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평화를 교란한 죄 2016년 04월 21일
작성자 김기석

 평화를 교란한 죄


총선이라는 난폭한 열정이 지나간 후 사람들은 그 결과를 분석하고 향후에 벌어질 일들을 예측하기 위해 분주하다. 총선을 통해 나타난 민의는 수많은 정치평론가들과 선거 전문가들의  낯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정치는 생물이라는 사실을 겸허히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모처럼 열린 여소야대 국면을 두고 어떤 이들은 나라가 혼란스러워질 거라고 염려하고, 어떤 이들은 구부러진 것을 바로잡을 기회가 왔다고 흥감스럽게 말한다. 그 와중에 민의를 이현령 비현령으로 해석하여 자기 지분을 늘리려는 이들도 많다. 그게 어쩔 수 없는 정치인의 생리임을 인정한다 해도 씁쓰레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정국은 전경련에서 어버이연합 등 보수단체로 돈이 흘러간 정황이 포착되면서 새로운 격랑에 휩쓸리고 있다. 전경련은 어려운 사회단체에 대한 일상적인 지원의 일부라고 발뺌을 하고 있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미움과 갈등을 부추기는 세력의 배후에 거대 자본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돈에 취약한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이다. 자본은 공익을 내세운다 해도 이익 창출을 최우선의 가치로 여긴다. 이익이 최우선의 가치가 될 때 사람들은 수단으로 전락하고, 자본의 이익을 가로막는 이들은 적으로 간주된다. 돈은 힘이 세다. 돈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사회적 약자들은 투명 인간 취급받기 일쑤이다.


어느 시대이든 주류 세계의 가치관에 길들여지기를 거부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주류 세계에 의해 변두리로 몰려난 사람들이거나 자발적으로 소외의 자리에 선 사람들이다. 관습적 사고에 길들여진 사람들의 눈에 그들은 불순분자 혹은 불평불만이나 일삼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역사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그런 주변부 사람들을 통해 갱신되는 법이다. 괴어 있는 시간, 후텁지근한 일상 너머를 상상하는 이들이 없다면 역사의 변화는 불가능하다.


기원 전과 후를 가르는 존재인 예수는 로마제국의 지배를 당연한 것으로 수납하지 않았다. 압도적인 군사력에 의해 유지되는 평화는 진정한 평화가 아님을 알았기에 그는 새로운 세상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상상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제자들과 더불어 억압과 착취가 일상인 세상에서 나눔과 돌봄과 섬김에 근거한 새로운 세상을 시작했다. 세상이 만들어놓은 수많은 분리의 장벽을 넘나들면서 도무지 만날 수 없었던 사람들을 만나게 했고, 타자들의 낯선 모습 속에 깃든 아름다움을 보게 만들었다. 혁명이란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참 종교는 벽을 만들지 않는다. '우리'와 '그들'을 가른 후 '그들'을 불온시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기존 사회가 도외시하고 있던 이들을 사랑으로 품어 안아 그들을 벗으로 만든다. 그런데 오늘의 종교 현실은 어떠한가? 혐오와 수치심이라는 기제를 통해 낯선 이들에 대한 적개심을 만들어내는 일에 열중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토마스 모어가 1515년에 출간한 <유토피아>는 거의 마지막 부분에서 종교를 다룬다. 모어의 유토피아에는 다양한 종교가 공존한다. 그런데 그곳에 지나친 열정으로 기독교를 전파하는 이가 있었다. 그는 기독교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다른 종교를 모독하기까지 했다. 다른 종교는 성스러운 종교가 아니고, 그것을 믿는 이들은 영원히 지옥불에서 처벌을 받아야 마땅한 악한들이라고 말했다. 결국 그는 당국에 체포되고 말았는데 그 까닭은 종교를 모독했기 때문이 아니라 평화를 교란했기 때문이었다. 종교를 가지고 다른 사람을 해쳐서는 안 된다는 유토피아의 핵심 원리를 범했기에 그는 재판 끝에 유토피아에서 추방되었다. 다른 사람을 해치거나 그들의 생명을 위축시키려는 일체의 시도는 악이다. 이익이 아니라 생명이 근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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