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하늘땅사람이야기47-바늘로 우물 파기 2015년 11월 16일
작성자 김기석

 

 바늘로 우물 파기


모처럼 단비가 내리는 오후입니다. 찾아왔던 이들이 다 돌아가고 홀로 앉아 라흐마니노프의 '베스퍼스Vespers'를 들었습니다. 성무일과 중 '저녁기도'를 뜻하는 베스퍼스가 제 마음에 저릿하게 다가온 것은 날씨 탓도 있는 것 같습니다. 스웨덴 라디오 콰이어의 목소리에 담긴 채 무장무장 밀려오는 음의 파도에 몸과 마음을 맡기니 참 평안해졌습니다. 처리해야 할 많은 일들에 대한 근심도 잠시 물러갔습니다. 예배로의 부름으로부터 시작되어 주님에 대한 찬미, 빛을 모심, 시편 기도, 부활의 노래, 마니피캇, 글로리아를 거쳐 승리의 노래에 이르는 합창곡들이 지친 제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었습니다. 얼마나 큰 위안이었던지요.


늘 푸근하고 따뜻한 마음으로 날 찾아와 주어 고맙습니다. 이역만리에서 살고 있어 기회는 많지 않지만 만날 때마다 들려주시는 이야기에 깊은 감동을 느끼곤 합니다. 벌써 그곳으로 이주한지 4년이 되었다구요? 그러면 대략 50대 초반에 이 땅을 떠난 거네요. 대개 그 나이쯤 되면 외국에 살던 이들도 돌아오고 싶어하던데 참 특이한 경우인 것 같아요. 사업을 위해 간 것도 아니고 노후의 안락한 삶을 누리기 위해 간 것도 아니고, 다만 상처받은 땅에 사는 사람들의 이웃이 되고 싶어 떠난 길임을 나는 대충 짐작할 뿐입니다. 재미있게 목회하던 교회를 후임자에게 홀가분하게 물려주고 사서 고생을 하러 간 그 마음을 세상 사람들은 어리석다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할 수 없지요. 그분이 부르신 것이라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는 것을 성령께서 막으시고, 비두니아로 가려던 길조차 막혀 갈 바를 알지 못하던 바울이 떠오릅니다. 이리 갈까 저리 갈까 망설이면서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에 이르렀을 때 그는 밤에 환상을 봅니다. 마케도니아 사람 하나가 그의 앞에 서서 "마케도니아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간청했습니다. 바울은 즉시 그것을 하나님의 부름으로 알고 마케도니아로 건너갑니다. 그런 즉각적 응답이야말로 역사의 전환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브라함은 살고 있는 땅과 난 곳과 아버지 집을 떠나 하나님이 보여주는 땅으로 과감히 이주했습니다. 애굽에 머물고 있던 히브리인들은 광야를 향해 과감하게 행진하기 시작했습니다. 갈릴리의 어부들은 '나를 따르라'는 부름을 듣자 즉시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랐습니다. 신앙은 '떠남'과 '따름' 사이에서 형성됩니다. 떠날 줄 모르는 이들은 따를 줄도 모릅니다. 그게 오늘의 내 모습이 아닌가 싶어 두렵습니다.


아는 사람이라고는 누군가의 소개로 알게 된 한 사람 밖에 없었다고 하셨지요? 소통할 수 있는 언어조차 없었으니 안다고 할 수도 없었겠네요. 처음 그분의 소개로 신앙공동체에 참여했을 때의 그 낯선 느낌을 아직도 기억하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그 난감한 시간을 속으로 가늠해 보는 데, 뜬금없이 오래 전 암벽등반을 즐기던 시간이 떠올랐습니다. 아직 바위에 서툴 때 직각에 가까운 벽 앞에 서면 일종의 현기증 같은 두려움에 사로잡히곤 했습니다. 그래도 그 암벽을 오르고 싶다는 매혹이 두려움을 이겼기에 도전을 계속했을 겁니다. 아차 하는 순간 추락할 수도 있었기에 온 몸과 마음을 발로 딛고 서거나 손으로 붙잡아야 하는 한 점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도로 집중된 그 시간이 쌓이고 또 쌓여 선을 이룹니다. 수직으로 이동한 거리는 공간으로 환산된 시간이었습니다. 바위에 오르기 위해서는 균형감각은 물론이고 다소의 과감함과 높은 집중력 그리고 바위와 일체가 되기 위한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암벽에 매달렸던 그 시간처럼 내가 집중했던 시간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낯선 세계에서 살아가는 것 역시 그런 것이 아닐까 짐작해봅니다. 그 낯선 공동체에서 만나는 사람 하나 하나가 정말 소중한 이들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비록 통역을 통해서이긴 하지만 서로의 진정을 이해하게 되자 마침내 해야 할 일이 보였다고 하셨지요? 어쩌면 그것이 하나님의 계시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삶의 무게가 버거운 듯 비틀거리면서도 진실하게 살려고 애쓰는 젊은이들과 만나고, 그들에게 참살이가 무엇인지 일깨워주려고 애쓰는 동안 스스로 치유됨을 느꼈다 하신 말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언어의 한계 때문에 이야기가 더 깊어지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하며 내년에는 대학에 들어가서 언어를 더 익혀야 하겠다는 말씀에 깊이 감동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언어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서로의 마음에 가 닿으려는 절실함과 진정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그것이 마틴 부버가 말하는 근원어(Grund-worte)가 아닐까요? 근원어는 자기의 전 인격을 걸어 말하는 언어입니다. 근원어가 말해질 때 새로운 관계가 형성됩니다. 언어가 혼탁해진 시대를 살아서 그런지 요즘은 언어가 오히려 불통의 도구가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쓸데없는 말인 줄 알면서도 이렇게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는 것은 지금 우리 시대의 언어에 대한 절망이 그만큼 깊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의 언어만 통용되는 시대, 오직 한 사람만 말할 권리를 갖고 다른 이들의 말은 억압되거나 거짓의 낙인이 찍히는 시대처럼 위험한 때가 또 있을까요? 공무원 면접 시험장에서 응시자들에게 '국정교과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 세상이 과연 정상적인 사회일까요? 기업의 면접장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각자가 구명도생해야 하는 이 위태로운 세상에서 양심의 자유는 이렇게 위축되고 있습니다. 세월호를 연상시키는 내용이 들어간 작품을 무대에 올릴 수 없는 세상, 공당의 대표라는 사람이 우리 국민들이 강남구 수준만 되면 선거도 필요 없다고 말해도 아무렇지도 않은 세상, 사람들 속에 공포를 내면화시켜 자기 말을 스스로 검열하도록 하는 세상에서 말을 다루는 자들은 깊은 자괴감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파커 J. 파머의 말이 자꾸 떠오릅니다.


"한 사회가 권위주의적 통치체제로 흘러가기 시작할 때 가장 먼저 차단되는 장소는 공적인 삶이 영위되는 곳들이다. 사람들은 체포의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 길거리에 모일 수 없다. 공적인 시위는 불법으로 선언되고 강제로 종식된다. 종교 공동체를 포함한 자발적 결사는 금지된다. 또 모든 결사적인 삶은 권력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엉터리 정치 집회가 무대 위에 오르고 정권에 의해 각본과 안무가 짜인다. 정치적인 통제의 1차 도구인 공포가 사회에 깊게 깔리면서 사람들은 더 이상 서로를 믿지 못하게 된다. 법과 힘 그리고 상호 불신에 의해 고립된 개인은 중앙권력의 인질이 되어 손쉽게 중성화되거나 제거될 수 있다."(파커 J. 파머,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 김찬호 옮김, 글항아리, 2012년 3월 26일, p.174)


이런 불신 세상에서 이익을 보는 이들은 파렴치하고 뻔뻔한 자들입니다. 그렇기에 기득권을 지키는 것을 최우선의 관심으로 여기는 이들은 세상을 혼돈 속으로 몰아넣기 위해 끊임없이 일을 꾸밉니다. '민생' 혹은 '국민', 더 나아가 '국가'를 입에 달고 살지만 그들의 관심은 자기 이익의 극대화일 뿐입니다. 거짓 예언자들은 예나 지금이나 평화가 없는 데도 '평안하다 평안하다' 하며 사람들의 의식을 마비시켜 현실을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남왕국 유다의 멸망기에 활동했던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등진 백성들의 실상을 이렇게 고발하고 있습니다.


"나의 백성 가운데는 흉악한 사람들이 있어서, 마치 새 잡는 사냥꾼처럼, 허리를 굽히고 숨어 엎드리고, 수많은 곳에 덫을 놓아, 사람을 잡는다. 조롱에 새를 가득히 잡어넣듯이, 그들은 남을 속여서 빼앗은 재물로 자기들의 집을 가득 채워 놓았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세도를 부리고, 벼락부자가 되었다. 그들은 피둥피둥 살이 찌고, 살에서 윤기가 돈다. 악한 짓은 어느 것 하나 못하는 것이 없고, 자기들의 잇속만 채운다. 고아의 억울한 사정을 올바르게 재판하지도 않고,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를 지켜주는 공정한 판결도 하지 않는다."(렘5:26-28)


세월이 그만큼 흘러도 세상은 어쩌면 이렇게 변하지 않는 것일까요? 2600년 전 세상이나 지금이나 인간들이 살아가는 풍경은 비슷한가 봅니다. 그러나 세상이 그래도 이만큼 유지된 것은 그런 가운데서도 사람다운 삶을 지향한 이들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현상을 유지하고 싶은 이들에게 박해를 받으면서도 그 강고한 체제에 틈을 만들던 사람들 말입니다. 2006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터키 소설가 오르한 파묵은 자기의 소설 쓰기를 가리켜 '바늘로 우물 파기'라 말했습니다. 생각만 해도 아득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는 자기의 인생을 소설에 복무하는 것으로 여기는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매일 새벽 일찍 일어나 글을 쓴다", "남은 생애를 수도승처럼 방 한구석에서 (글을 쓰며) 보낼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작가에서 필요한 최고의 덕목이 인내라고 말합니다(이난아, <오르한 파묵-변방에서 중심으로>, 민음사, 2013년 3월 25일, p.31) 어찌 그것이 작가만의 덕목이겠습니까? 하나님 나라를 꿈꾸는 이들은 그러한 마음으로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서로 서 있는 삶의 자리는 조금 달라도 우리가 갈망하는 세상의 꿈은 같다는 사실에 감사합니다. 저만치 어딘가에서 온몸으로 어둠과 부딪쳐 파란 불꽃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우리는 가슴에 돋아나는 절망을 도려내고 다시금 길을 떠날 용기를 얻습니다. 그곳 젊은이들과 더불어 만들어가는 희망 이야기가 아름다운 메아리가 되어 이 척박한 땅까지 울려왔으면 좋겠습니다. 늘 자중자애 하시고, 청안청락 하시기를 빕니다. 안녕히 계세요. 


목록편집삭제

박승혜(15 11-19 06:11)
ㅡㅡㅡ 삶이 파편으로 흩어져버려진듯한 느낌을 가질때 ,믿음이 작아 기도조차할수없을 순간에
그래도 다잡고 집중할 수있게 생각이 정리되어지는 ㅡ 글을 읽고 힘을 받습니다 ㅡ개인적소감이지만 ㅡ
감사합니다.

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