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성스러움이 어디 따로 있나요 2018년 12월 05일
작성자 김기석
성스러움이 어디 따로 있나요?

어쩌면 그렇게 변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매년 거행되는 목사 안수식에 참여할 때마다 기시감이 느껴진다. 목사 안수례를 앞둔 후보자들의 긴장된 표정과 안수를 집행하는 목사들의 근엄한 표정, 그리고 꽃다발과 카메라를 든 사람들의 다소 흥분된 모습, 마치 졸업식장을 방불케 하는 광경이다. 안수례를 마친 후 안수를 받은 신참 목사들은 결단의 찬송을 부른다.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찬송가에 집중하기보다는 번번이 그들의 표정을 살피곤 한다. 소명의 무게에 대한 부담과 아울러 그 거룩한 직무에 부름을 받았다는 감격이 표정에 나타난다. 울먹이거나 눈물을 흘리는 이들도 많다. 그 순간은 어떤 욕망도 개입하지 않은 절대 순수의 순간이다. 그들은 ‘나의 일을 함께 하자’는 주님의 부름에 가장 절절한 마음으로 응답하고 있었다. 그들의 안색을 살피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뭉클해진다. 그리고 혼잣소리처럼 말한다. “아, 나는 저 소명의 자리로부터 얼마나 멀어진 것인가?” 자책이라면 자책이고, 탄식이라면 탄식이다. 목회를 오래 하다보니 십자가의 길을 올곧게 걸으리라던 애초의 다짐은 어느새 희미해지고, 하루하루 처리해야 할 수많은 일의 더미 속에 파묻혀 허덕이고 있는 나 자신의 모습이 자꾸 우울하게 상기되기 때문일 것이다.

혁명적이었던 그 절대와의 입맞춤 이후 우리가 마주해야 하는 것은 지루한 일상이다. 짜릿했던 사랑의 기억은 희미해지고, 소명은 루틴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에바그리우스가 말했던 아케디아(akedia)가 우리를 확고하게 사로잡는다. 마음의 평정을 잃어버린 상태인 아케디아는 ‘지금 이 순간에 머물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소명은 늘 새롭게 갱신되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 몸과 마음은 그런 창조적 긴장보다는 관습에 기댄 채 살기를 갈망한다. 사실 그것은 갈망이라기보다는 세월에 자기를 내맡기는 것이다.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카리스마의 루틴화(routinization of charisma)에 대해 말했다.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특별한 재능을 뜻하는 카리스마는 일상어법에서 어떤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경이로운 끌림의 요소를 이르는 말로 사용된다. 사실 그것은 리더와 추종자의 인격적 관계에서 발생한다. 문제는 리더의 존재가 사라지거나, 그의 존재에 드리웠던 광휘가 걷히는 순간 카리스마는 쉽게 사라지고 만다. 그래서 사람들은 시내산에서 내려온 모세가 광채 나는 얼굴을 수건으로 가린 것처럼 카리스마를 제도화한다. 그것이 바로 카리스마의 루틴화이다. 목사와 장로의 ‘안수례’, 목사들이 입는 성의, 법관들이 입는 법복이 그 한 예이다.

비행기에서 입국을 위한 서류를 작성할 때마다 잠시 망설이곤 한다. 목사라고 쓸까, 종교인이라고 쓸까, 성직자라고 쓸까?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무의식 속에 잠겨 있던 소명에 대한 생각이 재빠르게 소환된다. 차마 내 손으로 ‘성직자‘라고 적지는 못한다. 그 단어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는 삶의 부박함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성스러운 직무를 뜻하는 성직은 오직 목회자에게만 귀속되는 단어일까? 꽤 많은 목회자들이 교회와 관련된 일 이외의 일을 하는 것은 부르신 분에 대한 불충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생활이 어려운 목회자들 가운데는 부득불 생업을 갖는 이들도 많지만, 아무리 어려워도 그런 일은 할 수 없다고 손사래를 치는 이들도 있다. 대체 거룩함이란 무엇일까?

유다인들은 선민이라는 자부심을 품고 살았다. 시내산 계약을 통해 받은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이라는 소명이야말로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그들을 지켜낸 자부심의 근원이었다. 문제는 거룩함이 다른 이들과 자기들을 가르는 차이로 작동할 때이다. ‘우리는 그들과 다르다’는 생각이 내면화될 때 소명은 특권이 되고 만다. 마커스 보그는 1세기의 유대 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것이 ‘거룩의 정치학’이라 명명했다. 그가 말하는 정치학이란 사람들 사이에 미세하게 작동하는 권력관계를 이르는 말이다. 거룩의 정치학은 의인과 죄인, 거룩한 것과 속된 것, 유대인과 이방인, 남자와 여자를 가른다. 가름은 ‘우리’와 ‘그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장벽을 설정한다. 장벽이 높아갈수록 장벽 너머의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면 상상이 시작된다. 그들은 불길하고 더럽고 위험하다는 생각이 확고히 그들을 사로잡는다. 그들에 대한 혐오가 커질수록 ‘우리’의 결속은 확고해진다. 그들은 누군가를 혐오하고 수치심을 안겨줄 수 있다는 사실이 주는 저열한 쾌감을 즐긴다.

예수는 그런 가름의 세계에 머물지 않았다. 당시의 종교 문화가 만들어놓은 그 가상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그 둘이 소통하도록 만들었다. 세상의 모든 아픔과 슬픔을 자기 속으로 품어안는 예수에게 그 경계는 무의미했기 때문이다. 마커스 보그는 예수의 그러한 실천을 ‘자비의 정치학’이라 명명했다. ‘거룩‘은 나누지만 ‘자비’는 품어 안는다. 경계선 저편의 사람들을 품어 안는 행위는 위계화된 질서를 무너뜨리는 일로 받아들여졌고, 예수는 결국 공공의 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앨버트 놀런(Albert Nolan)은 <그리스도교 이전의 예수>라는 책에서 예수와 바리새인들의 차이를 한 문장으로 요약했다. 바리새인들은 권위를 진리로 삼았지만 예수는 진리를 권위로 삼았다는 것이다. 권위를 뜻하는 ‘엑수시아’는 ‘~로부터’를 뜻하는 ‘엑스’와 ‘본질’을 뜻하는 ‘우시아’가 결합된 단어이다. 진정한 권위란 본질로부터 나온다는 뜻일 것이다. 왜곡된 권위는 ‘본질(우시아)로부터 벗어나는 것(엑스)‘과 관련된다.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의 마음, 뜻, 의지와 접속하는 것이다. 인간의 그릇된 욕망은 그 접속을 방해한다. 시냅스(synapse)가 약화될 때 뉴런과 뉴런 사이의 정보교환이 이루어지지 못하듯, 욕망에 사로잡힌 영혼은 영혼의 시냅스가 약화되어 하나님의 뜻과 원활하게 접속하지 못한다. 

레위기 19장 2절은 성결한 백성으로 살아야 할 백성들에게 주어진 정언명령이다. “너희의 하나님인 나 주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야 한다”(레19:2). 성경이 가르치는 진정한 거룩함이란 어떤 것일까? 성경을 많이 읽고, 철야 기도를 하고, 금식 기도를 하고, 착실한 헌금생활을 하는 등의 실천일까? 물론 그런 요소를 배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성결법전은 거룩함에 대한 우리 생각을 바꿀 것을 요구한다. 부모 공경, 안식일 준수, 우상 숭배 금지, 올바른 희생 제물의 봉헌에 대한 요구에 이어 등장하는 것은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배려이다. 밭에서 추수 할 때 밭의 한 모퉁이를 남겨두어 그들 가운데 몸 붙여 살고 있는 고아, 과부, 나그네들이 그것을 누리도록 해야 한다. 그것은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명령이다. 이웃 관계에서도 자기 보호를 위한 장치를 갖지 못한 이들에게 피해를 입히지 말아야 하고, 품꾼의 품삯을 떼먹지 말아야 한다. 재판관들은 법에 따라 공정한 재판을 해야 한다. 거룩한 삶을 가로막는 가장 중요한 적은 과도한 이익에 대한 집착이다.

거룩함 혹은 성스러움은 특정한 종교적 실천이 아니라 일상의 삶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들의 삶은 정성스러워야 하고, 자기 앞에 현전하여 있는 모든 대상들을 존중해야 한다. 성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그 마음을 구현하며 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성직자가 아닐까? 성직은 특정한 직업이나 직책을 일컫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매 순간 선택하는 정성스러운 삶을 통해 발생하는 사태이다. 속됨과 거룩함은 처음부터 구별된 것이 아니다. 가장 속스러운 일도 거룩함을 드러내는 통로가 될 수 있고, 가장 거룩해 보이는 일도 속됨을 드러내는 통로가 될 수도 있다.

사크라멘툼 문디(Sacramentum Mundi), 세상의 성사를 가리키는 말이다. 식탁에 오르는 빵과 포도주가 성찬의 도구가 되는 것처럼, 자기 삶을 통해 하나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사람 그리고 일상 속에 깃든 신적 광휘를 읽어내는 눈을 가진 사람, 바로 그 사람이야말로 거룩한 사람이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성도의 공동생활>에서 “그리스도인이라면 수도원적 은둔 생활이 아니라, 원수들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한다. 경제가 삶을 과잉 대표하는 이 시대에 견결하게 하늘에 잇댄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야말로 거룩함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징표라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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