이 깃들어 있다. 야스퍼스는 그것을 초월자의 암호라 했다. 그 암호를 해독할 줄 아는 사람은 빈곤하지 않다. 


  회탁의 거리에서 바장이다가도 길가에 피어난 풀꽃 하나에 붙들릴 때가 있다. 윌리엄 블레이크가 '순수의 전조'에서 노래한대로 "한 알의 모래알 속에서 세계를 보며/한 송이 꽃 속에서 하늘을" 보지 못하고, "손바닥에 무한을 쥐고/한 순간에 영원을" 담지는 못한다 해도 인간은 늘 신비 앞에서 몸을 떤다. 함석헌 선생은 "나 자신 속에 잠자고 있던 그 우주적인 정신이 내 앞에 지금 나타난 그 대상으로 인하여 깨어나는 것"이 바로 감격이라 했다. 얼마나 놀라운 말인가. "산을 보고 기뻐할 때는 나 자신 속에 높음을 본 것이요, 바다를 보고 시원해 할 때는 나 자신이 넓어진 것이며, 성인의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릴 때는 나 자신이 거룩해진 것이다".


  별들이 쏟아져 내리는 것처럼 보이는 은하수나 장엄한 설산만이 우리에게 영원을 직관하게 하지는 않는다. 놀이터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경쾌한 웃음소리, 눈빛만으로도 장편소설을 쓰는 연인들의 시선, 다정하게 손잡고 아슬아슬하게 걸어가는 노인들의 발걸음, 구슬땀을 흘리며 일에 몰두하는 노동자들, 우는 이의 곁에 다가가 말없이 그의 설 땅이 되어주는 사람들….


  문제는 일상의 무게가 우리에게서 '먼 빛의 시선'을 앗아간다는 사실이다. 산다는 것은 좋든 싫든 자기 외부 세계와 접촉한다는 뜻이다. 그 외부 세계는 자연일 수도 있고, 사람일 수도 있고, 역사일 수도 있다. 외부 세계는 가끔은 친밀한 얼굴로 우리에게 다가오지만, 대개는 무심한 얼굴로 다가온다. 아주 가끔은 적대적 얼굴로 다가온다. 외부 세계는 우리의 통제를 받아들이지 않을 때가 많다. 외부 세계만 문제인 것은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되고 싶은 나'와 '현실의 나'가 불화하는 경우가 많다. 그 간극이 클수록 삶의 긴장은 더 커진다. 그 불화로 인해 깊은 좌절감을 맛보는 이들도 있지만, 대개는 자기기만을 통해 그러한 불화를 호도하려 한다. 그래야 그나마 살 수 있기 때문이다. 할 수 있는 한 자기와의 대면을 짐짓 회피하거나 연기한다. 일이나 이념에 몰두하는 사람들도 있고, 도취될만한 대상을 찾아 거기에 자기를 맡기는 이들도 있다.


• 부조리한 세상

  부끄러운 자기 얼굴과 대면하지 않는 동안 우리 속에는 허위의식이 자라난다. 가짜-나를 진짜처럼 여기고 사는 것이다. 진짜-나는 가뭇없이 멀어지고, 가짜-나가 나를 확고히 사로잡을 때 소외는 완성된다. 허위의식 없이 자기를 돌아볼 수 있을까? 자기 영혼의 비참과 참상과 대면한다는 것이 썩 유쾌한 일만은 아니다. 외부와의 불화든 자기 자신과의 불화든, 모든 불화는 고통이다. 그런데 그 고통을 불모의 고통으로 만들 것인지 창조적 고통으로 만들 것인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바로 이것이 우리에게 허용된 자유이다. 허위의식 없이 자기를 대면하는 것이 존재의 용기이다. 깊은 우물 속을 들여다보듯 자기를 들여다 볼 때, 그 심연 저편에서부터 한줄기 빛이 새어나오는 경우가 있다. 일상적 세계와 비일상적 세계의 접점에서 만나는 그 빛은 우리를 새로운 현실 앞으로 인도한다. 우리가 의지하고 있던 좁은 지평이 물러가면서 더 큰 지평이 열리는 것이다. 삶의 성숙이란 그런 지평을 지양해가면서 존재의 대양을 바라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살다보면 부조리의 감정이 우리를 엄습할 때가 많다. 부조리란 의미를 찾을 수도, 구성할 수도 없는 상황을 일컫는 말이다. 어느 날 문득 삶의 무상성에 사로잡힐 수도 있고, 삶의 이유가 모호해지는 때가 있다. 세상 전체와 단절된 것 같은 고적감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어떤 이는 그것을 인간의 조건이자 숙명이라 말한다. 사람이기에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감정이라는 말일 것이다. 사실 그것은 '존재의 호출'이지만 그것을 알아차리는 이들은 많지 않다. 막연한 부조리의 감정도 우리를 힘들게 하지만, 세상에서 벌어지는 많은 일들이 우리를 부조리의 무대에 소환하곤 한다. 


  무죄한 자의 고통이 가장 좋은 예이다. 우리의 도덕적 감정은 착하고 선하게 사는 이들이 복을 받고, 악인들이 응분의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실은 번번이 그런 우리의 기대를 배신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마5:45)고 고백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지혜자인 코헬렛은 "이 세상에는 권력 쥔 사람 따로 있고, 그들에게 고통받는 사람 따로 있음을 알았다"(전8:9)고 말한다. 그는 부조리로 가득 찬 세상을 이렇게 고발한다. "이 세상에서 헛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악한 사람이 받아야 할 벌을 의인이 받는가 하면, 의인이 받아야 할 보상을 악인이 받는다. 이것을 보고, 나 어찌 헛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전8:14) 전도서에 넘치는 '헛되다'는 외침은 이런 현실에 대한 통렬한 아픔에서 빚어진 것이다.


  자연재해나 갑작스런 사고는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도덕 감정이나 판단이 들어설 여지가 전혀 없다. 지진과 쓰나미 앞에서 속절없이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며 우리는 다만 입을 다물 뿐이다. '왜?'라는 물음조차 이런 일들 앞에서 흩어져버린다. 성경에서 가장 비극적인 인물 욥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렇게도 경건하고 착하게 살았던 사람에게 닥쳐온 느닷없는 재앙 앞에서 우리는 다만 입을 가릴 뿐이다. 하루아침에 재산을 다 잃고, 생때 같은 자식들은 다 불귀의 객이 되었다. 그렇게도 조심조심 걸어왔건만,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기 위해 최선을 다했건만 욥에게 주어진 보상은 너무 참혹하다. 굳건하다고 여겼던 터전이 사정없이 흔들린 것이다. 절망에 빠진 아내조차 차라리 신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욥에게 악다구니를 쓴다. 그렇게도 분명해보였던 신은 부재하거나 낯선 존재가 되고 말았다.


신의 정의는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욥은 자기 태어난 날을 저주한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그런 고통을 맛보지 않았을 것이라고 절규한다. 하나님의 정의에 이의를 제기한다. 기어코 하나님의 법정 앞에 서서 시시비비를 가려보고 싶다고 말한다. 불행에 직면한 친구를 위로하기 위해 불원천리하고 찾아왔던 벗들의 우정은 욥의 거친 말 앞에서 무너지고 만다. 그들은 더 이상 위로자가 될 생각이 없었다. 그들은 신의 변호자를 자처한다. 욥이 겪는 고통은 그가 저지른 죄에 대한 응분의 보상이라는 것이다. 처음에 친구들은 욥의 죄가 무엇인지 분명히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욥이 죄를 인정하지 않자 그들의 말은 거칠게 변해 간다. 악을 혀 밑에 넣고 그 달콤한 맛을 즐기는 사람들, 가난한 이들을 억압하고 돌보지 않는 사람들, 남의 것을 강제로 빼앗은 '악한 자들'에게 형벌의 때가 급작스럽게 닥쳐온다고 말한다. 친구들은 그 악한 자가 욥이라고 명토박아 말하지 않지만, 그것이 욥을 겨냥한 말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 수 있다. 고통도 고통이려니와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은 억울함과 외로움, 그리고 생의 무의미성에 대한 자각이었다. 욥은 다시 신에게로 시선을 들어올린다. "내가 지은 죄가 무엇입니까?" "어찌하여 주님께서 나를 피하십니까?"(욥13:23, 24) 하나님은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침묵과 부재가 그를 괴롭힌다. 


"그러나 동쪽으로 가서 찾아보아도, 하나님은 거기에 안 계시고, 서쪽으로 가서 찾아보아도, 하나님을 뵐 수가 없구나. 북쪽에서 일을 하고 계실 터인데도, 그분을 뵐 수가 없고, 남쪽에서 일을 하고 계실 터인데도, 그분을 뵐 수가 없구나."(욥23:8-9)


  왜 세상에는 고통이 있는 것일까? 합리적인 이유를 찾을 수 없을 때 사람들은 역사 너머로부터 답을 찾는다. 세상에 만연한 고통은 죄에 대한 신의 형벌이라는 것이다. 고대인들은 질병이나 재앙은 신의 노여움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그들은 일반인들과 격리될 필요가 있었다. 다른 이들까지 오염시킬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혐오와 수치의 대상이었다. 질병과 재앙은 그렇게 해서 사회적 소외를 심화시켰다. 예수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런 문제에 접근했다. 어느 날 제자들이 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을 보고 예수께 물었다.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요9:2) 그의 불행이 신의 저주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그들의 확고한 믿음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질병에 대한 신학적 이해나 해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려고 하는 구체적 노력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말씀하셨다. 해석에의 열망이 고통에 대한 연민을 넘어설 때 종교나 신학은 폭력이 된다.


도스또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에 나오는 이반은 '신이 없으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고 믿는 사람이지만, 정작 그를 괴롭히는 것은 '무고한 어린 아이 하나의 죽음'이다. 아무런 의미도 목적도 없는 죽음, 그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한단 말인가? 그는 신실한 믿음의 사람인 동생 알료샤에게 진리를 구입하는 데 드는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어린애들의 고통을 지불해야 한다면, 자신은 차라리 진리를 포기하겠다면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조화를 원치 않아. 인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원치 않는단 말이야. 난 차라리 보상받지 못한 고통과 함께 남고 싶어. <비록 내 생각이 틀렸다고 하더라도> 차라리 보상받지 못한 고통과 해소되지 못한 분노를 품은 채 남을 거야. 게다가 조화의 값이 너무 비싸서 내 주머니로는 입장료를 도저히 지불할 수 없단 말이야. 그래서 나는 서둘러 입장권을 되돌려보내주는 거야."(도스또예프스키,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上>, 이대우 옮김, 열린책들, 2000년 6월 15일, p.546-7)


  인류에 대한 사랑이니 뭐니 말들 하지만, 그것은 구체적으로 고통당하는 사람 앞에서 추상적인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이반은 그것을 신의 뜻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오히려 분노를 품고 그 현실과 맞서려 한다. 이때의 분노는 인류애에서 비롯된 근본 감정이다. 무고한 고통을 보고 분노할 줄 모른다면 그는 살덩이에 지나지 않는다. 무신론적인 태도로 보이지만 이반의 이런 태도가 어쩌면 신에게는 더 가상하게 보일 수도 있다.


• 고립의 길, 연대의 길

  어떤 이들은 고통이 인간에게 가져오는 선물에 주목하기도 한다. 고통이나 시련이 없다면 사람은 자기 강화의 욕망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한다. 겨울이 오기 전 자기 생명의 일부를 아낌없이 내려놓는 나무들처럼, 고통은 우리 삶에서 비본래적인 것들과 본래적인 것들을 구별하게 해준다. 고통은 삶의 구조조정을 단행하라는 메시지일 수 있다. 맹자에 나오는 이야기도 같은 지점에 주목하고 있다.


"하늘이 장차 이 사람에게 큰일을 맡기려 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그 마음과 뜻을 괴롭히고 뼈마디가 꺾어지는 고난을 당하게 하며 그 몸을 굶주리게 하고 그 생활을 빈궁에 빠뜨려 하는 일마다 어지럽게 하느니라 그러한 연유는 그의 마음을 두들겨서 참을성을 길러주어 지금까지 할 수 없었던 어떠한 사명도 감당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니라."(故로 天將降大任於是人也신댄 必先苦其心志하며 勞其筋骨하며 餓其體膚하며 空乏其身하여 行拂亂其所爲하나니 所以動心忍性하여 增益其所不能이니라", 고자 장구下15)


  고통을 통해 더 나은 존재가 되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곧 고통의 이유라고 말할 수는 없다. 나치의 절멸 수용소에서 죽어간 사람들, 세월호에 갇힌 채 공포의 시간을 견디다 죽어간 사람들, 증오 범죄의 희생자가 된 사람들, 종교적 근본주의자들에 의해 테러의 표적이 된 사람들은 우리의 인간성을 묻는 물음표로 우리 앞에 서 있다. 이런 악을 배태한 현실에 대해 예리하게 분석하고 재발 방지를 위해 노력하는 것은 살아있는 이들의 마땅한 의무이다. 


  칼 야스퍼스는 <독일의 죄에 대한 물음들>이란 책에서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네 가지 죄책을 말한다. 범죄적 죄책, 정치적 죄책, 도덕적 죄책, 형이상학적 죄책이 그것이다. 범죄적 죄책은 구체적이며 객관적인 잘못에 대한 죄책이다. 정치적 죄책은 국가의 범죄 행위에 대해 동조하거나 방조한 데서 비롯되는 죄책이다. 저항하지 못한 죄책 말이다. 도덕적 죄책은 자기의 양심과 내면에 대한 성찰에서 비롯되는 죄책이다. 문제는 형이상학적 죄책이다. 이것은 다른 인간들과의 연대성의 결여에서 나온다. 우리가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죄라는 말이다. 너무 과민한 것 아닌가 싶지만 모든 존재의 심연에 놓여있는 슬픔의 지층과 대면한 이들이라면 이 말의 깊이를 느낄 수 있다. 식민지 청년 윤동주는 자유를 박탈당한 채 굴종의 세월을 살 수밖에 없었던 동시대인들의 슬픔과 깊이 조우했다. '서시'에 나오는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라는 구절은 그런 슬픔의 심연에 접속한 이의 억눌린 함성이다.


  부조리는 문학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 그 자체가 부조리이다. 부조리에 직면하는 순간 대립과 단절, 그리고 혼돈이 찾아온다. 부조리 앞에서 인간이 취할 수 있는 행동은 무엇일까? 자살이 답일까? 자살은 인생에 패배했음을 자인하는 것이 아닐까? 욥은 결국 '왜?'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하나님으로부터 듣지 못했다. 영문 모를 고통 앞에서 인간 인식은 좌절된다. 인식의 좌절이 곧 존재의 마침은 아니다. 삶은 비장하다. 정답이 없는 삶을 살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 앞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고립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연대의 길이다. 고립의 길은 똑같은 물음을 안고 살아가는 이웃들에게 등을 돌린 채 욕망을 따르는 길이고, 연대의 길은 이웃의 곁으로 다가서기 위해 욕망을 거스르는 길이다. 기독교는 연대의 길을 참 생명의 길이라 가르친다. 인간의 소명은 자기를 초월하는 것 혹은 누군가의 고향이 되어 주는 것이라는 것이다. 욥기의 말미에 하나님은 엘리바스에게 욥을 찾아가 용서를 구하라 이르면서 이렇게 말한다. "내 종 욥이 너희를 용서하여 달라고 빌면, 내가 그의 기도를 들어줄 것이다"(욥42:8). 고통 받은 자가 오히려 다른 이들을 위해 중보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게 바로 참 사람의 길이라는 것이다.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 나오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온다고 약속했지만 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리다가 존재론적 권태에 빠진다. 어느 순간 장님이 되어 길에 넘어진 포조의 살려달라는 절박한 외침이 들려온다. 부조리한 세상에서는 누군가를 도와주는 행위 자체도 무의미하다. 하지만 망설이던 블라디미르가 에스트라공에게 한 말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포조의 저 외침이 특정인을 향한 것이 아닐지라도, 그 자리에는 자기들 둘 밖에 없기에 싫건 좋건 그 소리에 응답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불행히도 인간으로 태어난 바에야 이번 한 번만이라도 의젓하게 인간이란 종족의 대표가 돼보자는 거다." 무의미를 이기는 힘은 누군가의 이웃이 되는 데 있다.


베를린 시내에는 나치 시대의 순교자들을 기념하여 세운 교회가 있다. 그 교회에는 창문이 없다. 빛은 오직 천장에 있는 빛이 투과되는 십자가 형태의 알라바스터를 통해서만 유입된다. 창문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흑백 톤의 커다란 그림이 걸려 있는데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비유를 형상화해놓은 것이다.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로 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어 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마태25:35-36). 그 예배당을 설계한 사람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내게는 한 가지 깨달음이 계시처럼 다가왔다. 악한 세상에 의해 타자화된 사람들에 대한 연민, 환대, 돌봄이야말로 암흑과 같은 세상에 빛이 유입되는 통로가 아닐까 싶었던 것이다.


유대인들은 아이들에게 "네가 태어나기 전 세상보다 네가 떠날 때의 세상이 더 나은 곳이 되게 살라"고 가르친다 한다. 이것을 한 마디로 요약한 것이 '티쿤 올람'(tikkun olam)이다. '세상을 고친다'는 뜻이다. 너무 큰 과제인 것 같지만, 이런 과제를 능동적으로 어깨에 짊어질 때 삶의 비애는 줄어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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