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라비니아 폰타나의 ‘내게 손을 대지 말아라’ 2020년 04월 04일
작성자 김기석
라비니아 폰타나의 ‘내게 손을 대지 말아라’(Noli Me Tangere, 80*65.5cm, 우피치 미술관)

부활절 이야기의 핵심 인물은 베드로도 요한도 아닌 마리아입니다. 마리아는 주간의 첫 날 이른 새벽에 맨 먼저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빈 무덤에 놀란 마리아는 달려가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주님이 사라졌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놀란 두 제자가 무덤으로 달려가 마리아의 말이 사실임을 확인했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자기들이 있던 곳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차마 그 자리를 떠날 수 없었습니다. 비록 시신일지라도 예수의 부재를 마리아는 현실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몸에서 사취屍臭가 난다 해도 자기 삶에 성스러운 차원을 열어준 분의 상처 난 몸에 향유를 발라 드리고 싶었습니다.

마리아는 울다가 문득 무덤 속을 들여다보고는 깜짝 놀랍니다. 흰 옷을 입은 천사 둘이 앉아 있었던 것입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물었습니다. “여자여, 왜 우느냐?” “누가 우리 주님을 가져갔습니다.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가져가다’, ‘두다’라는 동사는 마리아가 예수의 죽음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인기척을 느낀 마리아는 문득 뒤를 돌아봅니다. 거기 서있던 낯선 사람이 “여자여, 왜 울고 있느냐? 누구를 찾느냐?” 묻자, 그가 동산지기인 줄로 알고 주님이 어디 계신지 일러주면 그를 모셔 가겠다고 말합니다. 그때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시자 비로소 마음의 눈이 열려 주님이신 줄 알아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내게 손을 대지 말아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않았다” 이르십니다.

‘내게 손을 대지 말아라’, 이 말씀은 수많은 화가들의 상상력을 자극했습니다. 이 명령을 라틴어로 번역한 것이 ‘놀리 메 탄게레Noli Me Tangere‘인데, 같은 제목의 그림이 참 많이 있습니다. 대개 예수님을 만지고 싶어 손을 내밀고 있는 마리아와 부드럽게 그 손길을 피하는 예수님의 모습이 대조되고 있습니다. 왜 주님은 당신을 만지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어떤 이들은 예수님의 부활체가 생명과 죽음, 이생과 저승 사이의 점이지대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럴 듯하지만 고개가 끄덕여지지는 않습니다. 차라리 예수님이 마리아에게 육신으로는 가 닿을 수 없는 신령한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기 위함이라는 해석이 더 그럴싸하게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충분한 설명이라 할 수 없습니다. 완전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프랑스 철학자인 장-뤽 낭시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는 이 사건을 진리에 대한 인식의 문제로 바라봅니다.

“진리는 절대적으로 귀결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것은 만지도록 내버려두지도 않고 붙들게 하지도 않는다. 어둠 속에서 보는 게 문제가 아니다. 더 나아가 어둠에도 불구하고 보는 게 믄제가 아니다(변증법적 방식으로든 종교적 방식으로든). 중요한 것은 어둠 안에서 눈을 여는 것이다.“(장-뤽 낭시, <나를 만지지 마라>, 이만형·정과리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5년, p.76)

누구도 이 신비한 구절에 대한 완전한 해석을 내놓을 수는 없을 겁니다. 화가들이 ‘놀리 메 탄게레’를 주제로 하여 그린 그림이 다양하다는 것은 그 말씀이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 오늘 우리가 보려는 것은 16-7세기 이탈리아 화가인 라비니아 폰타나(Lavinia Fontana, 1552-1614)의 그림입니다. 볼로냐 태생인 이 화가는 남성들이 중심이었던 이탈리아 화단에서 가장 성공한 여성화가 가운데 한 분입니다. 그는 아버지 프로스페로 폰타나에게서 그림 수업을 받았습니다. 초기에는 상류층 인사들의 초상화를 많이 그렸습니다. 라비니아의 그림은 색채가 다양하고, 특히 인물들이 입고 있는 의복과 착용하고 있는 장신구의 세부 묘사가 뛰어났습니다. 자연적인 것보다 양식화된 표현을 선호했던 이탈리아 매너리즘에 익숙했던 것입니다. 놀랍게도 라비니아는 남성과 여성의 누드화도 많이 그렸습니다. 
라비니아는 1577년에 파올로 자피(Paolo Zappi)와 결혼했습니다. 그도 화가였지만 아내의 재능이 뛰어남을 인정하고 그는 기꺼이 아내의 조력자로 지냈습니다. 그들 사이에 11명의 아이가 태어났지만 장성할 때까지 산 것은 겨우 3명뿐이었다고 하니, 인생의 쓴 맛도 많이 봤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라비니아의 명성이 높아지자 교황 클레멘스 8세가 그를 초대하여 교황청 화가로 삼았습니다. 라비니아는 나중에 로마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는 영예도 누렸습니다.

라비니아의 그림 가운데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작품은 1589년에 그린 ‘세례자 요한과 성 가족’입니다. 침대 위에 모로 누운 채 깊은 잠에 빠진 아기 예수의 모습이 매우 평화롭습니다. 아기는 꿈을 꾸는 듯 두 손을 얼굴 앞에 그러쥐고 있습니다. 침대 옆에 선 세례자 요한은 오른손 검지를 입에 올리고 있어 마치 관람객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머니 마리아는 벌거벗은 아들이 행여 추울세라 얇은 담요를 끌어 올려주려다가 문득 아기를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아버지 요셉은 어두운 배경 뒤에 서서 그들 모두를 지키는 늠연(凜然)하나 인자한 가장의 모습을 보입니다. 정말 평화롭고 사랑스러운 광경입니다.

라비니아가 ‘나를 만지지 마라’를 그린 것은 1581년입니다. 라비니아는 대각선적 구성을 통해 화면을 둘로 분할하고 연관된 두 이야기를 나란히 배치하고 있습니다. 좌측 상단은 빈 무덤을 보여줍니다. 무덤 안에는 천사가 앉아 있고 무덤 밖으로는 두 사람이 서 있습니다. 하나는 막달라 마리아이고 다른 하나는 베드로 혹은 예수의 사랑받던 제자일 것입니다. 마을 저 멀리 구릉지대 위로 아침 해가 찬란하게 떠오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얼굴은 고요하지만 슬픔에 차 있습니다.

화면의 하단에는 반 무릎을 꿇은 채 두 팔을 벌린 채 경외심에 가득 찬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마리아의 모습이 보입니다. 잔뜩 힘이 들어간 채 벌어진 오른손의 손가락은 그가 얼마나 크게 놀랐는지를 보여줍니다. 왼손에 들린 것은 향유입니다. 예수의 몸에 발라드리고 싶어 가지고 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라비니아는 예수님의 모습을 성경에 충실하게 그렸습니다. 손에는 자루가 긴 삽이 들려 있습니다. 정원지기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서 있는 자세는 화가들이 즐겨 형상화한 부활하신 주님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오른손을 마리아의 머리 바로 위에 올려 축복하고 계시지만 접촉은 삼가고 계십니다. 그 펼쳐진 손가락은 축복의 자세입니다.

예수님의 머리에 씌워진 모자는 형태나 크기가 다 부자연스럽습니다. 썼다기보다는 그 위에 살포시 올려놓은 것처럼 보입니다. 라비니아는 왜 그런 부자연스러움을 택했을까요? 표현의 미숙은 아닐 것입니다. 짐작이 가는 것이 있습니다. 일단 마리아의 머리 위에 있는 후광을 보십시오. 투명한 원반 같은 후광이 뚜렷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후광이 없습니다. 어쩌면 그 별스럽고 부자연스러워 보이는 모자가 후광을 대신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라비니아가 디테일 속에 숨겨놓은 하나의 메시지가 더 있습니다. 우측 화면의 중앙에는 밑둥만 남은 나무가 보입니다. 잘린 나무는 예수의 때이른 죽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그 밑둥으로부터 새로운 가지가 솟아나오고 있습니다. 죽음을 이긴 생명입니다. ‘어둠 안에서 눈을 열어야‘ 하는 것처럼, 죽음의 현실 속에서도 생명을 포기하지 않는 것, 끝끝내 생명의 싹을 틔우는 것, 그것이 신앙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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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04-09 09:04)
목사님 저희는 언제 뵐 수 있을까요?
코로나때문에 예배를 드릴 수가 없어서 너무 참혹하네요ㅠㅠ..! 직접 목사님 말씀 너무나 듣고 싶은데요... 어쩔 수 없는 형국이니... 간절히 주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겠습니다. 목사님도 조금만 더 힘내주세요!!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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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타리(20 04-13 01:04)
강팍한 마음을 녹이고 싶을 때 목사님 글을 찾아봅니다. 가난한 저희 곁에서 등불로서 오래오래 계셔주시기를 늘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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