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청년편지7 2016년 12월 10일
작성자 김기석

 푸른언덕에서 보내는 편지7


평안하신지요? 평안이 없는 시대에 평안의 인사를 건넨다는 게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여전히 이런 인사를 건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두가 힘겹다는 데 홀로 자족하는 이들을 보면 좀 얄미운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할 일이 무척 많지만 어느 것도 손에 잡히지 않네요. 저 멀리 있는 북한산 연봉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습니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저 산이 저곳에 의연하게 서있다는 사실에 괜히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보면 덧거친 세상을 헤쳐나가느라 나름 힘에 겨웠던 모양입니다. 지나치게 의기양양한 사람들, 세상에 두려울 게 아무 것도 없다는 듯이 설치는 사람들을 보면 가슴 가득 우울함이 몰려옵니다. 좋은 세상을 만들려고 애면글면 애를 써보지만 세상은 날로 악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럴 때마다 제게 큰 위안과 힘이 되어 다가오는 시편을 떠올립니다.


"주님,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은 하늘에 가득 차 있고, 주님의 미쁘심은 궁창에 사무쳐 있습니다. 주님의 의로우심은 우람한 산줄기와 같고, 주님의 공평하심은 깊고 깊은 심연과도 같습니다. 주님, 주님은 사람과 짐승을 똑같이 돌보십니다."(시36:5-6, 새번역)


이 시를 입으로 되뇌다 보면 나를 사로잡고 있던 세상에 대한 번뇌로부터 조금쯤 놓여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 미쁘심, 의로우심, 공평하심이라는 단어만 죽 나열되었더라면 그리 큰 감동이 안 되었을 겁니다.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단어에 우리 심상 속에 있는 놀라운 이미지들이 결합되면서 감동이 배가 되고 있습니다. 이 구절과 만난 이후에 하늘과 산 그리고 바다를 저는 무심하게 바라볼 수 없습니다. 마치 연인들이 사람들 사이에서 은밀한 눈빛을 교환하는 것처럼 저는 그 대상들을 바라볼 때마다 말 없는 말을 듣고, 숨겨진 진실을 엿봅니다. 반칠환의 짧은 시 '수평선'이 떠오릅니다.


"멸치 한 마리 솟구쳤을 뿐인데

일순 수평선은 수평을 놓친다


수평선은 언제나 수평이 없는 채로 수평이다"


저절로 미소가 떠오르게 하는 시입니다. 시인은 저 난바다의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높음과 낮음을 가르는 세상에 사느라 피곤해진 눈에 수평선은 장엄하기만 합니다. 무심한 저 수평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동안 처연한 심사는 누그러지고, 소사스러운 행위에 대한 부끄러움도 스러졌겠지요. 그때 문득 물 위로 뛰어오르는 멸치 한 마리 때문에 수평선이 무너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떠올랐던 것 같습니다. '하, 이게 시가 되겠구나'. 시인은 어쩌면 무릎을 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시인은 그런 결정적인 한 순간을 보기 위해 무념무상에 몰두하는 사람이니까요. 시인은 두 행을 막힘 없이 써내려간 후 잠시 숨을 전주른 후에 "수평선은 언제나 수평이 없는 채로 수평이다"라고 적었습니다. 역설적인 표현이지만 이 속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각자가 상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다만 목사의 버릇대로 저는 하나님의 세계를 상상합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인 분이시지만 상대적 세계를 품는 절대가 아니시던가요? 멸치 한 마리 때문에 수평이 무너지듯 하나님은 세상 사람들이 겪는 아픔 때문에 함께 아파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온전함을 무너뜨리지 않는 여여하심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아픔 너머의 세계를 바라보게 하십니다.


바다에 갈 형편이 되지 않으니 하늘이나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듣고 있습니다. 걱정과 염려를 내려놓고, 해야 할 일에 대한 부담감도 내려놓고 고즈넉하게 울리는 피아노 선율에 마음을 싣습니다. 차츰 고요해집니다. 시몬 베유는 "아름다움에 대해 순수하고 진정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들 안에는 언제나 신이 현존한다"고 말했습니다. 아름다운 음악이 그러한 것 같습니다. 삶이 아무리 힘겨워도 하나님은 늘 우리 곁에 머물고 계십니다. 삶이 힘겨울 때마다 자꾸 아름다움 곁으로 가야 합니다. 


며칠 전 한 지인과 길을 걸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대학교 졸업반인 딸과 함께 위안부 문제를 다룬 영화 '귀향'을 함께 보았다고 하더군요. 영화관을 나서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느냐고 묻자 딸은 쓸쓸한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하더랍니다. "나보다 조금 더 불행한 사람들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그 청년은 아주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그리고 소위 말하는 명문 대학에 다니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전망이 뚜렷하지 않은 현실의 장벽 앞에서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불행하다고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조금 극단적인 예이긴 하지만 이게 어쩔 수 없는 청년들의 현실인 것 같습니다. 사소한 일탈이 곧 루저로의 지름길이 된다고 생각하여 앞만 보고 달려왔는데,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지갯빛 현실이 아니라 잿빛 현실이니 암담할 수밖에 없지요. 변죽을 울리며 먼 길을 걸어온 것 같습니다. 이제 물으신 질문에 답해보려 합니다.


"우리가 기초하고 있는 자본주의 시스템은 일견 문제가 많아 보입니다. 시스템이 문제일까요? 아니면 그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는 사람이 문제일까요? 우리는 이 문제 앞에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직접 사회에 뛰어들어야 할까요? 아니면 주어진 자리에서 기독교적 삶을 견지하는 것으로 충분할까요?"


흔히 1989년에 동구권이 연쇄적으로 무너지면서 70년 가까이 지속해온 사회주의 실험은 끝이 났다고들 말합니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야말로 인간의 심성에 가장 적합한 체제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후 불과 30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세계는 점점 이전보다 더 삭막한 곳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종족간의 갈등이 빈번하게 벌어지고, 폭력과 테러는 도처에서 벌어집니다. 부유한 사람은 점점 부유해지고 가난한 사람은 점점 가난해집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성실하게 노력하기만 하면 넉넉하진 않아도 먹고는 살 수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물론 욕망의 평균화로 인해 사람들의 욕망이 커진 것은 분명합니다. 다른 이들이 누리는 것을 나도 누리고 싶다는 욕망 자체를 누가 탓할 수 있겠습니까? 이데올로기의 갈등 문제가 심각하던 시절에는 그래도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마치 '다른 삶의 가능성'이 없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경쟁을 내면화하고 삽니다. 경쟁은 타자들을 소중한 이웃으로 보지 못하게 우리 마음에 차단막을 치곤 합니다. 욕망은 결핍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그 결핍을 채우려는 마음에 사로잡히는 순간 다른 이들과의 나눔은 생각하기 어렵게 됩니다. 인간은 본래 '경쟁'하는 주체로 만들어진 것일까요? 소설가 존 쿳시(John M Coetzee)는 "경쟁은 전쟁의 순화된 대체물"이라고 말했습니다. 경쟁은 사람들이 선택한 삶의 방식이지 필연적인 삶의 양식이 아닙니다. 경쟁은 평화나 공존을 목표로 하지 않습니다. 


"시스템이 문제일까요? 아니면 그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는 사람이 문제일까요?"라고 물으셨지요? 이 질문 속에는 잘만 운용된다면 자본주의 시스템도 꽤 괜찮은 제도가 아니냐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정말 아이디얼하게 운영된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럴 수 있을까요? 질문자는 세상의 음험함이나 욕망의 집요함, 그리고 인간의 비루함에 대해 비교적 낙관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즐겨 소비사회의 신민이 되려는 이에게 자유는 허락되지 않습니다. 폴란드 출신의 사회학자인 지그문트 바우만은 소비사회가 사람을 어떻게 부자유하게 만드는지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슈퍼마켓은 우리의 사원寺院이다. 한마디 더 덧붙이자면, 쇼핑 목록은 우리의 '성무일도서'이고 쇼핑몰을 거니는 것은 우리의 순례가 된다. 충동구매와 보다 매력적인 물건들과 바꾸기 위해 더 이상 매력적이지 않은 물건들을 처분하는 것이야말로 우리를 가장 열광시키는 감정이다. 소비의 즐거움의 충만은 삶의 충만을 의미한다. 나는 쇼핑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쇼핑할 것인가 쇼핑하지 않을 것인가는 이제 더 이상 문제가 아니다."(지그문트 바우만,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안규남 옮김, 동녘, 2015년 5월 10일, p.78)


문학적인 열정이 느껴지는 문장이지요? 그런데 이게 현실입니다. 자본주의 시스템을 운용하는 사람도 문제이지만, 이 시스템 자체에 내재된 결함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말한다하여 내가 다른 체제를 옹호하는 사람이라고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지금 우리 현실이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자본주의는 그야말로 '돈'이 '본'이 되는 세상입니다. 인간은 거기에 종속되게 마련이지요. 본말전도입니다. 돈은 사람들에게 환상을 심어줍니다. 돈이 곧 자유라는 환상 말입니다. 실제로 돈이 많으면 못할 일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돈으로 누릴 수 있는 행복에 매달리는 순간 우리는 돈 없이 누릴 수 있는 다른 행복을 외면하게 됩니다. 인간적 퇴화입니다. 돈은 또한 관계를 망가뜨리고, 세상을 망가뜨립니다. 미국 출신의 철학자인 데이비드 로이는 이것을 함축적으로 설명했습니다.


"돈의 유혹에 빠지면 그 '순수한 수단'을 얻기 위하여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한다는 점이다. 즉 지구는 자원이 되고, 우리의 시간은 '노동'이 되고, 우리의 관계는 이용해야 할 '연줄'이 된다."(데이비드 로이, <돈, 섹스, 전쟁 그리고 카르마>, 허우성 옮김, 불광출판사, 2012년 2월 28일, p.49)


놀라운 통찰입니다. 구체적인 것들에 대한 욕망보다는 욕망을 위한 욕망이 커질 때 우리 영혼은 파리해질 것이고, 세계는 황무하게 변할 것입니다. 마틴 부버의 말을 빌어 말하고 싶습니다. '나와 너'의 관계는 점점 사라지고 '나와 그것'의 관계가 세상을 지배한다면 어떨까요? 사람들이 서로를 수단 혹은 이용 가치로 대하는 세상에서 살고 싶은 생각이 드세요? 사실 이게 지금 우리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소외감과 공허감, 그리고 분노가 우리 속에 차올라 중층의 어둠을 이루고 있습니다. 영혼을 잃은 좀비같은 이들이 거리를 헤매고 있습니다. 세상은 점점 위험한 곳으로 변하고 있는 거지요.


그러면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예배에 빠짐없이 참여하고, 직장이나 친교의 자리에서 상식을 지키며 그저 착하게 살면 될까요? 더러 교회가 마련한 봉사의 현장에 동참하면 되는 것일까요? "주어진 자리에서 기독교적 삶을 견지하는 것으로 충분할까요?"라고 물으셨지요? 사실 이 질문 속에는 어떤 편견이 숨겨져 있습니다. '기독교적 삶'을 개인의 덕스러운 삶이나 윤리적 실천으로 고착시키고 싶어하는 편견 말입니다. 제가 좀 과도하게 해석했나요? 그렇다면 미안합니다. 나는 교회 안에 고착된 믿음은 참된 믿음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강도 만난 이웃을 돕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강도가 출몰하지 않는 세상을 만드는 일 또한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애굽이라는 제국의 압제 아래 신음하고 있는 히브리들의 억눌린 간구를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역사에 개입하여서 새로운 세상을 여셨습니다. 그런 하나님을 믿는 이들이 어떻게 다른 이들의 고통을 외면하거나, 사람들을 고통으로 몰아가는 시스템에 대해서 오불관언의 태도를 보일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 또한 로마 제국의 통치 하에서 신음하고 있던 이들 곁에 다가가셨습니다. 체제의 모순이 만들어낸 시대적 아픔을 당신과 무관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던 것이지요. 그들 곁에 머물고, 그의 몸에 손을 대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면서 예수는 새로운 세상을 시작하셨습니다.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잘못된 혹은 잘못 운용되고 있는 시스템 아래서 누군가 죽어간다면, 시름시름 앓고 있다면, 조금씩 비인간적으로 변해가고 있다면, 하나님을 믿는 이들은 그런 세상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자본주의를 신봉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세상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전쟁과 신부>는 그리스 내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야나로스 신부는 세상에 만연한 고통 때문에 어쩔 줄 몰라합니다. 그는 세상에 고통이 가득 차 있는데도 침묵하고 계신 그리스도께 왜 인간을 아끼지 않느냐고 항변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홀로 버려두지 말고 도와달라고 간구합니다. 그때 엄격한 비밀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야나로스 신부여, 너는 부끄럽지도 않느냐? 왜 너는 나에게서 충고를 바라느냐? 너는 자유롭고―나는 너를 자유로운 존재로 만들었노라! 너는 왜 아직도 나에게 매달리느냐? 참회를 그만두고, 야나로스 신부여, 몸을 일으켜 스스로 책임을 맡고, 어느 누구에게서도 충고를 바라지 말아라. 너는 자유가 아니더냐? 너 스스로 결정을 내려라!"(니코스 카잔차키스, <전쟁과 신부>, 안정효 옮김, 열린책들, 2008년 3월 30일, p.236) 


강렬하지요? 지금 한국의 젊은 크리스천들에게 요구되는 게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몸을 일으켜 스스로 책임을 맡는 것 말입니다. 바로 그게 예수를 따르는 길이 아닐까요? 사는 게 힘겨운데 또 다른 부담을 안겨드린 것 같지만, 바로 그렇게 사는 것이 우리를 참된 자유로 이끌 겁니다. 평화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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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데(17 01-05 08:01)
분명히 모든것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보이셨는데 우리는 묻고 또 묻고 주저합니다.
얼마나 피곤하시고 속 터지실까요?^^
어린아이의 것을 버리고 스스로 일어서서 결정하고 책임지라는 메세지 가슴이 뛰네요.
기뻐하며 자유하며 함께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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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성(17 04-16 06:04)
요즈음 목사님의 설교문이나 쓰신글을 읽으면서, 감동을 받습니다 .이 나이에 인터넷을 할수 있음에 또 한번감사 했구요.목사님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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