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지구 문해력’을 높일 때 2021년 04월 11일
작성자 김기석
‘지구 문해력‘을 높일 때

재·보궐선거가 끝났다. 정부의 실정과 다수당인 여당의 무책임에 대한 국민의 추궁이 매서웠다. 승리와 패배의 요인에 대한 분석 기사들이 넘쳐난다. 최근 몇 년 사이에 벌어진 일들을 보며 시민들은 여와 야 사이에 이념이나 도덕성에 큰 차이가 없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삶은 위태롭고 미래의 전망 또한 암울할 때 사람들이 집권 여당에 분노하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경제와 정치가 우리 삶을 과잉 대표할 때 현실을 차분하게 진단하고 역사가 지향해야 할 방향에 대한 논의가 끼어들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정치권의 시선은 이미 내년에 열리는 대선과 지방 선거를 향하고 있다. 대중들의 욕망에 예민할 수밖에 없다. 자칫 잘못하면 욕망이라는 이름의 기관차가 정치적 지향과 실천을 이끌고 갈 수도 있는 상황이다. 욕망은 자기중심적이기에 배타성을 띠게 마련이다. 대중의 욕망을 적절히 제어하면서 공공성을 강화해야 할 정치가 그 책임을 방기하고 사람들의 눈치를 보는 순간, 가장 큰 피해를 입는 것은 사회의 가장자리로 내몰리는 사회적 약자들이다.

그리고 또 있다. 하나 밖에 없는 초록별 지구이다. 인간은 발전과 진보라는 미명하에 지구의 엔트로피를 높이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우리 모두의 삶의 터전인 지구는 신음하고 있다. 코로나19는 생태계의 균형을 무너뜨린 인간에 대한 자연의 역습이건만, 그 위기의 한복판에 있으면서도 성찰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멈춤 신호가 켜진 지 이미 오래건만 사람들은 가속페달에서 발을 떼려 하지 않는다. 행복의 신기루를 좇고 있기 때문이다.

문명의 대안을 찾는 이들은 지구 문해력Earth literacy이라는 용어로 우리 시대를 진단하기도 한다. 문해력이 문장을 읽고 이해하고 그것을 자기 삶에 적용하는 능력이라면, 지구 문해력이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의 생명을 이해하고 그 신비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안타깝게도 현대인들 특히 도시인들의 지구 문해력은 매우 떨어진다. 우주의 신비 안에서 우리 삶을 바라보는 통합적인 능력을 잃었기 때문이다. 경외감을 잃는 순간 세상은 시장 바닥으로 변한다. 이익이 블랙홀처럼 모든 가치를 삼키는 사회는 위험하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우리 삶을 조망하는 높은 관점이다. 정신이 높이와 깊이를 잃어버려 납작해질 때 사람은 누구나 욕망의 전장에서 살아남을 생각에만 골몰한다.

정치인들에게만 우리 운명을 맡겨둘 수 없다. 엔트로피가 높아진 사회, 즉 혼돈과 무질서가 축적되어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을 상상하지 못할 때 문명은 붕괴한다. 지금 우리가 처한 위기가 자못 심각한데 단기적인 처방만 남발해서는 안 된다. 세계관이 바뀌어야 한다. 옛 사람의 말처럼 막히면 변해야 하고, 변하면 통하게 마련이다. 과연 변할 수 있을까?

미국의 생태학자인 로빈 월 키머러는 <향모를 땋으며>라는 책에서 아메리카 원주민인 오난다가 부족의 한 전통을 소개하고 있다. 그 부족은 한 주를 시작하거나 끝낼 때 감사연설을 한다고 한다. 감사연설은 그 부족의 언어로는 ‘모든 것을 앞서는 말’이다. 그들은 우리 삶을 에워싸고 있는 모든 것들에 감사를 표한다. 생명의 순환, 모든 것을 주는 대지, 물, 생물, 땅에서 자라는 작물, 약초, 각종 동물들. 이 목록은 한정 없이 길어질 수 있다. 그들에게 자연 세계는 인간이 착취해도 괜찮은 대상이 아니라 사귀어야 할 주체이다. 각각의 대상을 기억하는 감사의 연설은 언제나 “이제 우리의 마음은 하나입니다”라는 말로 끝난다. 이 선언은 보이지 않는 끈이 되어 의식에 동참한 이들의 마음을 묶어줄 것이다.

로빈 월 키머러는 감사를 표현하는 것은 순진무구해 보이지만 실은 혁명적이라고 말한다. 소비 사회에서 만족은 급진적 태도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경제는 공허를 필요로 하는 데 비해 감사는 충만을 계발한다. 우리 삶에 꼭 필요한 것들은 어쩌면 가까이에 있는지도 모른다. 다만 우리 눈길이 다른 곳을 떠돌고 있을 뿐.

(2021/04/11 자 경향신문 컬럼 '사유와 성찰'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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