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텅 빈 언어 속에 숨겨진 큰 뜻 2016년 10월 12일
작성자 김기석

 

 텅 빈 언어 속에 숨겨진 큰 뜻

   -바바라 브라운 테일러, <잃어버린 언어를 찾아서>


1981년에 상재된 이청준의 소설집 <잃어버린 말을 찾아서>는 '언어사회학서설'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자서전들 쓰십시다', '서편제', '선학동 나그네', '떠도는 말들', '지배와 해방' 등의 작품은 언어가 현실 사회속에서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를 다룬다. 저자는 그 작품들을 통해 집요하게 말의 본질을 묻고 있다. 엄혹했던 유신시대를 거치는 동안 사귐과 소통의 언어는 지배와 폭력의 언어로 바뀌었다. 나쁜 의도를 가진 사람들이 말의 주소를 바꿈으로 말을 혹사하고, 배반하고, 기진맥진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하여 집을 떠난 말들은 원래 깃들었던 실체와의 약속을 잊고, 아무데나 깃들어 음란하게 교미하기 시작했다. 불통은 그렇게 강화되었다. 말에 예민한 이들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청준은 말들의 원주소를 찾기 위해 진력했다. 작가가 일상적으로 발화되는 말들을 넘어 소리의 세계로, 소리의 세계를 넘어 구음의 세계로 자꾸만 소급해갔던 것은 그 때문이다.


신학의 언어 또한 다르지 않다. 오늘날 신학자들이 정교한 논리로 직조한 글들은 사람들의 가슴을 일렁이게 만들지 못한다. 열정적인 설교자들의 외침은 메아리조차 없이 허공을 헤매다 흩어지곤 한다. 신학의 언어, 신앙의 언어는 어느 결에 상투어로 변하고 말았다. 익숙하기는 하지만, 아니 익숙하기에 아무런 긴장도 일으키지 않는 언어, 낯섦을 잃어버린 언어, 우리의 안일한 일상에 틈을 만들지 못하는 언어는 더 이상 말씀-사건을 일으키지 않는다. 교회 안에서 구원이니, 은혜니, 화해니 하는 말들은 거듭 발화되고 있지만 그 말이 담보하고 있는 사건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말은 그렇게 타락한다. 말의 타락을 예민하게 자각하고, 말의 의미를 다시금 채우려는 노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들은 전통적인 신앙적 언어를 새로운 용어로 대체하려고 애쓴다. 이것은 물론 중요하다. 신앙의 언어가 일상의 언어로 재해석되지 않으면 그것은 자폐적인 담론 속에 갇힐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문제는 신앙적 언어가 가지고 있는 급진성이 번역 혹은 해석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 스러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자본주의의 망령이 온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죄, 참회, 구원에 대한 담론은 진부한 것으로 취급된다. 행복을 향해 산뜻하게 나아가려는데, 그 단어들은 우리의 누추했던 과거를 상기시키는 불편한 동창과 다를 바 없다. 그래서 그런 용어는 치열한 경쟁에서 밀려난 루저들의 탄식처럼 들린다. 그렇다면 교회는 혹은 신앙 공동체는 기독교의 전통적인 언어를 포기하고 새로운 언어를 채택해야 할 것인가? 바바라 브라운 테일러의 <잃어버린 언어를 찾아서>는 바로 그런 질문에 답하고 있다. 저자는 21세기 북미권에서 사람들이 입에 올리지 않게 된 단어들을 꼽아본다. '죄', '저주', '참회', '보속', '구원', '죄악', '허물'(12쪽) 등이 그것이다. 문제는 사람들이 꺼리는 그 언어를 버린다고 하여 그 언어가 지시하는 현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데 있다.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신앙의 언어를 잃어버리면 이 언어가 재현하는 실재도 함께 잃어버리게 된다"(20쪽)는 점이다. 죄의 현실을 외면하는 순간 은총이나 은혜와 같은 단어 속에 깃든 의미를 이해할 수 없게 되지 않던가. 바바라가 교회 전통이 소중하게 갈무리해온 단어들 속에 담긴 보화를 찾아보자고 제안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가 택한 방법론은 단순하지만 효과적이다.


"죄와 구원이라는 단어를 생각할 때 내 관심은 두 가지다. 첫째는 주류 교회에서 이 단어를 말하기 어렵게 된 상황을 설명하는 일이고, 둘째는 이 단어가 사라졌을 때 우리가 무엇을 잃게 되는지를 생각해 보는 일이다"(19쪽).


바바라는 '죄'와 '구원'이라는 단어가 진부하게 혹은 텅 빈 언어로 여겨지는 것은 다원주의, 포스트 모더니즘, 세속주의의 도래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본다. 매체의 발달로 인해 사람들은 다양한 종교와 접하게 되었고, 거기서 초래된 영적인 세계화는 특정 종교에 대한 충성심을 약화시킨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바바라는 다른 종교가 다다른 깨달음에 주목할 때 오히려 우리 자신에 대한 이해도 깊어진다고 말한다(38쪽). 포스트모더니즘은 한마디로 근대의 종언이라 할 수 있다. "국가, 학문, 또는 종교가 우리 안에 있는 최선을 끌어낼 수 있으리라 믿었던 시대는 지나갔다"(40쪽). 이러한 때 죄에 대한 경고나 구원의 약속이라는 표현은 작동하지 않는다.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가 설교자들에게 요청하는 것은 우리 삶의 곳곳에서 교묘하게 작동하고 있는 죄의 현실을 옳게 진술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식별해내도록 돕는 일이다. 세속주의는 이전에는 죄라고 여겨졌던 일들을 사소한 일로 취급하곤 한다. 한마디로 말해 세속주의의 특색은 "죄의 '퇴화'de-evolution라 할 수 있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거짓말도 '장난'이라는 이름으로 허용되고 '탐욕'을 '동기'라 부르며 긍정"(44쪽)하기도 한다. 세속주의는 죄와 구원의 언어를 의학, 법률 용어로 대체하기도 한다. 죄가 질병 혹은 법률적 위반으로 취급되는 순간 악의 심각함에 대한 인식, 자기 행위에 대한 책임, 참회의 요구는 설 자리를 잃게 된다.


1장에서 주류 교회에서 죄와 구원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어렵게 된 사정을 설명한 저자는 2장에서 죄라는 단어를 잃어버릴 때 우리가 잃게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핀다. 전통적으로 기독교는 하느님과 분리되는 것을 죄라고 가르쳤다. 죄를 가리키는 히브리어는 세 가지다. 'Chatah'는 '과녁을 벗어났다'는 뜻이고, 'Avah'는 '잘못된 행동을 하다'는 뜻이고, 'Pasha'는 '번역하다'는 뜻이다(65-66쪽). 세 단어가 모두 하나님을 거스르는 행위를 가리키지만 각각 의미의 차이는 분명했다. 하지만 히브리 성서가 그리스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과녁을 벗어나다'라는 의미가 신약에서 말하는 죄의 주된 의미로 고착화되었다. 이로써 죄는 인간의 특정한 행동이 아니라, 인간의 지향 혹은 경향성을 뜻하는 말로 통용되기 시작했다. 죄라는 말 속에 담긴 급진성은 사라지고 변명의 여지만 남게 되었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사람들은 '죄'라는 불편한 용어를 '의학 언어'와 '법률 언어'로 대체했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병이 죄를 대체하게 되었기 때문에 질병은 또한 인간의 실패를 가리키는 하나의 은유가 되었다. 이제 우리는 심판을 받는 대신 진단을 받으며 속죄를 받는 대신 치료를 받는다. 우리가 죄를 저지르는 이유는 세균 혹은 생물학적인 이유 때문이거나 어린 시절 경험한 정신적인 외상 때문이다."(72쪽)

"범법행위가 죄를 대체하면 불법이 인간이 저지른 실패를 가리키는 은유가 된다."(74쪽)


바바라는 의학 언어나 법률 언어는 신학 언어가 갖고 있는 역설의 공간을 다 담아낼 수 없다고 말한다. "신학 모델에서 죄는 단순히 하면 안 되는 일련의 행동들이 아니다"(77쪽). 죄는 훨씬 더 근본적이다. "신학적으로 죄는 하느님, 그리고 다른 사람과 깨어진 관계에 머무르기를 선택하는 것이다"(77쪽). 죄가 생명의 원천에서 분리되는 경험이라면 참회는 다른 존재 혹은 피조물과 '함께' 구원받는 삶을 지향한다. 참회는 잘못된 행동에 대한 후회가 아니라 참된 관계를 회복하겠다는 결단과 더불어 시작된다. 이런 의미에서 "죄는 우리의 유일한 희망"(78쪽)이다.


3장은 참회의 회복을 다룬다. 예배 공동체에서 의례적으로 반복되는 참회 예절이 곧 참회는 아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여, 우리의 잘못을 고백하나이다', '주여, 우리의 회개를 받아주소서'라고 기도한 후에도 이전의 삶을 계속한다면 참회한 것이라 말할 수 없다. 참회는 자기의 잘못에서 돌아서는 일, 세계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에 책임적으로 동참하는 일, 세계의 하나 됨을 위하여 일하는 이들의 대열에 합류하는 일과 무관하지 않다. 참회는 삶의 변화를 요구한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참회보다는 후회를 선호한다"(117쪽). 단순히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은 자의 편안함을 누리기 원하는 것이다.


시인 최승호는 교회를 '자동 세탁기'에 빗대 말한 적이 있다. 일주일 동안 세상에서 죄를 짓다가 주일날 교회에 들어가 죄를 말끔하게 씻고는 또 다른 죄를 시작한다는 것이다. 우리를 진정한 참회로 견인할 때만 '죄는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 된다. 진정한 참회를 통해 우리가 얻는 구원이란 어떤 것일까? 바바라는 "구원은 질병이나 중독에서의 회복, 잘못에 대한 용서, 오랜 원수와 이룬 화해, 기근의 시대에 서로 나눈 음식, 가난한 자들에게 구현되는 정의"(108쪽)라고 말한다. 구원은 세상에 회복이 도래하는 사건이다. 일그러진 세상을 바로잡는 책임을 상기하기 위해 우리가 회복해야 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보속' 개념이다. "보속은 죄에 대한 벌이 아니라 잘못을 '바로잡는' 행위"(118쪽)이다. 과거에 보속은 습관이 되거나 강제적인 의무가 되기도 했다. 종교개혁자들은 가톨릭에 맞서기 위해 보속의 전통을 버렸지만, 바바라는 보속이야말로 참회의 입구가 된다고 말한다. 값싼 은총에 탐닉하는 이들에게 보속은 행위를 통한 구원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삶의 변화, 치유, 세상에 대한 책임과 무관한 구원은 없다.


바바라는 이런 구원의 현실이 어떻게 일어나는가를 보여주기 위해 세이비어 교회를 예로 든다. 그 교회가 하는 모든 활동은 사람들이 서로를 소외시키는 죄를 멈추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거리의 진료소, 노숙인들을 위한 회복의 공간, 사람들이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돕는 공간, 어린이와 청소년 그리고 노인들을 위한 공간, 약물에 의존하는 이들의 회복을 돕는 공간, 집을 마련할 형편이 되지 않는 이들을 위한 공간, 노인들을 위한 주거 공동체 등은 사회복지 혹은 자선이라는 측면을 넘어 삶이 일그러진 이들의 회복을 돕는 장소라는 점에서 신앙의 본질과 무관하지 않다.


바바라는 "우리의 절망과 희망을 담아내는 데 신앙의 언어를 대체할 수 있는 다른 언어는 없다고 믿는다"(124쪽)고 말한다. 그러나 그 언어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는 "우리 경험의 심연으로 들어가 저 언어가 가리키는 실재를 찾는 일"이다. 둘째는 "삶으로 그 언어를 불러와 우리 몸에 그 언어를 입는 일"이다. 신앙적 언어의 적실함은 우리의 삶을 통해 입증되어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앞서 언급했던 소설가 이청준 선생은 소설 '벌레 이야기'를 통해 사람들이 쉽게 사용하는 '용서'라는 언어가 현실 속에서 어떻게 남용되는지를 밝히고 있다. 용서 혹은 화해라는 단어는 아름답지만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폭력적으로 들릴 수도 있는 법이다.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그런 언어를 사용할 때가 그렇다. 그러한 단어들이 본래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먼저 종교인들이 다른 이들의 영혼을 옭아매기 위해 발설하는 계율화된 언어, 강자들이 약자들을 길들이기 위해 사용하는 언어, 신앙을 빙자하지만 자기 욕망에 복무하는 이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부정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언어를 구체적인 상황 속에 놓아보아야 한다. 


바바라는 아주 섬세하게 그런 작업을 수행했다. 스스로 빼어난 신학자이면서도 그는 목회적 상황 속에서 전통적 신앙 언어가 잉태된 곳, 곧 인간 경험의 심연을 통찰한다. 눈 밝은 이에게 하찮은 현실은 없다. 공중에 나는 새 한 마리, 들에 핀 풀꽃 한 송이 속에서도 하나님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이들에게 세상은 무채색의 공간이 아니다. 바바라는 망각의 심연으로 가라앉을 수도 있는 일상적인 일들 속에서 신적 메시지를 듣는다. 그는 개념어를 사용하기 보다는 이야기를 들려줌으로 우리를 보편적인 경험 세계로 초대한다. 그렇기에 그의 글은 설득력을 갖는다. 


상투어로 변해 버린 신앙 언어를 되살려내는 일이 오늘의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에게 주어진 책임이다. 사람들이 한사코 외면하고 싶어하는 그 언어들 속에 담겨 있는 급진성에 주목하고, 그 언어가 지시하는 인간 현실의 심연과 대면하도록 하는 것 말이다. 요한은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고 말했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이 현실을 빚어낸다. 이 조그마한 책자에서 바바라는 '죄', '참회', '구원'의 의미를 새롭게 드러냈다. 텅 비어 버린, 낡아버린, 혹은 잃어버린 종교적 언어가 무엇인지를 찬찬히 톺아보고, 그 본래의 심오한 의미를 드러내는 일은 이제 우리의 몫이다. 


목록편집삭제

로데(17 01-05 08:01)
너무 많이 입으로만 말해서 말이 죽어버렸어요.
가슴과 손발로 말하는 우리 되어서 아름다운 하늘나라의 말들을 살려내어요^^
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