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가면은 가면이다 2016년 09월 21일
작성자 김기석

 가면은 가면이다


아침 저녁 가을 바람이 불어서인지 공원을 걷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서붓서붓 경쾌하다. 푸른 빛을 머금은 하늘도 저만치 물러나 우리의 시선을 잡아끈다. 참 좋은 계절이다. 가을 기색을 알아차린 벚나무 잎은 벌써 노란빛을 머금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가을이 참 쓸쓸하다. 국제사회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제5차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를 강행했고, 남한의 강경론자들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전쟁불사를 외치고 전술 핵무기배치를 운위하고 있다. 두만강변에서 발생한 홍수로 인해 많은 사상자와 이재민이 발생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지만 통일부 당국자는 민간 차원의 인도적 지원조차 흔쾌히 허용하지 않고 있다. 정치적인 판단에 대해서는 왈가왈부할 생각이 없다. 정부 차원의 도움 주기는 어렵더라도 민간 차원의 인도적 지원은 허용해야 한다.


성경은 원수의 소나 나귀가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을 보거든 반드시 그것을 임자에게 돌려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서로 척진 채 지내는 사람의 나귀가 짐에 눌려 쓰러진 것을 보면 반드시 임자가 나귀를 일으켜 세우는 것을 도와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 말 못하는 짐승의 고통을 덜어주라는 뜻이기도 하지만, 둘 사이의 원한과 무관한 짐승들을 매개로 하여 화해를 도모할 가능성을 열어두라는 말일 것이다. 고통당하는 사람을 보고도 모지락스럽게 외면하거나, 고소해하는 것은 스스로의 인간됨을 훼손하는 일이 아니던가.


인간의 인간됨은 누군가의 필요에 응답함을 통해 구성된다. 신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한 후에 갈비뼈 하나를 뽑아 하와를 만들었다는 인간 창조 이야기는 인간의 생명이 서로에게 공속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너 없이는 나도 없다는 말이다. 따라서 타자들의 고통을 외면하는 일이 잦아지면 참 사람의 길에서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다. 삶의 부조리에 지친 사람은 '타인은 내게 지옥'이라고 말한다. 외부자는 늘 자기의 평안을 위협하는 존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는 한, 우리와 똑같은 희노애락의 감정을 가진 존재로 인식하는 한 함부로 대할 수 없다. 그렇기에 자기와 입장이 다른 사람들을 조롱하고 욕하고 없애려는 이들은 일쑤 타자들의 얼굴에 색깔을 덧칠하거나 '원수' 혹은 '사탄'이라는 가면을 씌운다. 맨 얼굴을 바라보는 고통 없이 그들을 파괴하려는 것이다.


스스로 가면을 씀으로써 자신들의 위선이나 비인간적인 행위를 숨기려는 이들도 있다. 이청준의 소설 <예언자>는 우리 사회의 기득권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가면놀이를 여왕봉이라는 술집에서 일어난 일로 축약해서 보여준다. 이야기는 여왕봉이라는 살롱에 새로운 마담이 오면서부터 시작된다. 홍마담은 손님들에게 이상한 규칙을 강요한다. 밤 10시가 되면 손님들과 여급들은 너나할 것 없이 일제히 가면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낯설어하던 단골 손님들도 어느덧 그 규칙에 익숙해지는데, 그렇게 가면을 쓴 사람들은 맨 얼굴로는 하기 어려운 행동을 스스럼없이 한다. 그건 손님들이나 여급들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면에는 인격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손님들은 일단 가면을 벗으면 가면을 쓰고 했던 행동과 무관한 사람처럼 행동했다. 작가는 가면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한다. 


"가면이란 이를테면 우리들 인간의 본능적 욕구의 발산을 규범화시켜 주는 풍속적 방편이지요. 그 서양의 가면 무도회라든가 우리 나라의 탈춤처럼……가면은 어떤 추악스런 본능적 욕구의 발산도 그것을 덮어씀으로 하여 하나의 당당한 풍속으로 용납받을 수 있습니다. 음흉스런 지혜지요." 


기가 막힌 통찰이다. 가면은 결국 현실을 '허위'의 놀이로 바꾸는 기제인 셈이다. 손님들은 그 가면놀이에 무의식적으로 적응하면서 사실은 자기들이 홍마담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있다는 걸 짐작조차 못한다. 홍마담은 손님들이 가면을 쓰고 있는 한 도붓장수 개 후리듯 그들의 의식을 마음껏 지배할 수 있었다. 오늘의 세계에서 우리 삶을 맘대로 좌지우지 하는 홍마담은 누구인가?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힘 있는 이들에 의해 가면 씌워진 이들의 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더럽다', '추하다', '위험하다' 하며 주변화시켰던 사람들 속에 있는 아름다움을 호명해내고, 그들의 억눌린 외침에 응답하는 것이다. 또한 가면을 써 자신의 추악한 민낯을 숨기고 있던 이들의 맨 얼굴을 드러내야 한다. 맨 얼굴을 드러냄은 망신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잃어버린 인간의 얼굴을 되찾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지금 우리 앞에 있는 낯선 이들은 우리의 인간됨을 묻는 물음표로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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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철(16 09-23 01:09)
감사합니다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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