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목회서신] 제 소임에 충실하면 2020년 08월 28일
작성자 김기석


제 소임에 충실하면

“주님께서 높은 곳에서 손을 내밀어 나를 움켜잡아 주시고, 깊은 물에서 나를 건져 주셨다. 주님께서 나보다 더 강한 원수들과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서 나를 건져주셨다.”(시18:16-17)

주님 안에서 형제 자매된 교우 여러분, 지난 한 주간 잘 지내셨는지요? 너무나 큰 어려움이 연거푸 다가와 우리를 뒤흔들어놓고 있습니다. 코로나19, 긴 장마, 태풍까지 무엇 하나 녹록치 않은 상황입니다. 다행히 8호 태풍 바비는 큰 피해를 남기지 않고 스러진 것 같습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하겠습니다. 물론 수확기를 앞두고 있던 과수 농가들이 입은 피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요즘은 아침 10시 무렵이 되면 마치 습관처럼 중대본의 발표를 기다립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확진자 수가 줄어들었다는 소식을 기대하지만 상황은 악화일로입니다. 방역당국은 지금이 매우 위험한 시기임을 여러 차례 고지한 바 있습니다. 저절로 ‘언제까지?’라는 탄식시편기자들의 억눌린 함성이 터져나옵니다. 동일한 상황이 주기적으로 반복되면서 피로감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도 그러한데 최전선에서 환자들을 돌보는 의료인들이 느끼는 피로감은 말할 나위도 없을 것입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지나고 있는 느낌입니다. 밝고 따뜻한 이야기는 별로 들려오지 않고 도처에서 성난 음성과 거친 몸짓들이 난무합니다.

이럴 때 필요한 일은 우리가 서로의 이름을 호명하는 일입니다. 지난 한 주간 동안 여러 교우들께서 잘 지내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주셨습니다. 모두가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던 때가 그립다고 말합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소중한 것들은 부재를 통해서만 뚜렷하게 인식되곤 합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누렸던 일들이 얼마나 귀한 것이었는지 이제야 분명하게 깨닫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당연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동녘 하늘에 벌건 해가 떠오른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그 해의 온기를 누리는 것은 하늘로부터 오는 은총입니다. 시간은 우리에게 본래 주어진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 위로부터 오는 선물이니 말입니다.

결혼식 날짜를 잡아놓았다가 몇 번씩이나 결혼을 연기해야 하는 예비부부들을 보며 안쓰러웠습니다. 더 이상 미룰 수 없어 결혼식을 진행하지만 하객 수 제한 때문에 가족들 말고는 더 초대할 수 없어 속상해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귀국 독주회 날짜를 잡아 놓고 대관까지 한 상태인데, 결국 취소할 수밖에 없게 된 교우도 있습니다. 각급 학교의 개학을 기다리던 학생들도 학부모들도 난감해하고 있습니다. 일일이 다 언급하지 않더라도 이런 일은 비일비재입니다. 잠시 얼떨떨하고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이것도 우리 생의 일부려니 하고 극복해야 할 것 같습니다. 종종 드렸던 말씀입니다만 임마누엘 칸트는 자기 인생을 든든하게 붙들어준 한 문장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주께서/나와/함께/하심이라”(Du-bist-bei-mir). 우리도 이 말씀을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지금은 주님이 멀리 계신 것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주님은 지금도 우리 곁에, 앞에, 뒤에, 함께 계십니다.

코로나 시대가 슬픈 것은 낯모르는 사람에 대해 경계심을 품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교인들이 교회에 출입하지 못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쑥 교회에 찾아오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오신 분을 싸늘하게 돌려보내기 어려워 잠시 응대하면서도 찜찜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입니다. 환대의 공간이어야 할 교회가 금기의 장소처럼 변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삶이 곤고할 때마다 예배당에 나와 하나님 앞에 엎드려 울기도 하고, 교우들과 목청껏 찬양을 드리면서 느꼈던 따뜻한 위안이 참 그립습니다.

마음이 스산할 때면 하릴없이 이 책 저 책을 펼쳐 아무 데나 읽어보는 습관이 있습니다. 우연히 마주친 어느 한 대목이 제 마음의 등불이 되어줄 때도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누렇게 변색된 <구상 시 전집>을 들추며 냄새도 맡고, 책벌레도 털어내다가 한 구절에 눈길이 갔습니다. ‘진실로 제 나라 제 겨레를’이라는 시의 일부입니다.

“여보게!
때로는 세상살이가 어지럽다고
오늘로 삶을 걷어나 치울 듯
호들갑을 떨지 말게

義人 열만 있으면
소돔과 고모라도 멸하지 않는댔지
썩고 곪으면 터지게 마련이요
새살이 다시 나는 게 자연이치니
서로가 제 소임에 충실하면서
서로가 제 허물을 고쳐 나가노라면
어떠한 악순환도 마침내 끝장이 날 걸세”

‘호들갑’이라는 단어에 눈길이 갔습니다. 그렇습니다. 힘든 상황인 것은 분명하지만 호들갑을 떨 것까지는 없습니다. 정신을 가다듬고 제 소임에 충실하고 허물을 고쳐 나가야 합니다. 교회에 쏟아지는 비난의 소리와 시선이 사뭇 따갑습니다. 교인들조차 교회를 부끄러워합니다. 지금은 엎드려 우리의 믿음이 경박하지 않았는지, 예수 정신과 무관한 것은 아니었는지 돌아보아야 할 때입니다. 많은 이들이 대면예배를 당분간 금지하고 있는 정부의 방침이 기독교에 대한 탄압이라고 말합니다.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예배를 지속해야 한다고 결기에 차서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영상 예배는 진정한 예배가 아니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저는 그 말에 조금도 동의할 수 없습니다.

네이선 D. 미첼은 <예배, 신비를 만나다>(안선희 옮김, 바이북스, 2014)라는 책에서 “예배의 윤리적 가치가 이웃들과의 삶속에서 제대로 구현될 때, 진정한 예배가 되는 것이다. 이때 몸의 역할이 필수 불가결하다”고 말합니다(p.64). 예배는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위해 일하시는 것에서 출발하여 그 은총에 반응하는 우리의 응답입니다. 진실한 예배는 특정한 장소성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네이선은 그래서 “교회의 예전은 이웃의 예전liturgy of neighbor을 통해 그 진정성과 유효성을 검증받아야 한다”(p.67)고 말합니다. 감염병 시대의 예배는 이웃들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교회를 어렵게 만드는 것은 예배의 중단이 아니라, 형식 논리에 빠져 진실한 예배를 외면하는 이들입니다.

다목적실에 전시된 사진들을 무심코 바라보다가 몇 해 전 성탄절 행사를 마친 후 찍은 단체 사진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기쁨과 설렘, 따뜻함과 신뢰가 그 속에 담겨 있었습니다. 기차를 타고 가을 나들이를 갔던 사진을 보니 함께 했던 시간이 더욱 그리움으로 다가왔습니다. 언제쯤이면 이런 일상이 회복될까요? 그 날과 시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렇기에 더욱 오늘을 충실히 살아야 하겠습니다.

교우 여러분, 부디 자중자애하셔서 건강을 잘 유지하십시오. 기독교인임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지금부터라도 예수 정신에 따라 삶을 재편하십시오. 이웃들에게 기쁜 소식이 되기 위해 노력하십시오. 어려운 때일수록 유머 감각을 잃지 않도록 유의하십시오. 따뜻한 말과 표정으로 주위 사람들의 가슴에 봄 소식을 전하십시오. 영상으로 드리는 예배에 정성을 다해 참여하십시오. 오늘도 내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싸개 속에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주님의 은총과 평강을 기원합니다.

2020년 8월 29일
김기석 목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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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미(20 08-29 08:08)

청파교회를 다니는 교인은 아니지만
여러 채널로 말씀을 접하고 있습니다
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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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주(20 08-29 11:08)
목사님,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동선을 최소화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매일매일 더욱 더 주님의 은총을 간절히 사모하게 됩니다. 주일이면 옷을 갈아입고, 노트북 앞에 앉아 예배를 드리지만 공동기도, 찬양, 특별찬양, 목사님의 설교말씀과 보냄의 기도에 한 부분, 한 부분 감동하고 감격하며 울컥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늘 교회 예배의 그 자리가 그립습니다. 목사님, 부목사님들, 전도사님 모두 건강하시기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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