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청년편지12 2017년 09월 23일
작성자 김기석

 일과 예배


잘들 지내고 계신지요? 이런저런 일들로 분주하게 지낸 것 같긴 한데, 정작 돌아보면 허청거리며 걸어온 발자취가 어지럽기 이를 데 없습니다. 낙엽이 툭툭 떨어지는 것을 보며 비감한 느낌에 사로잡히는 것은 그만큼 삶이 부실하기 때문일 겁니다. 방하착放下着, 미련 없이 허공에 몸을 던져 마침내 뿌리에 다가서는 나뭇잎이 가끔은 장엄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노자는 모든 사물이 끊임없이 바뀌지만 저마다 제 뿌리로 돌아간다(夫物芸芸 各復歸其根, 도덕경 16장)고 말했습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 말을 우리 삶에 통합하며 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가을은 우리에게 언제라도 돌아갈 준비를 하고 살아야 함을 가르칩니다. 푸른 세월을 지나고 있는 이들에게 이런 말은 너무 패배주의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우리가 시간 속을 바장이는 유한한 존재인 바에야 삶의 실상을 외면하지 않는 것도 지혜가 아닐까요?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한 평생 동안, 우리는 싫든 좋든 뭔가에 얽혀들며 살게 마련입니다.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 맑음과 탁함, 사랑과 미움, 전쟁과 평화 등이 갈마들며 우리 존재를 주조합니다. 굽이치듯 흐르는 바위산을 볼 때마다 바위가 겪어야 했던 풍상의 세월이 아프게 느꺼워지는 것은 우리 삶 또한 그와 다를 바 없기 때문일 겁니다. 누구나 행복하기를 원하지만 행복을 온전히 누리며 사는 이들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삶은 어쩌면 견디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조금 슬퍼지나요? 하지만 삶의 목표를 행복으로 정하는 것보다는, 일상의 삶을 견디며 그 속에서 더러 만나는 행복감에 만족하는 게 더 지혜로운 삶이 아닐까요?


가끔 제게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아야 할까요? 아니면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일을 사며 살아야 할까요?" 묻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 질문 속에는 묻는 이의 복잡한 심정이 담겨 있습니다. 그는 지금 하고 있는 일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거나, 앞으로 자기에게 주어질 일이 암담할 거라는 예상이 반영되어 있으니 말입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 수 있다면 그게 최선이겠지요. 하지만 그렇게 사는 이는 정말 극소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산다는 것은 그렇게 낭만적이지만은 않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에게 하나님이 뭐라 하셨던가요? "이제, 땅이 너 때문에 저주를 받을 것이다. 너는, 죽는 날까지 수고를 하여야만, 땅에서 나는 것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창3:17). 하나님의 명을 받아 아름다운 소산을 냈던 땅의 성격이 변했습니다. 사람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는 땅에서 살아야 하고, 얼굴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먹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불로소득, 불한당 노릇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문화를 뜻하는 영어 단어 '컬쳐culture'가 경작행위를 뜻하는 라틴어 '쿨투라cultura'에서 나온 말인 것은 다 잘 아실 것입니다. 수렵채취를 통해 삶을 영위하던 시절에는 문화라 할 만한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땅을 경작하고 씨앗을 파종하는 농업혁명이 일어나면서 사람들은 정착생활을 하게 되었고, 우리가 문화라 일컫는 것들이 축적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사전은 문화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인간이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 일정한 목적 또한 생활 이상을 실현하려는 활동의 과정 및 그 과정에서 이룩해 낸 물질적·정신적 소득의 총칭(특히 학문·예술·종교·도덕 등의 정신적 소득을 가리킴)"(민중 엣센스 국어사전 제3판 참고). 문화는 습득되고, 공유되고, 전승되면서 한 사회의 자산이 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과거의 유산을 바탕으로 삼고 거기에 새로운 것을 덧붙여가며 삶을 꾸려갑니다. 땅을 경작하든 텍스트를 경작하든 우리는 지금 뭔가를 해야만 합니다. 성경에서 일하라고 부름받은 것은 인간이 유일합니다. 에덴동산은 노동이 없는 곳이 아니라 소외된 노동이 없는 곳입니다. 소외된 노동이란 지겨운 노동, 일과 존재가 분리되는 노동, 생산자가 생산물과 생산과정으로부터 소외된 노동을 일컫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창1:28)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복하라' 혹은 '다스리라'는 말을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단어들은 매우 호전적으로 들리는 게 사실입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에게 그 단어들이 연상시키는 현실이 부정적이기 때문입니다. 정복하라, 다스리라는 말은 굴복시키고, 마음 내키는 대로 변형시켜도 좋다는 허락 혹은 권고가 아닙니다. 자연의 가혹한 힘에 눌려 살지 말라는 격려입니다. 


성경은 에덴에서 발원한 비손, 기혼,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등 네 강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자크 엘륄의 글을 읽다가 이 강 이름 속에 담긴 속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기혼과 유프라테스라는 이름 속에는 자연의 긍정적인 면모가 담겨 있습니다. 기혼은 '조화를 이루며 점점 커간다'는 뜻이고, 유프라테스는 '열매가 풍성하고 생산적'라는 뜻입니다. 반면 비손과 힛데겔이라는 이름에는 자연이 품고 있는 파괴성을 담겨 있습니다. 비손은 '멀리 뻗은 것, 오만, 무절제'를 뜻하고, 힛데겔은 '날카롭고 포악하며 관통하는 단단한 그 무엇'이라는 뜻입니다(자크 엘륄, <자유, 사랑, 능력에 관하여>, 빌렘 반더버그 엮음, 전의우 옮김, 비아토르, 2017년 4월 25일, p.101-102). 강은 생명을 살리기도 하고, 파괴하기도 합니다. 그것을 잘 다루는 것이 왕적 존재들의 직무였습니다. '땅을 정복하라'는 명령 속에 담긴 것이 이런 것 아닐까요? 


하나님은 당신의 뜻대로 지어진 세상을 보며 즐거워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연 세계가 아름답게 유지되고 번성하도록 돕는 역할을 인간에게 위임하신 것입니다. 노동은 인간을 골탕 먹이기 위해 하나님이 고안한 형벌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보존하는 일에 동참하라는 기쁜 초대입니다. 히브리어로 노동을 뜻하는 '아보다avoda'가 '예배'를 뜻하기도 한다는 사실이 의미심장합니다. 소외되지 않은 노동, 기쁨과 감사로 수행하는 노동은 하나님께 바치는 예배라는 뜻일까요? 생육하고 번성하고, 피조물들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일을 성서 기자는 하나님이 베푸신 복이라 말합니다. 그 복을 한껏 누리며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세상일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돈이 주인 노릇하는 세상은 우리에게 과도한 생산성을 요구합니다. 양계농가에 밝혀진 불빛처럼 우리는 끊임없이 뭔가를 산출해내라는 요구를 받고 있습니다. 주 5일 근무가 어느 정도 정착된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는 이미 오래 전부터 안식을 누리는 법을 잊어버렸습니다. 돈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노동자는 생산성에 의해 평가받습니다. 생산성이 떨어지는 이들은 배제되기 일쑤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합니다. 이웃들을 돌아볼 여유조차 없습니다. 먹고 사는 일이 뭔지 아니꼬운 일을 당해도 항거다운 항거 한번 해보지 못한 채 속으로만 투덜거립니다. 그런 일이 반복되면서 우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감정노동에 충실한 사람으로 변신합니다. 길들여지는 것이지요? 그림자 노동(이반 일리치)을 요구받을 때는 또 얼마나 많던가요? 일과 존재의 분리가 심화될수록 삶의 무의미성 또한 확대됩니다.


나치가 세운 수용소를 방문해 본 분들은 입구마다 적혀있던 섬뜩한 구절을 기억할 겁니다. "Arbeit macht frei."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얼마나 기만적인 구호입니까. 그런데 신자유주의 경제 질서에 편입된 이들의 내면에도 그 못지않게 살벌한 구호가 새겨져 있습니다. "돈은 주조된 자유이다". 도스또예프스키의 말입니다. 우리는 이 말의 주술을 떨쳐버리지 못한 채 자발적 수인이 되어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마치 악몽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나치 비밀경찰의 고문과 학대에 시달리고 여러 수용소를 전전하다가 자유의 몸이 되었던 장 아메리의 말도 제게는 참 아프게 다가옵니다. "달러가 있는 곳이 고향이다(ubi Dollar ibi patria)."(장 아메리,<죄와 속죄의 저편>, 안미현 옮김, 도서출판 길, 2012년 11월 20일, p.101). 수용소라는 특수한 공간에서도 돈만 많으면 비교적 안락한 삶이 가능했다는 말일 겁니다. 그러니 소외된 노동일망정 돈만 많이 준다면 사람들은 그 일에 기꺼이 뛰어드는 것이겠지요. 그것은 어쩌면 변형된 강제노동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짜르 체제를 비판하고 새로운 사회를 꿈꾸었던 페트라셰프스키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선고까지 받았던 도스또예프스키는 나중에 감형되어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지게 되었습니다. 그의 작품인 <죽음의 집의 기록>은 그곳에서 겪었던 일들을 많이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노동과 관련하여 제게 깊게 각인된 대목이 있습니다. 그는 강제노역이 그렇게 힘겹게 느껴졌던 것은 고달픔과 끝없음 때문이 아니라, 몽둥이 밑에서 의무적으로 해야 한다는 점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또 "누군가를 참혹하게 벌하고 싶다면 아주 전적으로 쓸모없고 무의미한 성격을 노동에 덧붙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리라는 생각이 여러 번 들었다"(도스또예프스끼 전집9, <죽음의 집의 기록>, 이덕형 옮김, 열린책들, 2000년 6월 15일, p.50-51)고 덧붙입니다. 정말 그렇지요? 


'콰이강의 다리'라는 영화를 보셨나 모르겠습니다. 영화는 일본군에게 포로로 잡힌 영국 군인들이 끊어진 다리를 세우는데 동원된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제게 군인들이 행진하면서 내는 경쾌한 휘파람소리와 더불어 기억되고 있습니다. 영국 군인들은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다리를 건설하는 것은 결국 적들에게 부여하는 것이고, 거절하면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한 장교가 대충 이런 뜻의 말을 합니다. '기왕 일을 할 수밖에 없다면 후세에 길이 남을 다리를 만들자.' 그때부터 그들의 노동은 소외된 노동이 아니라 창조적 노동이 됩니다. 강제 노동의 고통을 그들은 자기들에 대한 긍지의 표징으로 바꾼 것입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한번 뿐인 인생을 사는 건데, 할 수만 있다면 자기가 가장 좋아하고 또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사는 게 좋습니다. 그럴 수 없다면 자기가 해야 하는 일을 좋아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중세에는 '소명'이라는 뜻의 독일어 베루프Beruf가 대개 '성직'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종교개혁자인 마르틴 루터는 그 말을 '직업'이라는 뜻으로도 사용했습니다. 거룩한 일과 속된 일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개혁자들에 따르면 지금 우리가 해야 하는 그 일이 바로 하나님이 명하신 일입니다. 물론 몇 가지 전제가 있기는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파괴하는 일 혹은 평화를 유린하는 일이어서는 안 됩니다. 이웃들의 몸과 마음에 해를 끼치는 일이어서도 안 되겠지요. 경남에 있는 거창고등학교 2003학년도 졸업식에서 최지헌 학생이 한 답사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거고인 건축가가 세운 다리는 무너지지 않고

거고인 농부가 키운 작물은 안심하고 먹을 수 있으며

거고인 의사는 사람의 목숨을 그 무엇보다 소중히 여긴다.

거고인 판사가 내린 판결은 믿을 수 있고

거고인 직공이 만든 옷은 단추가 잘 떨어지지 않으며

거고인 선생님에게는 안심하고 자녀를 맡길 수 있다.

거고인 관리는 뇌물을 받지 않고

거고인 기자는 거짓을 전하지 않으며

거고인 역사가는 그 무엇보다 진실을 목말라 한다.

그래서 세상은 거고를 빛이요 소금이라고 한다."


소명이라는 말을 이보다 잘 설명한 게 또 있을까요? 모두가 이 마음으로 산다면 세상이 한결 평화로워질 겁니다. 이런 마음으로 살 때 일상의 일 혹은 세속적인 일은 거룩한 일로 바뀝니다. 포도는 오래 되면 썩게 마련이지만, 발효되는 순간 오랫동안 향기를 머금은 포도주가 됩니다. 그 포도주가 하나님 나라를 상기시키는 성찬에 사용될 때 그것은 거룩한 것으로 바뀝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수행하는 일이 하나님께 바치는 예배가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2세기의 교부(敎父)였던 이레네우스는 "신 앞에는 공허한 것이 없고 모든 것이 신의 표징"이라고 말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과 만날 절호의 기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은 마치 밭을 갈다가 보물을 발견한 농부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신앙생활은 일상과 구별된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구현되어야 할 영적 도전입니다. 이제 이야기를 마쳐야 할 때입니다.


일 혹은 노동에 대한 생각을 할 때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있는 '성 가족 교회Sagrada Familia'가 떠오릅니다. 예배당 건축을 시작한 가우디는 성 가족 가운데 늘 소외되고 있었던 요셉을 복권시키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예배당 입구인 '탄생의 파사드'에 망치를 들고 일하고 있는 요셉의 모습을 새겨놓았습니다. 그의 머리 위에는 일벌이 날고 있습니다. 그 예배당은 눈에 띄지 않지만 노동을 통해 가족을 건사하는 성 요셉들(?)에게 바치는 일종의 경의인 셈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한다"(요5:17),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이시다"(요15:1) 하신 주님을 따르는 자답게, 일을 예배로 바꿀 수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올해의 남은 시간도 기쁘게 지내시면 좋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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