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청년편지1 2015년 12월 14일
작성자 김기석

 푸른 언덕에서 보내는 편지(1)


안녕하십니까? 나는 이 편지를 읽게 될 당신이 누구인지 모릅니다. 길거리에서 내 곁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일 수도 있고, 시절을 한탄하며 어딘가에서 울분을 터뜨리고 있는 사람일 수도 있고, 아름다운 미래를 꿈꾸며 도서관에 틀어박혀 공부를 하는 사람일 수도 있겠습니다. 나는 이 편지를 병에 담아 물 위에 띄워보내는 심정으로 쓰고 있습니다. 일제시대에 양정고등학교의 지리교사였던 김교신 선생이 1927년에 벗들과 함께 잡지 <성서조선>을 창간하면서 썼던 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성서조선>아, 너는 소위 기독 신자보다도 조선혼을 소유한 조선인에게 가라, 시골로 가라, 산천으로 가라. 거기서 나무꾼 한 사람을 위함으로 너의 사명을 삼으라." 폭포가 쏟아져내리듯 단문으로 이어지는 이 문장 속에서 나는 26살 젊은이의 뜨거운 혼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감히 김교신 선생의 글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이 편지가 누군가의 가슴에 작은 울림이라도 일으킬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요즘 젊은 세대를 지칭하는 말들이 마구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몇 년 전만 해도 '오렌지족' 혹은 '야타족' 등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서 방종하게 사는 젊은이들의 행태를 비꼬는 용어가 주종을 이루었지만, 이제는 생존 자체가 어렵게 된 상황을 적시하는 용어들이 많아졌습니다. '88만원 세대'는 우석훈 선생과 박권일 선생이 함께 쓴 책 제목에서 따온 것으로 저임금노동에 시달리는 청년 세대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88만원 세대 담론이 나온지 불과 두 해 뒤인 2009년에 장기하와 친구들이라는 밴드는 '별일 없이 산다'는 노래를 들고 대중들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 노랫말은 청년들의 현실을 아이러니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니가 깜짝 놀랄만한 얘기를 들려주마 아마 절대로 기쁘게 듣지는 못할 거다 뭐냐하면 나는 별일 없이 산다 뭐 별다른 걱정 없다 나는 별일 없이 산다 이렇다 할 고민 없다……이번 건 니가 절대로 믿고 싶지가 않을 거다 그것만은 사실이 아니길 엄청 바랄 거다 하지만 나는 사는 게 즐거웁다 나는 사는 게 재밌다 매일 매일 신난다"('별일 없이 산다')


'나는 사는 게 즐겁다'고 말하고 있는 데도 왠지 눈물 겨운 까닭은 무엇 때문일까요? 장기하는 무표정한 얼굴로 나는 이렇다 할 걱정도 없고, 고민도 없다고 노래합니다. 어떤 때는 그 무표정이야말로 이 노래가 전하려는 메시지를 숨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동구권 해체 이후 세상은 급속하게 신자유주의 경제질서로 재편되고 있습니다. 여전히 이데올로기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은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으로 취급받고 있습니다. 벌거벗은 욕망이 이데올로기 혹은 삶의 의미 물음을 대치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걱정도 고민도 없고 사는 게 재밌다는 노랫말이 곧이 들리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싸구려 커피'라는 노래는 살벌한 경쟁체제에서 밀려난 루저들의 모습을 그려 보여줍니다.


"싸구려 커피를 마신다 미지근해 적잖이 속이 쓰려온다 눅눅한 비닐장판에 발바닥이 쩍 달라 붙었다 떨어진다 이제는 아무렇지 않다 바퀴벌레 한 마리쯤 쓱 지나가도"('싸구려 커피')

'이제는 아무렇지 않다'는 말은 이미 그런 생활이 상당히 오래 지속되었음을 나타냅니다. 익숙해진다는 것은 거기에 적응했다는 말일 겁니다. 적응이란 그런 삶을 자기 삶으로 수납했다는 뜻이구요. 많은 젊은이들이 이 노래에 공감했습니다. 일상의 풍경이기는 하지만 누구도 드러내보이려 하지 않았던 현실을 이 노래가 표현하고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장기하는 이런 노래를 통해 많은 젊은이들이 처한 현실을 보여줍니다. 이 노래를 웃으며 들을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면서 '3포세대'니 '5포세대'니 '7포세대'니 여러가지 조어가 나오더니 이제는 급기야 'N포세대'라는 말까지 나왔습니다. 연애, 결혼, 출산, 취업, 주택구입, 인간관계, 희망 등을 다 포기해야 하는 상황을 일컫는 말이라지요? 너무나 자조적인 표현이어서 조금 화가나기도 합니다. 젊은이들이 처한 현실을 자극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규정하는 순간 좀 맥이 빠지지 않던가요? 이제는 여기서 더 나아가 '헬조선'이라는 말까지 나왔습니다. 기회의 균등이 사라지고 부모 세대의 재력이 신분을 결정짓는 상황을 지칭하는 말일 겁니다. '금수저' '흙수저' 담론도 마찬가지입니다. 최근에 슈퍼스타K7에 참여했던 중식이밴드가 화제였다고 하지요? 그들을 N포세대의 대변자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더군요. 신문에 나온 기사를 보았습니다. 그들이 부르는 노랫말을 들으며 가슴이 답답해졌습니다.


"아기를 낳고 싶다니 그 무슨 말이 그러니(…) 난 재주 없고 재수도 없어 집안도 가난하지(…)나는 고졸이고 너는 지방대야 계산을 쫌 해봐"


결혼하고 싶다는 여자 친구를 타박하는 말이라지요? '아기를 낳고 싶다'는 말이 철없는 아이의 망언처럼 들린다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난 재주 없고 재수도 없어'에 이르면 그 도저한 자학이 고통스럽게 여겨집니다. 뭐 노래일 뿐인데 그냥 즐기면 되지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느냐고 타박하셔도 할 수 없습니다. 그 노랫말 속에 담긴 것은 시대에 대한 울분이나 그들을 그런 지경으로 몰고 간 체제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일종의 허무주의처럼 보이기 때문에 아픈 겁니다. 냉소나 허무주의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습니다. 세상을 직시해야 합니다. 세상이 왜 이 지경이 되었나 예리하게 파악해야 합니다. 우리가 누구에게 속아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심각하게 물어야 합니다. 냉소와 허무주의도 문제이지만 장향을 제대로 찾지 못한 분노는 매우 위험합니다. 테러와 폭력으로 세상을 뒤흔들고 있는 '이슬람 국가'(IS)를 표방하는 단체에 가입하려는 젊은이들이 늘고 있다고 합니다. 폭력적 방식으로 자기의 존재를 드러내려는 이들도 문제이지만 그들을 그런 벼랑 끝으로 몰고 있는 이 시대 정신에 대해서도 철저한 검토가 필요합니다.


평화운동가인 박노해는 <갈라진 심장>이라는 시에서 몇몇 젊은이들과의 만남을 상기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생각 있는 젊은이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좋은 일도 하고 성공도 하겠다는 결의를 다지고 있었습니다. 시인은 그 대단한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미소로 경청했습니다. 말없는 시인의 모습에 불안감을 느낀 그들은 시간이 갈수록 두 부류로 나뉘게 됩니다. '공격적 질문자'와 '심각하게 침묵하는 자'로. "왜 성공과 좋은 일을 동시 추구하면 안 됩니까/내 가슴 뛰는 삶을 살겠다는데 왜 문젭니까/요즘 어떻게 선하고 의롭기만 한 게 가능합니까/경쟁력 없고 힘도 없이 무엇으로 사회를 바꿉니까". 항변하는 젊은이들을 보며 시인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는 가만히 울먹이는 소수의 젊은이들의 눈물을 닦아주며 말합니다.


씨알은 처음부터 두 쪽이 아니라고

인간의 심장은 두 개가 아니라고

처음부터 갈라진 씨알은 이미 죽은 씨알이라고

처음부터 갈라진 심장은 이미 죽은 젊음이라고


정의를 내치든지 이익을 내치든지

영혼을 내치든지 성공을 내치든지

젊은 날에 두 개의 길은 없다고


박노해 시인의 말은 우리 삶의 근본 문제를 건드리고 있습니다. 너무 가차없어서 가슴이 다 서늘해집니다. 어중간은 없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꿩 먹고 알 먹는, 도랑 치고 가재잡는 일거양득의 삶은 없다는 것입니다. 매정한 듯 보여도 이게 진실일 겁니다. 다수의 정치인들이 자기의 정치생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이에게 잘 보이기 위해 양심을 팔지 않던가요? 그들은 마치 영혼이 없는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밥을 줄 주인에게 꼬리치는 개처럼 아양 떠는 이들을 볼 때마다 역겨움과 아울러 깊은 연민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의를 내치든지 이익을 내치든지', '영혼을 내치든지 성공을 내치든지', 시인의 일갈은 욕망의 덫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혼곤한 잠에 빠져드는 이들의 어깨를 후려치는 장군죽비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공포심을 주입합니다. 우리는 늘 남에게 뒤쳐지지 말아야 한다는 강박관념 속에서 살아갑니다. 돈이 주인 노릇하는 세상은 '일등이 아니면 살아남을 수 없다'고 말하며 우리를 마구 몰아갑니다. 경쟁은 언제나 타자 배제적입니다. 그의 존재는 늘 나의 안위를 위협하기 때문입니다. 경쟁을 내면화하도록 부치기는 세상은 우리에게 우정과 평화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이런 세상은 '다른 소리'를 내는 이들을 싫어합니다. 다른 소리를 내는 이들은 사회 통합을 깨뜨리는 불순분자들로 취급됩니다. 국가주의에 사로잡힌 이들일수록 '일사불란'을 사랑합니다. 차이에 대한 존중은 물론 없습니다. 판화가인 이철수는 평화란 "누구도 제 빛깔 잃지 않고 조화롭게 하나 되는 조각보 같은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폭력은 타자를 무리하게 동화시키거나 굴복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힘입니다. 


슬라보예 지젝은 폭력을 주관적 폭력과 객관적 폭력으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주관적 폭력은 물론 "명확히 식별 가능한 행위자가 저지르는" 행위로서 평온한 상태를 교란시킵니다. 지젝은 객관적 폭력을 둘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하나는 언어를 통해 구현되는 '상징적 폭력'입니다. 이건 아마도 정보와 언어를 독점한 자들이 만들어내는 권력관계와 관련된 것일 겁니다. 다른 하나는 '구조적 폭력'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경제체계와 정치체계가 정상적으로 작동할 때 나타나는"(슬라보예 지젝, <폭력이란 무엇인가>, 이현우·김희진·정일권 옮김, 난장이, 2014년 10월 27일, p.24 참조) 것입니다. 문제는 이것이 정상적인 것처럼 보인다는 데 있습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그것을 폭력으로 인식하지도 못합니다. 


요즘 사람들이 참 거칠어졌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어쩌면 그것은 그런 내재화된 폭력 속에서 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디모데후서는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를 것이라면서 그 징조를 이렇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딤후3:2-5a). 


역사는 반복되는 것인가요? 아니면 역사의 진보는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요? 거의 2000년 전에 나온 문서이지만 마치 우리 시대를 보고 서술한 것 같은 인상이 듭니다. 디모데후서의 저자는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고 단호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요? 


로마 제국이 지중해 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시기에 사람들은 제국의 군사력 앞에 굴복한 것이 사실이지만 로마의 화려하고 세련된 문화에 매혹당한 것도 사실입니다. 로마 제국의 식민통치에 협조하고 있던 로마식 극장과 경기장에서 벌어지는 공연과 경기들을 관람하면서 자기들도 로마 문명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고 착각하며 살았습니다. 로마의 신전을 기웃거리기도 했을 거구요. 하지만 그들이 웃고 떠들며 로마 문명을 떠받들고 있던 그 때에 민중들의 삶은 날로 피폐해지고 있었습니다. 팔레스타인에 사는 유대 백성들은 다양한 종교세(성전세, 십일조, 첫 열매 제물 등)는 물론이고 "조공, 직접세(예컨대 토지세, 인두세), 간접세(왕관세, 소금세, 판매세 등), 관세(수출입 관세, 항구 관세, 통행세 등), 각종 수수료와 강제 부역(angaria; 마5:41 참조)을 감당해야 했습니다(에케하르트 슈테게만·볼프강 슈테게만, <초기 그리스도교의 사회사>, 손성현·김판임 옮김, 동연, p.192 참조). 이것 떼고 저것 떼고 나면 남는 게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복음서에 그렇게도 많은 환자들과 귀신들린 사람들이 등장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만성적인 영양실조는 질병을 낳게 마련입니다. 게다가 로마가 저지른 잔인한 폭력에 대한 기억을 견딜 수 없었던 사람들은 정신이상 증세를 보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 성경에 등장하는 귀신들린 사람들을 다 정신이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상황이 개선될 가능성은 별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희망을 노래한다는 게 참 부질없는 것처럼 보이는 세월이었습니다.


그런데 갈릴리 나사렛 출신의 젊은이인 예수가 등장하여 사람들에게 새로운 세상의 꿈을 열어 보였습니다. 그는 로마 제국의 통치에 대비되는 하나님의 통치, 곧 하나님 나라 또는 하늘나라의 도래를 선포했습니다. 예수가 전한 하나님 나라는 물리적 강제력에 의해 도래하거나 유지되는 나라가 아니라 사랑과 나눔과 섬김과 돌봄을 통해 도래하는 나라입니다. 예수는 척박한 팔레스타인 땅 곳곳을 다니시며 그 꿈을 심어주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상황을 1세기 팔레스타인에 비길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예수를 믿고 따른다고 고백하는 이들의 삶은 좀 달라야 할 것 같습니다. 돈이 주인 노릇하는 세상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욕망의 문법에 따라 살기보다는, 예수께서 열어보이신 '다른 세상' 즉 하나님 나라의 꿈에 사로잡혀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게 힘겨운 일인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역사는 꿈꾸는 자들의 희생과 헌신에 의해 조금씩 발전하는 것이 아닐까요? 저는 앞으로 이런 이야기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겨울은 허장성세를 지양하고, 안으로 자기를 성찰하는 계절입니다. 이 계절에 주님이 주시는 은총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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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철(16 04-26 11:04)
목사님 감사드립니다.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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