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죽음에 이르는 욕망15 2019년 02월 18일
작성자 김기석
분수를 모르는 권력의 위험
 -벨사살 왕의 경우

술잔치에서 벌어진 신성모독
벨사살은 나보니두스(Nabonidus, 주전555-539 재위)와 느부갓네살의 딸 니토크리스 사이에서 태어났다1). 성경은 그가 느부갓네살의 아들이라고 말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나보니두스는 신-바벨론 제국의 마지막 왕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쿠데타를 통해 라바시-마르둑(Labashi-Marduk)을 축출하고 왕으로 등극한 사람이다. 쿠데타는 성공했으나 그는 사람들의 마음을 얻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는 바벨론의 주신인 마르둑을 경배하지 않았기에 제사장들과 평민들의 분노를 샀다. 그는 달신 ‘신’(Sin)을 최고 지위에 올리려다 저항에 부딪치자 나라를 아들인 벨사살에게 맡긴 후 수도를 떠나 10년 간 ‘신’의 신전을 짓는 일에 몰두했다.2)

벨사살은 그런 의미에서 섭정왕이라 할 수 있겠다. 성경에서 벨사살은 오직 다니엘서에서만 나온다. 어느 날 그는 귀족 천 명을 초대하여 큰 잔치를 벌인다. 어쩌면 아버지로 인해 멀어진 민심을 되돌리기 위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사람들 앞에서 술을 마셨다. 연회에 술이 빠지지 않는다. 심포지움이라는 단어는 학술적인 모임이나 특정한 주제를 다루는 회의를 일컫는 말이지만 이 단어의 뿌리인 고대 그리스어 심포지온(symposion)의 문자적 의미는 ‘함께 마신다‘는 뜻이다.3) 심포지온에 참여하는 이들은 방 한 가운데 놓인 크라테르krater(독한 포도주와 물을 섞기 위한 도구)에서 술을 따라 마셨다. 희석된 포도주를 마시면서 풍류를 즐기는 동시에 철학과 정치를 논하는 것이 심포지온4)인데, 도를 넘는 경우가 비일비재였던 것 같다. 과음한 사람이 마신 술을 토하는 장면이 그려진 크라테르가 있는 것을 보면 그렇다는 말이다. 

그리스 비극 작가인 에우리피데스의 사튀로스극인 <퀴클롭스>는 트로이 전쟁의 영웅 오뒷세우스가 외눈박이 거인 퀴클롭스가 사는 시켈로스 섬에서 지낸 시간을 배경으로 한다. 굶주렸던 오뒷세우스 일행은 퀴클롭스의 시종인 실레노스에게 술을 줄 테니 음식을 달라고 부탁한다. 실레노스는 술을 얻기 위해 주인을 기꺼이 배신한다. “그렇게 하리다. 나는 주인 같은 것은 안중에 없으니까. 나는 단 한 잔이라도 좋으니 그것을 마시고 싶어 미칠 지경이오. 그것을 위해서라면 나는 전 퀴클롭스족의 가축을 내주겠소. 그리고 나는 술에 취해 눈이 게슴츠레해질 수만 있다면 레우카스 바위에서 바닷물 속으로 뛰어내릴 용기도 있소. 술 마시기를 좋아하지 않는 자는 바보지요.”5) 실레노스는 술이 성적인 충동을 일으키고, 인생의 온갖 고통도 잊어버리게 만들어 준다고 말한다. 술은 사람을 도취하게 만든다. 이스라엘의 지혜자는 술의 폐해를 인상깊게 서술했다. “재앙이 뉘게 있느뇨 근심이 뉘게 있느뇨 분쟁이 뉘게 있느뇨 원망이 뉘게 있느뇨 까닭 없는 상처가 뉘게 있느뇨 붉은 눈이 뉘게 있느뇨 술에 잠긴 자에게 있고 혼합한 술을 구하러 다니는 자에게 있느니라”(잠23:29-30). 술은 과도하게 탐닉하는 자를 뱀 같이 문다. 그러나 물려도 물린 줄 알지 못하기에 죽음에 이르기 쉽다.

술잔치를 벌이던 벨사살은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져온 금은 기물들을 내오라고 분부한다. 벨사살은 귀족들과 왕비와 후궁들과 함께 그 잔으로 술을 마심으로 바벨론 신들에 대한 충성심을 가시적으로 드러내고 싶었던 것 같다. 그것은 여호와에 대한 모욕과 조롱이었다. 모욕과 조롱은 그들을 하나의 동질적 집단으로 만들었다. 벨사살은 귀족들을 일종의 집단 황홀경 속에 몰아넣었던 것이다. 어느 한 사람도 그런 모욕 행위에 제동을 걸지 않았다. 아니, 걸 수가 없었다. 다른 소리를 낸다는 것은 그 자체로 배신으로 간주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어진 것은 그 인위적 일치를 종교적 열정으로 치환하는 일이었다. “그들이 술을 마시고는 그 금, 은, 구리, 쇠, 나무, 돌로 만든 신들을 찬양하니라”(단5:4). 신들의 이름이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그 신들은 제국의 안위와 풍요를 가져온다고 믿어지는 우상들이었을 것이다. 그 신들은 숭배자들의 윤리적 삶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참석자들은 국가적인 제의에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을 것이고 벨사살은 자기의 정치적 책략이 적중했다며 속으로 기뻐했을 것이다. 

그들만의 잔치는 공포로 이어지고
우상에 대한 찬양의 열기가 고조될 때 그들의 취지를 깨우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사람의 손가락들이 나타나서 왕궁 촛대 맞은편 석회벽에 글자를 썼다. 왕은 그 광경을 보면서 사색이 되었다. 다니엘서는 그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이에 왕의 즐기던 얼굴 빛이 변하고 그 생각이 번민하여 넓적다리 마디가 녹는 듯하고 그의 무릎이 서로 부딪친지라”(단5:6). 적나라한 공포는 왕의 위엄조차 무색하게 만든다. 



사람들이 빛의 화가라 부르는 렘브란트는 1635년에 이 놀라운 광경을 회화적으로 재현했다. ‘벨사살 왕의 연회’(168*209cm)가 그것이다. 렘브란트는 천 명이 참여하는 연회 광경을 그릴 생각이 없었다. 그는 오직 왕의 테이블만 보여준다. 화면에는 6명이 등장한다. 화려한 의복과 장신구를 걸친 왕과 왕족들일 것이다. 3층으로 된 왕의 흰 두건 위에 놓인 왕관은 상대적으로 작아 보인다. 제국을 다스리기에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을 그렇게 표현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화면의 우측 상단에 나타난 손가락과 글씨가 화면에 등장하는 모든 이들의 행동을 일으켰다. 벨사살은 자리에서 반쯤 일어난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는 공포에 질린 눈으로 뒤를 돌아본다. 뭔가를 움켜쥐려는 듯 보이는 그의 오른손은 그의 마음속에 일어난 공포를 가시적으로 드러내고 들어올린 그의 왼손은 마치 누군가의 공격을 막아내려는 것처럼 다급해 보인다. 왕의 위엄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오직 공포에 질린 사람만 있다. 왕의 오른쪽에 있는 두 사람 역시 눈을 화등잔만하게 뜬 채 공포스런 장면을 바라본다. 여인은 두 손을 부여잡고 있다. 그들 옆에 화면을 등지고 앉은 여인은 영문을 모른 채 그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다. 왕의 왼편에 앉아 있던 여인은 너무 놀라 잔에 담긴 술이 자기 팔에 쏟아지는 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손가락을 바라보고 있다. 오로지 한 사람만이 그 순간을 태연하게 맞이하고 있다. 화면의 왼쪽 구석에 있는 악사이다. 그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지 못한 채 악기 연주에 골몰하고 있다. 무감각일까? 렘브란트는 어쩌면 그 화려한 잔치의 흥을 돋우기 위해 동원된 사람의 눈으로 그 사건을 바라볼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날 제선왕을 만난 맹자는 왕이 음악에 빠졌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말한다. 왕은 당황한다. 그러나 맹자가 왕이 음악을 즐기니 나라가 제대로 다스려질 것이라고 말하자 왕은 저으기 안심이 된다는 표정을 짓는다. 맹자는 왕에게 음악은 혼자 즐기는 것이 즐거운지 아니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즐길 때가 더 즐거운지를 묻는다. 왕은 많은 이들과 함께 즐길 때가 더 즐겁다고 대답한다. 그러자 맹자는 제선왕에게 자기가 정작 하고 싶었던 말을 한다.

“그렇다면 제가 당신을 위해 ‘음악’이란 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만약 왕께서 대형 콘서트를 여셨다고 생각해봅시다. 빵빵한 음향에 음악소리가 울려퍼지겠죠. 그러자 국민이 죄 이마를 찌푸리면서 이런 반응을 보여요. ‘뭐야? 또 콘서트야? 아, 골 때리네. 정치를 이따위로 해서 사람 다 죽어가게 만들어놓고서는 지는 세월 좋게 뭐 음악? 에잇! 니미!’ 또 혹은 왕께서 축제를 여셨다고 생각해봅시다. 화려한 깃발과 장식, 각종 멋진 퍼레이드가 펼쳐집니다. 그러자 국민이 또 죄 이마를 찌푸리면서 이렇게 말하죠. ‘뭐야? 또 축제야? 아, 골 때려. 이따위 정치로 사람 다 죽게 만들어놓고서는 뭘 잘했다고 축제야? 에잇! 젠장!’ 지도자의 오락에 대해 국민이 이렇게 나온다면 이건 지도자가 자기만 알고 국민의 어려움을 돌보지 않아 즐거움을 함께해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6)

백성들의 삶의 현실과 동떨어진 왕실의 축제는 사람들의 가슴에 저항의 불씨를 심는 것이라는 말일 것이다. 물론 렘브란트의 그림에 등장하는 악사의 무표정을 일종의 저항으로 읽는 것은 과한 해석인 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악사의 존재는 벨사살 왕의 잔치가 민중들의 현실과 유리된 것임을 드러내고 있다고 보고 싶다. 여민동락(與民同樂)과 거리가 먼 그들만의 축제에 동원된 이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제국의 운명을 본다.

두려움 없는 해석자
벨사살은 스스로 해석할 능력은 없지만 벽에 쓰인 글씨가 불길한 징조임을 직감한다. 제국의 안위와 관련된 신탁이라 믿었기에 그의 마음은 다급해졌다. 그래서 술객과 갈대아 술사와 점쟁이를 불러오게 한다. 불려온 이들은 당대의 지식인으로 인정받던 이들이다. 벨사살은 누구든지 그 글자를 읽고 해석하는 사람에게 포상을 하겠다고 말한다. 자주색 옷을 입히고, 금사슬을 목에 걸어주고, 나라의 셋째 통치자로 삼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왕실의 녹을 먹고 사는 지식인 집단 가운데 누구도 그 글자들을 해독하지 못했다. 마침 그 자리에 들어온 왕비는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는 사람‘ 다니엘을 소개한다. 그는 바벨론식 이름인 벨드사살로 불리고 있었다. 느부갓네살의 꿈을 해석한 후에 높은 관직에 등용되었던 다니엘은 왕권 교체기에 준은퇴 상태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다니엘이 다시 정치의 무대에 부름을 받았다. 벨사살은 그 동안 있었던 일들을 세세히 그에게 고한 후에 다니엘에게 해석을 의뢰한다. 이전의 지식인들에게 했던 포상에 대한 말도 건넨다. 다니엘은 그런 포상에 관심이 없다. 그는 다만 하나님의 뜻을 그에게 전하는 예언자적 직무를 수행할 뿐이다.

다니엘은 벽에 적힌 글자들을 해석하기 전에 그 글자가 적힐 수밖에 없었던 맥락을 짚어낸다.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의 경우를 예로 들어 설명한다. 높으신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라와 큰 권세와 영광과 위엄을 주셨지만, 그는 그것을 자기의 능력으로 얻은 것으로 착각함으로써 마음이 높아지고 뜻이 완악하여 교만에 빠졌다는 것이다. 그 결과 느부갓네살은 왕위에서 쫓겨나 광야를 떠돌게 되었던 사실을 벨사살은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권력의 들큼한 맛에 취하는 순간 이성은 작동하지 않는다. 아첨하는 무리에 둘러싸이면 참담한 국민들의 현실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 권력의 본질을 잘 알기에 다니엘은 에둘러 말하지 않는다. 그의 말은 거침이 없다. 

“벨사살이여 왕은 그의 아들이 되어서 이것을 다 알고도 아직도 마음을 낮추지 아니하고 도리어 자신을 하늘의 주재보다 높이며 그의 성전 그릇을 왕 앞으로 가져다가 왕과 귀족들과 왕후들과 후궁들이 다 그것으로 술을 마시고 왕이 또 보지도 듣지도 알지도 못하는 금, 은, 구리, 쇠와 나무, 돌로 만든 신상들을 찬양하고 도리어 왕의 호흡을 주장하시고 왕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는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아니한지라“(단5:22-23).

다니엘은 왕을 ‘벨사살이여’라고 부른다. 하나님 앞에서는 왕관을 쓴 채 설 수 없는 법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는커녕 하나님을 모독한 그의 행위는 용서받을 길이 없다. 다니엘은 마침내 벽에 쓰인 글자를 소리 내 읽는다.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그리고 그 뜻에 담긴 의미를 해석한다. “메네는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를 시대에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 함이요 데겔은 왕을 저울에 달아 보니 부족함이 보였다 함이요 베레스는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바사 사람에게 준 바 되었다 함이니이다”(단5:26-28). 

제국의 무도함을 심판하시는 하나님
예언자는 하나님의 눈으로 역사를 주석하는 사람이다. 그는 작은 징조를 보고도 미구에 일어날 일을 알아차리는 영적 예민함 속에서 살아간다.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세상은 초월자의 암호가 가득한 곳이라고 말했다. 절대타자이신 하나님은 우리와 구별되는 분이지만 세상을 통해 우리와 소통하려 하신다. 신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인간은 늘 세계와의 접촉을 통해 신적 메시지를 찾아내야 한다.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이 수수께끼와도 같은 단어들을 통해 다니엘은 바벨론 제국이 맞이하게 될 비운의 운명을 알아차린다. 과연 이 해석은 타당한 것인가? 스블리 타우너는 “19세기 후반 이후로 다수의 학자들은 이 세 단어들이 동전의 무게를 표시한다는 주장을 받아들였다“고 말한다. “메네(MENE)는 므나를 의미하고, 데겔(TEKEL)은 세겔의 아람어 표현이며, 페레스(PERES)는 반 므나를 가리킨다는“7) 것이다. 가치가 다른 동전 세 개를 지칭하는 이름이 벽에 적혔고, 제국을 대표하는 이들이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 신랄한 풍자가 아닌가? 시블리 타우너는 이 해석을 조금 더 상세하게 설명한다.

“25절에 열거된 세 개의 단어들은 26~28절에서는 다니엘에 의해 세 개의 수동태 동사로 취급된다: 메네는 ‘끝났다’(numbered)라는 의미의 동사 m-n-h; 데겔은 ‘달았다’라는 동사 t-q-l; 그리고 페레스는 ‘나누다’라는 동사 p-r-s. 벨사살의 시대는 그 날수가 센바 되어 끝났으며, 그의 통치는 저울에 달아본바 되어 그 무게가 미달되며, 그의 나라는 반은 메데로, 반은 페르시아(peres라는 단어는 페르시아를 의미하는데, 그 자체가 p-r-s의 또 하나의 해학적인 단어다.) 등 두 개로 나누어질 것이다.”8)

물론 이 모든 행위의 주체는 ‘하늘의 주재’,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바벨론의 연대까지 세시는 절대 주권자시다. 정의와 공의의 토대 위에 세상을 세우시는 하나님은 불의와 폭력으로 약자를 유린하는 제국의 지속을 바라지 않으신다. 야코프 부르크하르트는 국가는 폭력을 제도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서 “국가의 가장 초기 형태, 그 태도, 그 과제, 그 고난은 본질적으로 패배한 자들을 노예로 삼는 일”9)이라고 말한다. 특히 제국의 폭력은 잔인하고 무차별적이다. 착취와 억압에 근거한 벨사살의 나라는 끝났다.

하나님은 또한 바벨론의 무게를 달아보신다. 천칭의 한쪽에는 정의, 공의, 인애, 사랑이 놓이고 다른 쪽에는 벨사살의 통치가 놓인다. 다니엘은 벨사살이 다스리는 나라가 하나님이 세우신 기준에 턱없이 미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가난한 이들은 흙 속에 짓밟히고, 피식민지 백성들은 하릴없이 조롱거리로 전락하는 세상에 대해 하나님은 분노하신다.

다니엘은 결국 최후의 선언을 한다. 바벨론은 나뉘어져 다른 이들에게 넘어갈 것이다. 바벨론 제국의 속주에 불과했던 메대와 바사(페르시아)가 가장 강력한 제국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역사를 시작할 것이다. 그게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이다. 예언자는 목숨을 걸고 진실을 말한다. 

그의 말은 반역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조금의 유보도 없이 하나님의 뜻을 전한다. 뜻을 정한 사람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죽고 사는 문제보다 그에게 더 중요한 것은 진실의 통로가 되는 일이다. 벨사살은 놀랍게도 다니엘을 벌하지 않는다. 오히려 다니엘에게 붉은 옷을 입히고, 금목걸이를 걸어주고, 나라의 셋째 가는 통치자로 삼았다. 다니엘서는 이후에 벌어진 일을 아주 간결하게 전한다. “그 날 밤에 갈대아 왕 벨사살이 죽임을 당하였고 메대 사람 다리오가 나라를 얻었는데 그 때에 다리오는 육십이 세였더라“(단5:30-31). 심판은 이렇게 신속하고 군더더기 없이 시행되었다. 제국의 전성기처럼 보이던 때 몰락은 그렇게 도둑처럼 찾아왔다.

에뤼식톤 이야기
천 명의 귀족들이 참여한 연회, 악사들은 취흥을 돋기 위해 연주를 하고, 무희들의 춤사위는 왕과 귀족들의 특권의식과 허위의식을 더욱 부추겼을 것이다. 벨사살은 여호와에 대한 모독을 통해 승리자의 오만에 왕관을 씌우고 싶어했다. 그것이 몰락의 덫인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벨사살의 몰락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에뤼식톤(Erisichton)을 떠올리게 한다. 오비디우스는 <변신 이야기>(Metamoroses)에서 테살리아의 왕이었던 에뤼식톤의 비극 이야기를 들려준다. 신화 속 인물이지만 오늘의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바가 많다. 

에뤼식톤은 욕심이 많은 인물로 신들조차 우습게 알았다. 그가 다스리던 테살리아에는 농업의 여신 케레스에게 바쳐진 신성한 숲이 있었다. 숲 한 복판에는 큰 참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케레스를 통해 소원을 성취한 사람들은 감사의 표시로 그 나무에 화환을 걸어놓거나 봉헌물을 바치기도 했다 나무의 요정들도 나무 주위를 돌며 춤을 추곤 했다. 에뤼식톤은 그 나무가 탐났다. 그 나무를 베어다가 연회장을 짓고 싶었던 것이다. 왕은 종들에게 그 나무를 자르라고 명했다. 하지만 종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주저했다. 에뤼식톤은 그들을 비웃으며 직접 도끼를 들어 나무를 찍기 시작했다. 나무는 떨며 신음소리를 냈고, 도낏날이 닿는 자리마다 붉은 피가 솟아나왔다. 모두 공포에 질렸지만 에뤼식톤은 아랑곳하지 않고 나무를 넘어뜨렸다. 님프들은 데메테르에게 달려가 자초지종을 알렸다. 화가 난 데메테르는 황량한 땅에 머물고 있던 굶주림과 기근의 여신 리모스(Limos)에게 종을 보내 에뤼식톤에 대한 징계를 부탁한다. 데메테르의 부탁을 받은 리모스는 깊은 잠에 빠진 에뤼식톤의 침상에 다가가 그의 혈관 구석구석에 배고픔을 심는다. 연회의 꿈을 꾸던 에뤼식톤은 극심한 허깃증에 잠에서 깨어나 종들에게 먹을 것을 가져오라 명한다. 하지만 허깃증이 사라지기는커녕 먹으면 먹을수록 배고픔이 더욱 극심해졌다. 그는 왕궁에 있는 모든 음식을 먹었다. 급기야 자기 전 재산을 팔아 음식을 샀지만 배고픔은 가시지 않았다. 나중에는 딸을 종으로 팔아 음식을 마련했다. 그래도 배고픔은 사라지지 않았다. 결국 그는 자기의 팔 다리와 몸통까지 뜯어먹었다. 나중에 남은 것이라고는 이빨뿐이었다.10) 매우 엽기적인 이야기처럼 들린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권력에 도취되어 자기 한계를 잊은 이들의 운명을 절묘하게 보여준다. 신에게 속한 것을 사취하려는 인간의 오만함은 결국 자기 파멸로 귀착될 뿐이다. 이전에 비해 많은 것을 누리며 살면서도 여전히 만족할 줄 모르는 우리들, 함께 살아야 할 이웃들을 존귀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대하기보다는 수단으로 삼기에 주저함이 없는 우리들은 어쩌면 에뤼식톤의 후예인지도 모르겠다. 비용 절감과 효율성을 핑계로 노동자들을 죽음의 자리에 방치하는 현실과 케레스의 참나무를 도끼로 찍는 에뤼식톤의 무도함은 묘하게 닮아있다. 성경은 동료 인간에게 가하는 모욕 행위가 하나님에 대한 모욕이라고 말한다.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공경하는 자니라“(잠14:31).

자기가 한낱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을 때 심판의 다림추가 내려진다. 바벨론이라는 거대 제국의 왕이라는 헛된 자부심, 자기 앞에 머리를 조아린 수많은 귀족들의 모습은 그의 자아를 한껏 부풀게 했다. 신들조차 그의 발 아래로 보였다. 제국을 운영하는 자들은 군대의 채찍만으로는 왕권을 보존할 수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래서 ‘왕은 곧 신’이라는 신화를 만들곤 한다. 술객, 술사, 점쟁이, 천문 해독자들은 하늘의 뜻을 빙자하여 왕의 신화를 뒷받침한다. 이런 이들에 둘러싸여 있는 이들은 자기 성찰을 할 수 없다. 그렇게 하여 도취된 영혼은 확고하게 제 무덤을 판다. 예수를 따르는 이들을 박해하던 사울은 하늘로부터 엄중한 경고를 받는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행26:14). 자기 딴에는 자부심을 가지고 한 일이 결국은 자기를 상하게 할 수도 있다. 과도함은 미치지 못함만 못하다. 벨사살, 그는 권력의 맛에 취해 있던 그 시간에 공포를 만났고, 그 공포는 결국 죽음으로 귀결되었고, 그의 죽음과 더불어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던 제국도 무너졌다. 하나님의 심판은 이렇게 엄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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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브리태니커 사전9, 동아일보 공동출판, 1993년 4월 30일, p.480
2. Wikipedia, ‘나보니두스’ 항목
3. 김승중, <한국인이 캐낸 그리스 문명>, 통나무, 2017년 2월 25일, p.124.
4. 김승중, 앞의 책, p.134
5. 에우리피데스, ‘퀴클롭스, <에우리피데스 비극> 중, 천병희 옮김, 단국대학교 출판부, 1999년 1월 15일, p.565
6. 맹자, <오늘을 읽는 맹자>, 임자헌 옮김, 루페, 2019년 1월 21일, p.52
7. W. 시블리 타우너, <다니엘서>, 한·미 공동 주석편집/번역위원 신정균, 한국장로교 출판사, 2004년 6월 10일, p.117
8. W. 시블리 타우너, 앞의 책,  p.117-8
9.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세계 역사의 관찰>, 안인희 옮김, 휴머니스트, 2008년 6월 2일, p.64
10. 오비디우스, <변신이야기>, 이윤기 옮김, 민음사, 1995년 2월 20일, p.282-287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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