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예레미야산책4 2016년 07월 14일
작성자 김기석

 진노의 술잔

본문/ 렘25:1-38


귀가 어두운 백성

25장은 유배 이전에 예레미야가 선포한 내용을 요약하고 있다. 예레미야는 지난 이십삼 년 동안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지만 유다와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은 누구도 자기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고 탄식한다. 들을 생각이 없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것처럼 외로운 일이 또 있을까? "끊임없이"라는 단어와 "너희가 순종하지 아니하였으며 귀를 기울여 듣지도 아니하였도다"(4b) 사이의 어긋남 속에 예언자의 외로움이 있다. 영어로 순종을 뜻하는 obedience는 '듣다'는 뜻의 라틴어 'audire'에서 나왔다. 순종은 들음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완고해진 마음은 듣기를 거부한다. 노자는 다섯 가지 소리가 귀를 멀게 만든다 하였다(五音令人耳聾). 자기 의에 가득 찬 이들은 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물론 하나님의 뜻을 여쭙지도 않는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라는 소의 등에 앉은 등에를 자처했다. 소가 나른한 잠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게 자기 소명이라는 것이다. 옳고 그름이 선명하게 분별되지 않을 때 사람들은 다수의 편에 섬으로 선택에 따른 책임을 모면하려 한다. 그런데 예언자들이 외쳤던 메시지는 무엇이었던가.


"너희는 각자의 악한 길과 악행을 버리고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 여호와가 너희와 너희 조상들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준 그 땅에 살리라"(5)


'돌아오라'는 요구는 벗어났음을 전제한다. '악한 길'과 '악행'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멀어짐 곧 소외이다. 돌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일단 분주하던 발걸음을 멈추어야 한다. 그런 후에 돌이켜야 한다. '악惡'이란 한자는 무덤을 형상화한 '아亞'와 '심心'이 결합된 말이다(우석영, <낱말의 우주>, 궁리, p.292 참조). 악이란 결국 상대에게 무덤을 안겨주고 싶은 마음, 곧 남에게 해를 끼치려는 마음이다. 그 마음을 품은 채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는 없다. 돌이키는 자에게 주어지는 약속은 땅에서의 장구한 삶이다. 그러나 백성들은 여호와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우상 숭배의 길에 접어듦으로써 스스로 화를 자초했다.


"보라 내가 북쪽 모든 종족과 내 종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을 불러다가 이 땅과 그 주민과 사방 모든 나라를 쳐서 진멸하여 그들을 놀램과 비웃음 거리가 되게 하며 땅으로 영원한 폐허가 되게 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9)


여호와는 느부갓네살을 '내 종'이라 이르신다.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는 말이 아니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된다는 뜻이다. 그는 하나님의 손에 들린 일종의 몽둥이이다. 잔혹한 그의 침략으로 하나님의 뜻을 받들던 땅은 폐허로 변하고 말 것이다. 기뻐하는 소리와 즐거워하는 소리, 신랑과 신부의 소리, 맷돌 소리가 끊어지고 등불 빛조차 사라질 것이다. 일상이 파괴된 괴괴하기 이를 데 없는 풍경이다. 하지만 그 징계의 시간이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는다. 칠십 년이 지나면 오히려 징계의 도구였던 바벨론이 징계의 대상이 될 것이다. 칠십 년은 정확하게 계산된 기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시간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포효하시는 여호와

15절부터는 이민족들에 대한 신탁이다. 하나님은 예언자에게 이르신다. "너는 내 손에서 이 진노의 술잔을 받아가지고 내가 너를 보내는 바 그 모든 나라로 하여금 마시게 하라"(15).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운명을 관장하는 민족신이 아니라 모든 민족의 운명을 결정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진노의 술잔을 받은 나라들은 그것을 마시고 비틀거리고 미친 듯이 행동할 것이다. 전쟁의 칼날이 그들에게 닥쳤기 때문이다. 전쟁이 중근동 지역을 휩쓸 때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에 사는 사람들, 왕과 고관들은 놀램과 비웃음 거리가 되고 그 땅은 폐허로 변할 것이다. 이스라엘 주변의 모든 나라 역시 그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예언자는 각 민족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열거한다. 애굽, 우스, 블레셋의 여러 부족, 에돔, 모압, 암몬, 두로, 시돈, 드단, 데마, 부스, 살쩍을 깍은 모든 자(관자놀이의 머리를 민 모든 자, 아랍 부족), 아라비아, 광야에서 섞여 사는 민족, 시므리, 엘람, 메대는 물론이고 미처 이름을 언급하지 않은 나라와 그 백성들도 전쟁의 참상에서 벗어날 수 없다. 26절 하반절에 등장하는 '세삭'은 일종의 암호화된 단어로  '바벨론'을 뜻한다. 그러니까 온 세계를 전쟁의 참화 속으로 끌어들인 바벨론도 결국은 여호와의 진노의 잔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칼에 취한 나라들은 서로를 찌르고 베면서 스스로 무너진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이 내리신 징벌이다. "요란한 소리가 땅 끝까지 이름은 여호와께서 뭇 민족과 다투시며 모든 육체를 심판하시며 악인을 칼에 내어 주셨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31). 


하나님의 진노로 인해 죽임을 당한 자가 지면을 가득 채우겠지만 그들을 위해 애곡하는 자도, 시신을 거두어 주는 자도, 매장하여 주는 자도 없을 것이다. 전쟁은 파괴와 죽음을 일상화한다. 죽음이 일상화된 세상에서 사람들은 더 이상 울 기력조차 없다. 죽음 앞에서도 울지 않는다는 것, 비인간화의 극치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백성들의 목자들에게 '애곡하라', '잿더미에서 뒹굴라'고 말한다. 참회하라는 말이다. 목자로 상징되는 지도자들의 그릇된 상황인식이 백성들의 죽음을 불러온다. 세상을 지배하는 분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세상에 평화가 임한다.


















성전에서 벌어진 논쟁

본문/ 렘26:1-24


그릇된 성전 신앙

예레미야서는 시간적 순차를 따르기보다는 전과 후를 자유롭게 오가며 이야기를 풀어간다. 26장은 다시 여호야김 원년으로 돌아간다.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성전 뜰에서 예배드리러 모여 드는 이들에게 말씀을 전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예배는 자기를 말끔히 비워내고 하나님의 뜻을 정성스레 모시는 행위 아니던가. "그들이 듣고 혹시 각각 그 악한 길에서 돌아오리라 그리하면 내가 그들의 악행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려 하던 뜻을 돌이키리라"(3).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저버리고 베돌기만 하는 백성들의 행태가 그저 안타까우신 것이다. '혹시'라는 단어 속에 하나님의 안타까움이 배어 있다. 지금까지 그들은 순종하지도 않았고, 율법을 행하지도 않았고, 선지자들의 말을 따르지도 않았다. 그들은 성전이 굳건히 서 있는 한 하나님이 자기를 버리지 않으리라고 확신했다. 자의적으로 구성한 그릇된 신앙에 스스로 구속된 꼴이다. 예레미야는 그런 백성들의 그릇된 신념을 타격하는 말씀을 전한다.


"내가 이 성전을 실로 같이 되게 하고 이 성을 세계 모든 민족의 저줏거리가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6)


이 말은 충격이었을 것이다. 성전이 실로와 같은 운명에 떨어진다니. 엘리 가문이 멸문지화를 당하면서 실로는 처참하게 파괴되지 않았던가(삼상4장 참조). 그것은 감히 누구도 할 수 없는 말이었고 해서도 안되는 말이었다. '성전 신앙'에 사로잡힌 이들에게 예언자의 이 말은 불경하기 이를 데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신앙의 본질인 경외심은 사라지고 관습적인 신앙의 몸짓만 남을 때 성전은 무너지는 게 마땅하다. 하지만 성전 체제에 기생한 채 살아가는 이들은 예언자의 그런 말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범죄로 받아들인다.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들이 나서서 예레미야를 붙잡아 왕궁에서 온 고관들 앞에 이끌어냈다. 그리고 제사장과 선지자들이 나서서 성전과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한 그가 죽는 게 마땅하다고 사람들을 선동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전혀 주눅든 기색 없이 성전 뜰에서 외쳤던 말씀을 반복한다. 말씀에 사로잡힌 자는 그것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 마음이 불 붙는 것같기 때문이다(렘20:9). 그는 자기 운명을 스스로 선택할 수 없기에 철저히 수동적인 존재라 할 수 있다. 예수님도 베드로에게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21:18b)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이것이 부름받은 자들의 운명이다.


"보라 나는 너희 손에 있으니 너희 의견에 좋은 대로, 옳은 대로 하려니와 너희는 분명히 알아라 너희가 나를 죽이면 반드시 무죄한 피를 너희 몸과 이 성과 이 성 주민에게 돌리는 것이니라 이는 여호와께서 진실로 나를 보내사 이 모든 말을 너희 귀에 말하게 하셨음이라"(14-15)


모든 행위에는 책임이 따른다.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린 자는 그에 따른 보응을 받게 될 것이다. 예언자를 박해하는 것은 그를 보내신 분을 적대하는 일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닥쳐올 고난을 예고하면서 하신 말씀은 얼마나 적확한가?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만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요16:2). 하나님을 대적하면서도 하나님을 섬기는 줄로 아는 사람들이 많다. 절대적 진리를 주장하는 종교인들은 일쑤 폭력을 사용한다. 그러한 배타적 진리 주장 뒤에는 비릿한 자기 확장의 욕망이 숨어 있을 때가 많다.


숨겨진 조력자들

예레미야의 단호하고도 과감한 증언 앞에서 고관들과 백성들은 두려움을 느꼈다. 그래서 그들은 주저한다. 불편한 존재이기는 하지만 그를 차마 죽일 수도 없다. 그들은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곤경에서 벗어날 방도를 전례前例에서 찾는다. 히스기야 시대에 시온과 예루살렘의 파멸을 예고했던 모레셋 사람 미가의 예가 동원되었다. 히스기야는 그를 죽이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 앞에 엎드려 간구함으로 재앙을 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똑같은 경고를 했던 스마야의 아들 우리야는 다른 운명을 맞았다. 여호야김은 사람을 보내 애굽에 피신하고 있던 그를 잡아들여 처형했던 것이다. 이처럼 두 가지 선택이 그들 앞에 있다. 하지만 어느 편이 옳은 것인지 여전히 불분명하다.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상황에서 예레미야를 도운 것은 사반의 아들 아히감이었다. 그는 백성의 손에서 예레미야를 빼내고 보호해주었다. 예레미야는 요시야 임금 시대부터 사반의 집안과 두터운 친분을 맺고 있었다. 사반은 기원전 622년에 성전에서 발견된 율법서를 왕 앞에서 낭독한 사람이다(왕하22:10). 바벨론에 잡혀간 포로민들에게 보내는 예레미야의 편지를 가지고 간 것도 사반의 아들 엘라사였다(렘29:3). 나중에 포로로 잡혀 바벨론으로 끌려가던 예레미야가 사령관 느부사라단의 호의로 풀려났을 때 몸을 기탁하기 위해 찾아간 것은 바로 아히감의 아들인 그다랴였다(렘40:1-6).


하나님은 곳곳에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을 숨겨두신다. 세상이 아무리 타락해도 그 탁류에 휩쓸려가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 말이다. 엘리야는 천애의 고아가 된 듯 외로운 처지에 빠져 낙심했을 때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도 않고 입을 맞추지도 않은 선지자 칠천 명을 남겨두셨다는 여호와의 말씀을 듣는다(왕상19:18). 세상이 온통 어둡기만 한 것은 아니다.


















거짓 예언자들

본문/ 렘27:1-22


세상의 주권자는 누구인가?

27장은 여호야김이 다스리던 시절에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이라는 말로 시작되지만 3절을 보면 '시드기야'의 오기가 아닌가 싶다. 이것은 성경의 판본이 다양하기에 비롯되는 문제이다. 예레미야는 줄과 멍에를 만들어 목에 걸고서 유다 왕 시드기야를 보러 온 외국 사절들에게 나아가 그 멍에를 나눠주어 본국의 왕들에게 전달하도록 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줄과 멍에는 물론 바벨론의 지배를 뜻한다. 에돔, 모압, 암몬, 두로, 시돈 왕의 사신들은 왜 시드기야에게 왔던 것일까? 무서운 기세로 몰아치는 바벨론의 침공에 공동 대처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 자구책을 강구하는 것은 다스리는 자들의 당연한 책무이다. 그러나 그들은 한시적이긴 하지만 바벨론을 근동 세계의 패권자로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알 길이 없었다. 하나님은 세상을 다스리는 주권이 당신에게 있음을 명백히 밝히신다.


"나는 내 큰 능력과 나의 쳐든 팔로 땅과 지상에 있는 사람과 짐승들을 만들고 내가 보기에 옳은 사람에게 그것을 주었노라"(5)


여기서 말하는 '옳은'은 도덕적인 자질의 탁월함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적합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당분간 세상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손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정치술이나 군사력의 월등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맡기셨기 때문이다. 기한이 이르기까지 그의 지배는 땅의 곳곳에 미칠 것이고, 바벨론의 멍에를 메지 않는 나라와 백성에게는 칼과 기근과 전염병이 뒤따를 것이다. 이것은 쓰라릴망정 직면해야 할 현실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재앙이 닥쳐오기 전까지는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붙들고 싶어하는 법이다. 왕들은 자기들의 불안을 다독거려줄 누군가를 찾는다. 하나님은 그런 마음조차 아시기에 단호하게 이르신다.


"너희는 너희 선지자나 복술가나 꿈꾸는 자나 술사나 요술자가 이르기를 너희가 바벨론의 왕을 섬기게 되지 아니하리라 하여도 너희는 듣지 말라"(9)


그들의 말은 달콤하지만 위험하다. 그 달콤한 말에 귀를 기울이는 순간 파멸은 예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거짓 예언자들에게 현혹되는 이들은 제 나라에서 쫓겨날 것이고 결국 망하고 말 것이다. 희망적인 말이 때로는 독이 되는 법이다. 들음에도 분별력이 필요하다. 분별력이 어두워질 때 우리는 자신의 욕망 혹은 누군가의 의지에 종속되고 만다. 여호와는 현실을 현실로 수용하라고 말한다. 바벨론 왕의 멍에를 메는 사람은 살아남을 것이다. 


예레미야는 시드기야 왕에게도 바벨론 왕의 멍에를 메야 한다고 권고한다(12-15). 치욕스럽더라도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으니 바벨론 왕의 지배를 받지 않게 될 것이라는 거짓 선지자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말라는 것이다. 거짓 선지자들은 권력에 종속된 존재들이다. 그들은 왕이 듣고 싶은 말만 한다. 왕의 비위를 거스를 엄두도 내지 못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자가 아니라 왕의 종일 뿐이다. 문제는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빙자하여 말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거짓 선지자의 운명을 이렇게 예고하신다.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하니 내가 너희를 몰아내리니 너희와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이 멸망하리라"(15)


근거없는 낙관론은 위험하다

예레미야는 제사장들과 백성들에게도 말씀을 전한다(16-22). 이 단락에는 경고와 권고 그리고 꾸짖음이 뒤섞여 있다. 먼저 예레미야는 여호야긴 왕 때 약탈당했던 성전 기구들이 바벨론으로부터 되돌아올 것이라는 선지자들의 헛된 말을 믿지 말라고 말한다. 성전 기구들을 돌려받는다는 것은 바벨론의 멸망을 전제하는 것이다. 성전 기구가 이방 땅에 있다는 사실을 지극한 치욕으로 느꼈을 제사장들의 입장에서는 성전 기구들이 돌아오리라는 예언보다 더 달콤한 예언이 또 있었을까. 그들은 시대를 통찰하거나 사리를 분별하기보다는 그 말을 무작정 믿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그들의 근거없는 낙관론에 찬물을 끼얹는다. 바벨론 왕을 섬기는 것만이 살 길이라는 것이다.


"만일 그들이 선지자이고 여호와의 말씀을 가지고 있다면 그들이 여호와의 성전에와 유다의 왕의 궁전에와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기구를 바벨론으로 옮겨가지 못하도록 만군의 여호와께 구하여랴 할 것이니라"(18)


예레미야는 훨씬 더 비극적인 미래를 예고한다. 약탈당하지 않고 남아 있던 기둥들과 큰 대야와 받침들과 예루살렘 성에 남아 있는 기구들이 바벨론으로 옮겨지고, 하나님이 정하신 기한이 찰 때까지 거기에 머물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여호와께 매를 맞아도 깨닫지 못하는 이들, 궁지에서 벗어나는 일에만 골몰할 뿐 삶을 근본으로부터 다시 돌아보지 않는 이들은 더 큰 재앙을 맞을 수밖에 없다. 



















예레미야와 하나냐

본문/ 렘28:1-17


거짓 평화에 속지 말라

유다 임금 시드기야의 통치 제 사년(기원전 594년) 다섯 째 달에 기브온앗술의 아들 선지자 하나냐가 여호와께서 들려주신 말씀이라며 제사장들과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예언을 했다. 그는 마치 예레미야를 비웃기라도 하듯 예레미야가 선포한 예언의 메시지를 다 뒤집는다. '여호와께서 바벨론 왕의 멍에를 꺾으셨다', '느부갓네살이 옮겨 간 성전의 모든 기구를 이 년 안에 되돌려 놓으실 것이다', '포로로 잡혀간 왕의 아들 여고니야와 모든 포로들을 고토로 되돌리실 것이다'. 라는 것이다. 그의 예언은 확신에 차 있다. 구체적인 일자까지 제시한다. 마치 시한부 종말론자를 보는 것 같지 않은가. 세상에는 특별한 계시를 주장하는 이들이 참 많다. 기도하는 중에 하늘의 음성을 들었다거나 비전을 보았다고 말하며 사람들을 현혹하는 무리들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바람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하나님의 뜻으로 둔갑시키곤 한다. 대중들은 그들이 사용하는 단정적이고 확신에 찬 말에 넘어간다. 


삶이 불안할수록 사람들은 자기들의 불안감을 잠재워줄 카리스마적 지도자들을 찾는다. 삶의 불확실함과 모호함을 말끔하게 걷어내고 흔들림 없이 걸어갈 길을 제시해주는 사람 말이다. 이단 종파에 사람들이 몰리는 까닭은 그들이 확신에 찬 언어를 구사하기 때문이다. 자기 삶의 주체로 설 힘이 없는 사람일수록 누군가의 권위에 의지하고 싶어하고, 그들은 쉽게 거짓 예언자들의 먹잇감이 된다. 하나냐는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을 했다. 그의 실상을 꿰뚫어본 사람은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예레미야는 역시 모든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서 말한다.


"아멘, 여호와는 이같이 하옵소서 여호와께서 네가 예언한 말대로 이루사 여호와의 성전 기구와 모든 포로를 바벨론에서 이 곳으로 되돌려 오시기를 원하노라"(6)


그렇게만 되면 얼마나 좋겠느냐는 것이다. 그건 이미 시작되었고 미구에 닥쳐올 엄청난 재앙을 전하는 예레미야도 원하는 바이다. 하지만 듣기 좋은 소리가 늘 참인 것은 아니다. 예레미야는 "너는 내가 네 귀와 모든 백성의 귀에 이르는 이 말을 잘 들으라"(7)고 말한다. 평범하게 보이지만 이 구절은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앞서 하나냐가 자기 예언이 여호와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강변한 것에 대한 대응이다. 예레미야는 자기의 이성과 경험과 추론 능력에 근거하여 말한다. 이전부터 전쟁과 기근과 전염병을 예고한 예언자들도 있고 평화를 예언한 이들도 있지만 평화를 예언한 이들이 참 예언자인지 아닌지는 그들이 선포한 내용의 실현 여부를 통해 드러난다는 것이다. 신명기 법전은 '증험'도 '성취'도 없다면 그것은 여호와의 말씀이 아니라 선지자가 제 마음대로 한 말이라고 못박고 있다(신18:21-22). 


광신을 넘어

하나냐는 거짓 예언자의 초상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계시로 주장하나 실상은 정반대이다. 존 웨슬리는 <광신의 본성>이라는 설교에서 광신자들의 특색을 이렇게 밝힌다. 그들은 "설교나 기도에서 자신들이 성령의 특별한 능력을 받았다고 상상"하고, "생활의 가장 사소한 일들에서까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지시'를 받고 있거나 받을 것이라고 상상"(한국웨슬리학회 편, <웨슬리 설교전집3>, 조종남·김홍기·임승안 외 공역, 대한기독교서회, p.24, 25)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은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까? 웨슬리의 메시지는 간명하지만 핵심을 꿰뚫고 있다. "경험과 이성 그리고 성령의 평범한 도우심을 힘입고 명백한 성경적 법칙을 적용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는 것"(위의 책, p.34)이다. 하나님이 주신 이런 능력을 사용하지 않을 때 우리 영혼은 악한 자들에게 속절없이 휘둘리게 마련이다. 특별한 계시를 추구하기 전에 우리에게 일상적으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자기 말을 부정당한 하나냐는 폭력적 방식으로 예레미야에게 대응한다. 그는 예레미야의 목에서 멍에를 빼앗아 꺽어 버린 후 여호와께서 이 년 안에 느부갓네살의 멍에를 꺾으실 것이라고 재확인하듯 말한다. 자기 증언의 신빙성을 사람들에게 시각적으로 각인시키기 위한 행동이었다. 하나냐의 폭력에 예레미야는 일체 폭력으로 대응하지 않고 자기 길을 갔다(11). 갈등을 회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불필요한 대응을 하느라 시간과 감정을 허비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하나님의 말씀이 다시 예레미야에게 임한다.


"너는 가서 하나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나무 멍에들을 꺾었으나 그 대신 쇠 멍에들을 만들었느니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쇠 멍에로 이 모든 나라의 목에 메워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을 섬기게 하였으니 그들이 그를 섬기리라 내가 들짐승도 그에게 주었으니라 하라"(13-14)


하나님의 뜻은 확고하다. 인간의 낙관론으로 그 결정을 되돌릴 수는 없다. 나무 멍에로도 깨닫지 못한다면 쇠 멍에를 지는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그릇된 말로 사람들의 영혼을 호리는 하나냐를 그냥 두고 보실 수가 없어 말씀하신다. "내가 너를 지면에서 제하리니 네가 여호와께 패역한 말을 하였음으라 네가 금년에 죽으리라"(16). 하나냐는 그해 일곱째 달에 죽었다. 거짓 예언자의 말로이다.


















미래와 희망을 주시는 주님

본문/ 렘29:1-32


긴 호흡의 희망

29장은 예레미야가 바벨론에 잡혀간 포로민들에게 보낸 편지를 둘러싼 이야기이다. 그는 유배지에 살아남은 장로들과 제사장과 선지자들과 백성들에게 쓴 편지를 시드기야 왕의 사신으로 보냄을 받은 사반의 아들 엘라사와 힐기야의 아들 그마랴 편에 보냈다. 포로민들에게 주어진 메시지는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는 정착의 권유이다. 그곳에서 집을 짓고 거기에 살며 텃밭을 일구고 그 땅에서 나는 열매를 먹으라는 것이다. 섣부른 희망에 기댄 채 내일을 준비하지 않는 어리석음은 위험하다. 둘째는 결혼 장려이다. "거기에서 번성하고 줄어들지 아니하게 하라"(6b). 가혹한 현실의 중압감에 눌려 위축되지 말고 주어진 생명을 검질기게 살아내라는 것이다. 셋째는 그 땅의 평안을 구하라는 것이다. 민족적 자긍심을 훼손하는 말처럼 들릴 수도 있다. 어찌 원수의 땅이 평안하기를 빌 수 있단 말인가? 시편 기자는 바벨론 사람들이 시온의 노래를 청할 때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시137:4) 하고 탄식하지 않았던가? 차라리 바벨론의 멸망을 위해 기도하란다면 모를까 어찌 그 땅의 평안을 구하라고 하실까. 그것은 그들이 처해 있는 상황 때문이다. 그 땅이 평안하지 않으면 포로민들은 생사를 기약할 수 없다.


예레미야를 통해 전달된 메시지는 간명하다. 섣부른 희망에 사로잡혀 더 깊은 절망 속으로 추락하지 말라는 것이다. 빅터 프랭클은 <죽음의 수용소에서>에서 어느 해 5월 말이면 전쟁이 끝날 거라는 확신 속에 아주 낙관적으로 살던 사람이 때가 되어도 기대한 일이 일어나지 않자 티프테리아에 감염되어 곧 죽음에 이르렀던 일을 전하고 있다. 희망은 본래 희박한 것이다. 그렇기에 지혜로운 이들은 최악의 상황을 상정하고 그 속에서 기어이 살아낼 힘을 끌어낸다. 절망의 어둠을 견디지 못하는 이들일수록 거짓 선지자들에게 미혹되기 쉽다. 하나님은 바벨론의 지배가 영구하지는 않을 거라고 말씀하신다.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10). 일각이 여삼추 같은 사람들에게 70년은 가혹한 시간이다. 하지만 급하다고 하여 바늘 허리에 실을 묶어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11)


지금 현실이 어둡다 하여 하나님이 계시니 안 계시니 할 일이 아니다. 오히려 당신의 백성들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신뢰해야 한다. 지금 그 백성에게 닥쳐온 재앙이 마지막 말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들이 샬롬을 누리기를 원하신다. 그러기 위해서는 백성들이 먼저 돌이켜야 한다. 하나님을 등진 자리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향해 서야 한다. 부르짖어 기도하고, 온 마음으로 구하면 하나님은 그들을 만나 주실 것이다. 그 때가 되면 긴 유배 생활은 끝나고 그리웠던 고토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스마야의 운명

하지만 본토에 남아 있는 이들이라 하여 죄가 없다 할 수 없다. 여호와는 유배를 면하고 그 땅에 남아 있던 자들에게 임할 징벌을 예고하신다. 그들에게도 칼과 기근과 전염병이 임할 것이고, 그로 인해 그들은 상하여 먹을 수 없는 몹쓸 무화과 같게 될 것이고, 세계 여러 나라 가운데 흩어져 학대를 당하고 조롱거리로 전락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백성들에게 닥칠 그 모든 재앙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지 않는 데서 비롯된다. 15절에 나오는 "너희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바벨론에서 선지자를 일으키셨느니라"라는 구절은 21절 이하와 연결된다. 바벨론이라고 해서 여호와의 선지자가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물론 없다. 하나님은 어디에서나 당신의 종들을 일으켜 세우실 수 있다. 하지만 거짓 선지자 또한 어디에나 있다. 예레미야는 포로민들 가운데 있으면서 사람들을 미혹하는 거짓 예언자들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거명하며 그들에게 임할 파국을 전한다. 골라야의 아들 아합, 마아세야의 아들 시드기야는 결국 느부갓네살에 의해 살해당할 것이고 그들의 이름은 사람들이 누군가를 저주할 때 사용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 두 예언자는 말로만 속이는 것이 아니라 악한 행실로 여호와의 눈밖에 난 사람들이다.


"그들이 이스라엘 중에서 어리석게 행하여 그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며 내가 그들에게 명령하지 아니한 거짓을 내 이름으로 말함이라 나는 알고 있는 자로서 증인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시니라"(23)


24절부터는 스마야에 관한 예언이다. 그는 예루살렘에 있던 스바냐 제사장과 다른 제사장들에게 편지를 보내 왜 예언자 행세를 하는 미친 자들과 선지자 노릇을 하는 이들을 붙잡아 나무 고랑과 쇠 고랑으로 채우지 않냐고 항의한다. 포로민들에게 바벨론에 정착하여 살라고 권면한 예레미야는 마땅히 징계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스바냐가 그 편지를 예레미야에게 읽어주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 스마야는 보냄을 받은 적이 없는 사람 곧 거짓 예언자이고,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패역한 말을 했기에 그와 그의 자손들은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복된 일을 보지 못할 것이다. 오늘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이들이 두렵게 기억해야 할 경고이다. 


















회복에 대한 약속

본문 /렘30:1-24


멍에를 꺾으시는 여호와

30장은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약속을 다룬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일러 준 모든 말을 책에 기록하라고 명하신다. 구전 전통이 강한 시대에 뭔가를 기록한다는 것은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발화된 말은 시간과 더불어 소멸되지만 기록된 말은 시간의 풍화 작용을 견뎌낸다. '기록하라'는 명령 속에는 선포되는 메시지가 분명히 시행되리라는 약속이 담겨있다. 1-3절은 '위로의 책'이라 불리는 30장과 31장의 도입부이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과 유다의 포로를 돌아가게 할 날이 오리니 내가 그들을 그 조상들에게 준 땅으로 돌아오게 할 것이니 그들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3)


예언자의 말투이긴 하지만 이 짧은 구절의 앞뒤를 감싸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와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가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를 드러낸다. 포로들이 해방되어 고국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은 백성들이 투쟁을 통해 얻은 결과도 아니고, 탁월한 외교의 성과도 아니다. 바벨론의 국력이 약화되었기 때문도 아니다.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의지의 결과이다. 


4절부터 7절까지는 '무서운 징벌'을 받아야 했던 지난 날을 돌아본다. 평화 대신 두려움과 공포가 사람들을 사로잡던 날, 남자들이 마치 해산하는 것처럼 낯빛이 변했던 날, 환난과 슬픔의 날, 그 운명의 날은 이제 지나가고 구원이 다가온다. 먹구름의 시간이 지나가고 마침내 화창한 날이 온다. 그 날은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시고 회복케 하시는 주님, 언약을 기억하시는 주님의 은총으로 열린다.


"만국의 여호와의 말씀이라 그 날에 내가 네 목에서 그 멍에를 꺾어 버리며 네 포박을 끊으리니 다시는 이방인을 섬기지 않으리라 그들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며 내가 그들을 위하여 세울 그들의 왕 다윗을 섬기리라"(8-9)


바벨론의 멍에를 꺾고 그 포박을 끊는 분은 여호와시다. 그러한 해방의 목적은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것이고, 하나님의 위임을 받은 왕과 더불어 새로운 세상을 열기 위함이다. 악행과 우상숭배에 빠졌던 과거의 행적은 말끔히 지워져야 한다. 하나님의 의지는 강력하다. 그 백성이 아무런 위협도 받지 않으면서 태평과 안락을 누릴 날을 창조하신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원할 것이라"(11a). 이 한 마디를 진심으로 신뢰하는 것보다 더 큰 용기가 되는 말이 또 있을까? 하지만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시다. 백성들을 구원하지만 그들의 잘못을 벌하지 않은 채 버려 두지는 않으신다. 


"네 상처는 고칠 수 없고 네 부상은 중하도다 네 송사를 처리할 재판관이 없고 네 상처에는 약도 없고 처방도 없도다 너를 사랑하던 자가 다 너를 잊고 찾지 아니하니 이는 네 악행이 많고 네 죄가 많기 때문에 나는 네 원수가 당할 고난을 네가 받게 하며 잔인한 징계를 내렸도다(12-14)


시련의 시간은 지나고

하지만 이제 이 시련의 시간은 끝났다. 이스라엘을 삼켰던 자들이 잡아먹힐 것이고, 대적들은 사로잡혀 갈 것이다. 그들을 노략질했던 자들이 오히려 노략물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친히 그 백성의 상처를 고쳐 주신다. 그 상처로부터 새 살이 돋아나게 하신다(17). 하나님의 징계는 중병에 걸린 그 백성을 고치고 새롭게 하시는 주님의 자비이다.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다. 돌아온 포로민들이 언덕 위에 성읍을 건축하고 궁궐도 제 자리에 서게 될 것이다. 일상의 소음이 그쳐 괴괴하기 이를 데 없던 거리에서 감사의 소리, 즐거워하는 자들의 소리가 다시 터져 나온다. 백성들의 수도 줄지 않고, 아무에게도 멸시당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백성 가운데서 지도자를 일으켜 세우시어 당신 가까이 다가오도록 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부르지 않으시면 누구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 "참으로 담대한 마음으로 내게 가까이 올 자가 누구냐"(21b). 이 구절을 직역하면 "누가 나에게 접근하려고 자신의 심장을 저당 잡히려 하겠느냐?"(한국천주교주교회의 '주석성경' 참고)가 된다.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은 심장을 바치는 일이다. 지난 날 백성의 지도자라는 자들이 하나님을 등지고 살았다면 새로운 역사를 이끌어갈 지도자들은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을 향해 서는 사람이어야 한다. 


22절은 출애굽 당시에 주어진 약속을 반복하고 있다.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들의 하나님이 되리라"(22). 하나님은 바벨론으로부터의 해방을 제2의 출애굽으로 선포하신 셈이다. 광야에서 맺었던 사랑의 언약은 이제 갱신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백성들의 하나님 사랑을 늘 앞지른다. 구원이 그러하듯 언약의 주도권도 하나님께 있다. 구원의 은총이 먼저이고 언약이 그 뒤를 따른다. 그러나 만심은 금물이다. 늘 깨어 있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겸허하게 살아야 한다. 언제라도  "여호와의 노여움이 일어나 폭풍과 회오리바람처럼 악인의 머리 위에서 회오리칠"(23) 수 있기 때문이다. 


















새 언약

본문 / 렘31:1-40


이스라엘의 회복

주전 722년 앗수르에 의해 멸망 당한 북왕국 이스라엘은 오랫 동안 유다인들의 관심 밖에 있었다. 나라는 비록 망했어도 그 백성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살고 있었을 터인데 그들은 잊혀진 존재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여기서 예레미야는 돌연 북왕국 이스라엘의 회복을 예고한다. 31장에는 '이스라엘', '사마리아', '라마', '에브라임' 등 북왕국을 가리키는 지명이 많이 등장한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때에 내가 이스라엘 모든 종족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1). 하나님의 구원 계획 속에서 이스라엘은 배제되지 않았고, 자비는 철회되지 않았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다시 세우실 것이다. 일어선 이들은 기쁨의 춤을 출 것이고, 사마리아의 산마다 포도열매가 영글 것이다. 에브라임 산 위에서 파수꾼들이 순례자들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올 것이다.


순례자의 무리가 시온에 당도하면 감동의 물결이 거리를 휩쓸 것이고, 사람들은 "여호와여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구원하소서"(7) 하고 외칠 것이다. 여호와는 또한 북녘땅으로부터 사람들을 시온으로 인도하실 터인데, 맹인, 다리 저는 사람, 잉태한 여인, 해산하는 여인까지도 빠뜨리지 않으신다. 가장 연약한 이들까지도 소외되지 않는다. 이 대목이 참 감동 아닌가? 성서는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은 어린양이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 곁에 계셨다(계5:6)고 전한다. '상처입은 어린양'이 세상의 중심이다. 고통받는 이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볼 때 평화의 길이 열린다. 여호와는 울면서 돌아온 이들을 물이 있는 시냇가로, 곧은 길로 인도하신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그 놀라운 구원 역사의 증인으로 초대받는다(10). 해방과 구원이 베풀어질 때 슬픔은 즐거움으로, 근심은 기쁨으로 변한다. "그 심령은 물 댄 동산 같겠고 다시는 근심이 없으리로다"(12).


15절부터는 분위기가 일변한다.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 때문에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어져서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도다"(15).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7-9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던 라마는 남왕국과 북왕국의 접경 지역에 있었기에 분단의 비극을 상징하는 성읍이라 말할 수 있다.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길목에 있었기에 사람들은 그곳을 비극의 땅으로 기억했다. 베냐민을 낳고 죽은 라헬의 무덤이 가까운 곳에 있었기에, 예레미야는 라마와 자식 때문에 우는 라헬 이야기를 연결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이 단락에서 라헬은 포로로 끌려가는 자식들을 보며 슬피 우는 모든 어머니들의 아픔과 한을 대변한다.


여호와는 울고 있는 이들에게 울음을 그치라 하신다. 이제 그들이 대적의 땅에서 돌아올 것이라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에브라임의 통회의 눈물을 보셨다. "주께서 나를 징벌하시매 멍에에 익숙하지 못한 송아지 같은 내가 징벌을 받았나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이시니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아오겠나이다"(18). 참회하는 에브라임을 보며 하나님의 마음도 녹는다.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창자가 들끓으니 내가 반드시 그를 불쌍히 여기리라"(20). 언약을 맺은 백성 때문에 애를 태우시던 하나님이 새 일을 창조하신다. 그 세상에서는 "여자가 남자를 둘러 싸리라"(22). 지금까지는 주님(남자)께서 그 백성을 쫓아다니셨지만 이제는 백성들(여자)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려고 애쓸 것이다. 


23절부터 26절까지는 유다의 회복에 대한 말씀이다. 저주받은 것처럼 보이던 유다 땅과 성읍들이 '의로운 처소', '거룩한 산'으로 불릴 날이 온다. 척박하게 변했던 땅이 생명의 땅으로 변할 것이다. 27절부터는 새로운 질서에 대한 비전이다. 하나님은 이전에 뿌리 뽑고 무너뜨리며 전복시키며 멸망시키며 괴롭게 하셨던 유다와 이스라엘을 다시 세우며 심으실 것이다. 분단 의식은 극복될 것이고 모두가 함께 여호와 앞에서 기뻐하는 날이 온다. 연좌제는 사라지고 각자 자기 삶에 책임을 지는 시대가 온다(29-30).


하나님은 이제 그 백성과 새로운 언약을 맺으신다. 그 옛날 시내산에서 맺었던 언약이 파기되었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율법이 돌판에 기록되었지만 이제는 백성들의 마음에 기록될 것이다. 그들에게 법(토라)은 더 이상 외적 강제가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내적 규범이다. 마음에 새겨진 법은 밖에서 흘러 들어오는 물이 아니라 안에서 솟아나는 샘물이 아닌가? 새로운 시대에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 삶의 주체가 되어 살아간다.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34a). 


하나님은 약속이 확고하다는 사실을 재확인시키려고 해와 달, 별과 바다, 그리고 땅의 질서를 상기시킨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질서가 흔들리지 않는 한 하나님의 약속은 결코 폐기되지 않을 것이다. 황폐하게 변했던 예루살렘은 여호와를 위하여 재건될 것이다. 예레미야는 마치 점을 찍듯 측량줄이 이르는 곳을 적시한다. 하나넬 망대, 가렙 언덕, 고아, 시체와 재의 골짜기, 기드론 시내, 동쪽 마(馬)문의 모퉁이가 다 포함된다. 그리고 못을 박듯 말한다. "여호와의 거룩한 곳이니라 영원히 다시는 뽑거나 전복하지 못할 것이니라"(40b).

















밭을 사다

본문/ 렘32:1-44


회복의 징표

32장은 시드기야 10년(주전 588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 성을 포위한 채 공격을 계속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예루살렘의 운명은 풍전등화와 같았고 예레미야는 시위대에 속한 감옥에 갇혀 있었다.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국론을 분열시키는 자로 몰려 그는 투옥된 것이다. 그는 예루살렘은 결국 함락될 것이고 백성을 이끄는 시드기야는 갈대아인들에게 사로잡혀 갈 것이라고 예고했던 것이다. 3-5절에 나오는 "입이 입을 대하여 말하고 눈이 서로 볼 것"이라는 구절을 새번역은 시드기야가 바벨론 왕 앞에 끌려나가 직접 항복할 것이라는 말로 새기고 있다. 예레미야는 아무리 애써 봐도 갈대아인 곧 바벨론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없다고 단언했다. 그것은 여호와로부터 온 메시지였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예레미야 본인의 것으로 간구하고 그를 박해한 것이다.


시위대 뜰에 갇힌 예레미야에게 또 다른 계시가 임한다. 사람을 가둘 수는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조차 가둘 수는 없는 법이다. "보라 네 숙부 살룸의 아들 하나멜이 네게 와서 말하기를 너는 아나돗에 있는 내 밭을 사라 이 기업을 무를 권리가 네게 있느니라 하리라"(7). '기업을 무를 권리'는 땅의 분배를 배경으로 해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땅의 주인은 하나님이고, 각자가 터잡고 살아가는 땅은 하나님께서 나눠주신 분깃이라고 생각했다. 땅은 사적 소유물이라기보다는 공적 자산이었다. 채무에 몰려서든 질병 때문이든 부득이 땅을 누군가에게 넘겨야 한다면 가장 가까운 친족들에게 우선권을 줌으로써 땅이 지파의 경계를 넘어 매매되지 않도록 해야 했다. 제사장 가문에 속한 사람들의 토지 거래가 낯설게 여겨지지만, 토라는 제사장들에게도 성읍 주변의 들판과 집의 소유를 허용했다(민35:2-3 참조).


하나멜이 예레미야를 찾아와 베냐민 땅 아나돗에 있는 자기 밭을 사라고 말하자 예레미야는 그것을 여호와의 명으로 받아들인다. 그는 증인들 앞에서 은 십칠 세겔을 달아 주고, 매매 증서 두 부를 작성한 후 법과 규례에 따라 하나는 봉인하고 다른 하나는 봉인하지 않은 채 바룩에게 넘겨 주었다. 봉인한 한 부는 임의의 변경을 막기 위한 것이고, 봉인하지 않은 한 부는 누군가가 확인을 요구할 때 보여주기 위함이다. 바룩은 그것을 토기에 담아 보관했다. 사실 기업을 무르는 일은 통상 일어나는 일이었기에 특별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경우는 좀 다르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멸망이 임박했다고 선포했다가 시위대 뜰에 갇혀 있다. 나라가 망한다면 땅의 소유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레미야는 땅을 샀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보여주기 위한 일종의 징표였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사람이 이 땅에서 집과 밭과 포도원을 다시 사게 되리라 하셨다 하니라"(15).


보살피시는 하나님

하나멜과의 계약이 성사된 후 예레미야는 하나님 앞에 엎드린다. 슬픔 속에서 올리는 그의 기도는 창조주 하나님의 크신 권능과 그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구원하시는 사랑을 노래한다. 그의 슬픔은 세계 도처에서 표적과 기사를 행하심으로 억눌린 사람들을 구원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지 않으려는 백성들의 완악함에서 기인한다. 강력한 적들 앞에서 속수무책인 예루살렘을 보며 예레미야는 다만 탄식할 뿐이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이 느부갓네살의 손에 넘어갈 것이고, 성과 성전은 불에 타거나 파괴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언약의 백성들이 신실하지 못했기에 빚어지는 참극이라는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과 유다 자손, 그들의 왕들과 고관들,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모두 다 악을 행하여 하나님의 노여움을 일으켰다. "그들이 등을 내게로 돌리고 얼굴을 내게로 향하지 아니하며 내가 그들을 가르치되 끊임없이 가르쳤는데도 그들이 교훈을 듣지 아니하며 받지 아니하고"(33). 죄는 하나님을 등지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 빛이신 하나님을 등지는 이들은 자기들의 그림자만 보고 살 수 밖에 없다. 그 그림자는 또 다른 두려움을 낳게 마련이다. 하나님을 등진 이들은 참의 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등진 이들의 마음은 공허하기 이를 데 없다. 그 공허를 채우기 위해 사람들은 세상의 존재자들에 탐닉하거나 우상 앞에 절을 한다. 불안과 공허의 악순환 속에서 사람들은 파멸의 길을 걷는다. 그러나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 백성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곧 희망이다. 하나님은 세상 곳곳에 흩어질 수밖에 없었던 그 백성을 다시 모아 들여 안전하게 살도록 보살피실 것이라 약속하신다.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과 한 길을 주어 자기들과 자기 후손의 복을 위하여 항상 나를 경외하게 하고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영원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고 내가 기쁨으로 그들에게 복을 주되 분명히 나의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그들을 이 땅에 심으리라"(39-41)


등을 돌리곤 하는 백성들과 언약을 다시 세우고, 경외하는 마음을 그들 속에 두고, 정성을 다하여 땅에 심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놀랍지 않은가? 믿음이란 절망 속에서 희망을 보고, 그 희망을 삶 속에서 구현해내는 것이다.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본문/ 렘33:1-26


33장은 시위대 뜰에 갇혀 있을 때 임한 두 번째 말씀이다.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2)이다. 하나님은 불변의 자리에 머물지 않고 늘 창조적인 변화의 흐름을 만들어내신다.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출3:14)라는 여호와의 자기 소개와 잇대어 있다. 하나님은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규정할 수 없는 분, 늘 새로운 일을 시작하시는 분이시다. 부르짖는 자에게 하나님은 당신의 계획을 숨기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바벨론에 맞서려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저항이 무모한 짓이라고 말씀하신다. 바벨론은 악행에 빠진 백성들을 징계하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일 뿐이다. 이 참혹한 전쟁에서 백성들이 보아야 하는 것은 황폐하게 변해버린 자기들의 성읍이 아니라 하나님의 노여움이다. 하나님의 보호가 철회되자 성은 속절없이 유린되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노여움이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는다. 기원전 8세기의 예언자 호세아는 하나님을 등지고 떠났던 백성들에게 이렇게 권고한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호6:1). 예레미야도 하나님께서 그 성읍을 고쳐 낫게 하시고 평안과 진실의 풍성함을 나타내실 것이라고 말한다. 포로들을 돌아오게 하여 그 땅에 다시 심고, 그들의 죄를 사하여 정결하게 하시고, 이스라엘을 두고 베푸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으로 인해 세상 모든 나라가 하나님을 경외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망가뜨리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 더 큰 선물을 마련하신다. 그러니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일상의 회복

황폐한 땅은 회복되고 빼앗겼던 일상이 회복될 것이다. 일상을 박탈 당해본 사람만이 일상이 은총임을 안다. 수용소나 감옥에 갇힌 이들이 가장 그리워하는 것은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일상을 다시금 누리는 것이다. 평범함은 진부함이 아니다. 담담함의 참 맛을 모르는 이들만 짜릿함을 갈구한다. 일상이 곧 은총의 순간이다. 잘 산다는 것은 자기의 일을 통해 영원을 드러내는 것이다. 땅 속에 감춰진 불꽃을 드러내는 일이다. 


거듭되는 전쟁 때문이었을 것이다. 예레미야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회복될 세상의 꿈을 거듭 소리의 이미지로 형상화한다(7:34, 16:9, 25:10, 33:11). 거리에서 들려오는 왁자지껄한 소리, 즐거움에 겨운 사람들의 웃음소리, 신랑 신부의 소리, 성전에서 들려오는 찬양 소리를 그는 아련한 꿈처럼 그린다. 소리 뿐만이 아니다. 예레미야는 일상이 회복된 세상을 목가적으로 그려낸다. 황폐하여 사람도 짐승도 살지 않던 땅 곳곳에 양 떼가 돌아오고 목자들이 그 양 떼를 이끈다. 


목가적인 풍경이다.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부지런히 일하는 이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하나님께서 회복하실 세상을 다스릴 사람은 다윗의 가지에서 나온 한 가지이다. "그가 이 땅에 정의와 공의를 실행할 것"(15)이다. 사법적 정의인 미슈팟과 회복적 정의인 쩨다카가 있는 세상은 강자라 하여 함부로 살지 않고 약자라 하여 차별받거나 착취 당하지 않는 세상이다. 정치의 목적은 바로 이런 것이다. 여호와를 중심에 모신 이들은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는 사람들이다(호10:12). 그런 정치가 시행될 때 이스라엘 집의 왕위에 앉을 사람이 끊어지지 않을 것이고, 하나님 앞에 제사를 바칠 레위 사람 제사장들도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언약을 깨뜨릴 수 있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하늘의 만상은 셀 수 없으며 바다의 모래는 측량할 수 없나니 내가 그와 같이 내 종 다윗의 자손과 나를 섬기는 레위인을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라"(22). 아브람에게 주셨던 약속이 여기서 다시 반복되고 있다. 


하지만 백성들은 여전히 확신하지 못한다. 백성들은 "여호와께서 자기가 택하신 그들 중에 두 가계를 버리셨다"고 말한다. 두 가계는 물론 이스라엘과 유다를 가리킨다. 현재 상황은 분명 그들이 버림받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자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멸시하였다. 하나님의 뜻에 무지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에 대한 구원의지를 확고하게 천명하신다. 


"내가 주야와 맺은 언약이 없다든지 천지의 법칙을 내가 정하지 아니하였다면 야곱과 내 종 다윗의 자손을 버리고 다시는 다윗의 자손 중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을 다스릴자를 택하지 아니하리라"(25-26a)


부정적 가정을 통한 확고한 의지의 표명이다. 하나님은 그 백성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이라 칭하신다. 가시떨기나무 불꽃 사이에서 현현하신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을 묻는 모세에게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출3:6a)이라고 대답하셨다. 성조들의 신산스런 삶의 여정 가운데 동행하시면서 그들의 힘이 되어 주셨던 하나님께서 지금 환난 앞에 떨고 있는 백성들을 그들의 이름으로 호명하신다. 이로써 출애굽과 새로운 구원 사건이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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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청자(16 08-10 12:08)
성경과 함께 읽으며 더 깊은 세계 속으로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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