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예레미야산책2 2016년 03월 12일
작성자 김기석

 슬프다, 나의 근심이여

본문 / 렘8:1-22


후회는 언제나 너무 늦게 찾아온다

하나님을 떠난 백성들이 감내해야 할 참담한 고통은 마침내 참담한 죽음으로 막을 내린다. 그 운명의 날이 오면 사람들이 왕들과 지도자들, 제사장들과 선지자들, 그리고 주민들의 뼈를 무덤에서 끌어내는 일이 벌어질 것이다. 변형된 형태의 부관참시인 셈이다. 지하 세계에 내려가 있던 시신까지도 모독하는 일은 생각만 해도 끔찍스럽다. 그 뼈들은 "그들이 사랑하며 섬기며 뒤따르며 구하며 경배하던 해와 달과 하늘의 뭇 별 아래에서 펼쳐지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그 뼈들을 거두거나 묻어줄 사람이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따르던 우상들 역시 무력하기만 하다. 우상을 숭배하던 이들은 땅바닥에 흩어진 거름처럼 되고 말 것이다. 살아 남은 자의 운명 또한 참혹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유배지에서 치욕을 겪으며 살 것이고, 죽음보다도 더한 고통을 겪게 될 것이다. 


이런 모든 일은 돌이킬 줄 모르는 완악함 때문에 빚어진다. 넘어지면 일어나고, 떠난 후에는 돌아오게 마련이건만 예루살렘 사람들은 여호와를 떠날 줄만 알뿐 돌아올 줄은 모른다. 그들은 진실한 말을 버렸고, 자신의 악행을 뉘우치지도 않으며,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 뿐이었다. 그 길, 자기를 중심에 놓고 사는 그 길은 어긋난 길, 그릇된 길이었다. 철새들도 때가 되면 돌아올 줄 알지만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받은 이들은 주의 법도에 대해 까막눈이다. 암담하다.


그런데도 그들은 "우리는 지혜가 있고 우리에게는 여호와의 율법이 있다"(8)고 말한다. 서기관들의 거짓된 붓이 율법을 거짓말로 바꾸어놓은 탓이다. 서기관 뿐이 아니다. 선지자나 제사장이나 다 한 통속이 되어 말씀을 자기들의 입맛에 맞게 왜곡하고 적용함으로써 사람들을 오도했다. 백성들이 상처를 입어 앓고 있을 때에도 그들은 '괜찮다'고 말하며 진실과 대면하는 시간을 늦추었다. 오늘의 종교인들은 어떠한가? 신자유주의 경제질서라는 거대한 파도에 떠밀린 채 숨을 허덕이며 살아가는 이들에게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가르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상들의 유혹에 정신이 팔린 채 욕망의 벌판을 질주하고 있는 이들에게 '돌아오라'고 외치는 일조차 포기한 것은 아닌가? 오히려 돈과 권력의 단맛에 취한 채 비틀거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나님은 예레미야 시대의 지도자들이 역겨운 일을 하면서도 부끄러운 줄도 모른다고 꾸짖으신다. 과도한 욕망은 영적인 무감각을 낳게 마련이다. 돌이킬 줄 모르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보상은 진멸이다.


"내가 그들을 진멸하리니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을 것이며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없을 것이며 그 잎사귀가 마를 것이라 내가 그들에게 준 것이 없어지리라"(13)


늦게야 사태를 파악한 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써보지만 돌이키기에는 너무 늦었다. 죽더라도 견고한 성읍에 들어가서 버틸 때까지 버텨보자고 서로 독려하지만 그들의 가슴에 돋는 절망감을 뿌리칠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독한 물을 마시게 하시는 것이니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마침내 그들은 이런 탄식을 내뱉는다. "우리가 평강을 바라나 좋은 것이 없으며 고침을 입을 때를 바라나 놀라움뿐이로다"(15).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 삶을 돌아보면서 '진리를 피하면서 찾고 있었다'고 말했다. 아이러니이다. 평강을 바란다는 이들이 그동안 노정해온 삶은 평강과는 거리가 멀었다. 제 욕심을 우주의 중심에 놓는 삶에 평강이 있을 수 없지 않겠는가? 그들은 단에서부터 몰려오는 말의 부르짖음을 듣는다. 거대한 폭력이 쓰나미처럼 몰려온다.


예언자의 아픔

현실은 냉정하다. 옛사람은 '천지불인天地不仁'이라 했다. 하늘과 땅은 사람을 편벽되이 가르지 않는다는 말일 것이다. 죄가 누적되면 운명이 된다. 하나님을 떠난 백성들의 삶이 평안할 수는 없다. 예언자는 그런 사실을 누구보다 앞서 보는 자이다. 그렇기에 다른 이들보다 먼저 그 운명을 슬퍼한다. "슬프다 나의 근심이여 어떻게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 내 마음이 병들었도다"(18) 예언자는 이국 땅에서부터 들려오는 백성들의 울부짖음을 듣는다. "여호와께서 시온에 계시지 아니한가, 그의 왕이 그 가운데 계시지 아니한가"(19a) 그런데 또 다른 소리가 들려온다. "그들이 어찌하여 그 조각한 신상과 이방의 헛된 것들로 나를 격노하게 하였는고"(19b). 예언자의 귀에 다시 백성들의 울부짖음이 들려온다. "추수할 때가 지나고 여름이 다하였으나 우리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20). 이제나 저제나 혹시 거둘 것이 있을까 하고 살펴보지만 여름이 다 지나가도록 그들은 빈손일 수밖에 없다. 물론 여기서 '추수'는 구원의 은유이다. 구원의 가능성이 점점 줄어드는 반면 절망의 어둠은 더욱 짙어진다.


예레미야는 심드렁하게 그 현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지만 누구보다 영혼이 민감한 사람이다. 동족들이 겪는 고통을 초연한 자리에서 바라볼 수 없다. 높은 자리에 앉아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사람이 아니다. 치료받지 못하는 백성들을 바라보며 그는 아파한다. 슬픔과 놀라움이 그를 확고히 사로잡는다. 예언자는 백성과 운명을 같이 하는 자이다. 



















무엇을 자랑하려는가

본문 / 렘9:1-26


녹이고 연단하리라

사람들은 흔히 예레미야를 눈물의 예언자라 부른다. 그는 어느 다른 예언자들보다 많은 눈물을 흘렸다. 하나님께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던 남왕국 유다가 속절없이 유린되는 현실을 목도하면서 그는 울고 또 울었다.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죽임을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울리로다"(1). 어둠이 중첩된 상황 속에 오래 머물다 보면 현실로부터 벗어나 이꼴 저꼴 보지 않고 살고 싶어진다. 예레미야도 간음하는 자요 반역한 자의 무리를 떠나 광야로 숨어들고 싶었다. 그러나 예언자는 자기 운명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다. 그는 하나님의 손아귀에 확고히 사로잡힌 자이기 때문이다. 예언자는 자기 슬픔에 겨워 우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 아픔에 공명하여 운다. 


하나님의 백성이라 자부하는 이들이 혀를 놀려 거짓을 일삼고, 서슴없이 폭력을 행사하고, 가까운 이웃끼리 서로 비방하고 속인다. 하나님을 알려는 열정조차 보이지 않는다. 입으로는 이웃에게 평화를 말하지만 마음으로는 해를 꾸미는 이들을 보며 하나님은 탄식하신다. "보라 내가 내 딸 백성을 어떻게 처치할꼬"(7a) 놀랍지 않은가? 염증이 날만도 한데 하나님은 그들을 여전히 '내 딸 백성'이라 부르신다. 죄를 지어 때가 묻기는 했지만 딸을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하여 징계를 하지 않을 수도 없다. 꾸짖는 동시에 그를 새로 빚어야 한다. "그들을 녹이고 연단하리라"(7). 용광로 속에 넣어 불순한 것은 걸러내고, 불과 물 사이를 오가며 연단해야 새로워질 수 있다. 하지만 그 과정은 녹록하지 않다. 예레미야는 그 아픈 연단의 시간을 내다보며 운다.


"내가 산들을 위하여 울며 부르짖으며 광야 목장을 위하여 슬퍼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불에 탔으므로 지나는 자가 없으며 거기서 가축의 소리가 들리지 아니하며 공중의 새도 짐승도 다 도망하여 없어졌음이라"(10)


마을과 성읍은 황무지로 변하고 불이 휩쓸고 지나간 산과 들에는 초목조차 자라지 못하고, 초목에 깃들어 살던 새와 짐승도 다 사라진 세상, 마치 묵시록적 풍경을 보는 듯하다. 노자는 노덕경 30장에서 전쟁이 지나간 땅의 참상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군사를 일으켰던 곳에서는 가시덤불이 자라고 큰 군대가 지나간 뒤에는 반드시 흉년이 든다"(師之所處, 荊棘生焉, 大軍之後, 必有凶年/도덕경 30장). 이것은 아마도 춘추전국시대의 적나라한 현실이었을 것이다.


예언자는 대체 땅이 그 지경이 된 까닭을 뭐라 말하나? 간단하고 명료하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저버리고 선물로 주신 율법을 버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완악한 마음을 따라 바알을 따르는 이들이 되고 말았다. '다산과 풍요'를 즉물적으로 약속하는 바알은 그들에게 매우 매력적인 신이었을 것이다. 매혹이 곧 미혹임을 알아차리지 못했기에 그들은 지싯지싯 여호와를 등지고 말았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쑥과 독을 보내시고, 그들이 알지 못하던 여러 나라에 그들을 흩어 버리셨다.


누가 지혜로운 자인가

17절부터 22절까지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언자의 말이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뒤섞여있다. 내용은 곡하는 여인, 지혜로운 여인(장송곡을 부를 여인)을 불러 그 백성이 겪어내야 할 운명을 슬퍼하며 울게 하라는 것이다. 눈물은 눈물을 부르는 법. 그들의 애곡 소리를 듣고 갑각류처럼 단단한 백성들의 마음이 깨어나기를 바란 것일까? 하나님이 애곡하는 여인들에게서 기대하시는 바는 백성들 속에서 슬픔에 대한 감수성을 일깨우는 것이다. 자기의 죄와 연약함으로 인해 슬피 울 때야말로 하나님의 마음과 접속할 수 있는 기회이다. 애곡하는 여인들은 억지 울음을 울지 않아도 된다. 죽음이 창문을 통하여 각 집과 궁실에 들어가고, 거리에는 청년들의 시신이 널부러져 있을 터이니 어찌 울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런 참담한 현실 앞에 설 때 인간은 자기의 작음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조건>으로 잘 알려진 작가 앙드레 말로는 인생 가운데 가장 기뻤던 때는 자기가 얼마나 작은지를 알게 되었을 때라고 말했다. 역설적인 이야기이지만 그 말은 진실일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랑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일깨워주신다.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23-24)


흔히 우리를 타자들보다 우월한 자리에 세워주는 지혜와 용맹은 자랑할 만한 것이 못된다. 그것은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랑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물론 성경에서 '안다'는 말은 물론 어떤 대상에 대한 정보 습득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그와 깊이 연루됨을 이르는 말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랑, 정의, 공의를 역사 속에서 행할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 중요한 것은 종족이나 종교나 몸에 받은 할례가 아니다. 우리는 과연 하나님의 뜻을 아는 사람인가?


















우상의 유혹에서 벗어나라

본문 / 렘10:1-25


아비투스(habitus)는 프랑스 사회학자 브르디외가 제창한 개념으로 인간의 구조화된 성향체계를 가리킨다. 개인의 문화적 취향이나 소비의 근간이 되는 '성향'은 타고난 것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길러진다는 것이 그의 논지이다. 음악에 대한 취향, 옷을 입는 방식, 타자를 바라보는 방식 등은 살아가면서 만나는 이들과의 관계를 통해 형성되게 마련이다. 즐겨 보는 것, 즐겨 듣는 것이 곧 우리의 성향이 되기 쉽다. 


우상을 넘어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여러 나라의 길을 배우지 말라"(2a) 이르신다. 여기서 '길'은 생활방식 혹은 습속을 이르는 말로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삶의 방식이 타자들에게는 낯설 수도 있다. 삶을 돌아보고 타자들과 관계를 맺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여러 나라의 길'을 배우지 말라는 말이 매우 배타적으로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타자의 존재나 문화를 전적으로 부정하라는 말이라기보다는 신앙적 정체성이 심히 흔들리는 상황 가운데서 자기를 지키라는 명령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하늘의 징조를 보고 인간의 운명을 가늠한다든지, 우상을 만들어 세우고는 그 앞에 엎드려 경배하는 일 따위는 사람을 실답게 만들지 못한다. 불안의 숙명을 타고난 인간은 뭔가 가시적인 존재물을 통해 자기 삶의 안전을 확보하려 한다. 우상을 만드는 마음은 경외심 때문이 아니라 두려움 때문이다. 하지만 우상은 사람에게 재앙을 내릴 수도 복을 내릴 수도 없다. 


예레미야는 우상과 대별되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노래한다. "여호와여 주와 같은 이 없나이다 주는 크시니 주의 이름이 그 권능으로 말미암아 크시니이다"(6). 여호와는 세상의 어떤 것과도 비교 불가능한 존재이다.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시니 세상보다 크시고, 세상의 압제를 깨뜨리고 곤고한 이들을 구원하시는 분이시니 권능이 크신 분 아닌가? "오직 여호와는 참 하나님이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요 영원한 왕이시라 그 진노하심에 땅이 진동하며 그 분노하심을 이방이 능히 당하지 못하느니라"(10) 하나님은 참되시고, 살아 계신 분이시다. 그리고 영원히 다스리시는 왕이시다. 하나님은 힘으로 누르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존재를 증여하심을 통해 세상을 다스리신다. "여호와께서 그의 권능으로 땅을 지으셨고 그의 지혜로 세계를 세우셨고 그의 명철로 하늘을 펴셨으며"(12). 연속되는 세 개의 동사인 '짓다', '세우다', '펴다'를 통해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세계를 장엄하게 펼쳐 보인다. 


그러나 사람은 어리석어서 그 놀라운 세상의 신비를 깨닫지 못한다. 신비를 볼 눈이 없는 사람들은 스스로 창조주가 되려 한다. 그들은 신조차 만들어 섬긴다. 하지만 우상을 만드는 은장이들은 자기가 조각한 신상으로 인해 수치를 당할 것이다. 우상은 생기가 없다. 헛 것이다. 하지만 '야곱의 분깃'인 여호와는 만물의 조성자(16)이시다. '야곱의 분깃'이라는 표현은 아론에게 주신 말씀과 연결된다. 하나님은 땅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는 그에게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땅에 기업도 없겠고 그들 중에 아무 분깃도 없을 것이나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네 분깃이요 네 기업이니라"(민18:20) 하고 말씀하셨다. 죄 가운데서 헤매고 있기는 하지만 그 백성은 아주 버림받지는 않았다.


백성의 탄식

희망이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고난조차 면제된 것은 아니다. 예레미야는 적들에게 포위된 백성들을 향해 정든 땅을 떠날 준비를 하라 이른다. 하나님은 그 백성을 먼 곳으로 내던지시려 한다. 그 내던져짐을 통해 백성들이 자기들의 불신앙과 내적 빈곤을 돌이켜 볼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슬프다 내 상처여 내가 중상을 당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말하노라 이는 참으로 고난이라 내가 참아야 하리로다"(19). 버림받았다는 사실에 대한 자각처럼 씁쓸한 게 또 있을까? 몸으로 겪는 고통도 견디기 어렵지만 마음으로 겪는 고통은 더욱 견디기 어렵다. 고난의 시간을 자기 갱신의 계기로 삼을 줄 아는 이들은 복되다. 현실은 암담하다. 장막이 무너지고, 그를 지탱해주던 모든 줄이 끊어지고, 자녀들은 알지 못하는 곳으로 떠나간다. 어리석은 목자로 인해 양떼가 흩어졌다. 그들은 어리석어 여호와를 찾지 않는 이들이다(21). 그들은 자기들에게 위임된 권한을 사람들을 돌보고 살리는 데 활용하지 않았다. 오직 자기 배를 채우는 데만 열중했다. 이제 곧 북방으로부터 밀려오는 적들이 유다 성읍을 황폐하게 만들 것이다. 그 땅은 인적이 드문 곳, 곧 승냥이의 스산한 울음소리만 들려오는 곳이 될 것이다. 


이러한 때 예언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오직 그 백성을 위해 기도할 뿐.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사람의 길이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23). 유한한 인간은 자기 운명의 궁극적인 주인이 될 수 없다. 주어진 한계 안에서 선택할 수는 있지만 생의 조건 자체를 바꿀 수는 없다. 예언자는 바로 그런 사실을 절감한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그를 확고히 사로잡을 때 그는 하나님의 엄위하심 앞에 엎드릴 수 밖에 없다. "여호와여 나를 징계하옵시되 너그러이 하시고 진노로 하지 마옵소서 주께서 내가 없어지게 하실까 두려워하나이다"(24). '나'라고 말하고 있지만 실은 그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우리'이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진노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부어지기를 소망한다. 가련한 안간힘이다. 



















언약을 상기시키라

본문 / 렘11:1-23


언약을 파기한 자들의 운명

언약은 말로 한 약속이다. 말로 했기에 언제든 파기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언약은 상호간의 신뢰와 존중을 필요로 한다. 성경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어진 언약을 근간으로 하여 전개되는 구원의 이야기이다. 결혼도 서약에 의해 신성해진다. 약속을 '지키겠다'는 성실한 다짐이 무너지는 순간 결혼생활은 위기에 빠진다. 예언자들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을 결혼관계에 빗대 설명하곤 했다. 하나님은 언제나 성실하셨지만 이스라엘은 그렇게 못했다. 정부들의 달콤한 유혹에 마음이 흔들리기가 부지기수이고, 정부들을 따라간 적도 많았다. 하나님의 인내가 없었다면 그 언약은 일찌감치 중도폐기 되었을 것이다. 거듭되는 이스라엘의 배신에 하나님께서 역정을 내신다. "언약의 말을 따르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니라"(3). 하나님은 그 백성들에게 쇠풀무 애굽 땅에서 그 조상들을 이끌어내던 날 명령한 바를 상기시키신다.

"내가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순종하고 나의 모든 명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4b)


하나님의 위대하심은 무한하신 분께서 유한한 이들의 구원을 위해 당신의 자유를 제한하시는 데 동의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언약의 신비이다. 언약을 맺은 이들이 해야 할 일은 '순종'이다. 순종은 굴종이 아니다. 하나님께 매인 해방이다. 한용운은 <복종>이라는 시에서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라고 노래한다. 그러나 그런 화자가 도저히 복종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는 요구이다. 그 요구에 응하는 순간 "당신에게 복종할 수가 없는 까닭"이다. 순종하는 자가 얻은 기쁨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당도하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명에 따라 유다 성읍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이 언약의 말을 듣고 지키라"(6b)고 외쳤다. 그러나 거듭되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그 말을 듣지도 않았고, 악한 마음에서 나오는 고집대로 살았다. 예레미야는 오늘 이스라엘에 닥친 재앙은 우연히 다가온 것이 아니라 언약을 파기한 데 따른 보응이라고 말한다. 재앙의 쓰라림을 견디지 못하여 사람들이 부르짖겠지만 하나님은 듣지 않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면 유다 성읍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자기들이 섬기던 우상들에게 부르짖겠지만, 우상들은 사람들을 돕거나 구원할 능력이 애초에 없다. 고난은 가중될 것이다. 자업자득이다.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낱낱이 폭로하신다.


"유다야 네 신들이 네 성읍의 수와 같도다. 너희가 예루살렘 거리의 수대로 그 수치스러운 물건의 제단 곧 바알에게 분향하는 제단을 쌓았도다"(13)


'설마' 하겠지만 이게 현실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현대인들은 이미 마음에 우상을 모시고 살지 않던가. 가시적인 신상을 세우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마음의 지성소에 모시고 산다면 우리는 우상숭배자들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그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도 부르짖지도 구하지도 말라 이르신다. 좋은 열매를 맺는 아름다운 푸른 감람나무 가지는 꺾였고 그 나무에는 이미 불이 붙었다(16). 아무도 그 불을 끄지 못한다.


예언자의 수난

18절부터는 갑자기 맥락이 바뀐다. 예레미야는 자기 고향 땅 아나돗 사람들이 자기를 죽이려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예언자는 여호와께서 그런 음모를 알게 하셨다고 말한다. "나는 끌려서 도살 당하러 가는 순한 어린 양과 같으므로 그들이 나를 해하려고 꾀하기를 우리가 그 나무와 열매를 함께 박멸하자 그를 살아 있는 자의 땅에서 끊어서 그의 이름이 다시 기억되지 못하게 하자 함을 내가 알지 못하였나이다"(19). 고향 사람들은 왜 예레미야에게 이런 적개심을 보이는 것일까? 예수님은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막6:4)고 말씀하셨다. 사실은 어떠했나? 참 예언자는 어느 곳에서나 환영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말씀을 하신 까닭은 자기들이 설정해놓은 경계선을 무너뜨리고 해체하는 존재를 받아들일 수 없는 향촌 사회의 폐쇄성을 가리킨 것일까? 안온한 평화를 구하는 이들은 예언자를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존재로 인식했다. 예언자의 존재 자체가 부담이었던 것이다. 아나돗 사람들은 예레미야에게 "너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말라 두렵건대 우리 손에 죽을까 하노라"(21b)라고 말했다. 불길한 예언을 하는 예언자로 인해 자기들이 입을 해가 두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도 '아나돗'은 도처에 있다. 하늘로부터 오는 메시지를 틀어막으려는 이들이 얼마나 많던가.


그러나 그들의 계획은 좌절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가로막는다고 하여 막히지 않기 때문이다. 말씀을 가로막으려는 이들에게 준엄한 심판이 예고된다. "보라 내가 그들을 벌하리니 청년들은 칼에 죽으며 자녀들은 기근에 죽고 남는 자가 없으리라 내가 아나돗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리니 곧 그들을 벌할 해에니라"(22b-23).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놓은 둑은 큰물이 지면 다 무너진다. 물은 수천 년 수만 년 동안 흐르고 또 흘렀던 길을 찾아가곤 한다. 하나님의 말씀도 그러하다. 


















하나님의 정의는 어디에 있습니까?

본문 / 렘12:1-17


악한 자가 형통한 세상

감수성이 예민한 시인은 세상이 삭아버렸다고 말한다. 삭을대로 삭는 것이 세계라는 것이다(최승자). 세상을 삭게 만드는 것, 그것은 인간의 욕망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세계의 중심이다. 각각의 중심들은 자기를 중심으로 세계가 돌기를 바란다. 이런 욕망들이 부딪칠 때 세상은 소란스럽다. 선한 이들은 자기가 유일한 중심이 아님을 알기에 다른 이들을 배려하며 산다. 그러나 악인들은 자기 욕망을 중심으로 세계를 재구성하려 한다. 악인들은 번성하고 선한 이들은 언제나 힘겹게 살아간다. 공평함이 없는 세상의 풍경이다. 선한 자는 선한 보응을 받고 악한 자는 악한 보응을 받아야 할 것 같지만 세상은 그렇지 않다. 이런 일이 반복될 때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 앞에서 흔들린다. 


"여호와여 내가 주와 변론할 때에는 주께서 의로우시니이다 그러나 내가 주께 질문하옵나니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반역한 자가 다 평안함은 무슨 까닭이니이까"(1)


전형적인 신정론의 문제이다. 악인들은 마치 하나님이 심으신 것처럼 뿌리가 든든하고 줄기 또한 청청하여 많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의 입은 주님께 가깝지만 그들의 마음은 멀다. 그들의 행태를 보면 알 수 있다. 예레미야는 자기를 속속들이 잘 알고 계시는 주님께서 그런 악인들을 심판해달라고 청한다. "언제까지 이 땅이 슬퍼하며 온 지방의 채소가 마르리이까 짐승과 새들도 멸절하게 되었사오니 이는 이 땅 주민이 악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그가 우리의 나중 일을 보지 못하리라 함이니이다"(4).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는 이들로 인해 세상은 황폐하게 변했고 예언자는 지쳤다. 주님의 위로가 절실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따뜻한 말로 예언자를 위로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냉정하게 현실을 직시하라 이르신다. 세상이 온통 혼돈에 빠진 것처럼 보일 때에도 지레 낙심하거나 비명을 지르지 말라는 것이다. 작은 시련 앞에서 비틀거리거나 정신이 혼미해지면 더 큰 시련이 다가올 때 어찌할 것이냐는 것이다. 가까운 이들이 건네는 다정한 말 속에도 이미 배신의 씨가 들어있는 경우가 많다(6). 아프지만 그게 현실이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그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배신 당한 것은 예언자만이 아니다. 하나님도 오쟁이 진 남편 신세가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원수들의 손에 넘겨주셨다. 7절부터 9절 사이에는 '내 소유'라는 단어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동일한 단어의 반복은 하나님이 느끼시는 아픔을 도드라지게 만든다. 굳게 맺었던 언약을 저버리고 제 욕망의 길로 달려간 그 백성을 하나님은 버리실 수 밖에 없었다. 자기의 소유를 포기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당신의 소유였던 백성이 속절없이 유린당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많은 목자가 내 포도원을 헐며 내 몫을 짓밟아서 내가 기뻐하는 땅을 황무지로 만들었도다 그들이 이를 황폐하게 하였으므로 그 황무지가 나를 향하여 슬퍼하는도다 온 땅이 황폐함은 이를 마음에 두는 자가 없음이로다"(10-11)


아벨의 피가 땅에서 부르짖었던 것처럼 황무지로 변한 땅이 하나님을 바라보며 슬퍼한다. 예언자는 땅의 슬픔을 온몸으로 느낀다. 대체 왜 이 지경이 된 것일까?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온 삶의 결과이다. 하나님이 아닌 자기 욕망을 신으로 삼고 살아가는 이들은 세상을 조금씩 묵정밭으로 만드는 법이다. 그러나 그것을 아프게 자각하는 사람은 드물다. 일단 사나운 매와 들짐승이 휩쓸고 지나가고(9), 이방 통치자들이 침입하여 노략질을 하고 지나가면(10) 땅은 황무하게 변할 수 밖에 없다. 그때는 사람들이 밀을 심어도 가시를 거두고 수고하여도 소득이 없다. 여호와의 분노 때문이다.


이방 민족들에게 주어지는 기회

하나님의 채찍이 되어 그 백성을 징계한 이방 나라들의 운명은 어떠한가? 그들도 악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예언자의 눈에는 그들이 하나님의 징계의 도구이지만 그들은 자기들의 욕심에 이끌려 이스라엘을 침공했다. 그렇기에 그들은 '악한 이웃'이다.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묵과하지 않으신다. "보라 내가 그들을 그 땅에서 뽑아 버리겠고 유다 집을 그들 가운데서 뽑아 내리라"(14b). 앞 단락에서는 이방 땅으로 사로잡혀가는 상황은 상정하지 않았지만 이 대목에서는 포로기를 염두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제국주의적인 야욕을 드러내며 고대 근동세계를 피로 물들이던 세력들도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다. '힘' 혹은 '권세'를 가진 이들은 자기를 절대화하려는 유혹을 떨치지 못한다. 정현종 선생은 이것을 <權座>라는 시를 통해 통렬하게 지적했다. "權座는 저주의 수렴이요/權座는 치욕의 원천이며/權座는 강력한 汚點이다". 자기의 한계를 아는 권력은 어쩌면 형용모순인지도 모르겠다.


하나님은 유다 백성들을 그들의 손아귀에서 구해내실 것이다. 잠시 동안 그들을 징계하셨지만 아주 버리신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하나님은 이방 나라에게도 구원의 길을 열어놓고 계시다는 것이다. 선택은 그들의 몫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도를 배우고 그 도에 순종하면 구원을 얻을 것이고 순종하지 아니하면 뽑힘을 당할 것이다(16-17). 여호와의 도는 영원하다. 


















너무 늦기 전에 돌이키라

본문 / 렘13:1-27


예언자가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가장 중요한 도구는 말이다. 그는 말씀을 위탁받은 자이기에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말한다. 그는 말로 세우기도 하고 허물기도 한다. 그러나 예언자는 상징 행위를 통해서도 말한다. 그들은 사람들의 통념을 깨뜨리는 행동을 함으로써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을 미리 보여준다. 물론 그들의 행동은 임의로 선택된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행한 것이었다.


상징 행동

어느 날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에게 이르셨다. "너는 가서 베 띠를 사서 네 허리에 띠고 물에 적시지 말라"(1). 물에 적시지 말라는 말은 빨지 말라는 말이다. 몸에서 나는 땀과 때를 그대로 두면 직물은 쉬이 상한다. 며칠 후 주님의 말씀이 다시 임했다. "너는 사서 네 허리에 띤 띠를 가지고 일어나 유브라데로 가서 거기서 그것을 바위 틈에 감추라"(4). '유브라데'의 히브리어 원문은 '퍼랏'인데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는 메소포타미아 땅에 있는 유프라테스 강을 가리킨다. 하지만 여기서는 아나돗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파라 와디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예레미야는 물론 말씀에 순종했다. 주님의 말씀이 다시 임했다. "일어나 유브라데로 가서 내가 네게 명령하여 거기 감추게 한 띠를 가져오라"(6). 예레미야가 보니 그 띠는 썩어서 쓸 수 없게 되었다. 마침내 하나님은 이 상징 행동의 의미를 밝히 드러내신다. "내가 유다의 교만과 예루살렘의 큰 교만을 이같이 썩게 하리라"(9). 썩어 버린 띠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저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겼던 유다와 예루살렘의 교만이 빚어낸 참상을 가리키는 상징물이었다. 하나님의 명예와 영광을 드러내야 할 그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만들었던 것이다.


포도주 가죽부대(새번역은 '항아리'로 번역함, 12-14)의 비유는 더욱 직접적이다. "모든 가죽부대가 포도주로 차리라"는 예언자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든 가죽부대가 포도주로 찰 줄을 우리가 어찌 알지 못하리요"(12) 하고 대꾸한다. 들을 귀가 없는 탓이다. 주님은 왕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예루살렘 모든 주민들이 잔뜩 취하게 할 것이고, 그들이 다투다가 서로를 상하게 할 것이라 이르신다. 취함, 다툼, 폭력의 연쇄반응을 통해 친밀한 공동체는 해체되고 만다. 하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사랑하지도, 아끼지도 않으실 것이고 오히려 멸하실 것이다.


기회는 없는가? 있다. 예언은 불가역적인 사태를 통고하는 행위가 아니다. 돌이키라는 부름이다. 돌이키기 위해서는 먼저 귀를 기울여 들어야 한다. 그러면 무엇을 해야 할지 알게 된다. "그가 어둠을 일으키시기 전, 너희 발이 어두운 산에 거치기 전, 너희 바라는 빛이 사망의 그늘로 변하여 침침한 어둠이 되게 하시기 전에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라"(16). 예언자는 절박하다. 유다의 백성들은 다가오는 재앙을 예민하게 감지하지 못하기에 태평하지만, 예언자는 두려움으로 그 현실을 목도하고 있다. 그들이 귀기울여 듣지 않는다면 예언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다만 눈물을 흘릴 뿐이다. 


네 수치를 드러내리라

여호와는 예레미야를 왕(여호야긴)과 왕후(느후스다, 왕하24:8)에게 보낸다. 사태를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하는 그들에게 전달된 메시지는 단순하다. "스스로 낮추어 앉으라 관 곧 영광의 면류관이 내려졌다"(18). 굳건하던 성읍은 봉쇄되었고, 백성들은 잡혀가고 있다. 그런데도 그들은 통회자복하지 않는다. "너는 눈을 들어 북방에서 오는 자들을 보라 네게 맡겼던 양 떼, 네 아름다운 양 떼는 어디 있느냐"(20). 왕은 지배하는 자가 아니라 책임을 지는 자라야 한다. 위임된 권한이 클수록 책임도 크다. 백성들에 대한 책임은 소홀히 하면서 강압적 지배에 맛들인 이들이 독재자이다. 그러나 운명의 날이 온다. 산고를 겪는 여인처럼 고통에 사로잡히는 때 말이다. "어찌하여 이런 일이 내게 닥쳤는고"(22) 하겠지만 현실을 돌이킬 수는 없을 것이다. 고통을 겪고 수치를 당하면서도 그들은 자기들이 죄를 자각하지 못한다. 권력에 중독된 자들의 불치병이다.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23)


오랜 세월 동안 몸과 마음에 밴 죄는 웬만해서는 벗겨지지 않는다. 몸에 새긴 문신처럼 지울 수도 없다. 악에 물든 이들은 그렇게 자기 죄로 인해 몰락한다. 하나님은 그들을 사막 바람에 불려가는 검불 같이 흩으시려 한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을 망각하고 거짓을 신뢰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보응이다. 여기서 말하는 거짓은 '바알'을 비롯한 '우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신다. 수치심이라도 좀 느끼라고. "내가 네 치마를 네 얼굴에까지 들춰서 네 수치를 드러내리라"(26). 수치심 혹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이들은 돌이킬 수도 없지 않던가. "내가 너의 간음과 사악한 소리와 들의 작은 산 위에서 네가 행한 음란과 음행과 가증한 것을 보았노라 화 있을진저 예루살렘이여 네가 얼마나 오랜 후에야 정결하게 되겠느냐"(27). 우상숭배에 정신이 팔린 이들로 인해 하나님은 탄식하신다.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징계는 분풀이가 아니다. 더럽혀진 백성들을 '정결하게' 하려는 것이다.


















평강을 기다렸으나

본문 / 렘14:1-22


압도적인 자연 재해를 만날 때마다 인간은 자신의 작음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다. 파스칼은 "저 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이 나를 두렵게 한다"고 말했다. 인간은 유정하지만 자연은 무정해 보인다. 인간은 삶을 기획하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런 노력의 결과가 속절없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하기도 한다. 무정한 세상에 지친 이들은 차라리 저 무한한 우주 속으로 사라지기를 소망하기도 한다. 


고통 앞에서 부르짖다

극심한 가뭄이 유다를 덮쳤다. 그때가 언제인지를 특정할 수는 없다. 2절부터 6절까지는 가뭄으로 인해 겪는 그 땅의 어려움이 생생하게 묘사되고 있다. 유다가 슬퍼하고 성읍들은 쇠약해져 간다. 땅에 쓰러져 통곡하는 사람들의 소리가 드높다. 비틀걸음으로 물을 구하러 갔던 종들은 빈 그릇만 가지고 돌아오고, 거북등처럼 갈라진 땅을 보며 농부들의 애가 탄다. 새끼를 낳은 들의 암사슴도 더는 어쩔 수 없어 새끼를 포기하고, 들나귀도 헐떡이고 그 눈이 흐려진다. 단순한 자연재해가 아니다. 옛 사람들은 가뭄을 인간의 죄에 대한 하늘의 징계로 인식하곤 했다. 그렇기에 조선조의 왕들도 극심한 가뭄이 찾아오면 자기의 통치가 하늘 뜻을 거스린 것은 아닌지 여섯 가지 항목을 돌아보며(六事自責) 하늘 앞에 엎드렸다. 


가뭄으로 삶의 터전이 무너지자 사람들은 하나님께 참회와 탄원의 기도를 올린다. "여호와여 우리의 죄악이 우리에게 대하여 증언할지라도 주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소서 우리의 타락함이 많으니이다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나이다"(7). 두루 평안할 때에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 생의 위기 앞에 설 때 사람들은 화들짝 놀라 자신이 한갖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시인한다. 자신들의 죄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이 모든 사단이 자기들의 죄로부터 시작된 것임을 인정한다. 그리고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일해달라고 청한다. 백성들은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소망', '고난 당한 때의 구원자'라 칭한다. 그런 하나님께서 마치 '땅에서 거류하는 자' 같이 '하룻밤을 유숙하는 나그네 같이' 연약한 지경에 처한 것인가? '땅에서 거류하는 자'는 '게르'의 번역어인데, 게르는 이스라엘 땅에 들어와 살고 있는 나그네들을 일컫는 말이다.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마치 누군가의 도움과 돌봄 없이는 살 수 없는 처지에 빠진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내친 김에 그들은 하나님에게 더욱 도발적으로 말한다. 하나님은 마치 '놀란 자' 같으시고, '구원하지 못하는 용사' 같아 보인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조롱하기 위한 말이 아니라 자기들 마음 속에 깃든 두려움과 당혹감을 그리 표현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대한 신뢰까지 버린 것은 아니다. "여호와여 주는 그래도 우리 가운데 계시고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이오니 우리를 버리지 마옵소서"(9b).


백성들은 이렇게 절박하지만 하나님의 노여움은 여전히 사그라들지 않았다. 여호와는 예레미야에게 그 백성을 위한 중보기도를 올리지 말라 이르신다. 가뭄이라는 극한의 고통을 겪으면서도 그들은 여전히 어그러진 길에서 돌아서지 않았다는 것이다. 백성들이 아무리 금식하며 부르짖고 번제와 소제를 드릴지라도, 그 악한 행실을 버리지 않는 한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 오히려 칼과 기근과 전염병이 그들을 더 괴롭힐 것이다.


예언자의 슬픔

예레미야는 깊은 슬픔 속에 잠긴다.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에 드리운 불통의 장벽 때문이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을 경외심을 품고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마땅히 전해야 할 말을 전하지 않은 선지자들의 죄 때문이다. 꾸짖고 경계하는 말보다는 사람들이 듣고 싶은 말만 전한 선지자들 때문에 모두가 함께 몰락을 향해 질주하고 있다. 선지자라는 자들이 백성들에게 '두루 잘 될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백성들의 악행을 방조했다. 하나님은 그들을 거짓 예언자라 단언하신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말씀을 위탁한 적이 없다. 그런데도 그들은 "거짓 계시와 점술과 헛된 것과 자기 마음의 거짓으로"(14) 백성들에게 예언을 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다는 게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거짓 예언자들은 칼과 기근에 멸망할 것이다. 그들의 말을 믿고 따른 이들의 운명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하나님도 좋아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당할 혹은 당한 일 때문에 비통해 하신다. "내 눈이 밤낮으로 그치지 아니하고 눈물을 흘리리니 이는 처녀 딸 내 백성이 큰 파멸, 중한 상처로 말미암아 망함이라"(17). 이 눈물은 하나님의 눈물인 동시에 예언자의 눈물이기도 하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마음을 함께 느끼는 자가 아니던가. 압도적인 재난 앞에서 백성들의 지도자를 자처하던 이들도 어쩔 줄을 모른다. 백성들은 다시금 절규하듯 하나님 앞에 엎드린다. 


"주께서 유다를 온전히 버리시나이까 주의 심령이 시온을 싫어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우리를 치시고 치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가 평강을 바라도 좋은 것이 없고 치료 받기를 기다리나 두려움만 보나이다"(19)


백성들은 마침내 자기들과 조상들의 악을 인정한다. 그리고 주의 이름을 위하여 자기들을 미워하지 말아 달라고, 맺은 언약을 기억하여 달라고 청한다. 매를 맞기 전에 이런 깨달음을 얻을 수는 없는 것일까? 진정한 참회는 변화의 문지방이다. 참회로부터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견고한 놋 성벽처럼 되리라

본문 / 렘15:1-21


윤동주가 <참회록>을 쓴 것은 1942년 1월 24일, 만 24년 하고도 1개월을 더 산 때였다. 그는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비친 자기 얼굴을 욕되게 여겼다. 식민지 청년의 자의식 탓일까? 그는 욕된 삶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지만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고 다짐한다. 이런 엄정한 자기 응시와 결단조차 없다면 삶은 습관이 될 뿐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가 일시적인 참회로 스러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여기신다. 제2의 천성처럼 되어버린 죄의 인력에서 그들을 구해내기 위해서는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 이스라엘 역사를 대표하는 모세와 사무엘이 중재기도를 드린다 해도 하나님은 뜻을 돌이키실 생각이 없으시다. 지금 백성에게 필요한 것은 존재론적 충격이다. 죄의 유혹에 넘어간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듯이 그들도 낯선 땅, 남의 나라로 유배를 떠날 수 밖에 없다. 어디로 가야 하냐고 묻는 이들에게 하나님은 냉정하게 이르신다. 


"죽을 자는 죽음으로 나아가고 칼을 받을 자는 칼로 나아가고 기근을 당할 자는 기근으로 나아가고 포로 될 자는 포로 됨으로 나아갈지니라"(2). 


이런 재앙은 전쟁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하나님은 왜 이리도 화가 나신 것일까? "유다 왕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가 예루살렘에 행한 것으로 말미암아 내가 그들을 세계 여러 민족 가운데에 흩으리라"(4). 므낫세는 열두 살에 왕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쉰다섯 해 동안 다스렸다. 그는 아버지 히스기야가 헐어 버린 산당들을 다시 세우고, 바알의 제단을 쌓고, 아세라 목상도 만들었고, 하늘의 별을 숭배하기도 하였다(왕하21:1-3). 므낫세 시대에 급속하게 퍼진 우상숭배의 흐름이 백성들을 휩쓸었고,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이르렀다는 것이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을 버렸고,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다. 하나님은 늘 뜻을 돌이키는 분이시지만 백성들에게 그만 염증이 나고 말았다. 돌이킬 줄 모르는 백성에게 주어지는 것은 파멸이다. 놀람과 두려움이 그들을 사로잡을 것이고, 일곱 아들을 낳은 어머니도 기력이 다하여 숨을 헐떡일 것이다.


예레미야는 백성들에게 이런 참담한 사실을 전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하나님의 발길에 채여 사는 것이 예언자라지만 정말 전하고 싶지 않은 말도 있는 법이다. 그렇기에 그는 자기를 낳아주신 어머니를 원망한다. 온 세상을 상대로 다투고 싸워야 한다는 것은 얼마나 고단한 일인가. 사람들은 마치 그가 재앙을 가져온 것처럼 예언자를 저주한다. 하나님은 탄식하는 예언자를 격려하신다. "내가 진실로 너를 강하게 할 것이요 너에게 복을 받게 할 것이며 내가 진실로 네 원수로 재앙과 환난의 때에 네게 간구하게 하리라"(11). 하나님의 이런 말씀이 예언자에게 위로가 되었을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가장 가까운 이들로부터 분리되는 고통과 외로움은 여전히 남기 때문이다. 


12절부터 14절까지는 하나님의 심판 의지가 확고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보여준다. "북방의 철과 놋"은 침입자들의 위세를 가리킨다. 남왕국 유다는 그들의 기세를 당해낼 수 없다. 그들이 소중히 여기던 것들이 속절없이 약탈 당하고, 그들은 적들의 손에 이끌려 낯선 땅으로 끌려갈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불처럼 타오르는 하나님의 분노로 말미암은 것이다. 


악에게 져선 안 된다

예레미야도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이다. '속에 근심 밖에 걱정'이 그를 에워싸고 있다. 그는 어디에서 속하지 못한 사람, 하나님의 엄중한 메시지와 백성들의 적대감 사이에서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이다. 그렇기에 그는 하나님께 기도를 올린다.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오니 원하건대 주는 나를 기억하시며 돌보시사 나를 박해하는 자에게 보복하시고 주의 오래 참으심으로 말미암아 나로 멸망하지 아니하게 하옵시며 주를 위하여 내가 부끄러움 당하는 줄을 아시옵소서"(15)


예레미야는 하나님 앞에 선 존재로서의 자기 자신을 돌아본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리우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기뻐하고 즐거움을 누린 사람이라고 말한다. 어김없는 진실이다. 그는 여느 사람들처럼 개인의 안일한 행복을 구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분노를 가슴에 품고 살았다. 그래서 그는 따돌림 받았고 죽음의 위협을 당하기도 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 항변한다. "나의 고통이 계속하며 상처가 중하여 낫지 아니함은 어찌 됨이니이까 주께서는 내게 대하여 물이 말라서 속이는 시내 같으시리이까"(18). 감히 하나님을 향하여 이렇게 말해도 되는 것일까? 하나님께서 여름철의 시냇물처럼 종잡을 수 없는 분이라니. 


하나님은 예언자의 고통을 잘 아신다. 그래서 그의 말이 거칠다는 사실도 잘 아신다. 그렇기에 그런 천박한 말을 그치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라 이르신다. 시절이 수상하다고 하여 악한 이들을 돌이키게 해야 할 사람이 그들에게 오히려 동화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백성들 앞에서 '견고한 놋 성벽'이 되게 하실 것이라 이르신다. 하나님의 말씀을 위탁받은 이들은 이 약속을 굳게 붙들어야 한다. 그래야 무너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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