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예레미야산책5 2016년 08월 24일
작성자 김기석

 노예 해방 선언과 철회

본문 / 렘34:1-22


34장부터 36장은 연대기적 순서를 따르지 않는다. 34장이 시드기야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비해 35장과 36장은 여호야김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레갑 족속의 순종을 인상깊게 서술하는 35장을 가운데 두고 두 임금의 불순종에 따른 심판의 불가피성을 앞뒤에 배치하고 있는 구조이다. 이 단락은 이후에 나오는 이스라엘 멸망 이야기의 서곡인 셈이다. 시드기야, 레갑 족속, 그리고 여호야김은 구체적인 인물이지만 그들은 순종과 불순종의 예로 제시되고 있다.


사회 통합을 위한 조처인가?

느부갓네살이 대군을 이끌고 와 예루살렘과 다른 모든 성읍들을 압박할 때 하나님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했다(1). 대부분의 성읍은 이미 침략자의 손에 넘어갔고 요새화된 성읍이라곤 겨우 라기스와 아세가만 남아 있는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예레미야는 시드기야가 겪게 될 참담한 패배를 예고한다. 예루살렘은 함락되어 불태워질 것이고 왕은 사로잡혀 바벨론으로 끌려갈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왕이 잡혀간 그 땅에서 평안히 살다가 눈을 감을 것이고, 사람들의 애도를 받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8절부터는 예언자의 경고를 받은 왕이 취한 조치와 그 이후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시드기야는 즉시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고관들과 제사장들을 불러 계약을 맺는다. "그 계약은 사람마다 각기 히브리 남녀 노비를 놓아 자유롭게 하고 그의 동족 유다인을 종으로 삼지 못하게 한 것이라"(9). 이 계약은 성전에서 이루어졌고(15), 언약에 참여한 이들은 "송아지를 둘로 쪼개고 그 두 조각 사이로 지나"(18)감으로써 계약을 어길시 제물과 똑같은 운명을 감수하겠다는 강렬한 의지를 표현했다. 


히브리 노예들의 해방에 관한 서사는 출애굽기(21장)와 레위기(25장) 그리고 신명기(15장)에 골고루 등장한다. 그만큼 중요한 사안이었다는 말이겠다. 어떤 사유에 의해서든 빚에 몰려 노예로 팔린 히브리 종들은 칠 년 되는 해에 해방되어야 했다. 하나님은 애굽의 전제정치 아래서 신음하던 히브리들을 구원하기 위해 역사에 개입하시기를 꺼리지 않으셨다. 그리고 출애굽 공동체를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으로 세우셨다. 그것은 억압과 착취가 없는 평등공동체를 역사 속에서 실현하라는 일종의 초대였다. 동족을 종으로 삼는다는 것은 그렇기에 하나님의 섭리를 거스르는 일이었다. 하나님은 만부득이 형제를 종으로 삼았다 하더라도 일정한 시간이 지난 후에는 그를 자유인으로 방면해야 한다고 엄히 이르셨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 이러한 명령은 무시되기 일쑤였다. 그런데 시드기야와 고관들은 그 명령에 귀를 기울였고 노예 해방을 실천했다.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바른 일'이었다(15).


방편적 신앙의 최후

시드기야와 고관들의 그런 갸륵한 결단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들은 왜 하필이면 토라의 많은 요구 가운데 노예 해방을 가장 긴급한 과제인양 받아들인 것일까? 여기에는 조금 복잡한 셈법이 작동했다고 볼 수 있다. 사회의 가장 밑바닥 계층에 속한 이들에게 현실은 늘 극복되거나 뒤집어져야 할 곤경이다. 억압과 착취가 가혹할수록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들의 노동력을 착취하여 거들먹거리며 살던 이들은 변혁의 시대가 도래할 때 그들이 등을 돌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히게 마련이다. 시드기야와 고관들의 노예 해방 선언은 그런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한 조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해방된 노예들이 자유민의 긍지를 가지고 나라를 위해 싸워준다면 금상첨화였을 것이다. 꼭 그렇게까지 볼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그 다음에 벌어진 사건을 보면 이내 그들의 조처가 신앙적 행위가 아니라 정치적 행위였음을 알 수 있다.


10절과 11절 사이에는 깊은 단절이 있다. "후에 그들의 뜻이 변하여 자유를 주었던 노비를 끌어다가 복종시켜 다시 노비로 삼았더라"(11). 어떤 사건 '후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말인가? 바벨론의 남진 정책에 오래된 제국의 안위가 위협받자 애굽왕 바로는 군대를 출병시켜 바벨론을 저지하고자 했다. 애굽의 출병 소식을 들은 느부갓네살은 예루살렘에 대한 포위를 풀고 긴급한 상황에 먼저 대처하려 했다. 시드기야와 고관들은 포위가 풀린 것을 하나님의 개입으로 위기가 해소된 것으로 간주했다. 상황이 달라지자 그들은 어쩔 수 없어서 해방시켰던 노비들의 경제적 가치에 생각이 미쳤고 그래서 노비들을 다시 잡아들였던 것이다. 히브리 노예의 해방이라는 사건이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이 아니라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전략적 행동이었음이 여실히 드러났다. 하나님은 그것을 당신의 이름을 더럽힌 사건으로 간주하신다(16).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나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각기 형제와 이웃에게 자유를 선포한 것을 실행하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너희를 대적하여 칼과 전염병과 기근에게 자유를 주리라"(17). '자유를 주리라'라는 구절이 강력하다. 칼과 전염병과 기근이 하나님의 통제에서 벗어나 그 백성을 마음껏 유린하도록 하겠다는 말이다. 이제 시드기야와 고관들의 생명은 바벨론 왕의 군대에 넘겨질 것이다. 백성들 또한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의 먹이가 될 것이고, 땅은 황폐하게 변할 것이다. 자업자득이다.




















레갑 족속의 모범

본문 / 렘35:1-19


자유인의 초상

35장은 신앙생활의 귀감이 될만한 한 가문을 소개하고 있다. 레갑 족속이 그들인데 여호야김 시대에 예레미야는 레갑 사람들을 성전의 한 방으로 데려가 포도주를 마시게 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예레미야는 그 명령에 순종하여 야아사냐와 그의 형제와 그의 모든 아들과 모든 레갑 사람들을 데리고 성전에 있는 하난의 아들들의 방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예레미야는 포도주가 담긴 술 단지과 잔을 내놓고, 그것을 마시라고 권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단호히 그 청을 거절했다. 그것은 선조들의 유지를 거스르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레갑을 중시조로 하는 이 가문은 유목민의 소박한 전통과 이스라엘의 종교적 이상을 충실히 지키는 것으로 유명했다. 레갑의 아들인 여호나답('요나답'으로 표기되기도 한다)은 불의한 오므리 왕조의 마지막 왕 아합을 제거한 후에 바알 신앙의 잔재를 없애기 위해 분투하던 예후의 혁명에 동참하기도 했다(왕하10:15-16). 하지만 그는 혁명 주체로서의 기득권을 거부한 채 광야에 머물렀고 그의 후손들에게 아주 엄격한 유지를 남겼다. 후손들이 전승하고 있는 여호나답의 명령은 다음과 같다.


"레갑의 아들 우리 선조 요나답이 우리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와 너희 자손은 영원히 포도주를 마시지 말며 너희가 집도 짓지 말며 파종도 하지 말며 포도원을 소유하지도 말고 너희는 평생 동안 장막에 살아라 그리하면 너희가 머물러 사는 땅에서 너희 생명이 길리라"(6b-7)


네 가지 금지 명령과 한 가지 수행 명령이 매우 정연하게 열거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유목적 삶을 지속하는 것이 땅에서의 존속을 보장한다는 사실이다. 포도주를 마시지 말라는 것은 소박하면서도 금욕적인 삶을 살라는 요구이다. 이것을 나실인에게 요구된 것(포도주 마시지 말 것, 머리에 삭도 대지 말 것, 죽은 것과 접촉하지 말 것)과 연결시킬 필요는 없다. 요나답의 명령에는 제의적 암시가 전혀 없으니 말이다. 


다른 세 가지 금령, 즉 집을 짓지 말며 파종도 하지 말며 포도원을 소유하지도 말라는 것은 세상이 주는 안정성 위에 인생의 집을 짓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 소유와 잉여에 집착하는 순간 권력에의 욕망이 발생하고, 권력욕은 타자를 형제자매가 아닌 수단으로 삼도록 우리를 강제한다. 레갑 족속은 늘 세우거나 해체하기에 용이한 장막에서 살아야 한다. 수유리 빨래골에 있는 공초 오상순의 시비에 적혀 있는 글이 떠오른다. "흐름 위에/보금자리 친/오, 흐름 위에/보금자리 친/나의 혼". 정주가 안겨주는 안락함을 한사코 거부하고 늘 흔들릴 수밖에 없는 흐름 위에 자기 영혼을 얹으려 했던 시인의 자유 혼이 느껍지 않은가. 흐름 위에서 사는 이들은 정주의 욕망에서 자유롭기에 권력의 회유에 쉽게 넘어가지 않는다. 레갑 족속들은 그런 삶의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 


불순종하는 이들에게 내릴 심판

그들은 조상의 명령을 삶의 금과옥조로 여기며 살았다. 지금 잠시 동안 성내에 머물고 있는 것도 느부갓네살의 침공으로 성밖의 생존이 위태로워진 상황에서 취한 부득이한 선택일 뿐이었다. 위기가 해소되면 그들은 또 다시 그 거칠고 척박한 광야로 나갈 것이다. 그렇기에 아무리 하나님의 사람인 예레미야의 권고라 해도 포도주를 마시라는 요구를 뿌리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해서 시험은 지나갔다. 그때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예레미야에게 임했다. 예언자가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 사람들에게 전해야 하는 말씀은 단순명료했다. 


"레갑의 아들 요나답이 그의 자손에게 포도주를 마시지 말라 한 그 명령은 실행되도다 그들은 그 선조의 명령을 순종하여 오늘까지 마시지 아니하거늘 내가 너희에게 말하고 끊임없이 말하여도 너희는 내게 순종하지 아니하도다"(14)


'실행되도다'와 '순종하지 아니하도다'가 어구가 예리하게 대비되고 있다. 레갑 자손들이 순종은 하나님의 백성이라 자부하는 자들의 불순종을 절묘하게 드러내는 배경막 구실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예루살렘과 유다 주민들이 보인 불순종의 역사는 유구하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보내고 또 보내시면서 악한 길에서 돌이켜 행위를 고치고 다른 신을 따라 그를 섬기지 말라고 아무리 이르셔도 그들은 들을 생각이 없다.


마침내 이스라엘 자손에게 최종적인 말씀이 떨어진다. 불러도 대답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말씀을 듣고도 돌이키지 않은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에게 하나님이 이미 선포하신 재앙이 임할 것이다. 그러나 조상들의 명령을 성심으로 지켜온 레갑 가문에게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약속이 주어진다. "레갑의 아들 요나답에게서 내 앞에 설 사람이 영원히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19b). 하나님 앞에 설 사람이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자손 대대로 하나님을 섬기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레갑 족속은 세상 현실이 어떻게 변하든지간에 마땅히 지켜야 할 근본을 든든히 붙잡고 살아가는 이들의 당당함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레갑 족속과 예루살렘 주민들은 얻고자 하는 자는 잃고 잃고자 하는 자는 얻는다는 사실을 삶으로 증언하고 있다. 




















말씀은 사라지지 않는다

본문 / 렘36:1-32


금식 선포

여호야김 제 사년에 감옥에 갇혀 있던 예레미야에게 다시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다. 요시야 시대부터 이제까지 주어졌던 모든 말씀을 기록하라는 것이었다. 이미 선포된 말씀을 기록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의지가 확고하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백성들로 하여금 악한 길에서 돌이키도록 하기 위함이다(3). 예레미야는 바룩을 불러 예언의 말씀을 불러 주었고, 바룩은 그것을 남김 없이 두루마리에 기록했다. 바룩은 연금상태에 있던 예레미야를 대신하여 금식일에 성전에 가서 모든 이들 앞에서 그 두루마리를 낭독했다. '금식일'은 통상 '속죄일'을 일컫는 말이지만, 여기서는 왕이 요청하여 온 백성들이 참여하는 특별 금식일인 것으로 보인다.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이 갈그미스 전투에서 애굽을 물리친 후 그 기세를 몰아 유다를 복속시키려 하자 여호야김은 크게 동요했다. 든든한 원군이라 여겼던 애굽이 무너지자 여호야김이 더 이상 바라볼 곳이 없었다. 그래서 백성들에게 금식일을 선포함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고자 했다. 


바룩은 예레미야에게 호의적이었던 사반의 아들 서기관 그마랴의 방에서 그 책을 낭독하였다. 두루마리에 적힌 주님의 말씀을 들은 그마랴의 아들 미가야는 왕궁에 있는 서기관의 방으로 가서 그 모든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하였다. 고관들이 여후디를 바룩에게 보내 그 두루마리를 가지고 와서 자기들 앞에서도 낭독하라 일렀다. 두루마리에 기록된 말씀을 들은 고관들은 그 말씀을 왕에게도 전해야겠다면서 그 두루마리의 내용을 어떻게 적게 되었느냐고 묻는다. 바룩은 예레미야가 일일이 불러 준 말을 기록한 것이라고 대답한다. 고관들은 바룩에게 즉시 예레미야와 함께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숨으라고 이른 후에 왕에게 이런 상황을 보고했다. 겨울 궁전에 머물고 있던 여호야김은 그 두루마리를 가져와서 자기 앞에서도 낭독하라 명한다.


여후디는 서기관의 방에서 그 두루마리를 가져와 임금과 그 곁에 있던 모든 대신들에게 읽어 주었다. 여호야김 앞에는 화롯불이 타고 있었다. 그런데 여후디가 서너 단을 읽을 때마다 왕은 서기관의 칼로 그것을 베어 화롯불을 던졌다. "왕과 그의 신하들이 이 모든 말을 듣고도 두려워하거나 자기들의 옷을 찢지 아니하였고 엘라단과 들라야와 그마랴가 왕께 두루마리를 불사르지 말도록 아뢰어도 왕이 듣지 아니하였으며"(24). '옷을 찢지 아니하였고'에서 '듣지 아니하였으며'로 이어지는 구절은 왕과 귀족들의 불순종을 온전히 드러내고 있다. 옷을 찢으며 참회하여야 할 순간에 왕은 말씀이 적힌 두루마리를 찢었고, 재를 뒤집어써야 할 시간에 그는 말씀을 화롯불 속에 던져 재로 만들었다. 백성들에게 금식할 것을 명령했지만 정작 자신은 참회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욘3:4)는 경고를 들었을 때 니느웨의 왕이 왕복을 벗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 위에 앉은 것과 극단적으로 대조된다.


금식을 선포함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모양새를 갖추기는 했지만 여호야김은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지 않았다. 이사야는 참된 금식이 무엇인지를 명료하게 가르쳐주었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사58:6-7). 결박을 풀어주고 멍에를 꺾는 것, 사회적 약자들을 세심히 보살피는 것과 무관한 금식은 오히려 가증한 것이 될 수 있다. 권력에 취한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예언자들을 통해 전달된 하나님의 말씀은 늘 불편한 말씀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을 여호야김은 두루마리 불태우기라는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낸 것이다.


다윗 왕조 몰락의 예고

그러나 두루마리를 태워버린다고 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숨어 있던 예레미야에게 다시 말씀을 기록하라 이르시면서 여호야김의 악한 행위를 준엄하게 책망하신다. "네가 이 두루마리를 불사르며 말하기를 네가 어찌하여 바벨론 왕이 반드시 와서 이 땅을 멸하고 사람과 짐승을 이 땅에서 없어지게 하리라 하는 말을 두루마리에 기록하였느냐 하도다"(29). 예언자의 말 혹은 글은 임의로 변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권력자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급진성을 제거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불태움으로써 여호야김은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을 통치할 의사도 능력도 없음을 드러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유다 왕 여호야김이 맞이하게 될 운명을 예고하신다. "그에게 다윗의 왕위에 앉을 자가 없게 될 것이요 그의 시체는 버림을 당하여 낮에는 더위, 밤에는 추위를 당하리라 또 내가 그와 그의 자손과 신하들을 그들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벌할 것이라 내가 일찍이 그들과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 사람에게 그 모든 재난을 내리리라 선포하였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30b-31). 하나님의 말씀을 만홀히 여기는 자의 운명이 이러하다. 영원하리라 믿었던 다윗 가문의 몰락이 기성사실이 되고 있다. 시온 불패의 신화는 권력자의 불신앙과 오만에 의해 이렇게 무너지고 말았다. 예레미야는 바룩으로 하여금 여호야김이 불태워버린 말씀은 물론이고 다른 말씀까지 다시 기록하게 하였다. 말씀은 죽지 않는다. 




















죽음의 문턱을 넘어

본문 / 렘37:1-38:13


허망한 낙관론

악연이라면 악연이겠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서 있는 삶의 자리에 따라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크게 엇갈리곤 한다. 어떻게 해서든 권력과 현상 질서를 지키려는 사람과 권력의 남용을 꾸짖고 상황을 바꿔나가려는 사람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왕과 예언자는 굳이 적이랄 것은 없지만 피차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다. 37장은 시드기야가 느부갓네살이 세운 허수아비 왕이 되었을 때의 이야기이다. 그때의 분위기를 예레미야서는 이렇게 압축하고 있다. "그와 그의 신하와 그의 땅 백성이 여호와께서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하신 말씀을 듣지 아니하니라"(2). 예언자가 존중받지 못하는 세상, 하나님의 말씀이 경청되지 않는 세상은 몰락을 앞두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어느 날 시드기야가 예레미야에게 사람을 보내 기도를 부탁했다. 상황이 절박했기 때문일 것이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었던 것이다. 느부갓네살이 세운 왕이지만 일종의 민족주의적 감정에 사로잡혀 있던 시드기야는 은밀히 애굽과 손을 잡고 바벨론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선민 의식으로 중무장한 일단의 사람들은 시드기야의 그런 태도를 강력히 지지했다. 느부갓네살은 배은망덕한 시드기야를 징치하기 위해 대군을 몰아 예루살렘을 압박했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상황에서 시드기야와 그 신하들이 바라볼 것은 하나님의 도움 밖에 없었다. 


그들이 예레미야에게 기도를 부탁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너는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라"(3b).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바로가 군대를 출병시켰다는 보고가 느부갓네살에게 들어왔고, 바벨론 왕은 즉시 포위를 풀고 그 긴급 상황에 대비토록 했다. "바로의 군대가 애굽에서 나오매 예루살렘을 에워쌌던 갈대아인이 그 소문을 듣고 예루살렘에서 떠났더라"(5). 철수하는 군대를 바라보며 왕과 귀족들은 득의의 미소를 짓지 않았을까? 그러나 예언자는 그들의 낙관론에 쉽게 동승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들의 낙관론에 찬물을 끼얹는 메시지를 전한다. "너희를 도우려고 나왔던 바로의 군대는 자기 땅 애굽으로 돌아가겠고 갈대아인이 다시 와서 이 성을 쳐서 빼앗아 불사르리라"(7b-8). 갈대아인은 아주 떠난 게 아니라 잠시 동안 떠난 것이다. 현실은 냉혹하다. 아무리 용감하게 싸워도 패배는 기정사실이다(10). 그것은 군사력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웅덩이로부터 구출되다

11절부터는 바벨론 군대의 포위가 풀렸을 때 벌어진 한 사건을 보여준다. 예레미야는 집안의 상속 재산을 물려받기 위해 베냐민 땅에 가려고 집을 나섰다. 그가 '베냐민 문'에 이르렀을 때 수문장 이리야가 적에게 투항하러 간다는 혐의를 씌워 그를 체포했다. 공을 세우고 싶었던지 이리야는 예레미야를 고관들에게 끌고 갔다. 고관들은 그에게 매질을 가하고는 서기관 요나단의 집에 있는 뚜껑 씌운 웅덩이에 그를 가뒀다. 이 사건은 유다의 패배를 공언하고 있는 예언자에 대한 적대감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이다. 


하지만 시드기야는 예레미야의 영적 권위를 완전히 부인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는 사람을 보내 예레미야를 왕궁으로 데려오도록 한 후 비밀스럽게 묻는다. "여호와께로부터 받은 말씀이 있느냐". 예레미야는 그때도 단호하게 대답한다. "왕이 바벨론의 왕의 손에 넘겨지리이다"(17). 왕이 이렇게 비밀스럽게 하나님의 뜻을 물은 것은 왕권이 확립되지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주전파들이 득세하는 상황에서 왕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곤경에 처해 있었다. 왕은 듣고 싶은 답을 듣지 못했다. 예레미야는 자기에게 씌워진 혐의가 부당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자기를 서기관 요나단의 집으로 돌려보내지 말아 달라고 부탁한다. 거기에 가면 살아 나올 수 없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호전적인 귀족들은 예레미야를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시드기야는 부하들에게 예레미야를 근위대 뜰에 가두라면서 도성에서 떡이 떨어질 때까지 매일 떡 한 덩이씩 가져다 주라고 명한다.


근위대 뜰에서 예레미야는 비교적 자유롭게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항복하는 것만이 살 길이라고 설득했다. 그의 이런 행태가 고관들의 귀에 들어갔고, 고관들은 예레미야를 죽이지 않으면 성 중에 절망의 독이 퍼질 것이라며 왕을 압박했다(38:4). 시드기야는 더 이상 예레미야를 보호해 줄 수 없었다. 고관들은 예레미야를 줄로 매달아 근위대 뜰에 있는 말기야의 웅덩이, 곧 물이 없는 진창에 쳐박았다. 예언자의 운명이 경각에 달했다. 


하지만 어디든 하나님의 숨겨진 일꾼은 있는 법이다. 이 소식을 들은 왕궁 내시인 구스 사람 에벳멜렉은 베냐민 문에 앉아있던 왕에게 은밀히 다가가 예레미야를 죽음에 이르도록 방기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왕에게 있어 예레미야는 뜨거운 감자였다. 하지만 왕은 결국 에벳멜렉에게 예레미야를 구하라는 특명을 내렸고 그 명령은 그대로 수행되었다. 하나님의 백성임을 자부하는 이들은 하나님의 일꾼을 죽이려 하지만 '구스 사람 내시'라는 이중적 차별에 시달리던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을 구하는 아이러니를 보라. 



















예루살렘 함락

본문 / 렘38:14-39:18


나약한 왕의 뒷모습

심약한 왕 시드기야는 예레미야를 은밀히 불러 하나님의 뜻을 묻는다. 예레미야는 어떤 말을 하든 자기를 죽이거나 적대자들에게 넘기지 않겠느냐고 묻자 왕은 그러겠다고 맹약한다. 예레미야는 왕이 만일 바벨론 왕의 고관들에게 항복하면 왕과 그 가족들은 살아남을 것이고 예루살렘 성도 불사름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절망의 심연을 비추는 작은 불빛인 셈이었다. 하지만 시드기야는 쉽게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 화친만이 살 길이라며 이미 바벨론에 투항한 유다인들로부터 학대나 조롱을 받지 않으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왕으로서의 책임감이나 의연함은 찾아보기 어렵다. 공포에 빠져 건전한 판단력을 잃어버린 나약한 존재의 누추함만이 도드라진다. 다윗 왕조는 이렇게 막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갈대아인들이 왕을 그들에게 넘기지 않을 거라며 시드기야를 안심시킨다. 하지만 왕이 항복하기를 거절하는 순간 파국이 다가올 것이다. 유다 왕궁의 여인들이 바벨론 사람들에게 끌려가면서 대신들에게 쉽게 휘둘렸던 왕을 원망할 것이고, 왕의 아내와 아들들도 다 끌려갈 것이다. 시드기야는 예레미야에게 고관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둘이 나눈 이야기를 해서는 안된다고 신신당부한다. 나약한 왕은 예레미야를 통해 전달된 하나님의 뜻이 분명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뜻을 따를 생각이 없다. 그를 사로잡고 있는 것은 부릅뜬 고관들의 눈이었을 뿐이다. 예언자가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이 멸망하는 날까지 근위대 울안에서 지냈다.


39장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다룬다. 거의 1년 6개월에 걸친 포위 공격을 받은 끝에 예루살렘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 의해 함락되었다. 시드기야의 제십일년 넷째 달 아홉째 날(기원전 587년 6월 말)이었다. 비극적인 그날을 예레미야는 이렇게 명토박아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과 다윗 사이에 맺어졌던 언약은 이렇게 해서 해소되고 말았다. 전후 처리를 위해 바벨론 왕의 모든 고관들이 도성 안에 있던 중문, 곧 공개회의나 재판이 열리는 곳에 모여들었다. 정복자들의 잔치가 마침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시드기야는 한밤중에 근위대의 호위를 받으며 왕실 정원 길을 따라서 성벽 사이의 통로를 지나 도성 밖으로 달아났다. 그러나 아라바 쪽으로 향하다가 추격자들에 의해 여리고 벌판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그들은 시드기야를 하맛 땅 립나에 있던 느부갓네살에게로 데려갔다. 바벨론 왕은 시드기야가 보는 앞에서 그의 아들들과 유다의 모든 귀족을 죽였고, 시드기야의 눈을 빼고, 바벨론으로 이송하기 위해 사슬로 결박했다. 홀로 살기 위해 백성을 버리고 달아나던 임금에게 가해진 처절한 모욕이었다. 임진왜란 때 백성들을 버리고 의주까지 도망갔던 선조 임금이나, 한국전쟁 때 적이 패주하고 있으니 서울을 굳게 지키자고 말하면서 한강 다리를 끊고 대구까지 달아났던 이승만 대통령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구원은 예기치 않은 곳에서 온다

갈대아인들은 왕궁과 백성들의 집을 불살랐고 예루살렘 성벽을 허물었다. 성벽을 허무는 것은 패자들에게 그들을 지켜줄 자가 더 이상 없다는 사실을 확인시키는 행위였을 것이다. 특이한 것은 예루살렘 성전 파괴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성은 무너졌지만 하나님의 역사는 끝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암시하기 위한 것일까? 바벨론 군의 사령관 느부사라단은 "성중에 남아 있는 백성과 자기에게 항복한 자와 그 외의 남은 백성을 잡아 바벨론으로 옮겼다"(39:9). 잡혀간 사람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과 절망감이 얼마나 깊었을까? 그러나 그들은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려는 하나님의 꿈의 단초였다. 절망의 그루터기에서 희망의 움이 돋아나오는 법이다. 


느부사라단은 또한 아무 소유가 없는 빈민을 유다 땅에 남겨 두고, 포도원과 밭을 그들에게 주었다. 정복군이 마치 사회적 약자들에게 관대한 것처럼 처신하고 있다. 항상 남의 눈치나 보며 살던 사람들에게 무상으로 주어진 땅은 은총처럼 여겨지지 않았을까? 무자비한 정복자가 은인으로 변신하고 있는 것이다. 그 땅에서 반역이 일어날 가능성은 줄어들고 바벨론 제국이 거둬들일 세금도 늘어날 것이다. 제국의 통치술은 이렇게 교묘하다. 


느부갓네살은 느부사라단에게 "그를 데려다가 선대하고 해하지 말며 그가 네게 말하는 대로 행하라"(39:12)고 명령한다. 느부사라단은 사람을 보내 경비대 울안에 있던 예레미야를 데리고 나가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 넘겼다. 이들은 예레미야에게 매우 호의적인 사람들이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일꾼을 바벨론 군대의 힘을 이용해 구해내셨다. 15절부터 18절까지는 왕의 내시였던 구스 사람 에벳멜렉(고유 명사라기보다는 '왕의 종'이라는 뜻의 직책명이었을 가능성이 크다)을 기억하시고 그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세심한 섭리를 다루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임을 자부하는 이들이 서슴없이 하나님을 거역할 때 이방 사람인 에벳멜렉은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썼다(38:7-13).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구하기 위해 한 그의 행동을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간주하셨다(39:18). 중요한 것은 인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경외심으로 받드느냐이다. 



















그다랴 시대

본문 / 렘40:1-41:18


미스바로 돌아가다

이미 석방되어 자유의 몸이 되었던 예레미야가 어떤 연고로 다시 사슬에 묶인 채 바벨론으로 끌려가던 포로민 행렬에 끼어들게 되었는지는 알기 어렵다. 예레미야는 라마에서 사령관 느부사라단의 도움으로 풀려났다. 1절은 그때 여호와의 말씀이 임했다고 보도하고 있지만 말씀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느부사라단의 말이 차라리 예언자의 말처럼 들린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곳에 이 재난을 선포하시더니 여호와께서 그가 말씀하신 대로 행하셨으니 이는 너희가 여호와께 범죄하고 그의 목소리에 순종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이제 이루어졌도다 이 일이 너희에게 임한 것이니라"(40:2-3). 패배자에 대한 조롱인가? 그럴 수도 있지만 이 말 속에는 아이러니도 있다. 이방 나라의 장군이 신실하지 못한 하나님의 백성을 통렬히 꾸짖고 있으니 말이다.


느부사라단은 예레미야에게 바벨론으로 함께 가면 선대하겠다면서도 그의 자유를 구속하지는 않는다. 그가 머물고자 하는 곳 어디에 머물러도 괜찮다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길 양식과 선물을 안겨주는 느부사라단의 호의를 받아들여 미스바에 있는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의 집으로 향한다. '미스바'는 다윗 왕조가 세워지기 전에 이스라엘 제의의 중심지였다. 미스바는 사무엘 시대에 대참회운동이 벌어졌던 곳이다(삼상7:5). 왕조가 몰락한 후 예언자가 향한 곳이 미스바라는 사실이 의미심장하다.


거의 패배가 예정되었던 싸움에서 물러나 광야에 머묾으로 참화를 면했던 군 지휘관들이 권력의 공백 상태에 빠진 그 땅을 돌보는 책임을 맡은 그다랴를 찾아온다. 친바벨론파의 대표격인 그다랴는 두려워하지 말고 갈대아인들을 섬기라면서, 지금은 생존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때라고 말한다. 각지에 흩어졌던 유다 사람들이 미스바로 모여들었다. 지리하고 참혹한 전쟁이 그치고 상대적이긴 할망정 평화의 시기가 도래했다. '포도주와 여름 과일과 기름'(40:10)은 바로 그런 시대에 대한 상징이다.


불안정한 평화의 종말

그러나 불안정한 평화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군 지휘관 가운데 유력한 사람인 요하난이 그다랴를 찾아와 첩보를 전한다. 암몬 왕 바알리스가 이스마엘을 보내 그다랴를 암살하려 한다는 것이다. 요하난은 이런 사태가 벌어지기 전에 자기가 이스마엘을 제거하겠다고 제안하지만, 그다랴는 그런 청을 거절한다. 모처럼 찾아온 평화가 피비린내 나는 암투로 인해 깨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스마엘은 다윗 왕가의 사람이었다(41:1). 이스마엘이 자기 수하를 거느리고 미스바에 왔을 때 그다랴가 그를 친교의 식탁으로 청한 것은 비록 무너졌다고는 하지만 왕가에 속한 사람에 대한 배려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친교의 자리는 피로 얼룩지고 말았다. 이스마엘은 그다랴와 다른 유다 사람들 그리고 그곳에 있던 갈대아의 군사들까지도 도륙하고 말았다. 나라를 잃어버린 백성들을 안돈시켜 살아갈 용기를 심어주려 했던 평화주의자는 이렇게 무기력하게 살해되고 말았다.


이스마엘이 그런 참혹한 일을 저지른 까닭은 무엇일까? 다윗 왕가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 지도권을 행사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 같다. 나라가 망한 마당에 왕가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하지만 인간은 이처럼 미욱하다. 그가 왕가의 복원을 꾀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그 가련한 땅에 공포와 적개심의 씨를 심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어느 날 세겜, 실로, 사마리아에서 출발하여 여호와의 성전(예루살렘의 파괴된 성전인지 미스바의 성소를 가리키는지 분명치 않다)을 향해 순례 길에 나섰던 사람들을 잘 영접하는 척하다가 잔혹하게 살해했다. 무너진 성전과 멸망당한 나라를 생각하며 애통하는 순례의 무리들을 그는 왜 구태여 죽인 것일까?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처사였다. 그는 순례자 80명 가운데 밭에 숨겨둔 밀과 보리와 기름과 꿀을 바치겠다는 10명만 남기고 다른 이들을 잔혹하게 살해하여 구덩이에 던져넣었다. 그는 다만 탐욕스러운 학살자였던 것이다. 이스마엘은 남은 사람들을 사로잡아 암몬으로 데려가려 했다. 그곳에서 세력을 키울 생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벌인 참극이 요하난과 다른 군 지휘관들의 귀에 들어갔고, 그들은 이스마엘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기브온 큰 물 가에서 이스마엘을 따라잡자 미스바에서부터 그에게 잡혀가던 사람들이 다 요하난에게로 돌아섰다. 역부족임을 알아차린 이스마엘은 겨우 몇 명의 부하들과 함께 암몬 자손의 땅으로 달아났다. 이스마엘의 그런 행실은 다윗 가문의 몰락이 돌이키기 어려울 지경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요하난은 미스바에서 잡혀갔던 사람들 곧 "군사와 여자와 유아와 내시를 기브온에서 빼앗아 가지고 돌아와서"(41:16) 베들레헴 근처에 있는 게롯김함에 머물렀다. 그들을 애굽으로 데리고 갈 생각이었다. 비록 이스마엘에 의해 자행된 것이긴 하지만 바벨론이 세워놓은 그다랴가 암살됨으로써 바벨론의 보복이 있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형제의 피가 흐른 땅은 더 이상 사람들을 품어 안지 못하는 불모지로 변하기 쉬운 법이다.




















애굽은 구원의 땅이 아니다

본문 / 렘42:1-22


당신의 하나님, 너희의 하나님

사방에 두려움이 넘치고 한치 앞도 내다보기 어려운 상황에서 사람들은 일쑤 하늘을 바라본다. 기브온에서 돌아온 요하난을 비롯한 군대 지휘관들과 백성들은 예레미야를 찾아가 기도를 부탁한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마땅히 갈 길과 할 일을 보이시기를 원하나이다"(42:3). '마땅히 갈 길과 할 일'을 여쭙는 것은 참으로 적절한 태도이다. 이 단락에서 눈에 띄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표현의 미묘한 차이이다. 백성들은 하나님을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라 칭한다. 하나님의 뜻을 받들지 못한 지난 삶이 만들어낸 거리감 때문일까? 아니면 역사를 이끌어가시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 때문일까? 예레미야는 기도를 약속하며 하나님을 '너희 하나님 여호와'라 칭한다. 하나님이 비록 진노하셨다 해도 그 백성을 온전히 버린 것은 아니라는 뜻을 그렇게 넌지시 드러낸 것이다.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 그대로 행할 것이라고 약속하는 6절에 이르러서는 표현이 또 한번 바뀐다. "우리가 당신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보냄은 그의 목소리가 우리에게 좋든지 좋지 않든지를 막론하고 순종하려 함이라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면 우리에게 복이 있으리이다 하니라". 마침내 백성들은 하나님을 '우리 하나님'이라 칭한다. 무슨 말씀이든 따를 것을 약속하는 이 대목은 시내산 계약이 체결될 때 한 맹세를 연상시킨다(출24:7). 


하나님의 응답은 즉각적이지 않았다. 열흘 후에야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 여기서 '열흘'은 일곱째 달 열흘날 시행되는 '대속죄일'을 연상시킨다(레23:27). 신탁을 받기 위해 필요한 것은 참회였던 것이다. 참회는 물론 하나님께로 돌아섬을 의미한다. "너희가 이 땅에 눌러 앉아 산다면 내가 너희를 세우고 헐지 아니하며 너희를 심고 뽑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너희에게 내린 재난에 대하여 뜻을 돌이킴이라"(42:10). 길에서 넘어진 자는 그 길을 딛고 일어서야 한다. 비록 그곳에서 참담한 경험을 했다고는 해도 하나님이 주신 그 땅에서 벗어나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죄 지은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이미 끝났다. 하나님은 남은 자들을 중심으로 하여 나라를 다시 세우고, 백성을 그 땅에 심으려 하신다.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은 출애굽의 역사를 뒤집는 일일 뿐이다. 하나님은 곡진한 언어로 그 남은 자들을 격려하신다. "너희는 너희가 두려워하는 바벨론의 왕을 겁내지 말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어 너희를 구원하며 그의 손에서 너희를 건지리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희를 불쌍히 여기리니 그도 너희를 불쌍히 여겨 너희를 너희 본향으로 돌려보내리라"(42:11-12). '겁내지 말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겠다', '너희를 건지겠다', '본향으로 돌려보내겠다'. 폭포가 쏟아지듯 주어지는 약속이 강력하다.


경청되지 않는 하나님의 뜻

불순종의 가능성도 있었기에 하나님은 경고를 잊지 않으신다. 만일 그들이 말씀에 복종하기를 거부하고 그 땅을 떠나려 한다면 오히려 파멸이 그 뒤를 따를 것이라는 것이다. 오랜 전란에 시달린 백성들에게 애굽 땅은 전쟁의 소용돌이가 미치지 못하는 땅, 전투를 독려하는 나팔소리가 들리지 않는 땅, 양식이 떨어져 굶주리지 않아도 되는 땅으로 이상화되고 있었다. 사람은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무슨 말씀을 하시든 하나님의 뜻에 따르겠다고 했던 백성들의 장한 맹세가 얼마나 허약한 것인지 하나님은 너무나 잘 아셨다. "너희가 만일 애굽에 들어가서 거기에 살기로 고집하면 너희가 두려워하는 칼이 애굽 땅으로 따라가서 너희에게 미칠 것이요 너희가 두려워하는 기근이 애굽으로 급히 따라가서 너희에게 임하리니 너희가 거기에서 죽을 것이라"(42:15b-16). 죽음을 피해 달아난 땅이 그들의 무덤이 될 것이라는 말이다. 도우심과 구원과 자비 대신 칼과 기근과 전염병이 그들을 따를 것이다.


18절부터는 예언자를 통해 전달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이들에 대한 경고가 다시 반복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긴급하고 격렬하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나의 노여움과 분을 예루살렘 주민에게 부은 것 같이 너희가 애굽에 이를 때에 나의 분을 너희에게 부으리니 너희가 가증함과 놀램과 저주와 치욕 거리가 될 것이라 너희가 다시는 이 땅을 보지 못하리라 하시도다"(42:18).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백성에게 임한 심판의 참극을 직접 경험하고도 그들은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들의 경험이나 판단을 신뢰한다. 하나님은 또 다시 오쟁이를 진 남편 신세가 되었다(예언자들은 하나님과 그 백성의 관계를 혼인관계에 빗대 설명하곤 했다).


하나님의 뜻을 여쭈어달라고 부탁하기는 했지만 요하난과 다른 지휘관들은 이미 애굽으로 내려갈 것을 결의해놓고 있었다. 그들이 필요로 했던 것은 자기들의 결정에 대한 하나님의 추인이었다. 하나님은 이렇게 거듭 능멸당하신다. 인간의 어리석음과 완고함에 막혀 하나님의 뜻은 경청되지 않는다. 예레미야는 그런 사실을 준엄하게 꾸짖으며 애굽으로의 피신이 결국은 파멸로 귀결될 것임을 거듭 경고한다. 예언자의 운명이 또 한번 출렁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다가오고 있다.





















최후의 경고

본문 / 렘43:1-44:14


벧세메스도 안전지대가 아니다

아사랴와 요하난과 모든 오만한 자들은 예레미야를 통해 전달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네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는 애굽에서 살려고 그리로 가지 말라고 너를 보내어 말하게 하지 아니하셨느니라"(43:2). 하나님의 뜻을 여쭈어 달라던 때와는 사뭇 다른 반응이다. 그들은 자기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예레미야의 말을 거짓으로 단정한다. 예레미야가 남은 자들을 갈대아인의 손에 넘기려는 바룩의 부추김을 받아 지어낸 말이라는 것이다. 지도자들은 자기들의 계획과 욕망을 이루기 위해 민족주의적인 감정을 획책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을 예레미야와 바룩의 반민족주의적 행태에 제공을 건 애국자로 포장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해서 간단하게 처리되었다. 


요하난을 비롯한 군 지휘관들은 예레미야와 바룩은 물론 남은 백성들을 다 이끌고 애굽의 다바네스로 내려갔다. 바벨론 제국의 칼날을 피해 또 다른 제국에 몸을 의탁하는 것이 과연 지혜로운 일일까? 본문은 이러한 그들의 선택을 "그들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함"(43:7)이라는 말로 간단하게 요약한다.


다바네스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다시 예레미야에게 임했다. 하나님은 특정한 장소에 국한되어 활동하지 않으신다. 온 세상이 그의 땅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유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큰 돌들을 날라다가 다바네스의 궁전 입구에 있는 진흙 벽돌이 깔린 광장을 파고 거기에 묻은 후에 그 상징행동의 의미를 사람들에게 밝혀주라 이르신다. 예레미야는 머지 않은 장래에 하나님은 당신의 종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그곳으로 부를 것이고, 그는 예레미야가 숨겨 두었던 돌을 초석으로 삼아 그곳에 왕좌를 세운 후에 그 위에 화려한 장막을 칠 것(43:10)이라고 예언한다. 여기서 느부갓네살은 다시금 '내 종'이라 지칭되고 있다(25:9, 27:6절 참고). 하나님은 역사를 지배하는 것은 강대국들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백성에게 일깨우려 하신다. 느부갓네살은 "애굽 땅을 치고 죽일 자는 죽이고 사로잡을 자는 사로잡고 칼로 칠 자는 칼로 칠 것"(43:11)이다. 애굽의 신당들은 불태워질 것이고, 벧세메스의 석상들도 파괴될 것이다. '태양의 집'을 뜻하는 벧세메스는 애굽 북부의 신전 도시 헬리오폴리스를 가리킨다. 하나님의 약속을 저버리고 태양신 레의 가호에 의탁하려는 이들은 예상치 못한 시련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보호를 피해 달아난 백성들이 의탁할 곳은 없다. 


반복되는 역사

44장은 믹돌, 다바네스, 놉, 바드로스 지방 등 애굽 땅 곳곳에 흩어져 살던 유다 공동체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이다. 예언은 전쟁의 참화를 겪은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이 황무지로 변해 인적조차 드문 땅이 되고 말았다는 말로 시작된다. 그 땅이 그렇게 변한 것은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출20:3)는 계명을 어겼기 때문이다.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으로 부름받은 이들이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는 악행을 저지름으로 여호와의 심판을 자초했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보내 그들에게 지속적으로 경고했지만 그들은 듣지 않았다. E.H. 카는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했다. 과거로부터 배우지 못하는 이들은 부끄러운 역사를 반복하게 마련이다. 부정적 자산도 자산은 자산이다. 하지만 참담하고 참혹한 사건을 겪었으면서도 애굽으로 피신한 이들은 돌이킬 줄 모른다. 공포와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영혼은 늘 곁눈질을 하는 법이다. 역사의 한복판을 응시할 힘이 없기 때문이다. 오직 용기 있는 자만이 하나님을 철저히 신뢰할 수 있다.


"어찌하여 너희가 너희 손이 만든 것으로 나의 노여움을 일으켜 너희가 가서 머물러 사는 애굽 땅에서 다른 신들에게 분향함으로 끊어 버림을 당하여 세계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저주와 수치 거리가 되고자 하느냐"(44:8)


문제는 '망각'이다. 기억해야 할 것은 자랑스러운 과거만이 아니다. 부끄러운 과거를 굳이 기억해야 하는 것은 다시는 역사를 그런 부끄러운 방향으로 퇴행시키지 않기 위해서이다. 부끄러운 기억은 숨긴다고 하여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은밀하고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유다 땅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저지른 조상들의 악행, 왕과 왕비들의 죄악, 평범한 사람들의 죄악이 애굽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그들이 오늘까지 겸손하지 아니하며 두려워하지도 아니하고 내가 너희와 너희 조상들 앞에 세운 나의 율법과 나의 법규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느니라"(44:10). 여기서 '겸손하지 아니하다'는 말은 교훈이 되는 일을 경험하고도 배우지 못하는 것을 가리킨다.


전쟁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왔지만 그들의 뜻은 성취되지 못할 것이다. 유다가 망한 것처럼 고집을 피우며 애굽으로 피신한 이들도 결국 다 엎드러질 것이다. 낮은 자부터 높은 자까지 예외는 없다. "칼과 기근에 죽어서 저주와 놀램과 조롱과 수치의 대상이 되리라"(44:12b). 그들이 그렇게도 돌아가 살고 싶어하는 유다 땅으로 귀환할 사람도 없을 것이다. 몰락은 언제나 마음의 무너짐으로부터 시작된다. 바랄 수 없는 중에 신뢰하는 것이 참 믿음이다.




















반역하는 백성들

본문 / 렘44:15-30


하늘 여왕을 숭배하는 사람들

예레미야는 일찍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외톨박이가 된 자기 처지를 한탄한 바 있다. "나는 무리의 비방과 사방이 두려워함을 들었나이다"(20:10a). 파멸과 멸망을 선포하는 사람이 환영받기는 어려운 법이다. 세월이 지나도 그의 처지는 개선되지 않았다. 그를 통하여 전달되는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들을 회개에 이르게 하기는 커녕 격렬한 저항을 낳곤 했다. 들을 생각이 없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밖에 없는 예언자의 운명이 참으로 가혹하다. 세상 모든 민족의 저주와 놀램과 조롱과 수치의 대상이 되리라는 예언자의 말을 듣은 유다 공동체의 반응은 어떠했던가? 아내가 다른 신들에게 향을 피운다는 사실을 아는 남자들, 무리를 지어 그 자리에 있던 여인들, 애굽 땅 바드로스(상부 애굽, 곧 애굽의 남부를 이르는 말)에 사는 모든 백성이 예레미야에게 그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네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하는 말을 우리가 듣지 아니하고 우리 입에서 낸 모든 말을 반드시 실행하여 우리가 본래 하던 것 곧 우리와 우리 선조와 우리 왕들과 우리 고관들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하던 대로 하늘의 여왕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를 드리리라 그 때에는 우리가 먹을 것이 풍부하여 복을 받고 재난을 당하지 아니하였더니 우리가 하늘의 여왕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 드리던 것을 폐한 후부터는 모든 것이 궁핍하고 칼과 기근에 멸망을 당하였느니라 하며"(44:16-18).


'하늘 여왕'은 메소포타미아에서 금성과 동일시되던 이쉬타르 여신(가나안 땅에서는 아스다롯 혹은 아세라로 변형되어 등장)을 일컫는 말이다. 이쉬타르는 전쟁과 사랑의 여신으로서 세상의 질서를 안정되게 유지하는 역할을 감당한다고 믿어졌다. 예루살렘 성전이 건재하던 시절에도 많은 여인들이 하늘 여왕을 숭배했다(렘7:18절 참조). 하늘 여신 모양의 과자를 만들어 바침으로 그들은 먹을 거리가 떨어지지 않기를 빌었던 것이다. 요시야의 종교개혁 때도 일월 성신을 위하여 만든 모든 산당들과 제기들을 파괴했던 사실에 비춰보면(왕하23:4-6) 혼합주의적 신앙이 이스라엘에 성행했음이 틀림없다. 경제적으로 궁핍한 삶이 낳은 소극만은 아니었다. 여호와 하나님만을 주님으로 섬기는 일이 일반 대중들에게는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불신앙과 우상숭배를 꾸짖는 예레미야에게 여인들은 자기들의 경험에 근거하여 하늘 여왕 섬기기를 그만 두었더니 궁핍이 찾아오더라면서, 하늘 여왕 앞에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를 드리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힌다. 예레미야는 그래도 완악한 그들을 깨우쳐주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는 유다 땅이 황무하게 변한 것은 백성들의 악행과 우상숭배를 더 이상 참아낼 수 없었던 하나님의 징계라고 말한다. 그들의 죄는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하늘 여왕에게 분향한 것, 둘째,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않은 것, 셋째, 여호와의 율법과 법규와 여러 증거대로 행하지 아니한 것이다. '증거대로 행하지 않았다'는 말은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고도 그 속에서 교훈을 얻지 못했다는 말이다. 모든 죄는 참된 소리를 듣지 않으려는 완악함에서 시작된다(44:23). 들을 귀 있는 자들은 들을지어다!


종교 혼합주의를 경계함

예레미야는 모든 백성들 특히 여인들에게 맹세하고 서원한 대로 하늘의 여왕에게 분향하고 전제를 드려보라고 말한다. 이것은 물론 적극적인 권장이 아니라 반어적 권장이다. 하지만 우상 앞에 절하는 이들은 만군의 여호와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한다. "그러므로 애굽 땅에서 사는 모든 유다 사람이여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나의 큰 이름으로 맹세하였은즉 애굽 온 땅에 사는 유다 사람들의 입에서 다시는 내 이름을 부르며 주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라 하는 자가 없으리라"(44:26).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으실 분이 아니다. '다른 신'을 섬기며 '여호와'를 동시에 섬길 수는 없다. '다른 신들'은 대개 강자들의 이익에 복무한다. 또한 그 신들은 신자들의 윤리적 삶에는 관심이 없다. 그런 신을 믿는 이들은 제의를 충실히 거행하는 것으로 신의 호의를 살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여호와는 그런 신들과 확연히 구분된다. 여호와는 역사의 그늘진 땅에서 바장이는 이들을 일으켜 세우시는 해방자이시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바치는 제물에는 큰 흥미가 없다. 하나님께 중요한 것은 백성들이 당신의 뜻을 받들어 살아가는 것이다. 그 삶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표현된다.


하나님을 등진 백성에게 닥쳐올 운명은 파멸 뿐이다. 애굽 땅으로 피신한 사람들은 모두 칼과 기근에 망하여 멸절될 것이다. 아주 소수의 사람들만이 애굽 땅을 벗어나 유다 땅으로 돌아가게 될 터인데 그때서야 하나님의 말씀이 참이었음이 드러날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일이 반드시 일어날 것이라면서 그 징조로 애굽왕 바로 호브라가 그의 원수들의 손에 넘어갈 것이라 말씀하신다. 그 원수들이 바벨론을 뜻하는지 애굽 내에 있는 반대 세력을 뜻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이 예언은 애굽으로 피신한 사람들이 믿고 의지하려던 애굽왕은 실은 부러진 갈대 지팡이에 지나지 않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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