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청년편지17 2018년 12월 05일
작성자 김기석
예수를 외롭게 하지 말라

평안하신지요?
날이 갈수록 우리가 나그네라는 사실이 점점 실감납니다. 세상이 어찌나 빨리 변하는지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습니다. 다람쥐는 머리 위 하늘에 떠있는 구름을 기준점으로 삼아 도토리를 숨겨놓는다고 하지요? 무상한 것을 기준점으로 삼는 그 귀여운 어리석음 덕분에 산은 푸르러진다고 합니다. 먹이가 되지 않은 도토리가 나무로 자라는 법이니까요. 가끔은 어리석기 이를 데 없는 우리 선택이 오히려 역사 변혁의 단초가 되기도 하는 것일까요? 트럼프가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을 때 눈 밝은 이들은 미국의 선택을 조롱했습니다. 미국의 친구들은 고개를 들 수 없다고 통탄하기도 했지요. ‘미국 우선!’을 외치며 그가 취하는 일들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에 반하는 것처럼 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가 아니었다면 분단체제의 담을 조금씩 허무는 일이 가능했을까 반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미국의 정치적 외교적 문법 혹은 관행에 익숙하지 않은 그였기에 이런 극적인 모멘텀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은 것이지요. 

이제 우리는 조금씩 평화로운 통일이 구호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조금씩 실감하고 있습니다. 기억나지요? 남북의 정상들이 손을 잡은 채 군사분계선을 넘나들고, 도보다리를 산책하며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던 모습 말입니다. 카메라가 30분 가까이 잡고 있던 그 장면은 오랫동안 잊혀질 것 같지 않습니다. 들리는 것이라고는 새소리와 바람 소리 뿐이었는데, 소리 전문가의 분석에 의하면 2종의 여름 철새와 9종의 텃새 소리가 그 장면을 장식했다고 합니다. 박새, 흰배지빠귀, 청딱따구리, 직박구리, 산솔새 등이 지저귀는 소리조차 없었다면 그 장면이 지루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북미의 정상들이 무려 70년이 넘는 적대의 시간을 지나 악수를 나누고 예의를 갖춰 담소를 나누는 모습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전쟁의 도화선에 불이 붙기 일보직전까지 갔던 이들이 비핵화와 종전선언을 넘어 평화체제 구축까지도 염두에 둔 채 만났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역사입니다. 이것이 한 여름 밤의 꿈이 되지 않으려면 이 잔약한 평화의 불씨를 소중히 간수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여전히 서로를 미덥지 않게 바라보는 이들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평화는 우리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가치이기에 담대하게 평화의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예언자들의 두 가지 직무는 불의한 세상과 권력자들을 고발하는 것과 상처 입은 백성들을 위로하고 하늘의 꿈을 심어주는 일입니다. 참 예언자들이 고발하는 직무에 치중하는 것처럼 보이는 게 사실이지만, 그 고발과 탄핵은 그 자체로 끝나지 않습니다. 예언자들은 정의가 강물같이 흐르는 세상을 꿈꾸었습니다. 제국이 발흥해서 주변 세계를 강압적으로 복속시킬 때, 그래서 전쟁이 일상이 되었을 때, 예언자들은 엉뚱한 꿈을 꾸었습니다. 사람들이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드는 세상의 꿈, 나라와 나라가 칼을 들고 서로를 치지 않는 세상의 꿈, 사람들이 더 이상 전쟁 연습을 하지 않는 세상의 꿈(사2:4, 미4:3),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살며,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새끼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풀을 뜯고, 어린 아이가 그것들을 이끌고 다니는 꿈(사11:6) 말입니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꿈입니다. 세상의 오랜 어둠에 시달린 이들은 이런 꿈조차 꾸지 못합니다. 꿈을 꾸는 이들은 몽상가 취급을 받습니다.

구약성서학자인 월터 브루그만은 <마침내 시인이 온다>라는 책머리에 월트 휘트먼의 시집 <풀잎> 가운데 나오는 시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바다를 모두 건넌 뒤에, (이미 건넌 것으로 보이지만)/위대한 선장들과 기관사들이 제 일을 완수한 뒤에,/고귀한 발명가들, 과학자들, 화학자들, 지질학자들, 민족학자들 뒤에, 마침내 시인이라 불릴 만한 사람이 오리라./하나님의 참 자녀가 와서 제 노래를 부르리라.” 기존의 세계에서 더 이상 출구를 찾을 수 없을 때 마침내 시인이 도래합니다. 시인은 다른 세상을 상상하는 사람입니다. 브루그만은 설교자들이 병든 세상에 마주선 대안의 세상을 시적으로 구성할 책임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언자들은 모두 시인이고, 예수님도 역시 시인입니다. 정호승 시인은 ‘시인 예수’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는 모든 사람을/시인이게 하는 시인//사랑하는 자의 노래를 부르는/새벽의 사람//해 뜨는 곳에서 가장 어두운/고요한 기다림의 아들//절벽위에 길을 내어/길을 걸으면//그는 언제나 길 위의 길//절벽의 길 끝까지 불어오는/사람의 바람“. 절벽 위에 길을 내는 사람, 그가 시인입니다. 신학자요 성서번역가요 통일운동가였던 문익환 목사님은 예언자적 계보를 잇는 시인이었습니다. 그의 시 ‘꿈을 비는 마음’은 역사의 발전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아름다우면서도 처연한 시어 속에 담아내고 있습니다.

“개똥같은 내일이야
꿈 아닌들 안 오리야마는
조개 속 보드라운 살 바늘에 찔린 듯한
상처에서 저도 몰래 남도 몰래 자라는
진주 같은 꿈으로 잉태된 내일이야
꿈 아니곤 오는 법이 없다네“

예수님도 꿈꾸는 사람이었습니다. 로마 제국의 가혹한 통치가 사람들의 삶을 거덜내고 있을 때, 사람들이 모두 악몽같은 폭력의 기억에 사로잡혀 있을 때,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꿈을 사람들 속에 심어주셨습니다. 지배와 피지배로 갈리는 세상 질서를 해체하고, 모두가 영원한 고향이신 하나님 안에서 우정을 누리는 세계를 꿈꾸셨다는 말입니다. 믿는 이들은 그 꿈에 동참할 것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차이와 차별을 영속화하는 세상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마땅히 가야 할 길을 잊기 일쑤입니다. 생존이 문제가 되는 상황 속에 오래 머물다 보면 사람들은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지게 마련입니다. 가난과 억압이 일상이 된 세계에서 사람들의 관심은 자기를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더 큰 세계를 가리켜 보여야 할 종교도 제 역할을 하지 못한 채, 또 다른 권부가 되어 사람들을 억압했습니다. 거룩한 삶이 가뭇없이 사라진 자리에 차가운 거룩의 정치만 남았습니다. 예수님은 거룩의 정치학을 넘는 자비의 정치학을 사람들에게 가져오셨습니다. 자비(compassion)는 ‘함께 아파하는 사랑’(痛愛)입니다. 이런 사랑 앞에서 너와 나를 가르던 분리의 장벽은 무너지게 마련입니다. 하나님 통치는 바로 장벽의 철폐로 나타납니다.

후기 자본주의 시대인 오늘 예수의 꿈은 어찌 되었나요? 사회는 꾸준히 진보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권위주의의 엔진 역할을 하던 낡은 가치관이 조롱거리가 되고, 우리 의식과 무의식을 옥죄던 분단의식도 서서히 무너지고 있습니다. 사회가 조금씩 자정 능력을 갖춰가면서 권력형 부정과 부패의 가능성도 현저히 줄어들고 있습니다. 물론 옛 세계의 반격 또한 만만치 않은 게 사실이지만 대세를 뒤흔들 정도는 아닙니다.

문제는 종교계입니다. 좁혀서 교회라고 할까요? 전래 초기에 교회는 계몽의 주체 역할을 톡톡히 해냈습니다. 지난 세기 중반 이후에는 폭력과 억압에 맞서는 보루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교회는 계몽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개신교회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뭔가 하는 질문에 사람들은 배타성, 소수자 혐오, 세습, 반공주의, 태극기 집회, 기복 신앙, 헌금 강요 등을 떠올리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미 개신교회는 맛 잃은 소금처럼 길에 버려진 신세가 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안타깝지만 이게 우리의 적나라한 현실입니다. 이런 현실을 직시할 용기가 필요합니다.

2018년은 미국의 기독교계에서도 기억할 만한 해입니다. 지난 해 연말, 미국의 평화 잡지인 ‘소저너스Sojourners’의 발행인 짐 월리스Jim Wallis가 제창한 ‘트럼프 복음주의자들로부터 예수를 되찾자’는 제안에 많은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마음을 모았습니다. 트럼프 복음주의자들이란 보수적인 백인 복음주의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들은 인종주의에 기대 세상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미국 우선’ 정책의 절대적 지지자들입니다. 그 운동에 동참한 신학자들은 미국의 국가 정신과 신앙의 고결함이 지금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다고 진단하면서 “위기 시대의 신앙 고백“(A Confession of Faith in a Time of Crisis)이라는 문서를 발표했습니다. 그 문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들은 국적, 정치적 진영, 인종, 민족, 성, 지역 등의 여타의 정체성을 뛰어넘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또 교회의 역할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사랑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인데, 그런 교회의 역할이 정치에 의해 곡해될 때, 신앙의 지도자들은 일어서서 외쳐야 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교회는 정부의 주인이나 종이 아니라 정부의 양심이 되어야 한다“는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의 견해에 깊이 공감을 표하면서, 예수가 진정 주님이라면, 다른 어떤 권위도 절대적일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 문서는 여섯 가지 항목의 신앙고백을 하는 동시에 그 고백에 근거하여 거절할 수밖에 없는 부정적인 현실을 예시하고 있습니다.

사실 하나하나 다 깊이 새겨보아야 하지만 지면이 제한되어 있으니 그 내용을 다 다룰 수는 없지만 몇 대목만은 꼭 소개하고 싶습니다. 문서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다고 믿기에 인종적 편협함은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잔혹한 부인이라고 고백합니다. 따라서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는 백인 우월주의와 인종주의에 반대하는 것은 믿는 이들의 마땅한 의무입니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는 인종, 성, 정체성, 계급에 따른 어떤 억압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여성 혐오, 학대, 성폭행, 성추행과 모욕은 하나님에 대한 도전입니다. 가정과 교회 공동체, 일터와 정치 무대에서 여성들이 존중받는 풍토를 만들어야 합니다. 굶주린 사람, 목마른 사람, 헐벗은 사람, 낯선 사람, 병든 사람, 갇힌 사람을 어떻게 대하느냐가 곧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하는 방식입니다. 이민자들과 난민들을 함부로 대하고, 병든 이들의 치유 받을 권리를 보호하지 않는 정치는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정치입니다. 정치 지도자들의 공적인 거짓말은 신뢰의 토대를 허물어 사회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기에 지도자들은 더욱 자기들의 언어에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적인 리더십은 지배가 아니라 섬김이기에 선출된 공직자들은 그 사실을 늘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특정한 나라의 경계 안에 갇혀 있어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미국 우선’이라는 구호는 신학적 이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마간산 격으로 살펴보았습니다만 이 문서는 한국교회를 돌아보는 좋은 거울이 될 것 같습니다. 사실 짐 월리스가 제안했던 ‘예수를 되찾자Reclaiming Jesus’는 구호는 매우 도발적입니다. 예수가 누군가에게 포로로 잡혀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가장 잘 믿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이 어쩌면 예수를 가두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씨네 형제들’에 나오는 ‘대심문관’ 장에서 최고 권력자인 대심문관은 한 밤중에 감옥에 갇힌 예수를 찾아와 ‘당신은 오지 말았어야 했다’고 말합니다. 그는 지금까지 교회는 사람들에게서 자유를 담보로 잡은 대신 그들이 필요한 것을 제공해주고 있다고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예수가 광야에서 사탄에게서 받았던 세 가지 시험을 물리친 것은 잘못이라고도 말합니다. 사람들은 자유보다는 빵과 권력과 신비를 더 소중히 여기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의 가르침과 삶이 불편한 교회, 예수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교회는 이미 진정한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따르는 일이 어렵다고 느끼기에 예수를 저만치 밀어 올린 후 경배합니다. 경배하는 일은 쉽습니다. 삶을 바꾸지 않아도 되니 말입니다. 이래저래 예수님이 외로운 시대입니다. 정호승 시인은 ‘서울의 예수’라는 시에서 “들풀들이 날마다 인간의 칼에 찔려 쓰러지고 풀의 꽃과 같은 인간의 꽃 한 송이 피었다 지는데, 인간이 아름다와지는 것을 보기 위하여, 예수가 겨울비에 젖으며 서대문 구치소 담벼락에 기대어 울고 있다.”고 노래했습니다. 예수를 외롭지 않게 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서늘한 가을바람과 만나 내면이 무르익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부끄럽지 않으려면 우리가 먼저 치열해지는 수밖에 없습니다. 종교 상인들에게 포획된 예수를 되찾기 위해 노력해야 할 때입니다. 예수의 손과 발이 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 외로운 길 위에 선 여러분들이 자랑스럽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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