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죽음에 이르는 욕망3 2018년 12월 05일
작성자 김기석
라반의 갑질

물에 닿으면 제일 먼저 젖어드는 곳
한 사람의 몸과 마음에는 시간 여행자로 살아가는 동안 만난 이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들의 말과 행동, 표정과 몸짓은 어떤 형태로든 우리 정신을 만드는 조형의 칼날 역할을 한다는 말이다. 초록빛으로 일렁이는 숲을 통과한 사람에게서 청량한 숲 향기가 나는 것처럼, 맑고 깨끗한 영혼들과 만나온 이들에게서는 청신한 향기가 난다.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물론 뻘밭에 핀 연꽃처럼 악조건 속에서도 아름다운 향기를 머금고 살아가는 이들도 있다. 어떤 경우도 일반화시킬 수는 없는 일이다. 정현종은 ‘비스듬히’라는 시에서 모든 생명은 어디 기대지 않으면 살 수 없다고 노래한다. “우리는 기대는 데가 많은데/기대는 게 맑기도 하고/흐리기도 하니/우리 또한 맑기도/흐리기도 하지요.”1) 서로 기댄 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 존재의 특성을 드러내기 위해 철학자 하이데거는 ‘서로 함께 하는 존재 Mit-einander-Sein’라는 용어를 만들었던 것이 아닐까? 인간은 철저히 공속된 존재이다. 너 없이는 나도 없다는 말이다.

가끔 나의 ‘있음‘에 대해 놀랄 때가 있다. 일상의 분주함 속에서는 좀처럼 떠오르지 않지만, 홀로 있는 시간, 혹은 어떤 한계상황에 직면했을 때, 지금 여기 있는 나는 없을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아득해지기도 한다. 어떤 필연이 혹은 어떤 우연이 나를 이 자리에 있게 했을까? 스스로 믿음이 좋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모든 생명의 근원과 목표는 하나님이라고 말함으로 질문자를 무색하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자기 존재에 대한 이런 의문은 시간에 떠밀리며 사는 동안 하늘을 잊고 살아온 이들을 부르는 존재의 소환장이 아닐까?

감수성 예민한 시인 나희덕은 문득 자기 존재의 근원에 대한 궁금증에 사로잡혔던 것 같다. 그래서 이런 질문을 던진다. “나는 무엇으로부터 찢겨진 몸일까”. 그는 자신이 세상의 일부분임을 잘 안다. 그래서 자기가 찢겨져 나온 그 전체를 그리워한다. 시인은 “유난히 엷고 어룽진 쪽을/여기에 대보고 저기에도 대본다”. 강하고 분명한 것이 아니라 엷고 어룽진 쪽을 여기저기 대보는 것은 시인이 연약함과 아픔에 예민한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귀퉁이가 찢겨진 열무 잎에도 대보고, 흰누에나방의 날개에도 대보고, 헝겊 조각에도 대보고, 어린 나뭇가지에도 대보고, 바닷물에 절여진 해초 뿌리에도 대보고, 조개의 둥근 무늬에도 대보고, 잠든 딸의 머리띠에도 대보고, 남편의 옷에 묻어온 개미 한 마리의 하염없는 기어감에 대보기도 한다. 시인은 자기 존재에 대한 물음에 형이상학적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비근한 일상 속에 깃든 어떤 기척에 주목하려 한다. 그러나 존재의 의문은 쉽게 풀리지 않는다. “물에 닿으면 제일 먼저 젖어드는 곳이 있어/여기에 대보고 저기에도 대보지만/참 알 수가 없다/종소리가 들리면 조금씩 아파오는 곳이 있을 뿐”.2) 존재의 뿌리를 느낄 수 있는 곳이 어딘지 도무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시인은 물에 닿으면 제일 먼저 젖어드는 곳, 종소리가 들리면 조금씩 아파오는 곳이야말로 생의 비의가 드러나는 통로인지도 모른다고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작고 여리고 아픈 것들에 주목할 때 우리 존재의 의미가 드러난다는 말일까?

그러나 악한 세상은 작고 여리고 아픈 것들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 각자도생의 살풍경 속에서 그들은 언제나 억압과 착취에 시달린다. 역사 속에서 그들은 강자의 폭력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그들은 존엄한 인격이 아니라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언제든 동원할 수 있는 수단 혹은 반(半)인간(half-person)으로 간주되었다. 하나님은 이런 세상의 흐름을 끊기 위해 역사에 개입하신다. 구원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광야길에서 홀로 선 사람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선조인 야곱은 태어날 때부터 약자였다. 형 에서의 발뒤꿈치를 잡고 태어난 그는 유목 문화에 적합한 신체 조건을 갖추지도 못했고, 호방한 성격을 갖지도 못했다. 에서는 거친 광야를 누비며 살았지만, 야곱은 집 근처를 맴돌며 살았다. 에서는 붉은 콩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았다 하여 불신앙의 대명사처럼 여겨진 반면, 야곱은 장자권을 소중히 여긴 것으로 인해 신앙적인 인물로 묘사되기도 한다. 정말 그런가? 부재하는 것을 사모하면서도 이미 자기 손에 있는 것은 귀히 여기지 않는 게 인간의 버릇이다. 이미 손에 든 것은 당연의 범주에 속한다. 당연의 세계에는 감사가 없다. 야곱은 자기에게 없는 것을 손에 넣는 일에 익숙하다. 약자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런 기민함과 약삭빠름이 필요한 것일까? 눈이 어두운 아버지 이삭을 속여 에서에게 돌아갈 축복을 가로채기도 했다. 물론 어머니와의 공모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의 기민한 행동은 형 에서 속에 잠들어 있던 가인을 깨웠다. 에서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곡하는 기한이 지나면 야곱을 죽이겠다고 다짐한다. 형제간의 갈등은 창세기의 일관된 주제이다. 창세기는 가인과 아벨, 이스마엘과 이삭, 에서와 야곱, 요셉과 그 형제들의 갈등과 화해 이야기가 중심축을 이룬다. 화해가 일어나기까지는 긴 격리의 시간이 필요하다. 

야곱은 부득불 고향과 아버지 집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아브람처럼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결과가 아니라, 다른 이의 가슴에 피멍이 들게 한 까닭에 그는 도망자처럼 고향을 등지게 된 것이다. 광야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 야곱이 광야 길을 가야 한다. 브엘세바에서 외가가 있는 밧단아람까지는 무려 900km에 이른다. 하루 30km 씩 걸어도 30일 걸린다. 도처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광야를 허위단심으로 가야 한다. 광야, 그곳은 사람들을 단련시키는 곳이다. 하루 몇 리터의 물과 음식으로 버텨야 하는 곳, 그늘조차 찾기 어려운 광야 길을 가기 위해서는 자기 속에 있는 유약함과 감정의 물기를 다 빼야 한다. 노량으로 걸을 수 있는 길이 아니라, 목숨을 걸고 걸어야 하는 길이다. 지금까지는 어머니의 판단에 따라 비주체적으로 살아왔다면 이제는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해야 한다. 생과 죽음 사이에 걸린 외줄 위에서 그는 위태로운 균형을 찾아야 했다. 척박하기 이를 데 없는 광야는 생략하는 법을 가르친다. 생략하고 또 생략한 후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 자기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에 대한 자각, 그리고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이다.

야곱은 루스에 이르러 돌베개를 베고 누워 자다가 하나님을 만난다. 가장 외롭고 쓸쓸한 시간, 홀로 두려움과 마주서야 하는 시간이 아니라면 언제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겠는가? 야곱은 하나님을 만난 그곳을 ‘하나님의 집’ 곧 벧엘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곳에서 야곱이 만난 것은 특정한 장소에 터를 잡고 있는 지역 신이 아니라, 그 백성들의 운명 속에 뛰어드시는 하나님이었다. 언제나 함께 있고, 지키고, 이끌어 주시는 하나님 말이다. 야곱은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부었다. 그 기둥은 벧엘 어딘가에 있을 테지만, 사실은 그 기둥이 우뚝 선 곳은 야곱의 마음이었다. 그 기둥으로 인해 그는 마침내 독립의 사람, 선 사람으로 탈바꿈하고 있었던 것이다. 

프레카리아트
성경은 야곱이 브엘세바를 떠나 벧엘에 이르러 하나님을 만난 이야기를 간략하게 서술한 후에 곧 바로 그가 밧단아람에 도착했다고 말한다. 그 여정 가운데서 일어난 일은 전혀 기술되지 않았지만, 광야 길을 발밤발밤 걸어가는 동안 그는 어떤 시련에도 굴하지 않는 존재로 거듭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당도한 밧단아람, 외삼촌 라반은 생질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와서 그를 영접한다. 지극한 환대이다. 마침내 고난의 행군이 끝난 것일까? 한 달이 지나자 라반은 야곱에게 말한다. “네가 비록 내 생질이나 어찌 그저 내 일을 하겠느냐 네 품삯을 어떻게 할지 내게 말하라”(창29:15). 라반의 제안은 합리적이다. 야곱은 즉시 “내가 외삼촌의 작은 딸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에게 칠 년을 섬기리이다”(창29:18). 라반도 그런 제안을 기쁘게 받아들인다. 모든 것이 순조롭다. 곱고 아리따운 라헬을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야곱은 칠 년을 며칠 같이 여기며 살았다. 마침내 기한이 차자 라반은 사람들을 불러 모아 큰 잔치를 베풀고는, 저녁이 되자 레아를 야곱에게 들여보낸다. 첫날밤을 치른 야곱은 아침이 되어서야 자기 곁에 있는 여인이 레아임을 알아본다. 항의해 보지만 현실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야곱은 비로소 자기가 난민의 처지임을 절감했을 것이다. 노련한 라반은 “언니보다 아우를 먼저 주는 것은 우리 지방에서 하지 아니하는 바”(창29:26)라고 말하며 초례 기간인 이레가 지나면 라헬도 그에게 줄 터이니 자기를 위해 칠 년 동안 섬기라고 휘갑친다. 말은 무작하지 않지만 위력에 의한 강요나 마찬가지이다. 야곱은 가족의 일원이라기보다는 일종의 프레카리아트precariat로 전락했다.3) 그는 불안정한 노동 상황 속에서 자기 선택권을 잃어버렸다. 그는 식민화된 존재로 거기 머물 수밖에 없다.

일찍이 야곱은 에서의 장자권을 속여 빼앗고 형이 받아야 할 축복까지 가로챔으로 형과 동생의 관계를 뒤집었다. 그런데 지금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레아와 라헬이 뒤바뀐 것이다. 속이는 자가 속임을 당했다. 심는 대로 거둔다는 말이 이런 것일까? 라헬을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야곱은 라반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야곱은 마음을 안추르며 칠 년을 더 일했다. 그 사이에 레아를 통해 아들들이 여럿 태어났다. 시녀들을 통해서도 아이들이 태어났고 마침내 라헬도 아들을 낳았다. 야곱은 이제 고향을 돌아가고 싶어졌다. 그래서 라반에게 자기 바람을 고한다. “나를 보내어 내 고향 나의 땅으로 가게 하시되 내가 외삼촌에게서 일하고 얻은 처자를 내게 주시어 나로 가게 하소서 내가 외삼촌에게 한 일은 외삼촌이 아시나이다”(창30:25b-26). ‘내 고향’, ‘나의 땅’이라는 표현 속에 담긴 객지 생활의 곤고함이 저절로 느껴진다. 

누구나 자기 삶의 자리를 한 번쯤 떠나기를 희구한다. 신경림 시인은 “아주 먼 데./말도 통하지 않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그 먼 데까지 가자고.//어느날 나는 집을 나왔다”고 노래한다. 세상의 모든 것이 낯설어질 때까지 산을 넘고 강을 건너가 마침내 짐을 풀어보지만, 세상은 하나도 낯설지 않다. 찾아들어간 집도 낯이 익고, 마주치는 사람들도 익숙하기만 하다. 수십 년 세월이 흘러 시의 화자는 혼잣소리처럼 말한다. “어쩌면 나는 내가 기껏 떠났던 집으로/되돌아온 것은 아닐까./아니, 당초 집을 떠난 일이 없는지도 모르지.“4) 그래서 그는 다시 집을 나선다. 익숙하지만 낯선 세상을 떠난다는 것, 그것은 삶의 주체가 되려는 움직임일 것이다.

야곱은 일가를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라반 곁에서 부자유를 느낀다. 하지만 라반은 도무지 야곱의 마음을 헤아릴 생각이 없다. 다만 그의 부재가 가져올 손실에만 마음을 쓴다. 의도한 것이든 의도하지 않은 것이든 야곱은 수단에 불과하다. 야곱은 용기를 냈다. 더 이상 투명한 존재로 취급받기를 거절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반은 야곱을 행위의 주체로 인정할 생각이 없다. “여호와께서 너로 말미암아 내게 복 주신 줄을 내가 깨달았노니 네가 나를 사랑스럽게 여기거든 그대로 있으라 또 이르되 네 품삯을 정하라 내가 그것을 주리라”(창30:27-28). 엄밀하게 보자면 이것은 외삼촌이라는 지위의 남용이다. 부드러운 제안처럼 들리지만 실은 야곱의 요구를 거절한 것이니 말이다. 야곱에게는 다른 선택의 가능성이 별로 없다. “지위와 특권을 분배하는 구조를 내버려둔 채, 자신의 지위를 남용하는 사람들에게 원칙을 지키라고 호소하는 것만으로는 모욕이라는 공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것”5)이라는 인류학자 김현경의 말도 이런 지점을 가리키고 있다.

책임적 존재로 산다는 것
라반의 태도는 아브람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조카 롯과 더불어 불확실한 삶 속으로 성큼 들어섰던 아브람은 떠돌이 생활 끝에 벧엘과 아이 사이에 장막을 친다. 그러나 늘어난 양과 소로 말미암아 동거하기 어려워지고, 목자들 사이의 다툼 또한 잦아지자 아브람은 롯에게 분가를 제안한다. 그리고 롯에게 먼저 선택권을 준다.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 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창13:9). 자기에게 위임된 책임을 제대로 감당하기 위해 우월적 지위와 그에 따른 선택 가능성을 포기할 때 평화가 깃든다. 아브람은 이익 동기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라 의의 동기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평가받는 사람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그가 아닌 아브람을 통해 구원사를 열어가셨을까? 둘은 모두 순종의 챔피언들이다. 주께서 명하시면 둘은 지체 없이 그 명령을 수행했다. 둘을 가르는 한 가지 차이점은 타자에 대한 책임의식이다. 노아는 자기 시대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타락한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방주를 만들었을 뿐이다.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시려 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하나님 앞에 서서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창18:23) 여쭙는다. 그리고 과감하게 그들을 구하기 위한 협상에 나선다. 의인 열 명이 없어 소돔은 망하고 말았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그런 태도를 귀히 보셨음에 틀림없다. 

라반은 아브라함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 이익의 확보이지 자기 삶의 주체가 되려는 야곱의 꿈이 아니다. 외삼촌이 “네 품삯을 정하라“고 말하고는 있지만 야곱은 그 말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는 라반에게 역제안을 한다. “오늘 내가 외삼촌의 양 떼에 두루 다니며 그 양 중에 아롱진 것과 점 있는 것과 검은 것을 가려내며 또 염소 중에 점 있는 것과 아롱진 것을 가려내리니 이같은 것이 내 품삯이 되리이다”(창30:32). 라반은 그 제안을 받아들인 후 즉시 자기 이익을 지킬 조치를 시행한다. “숫염소 중 얼룩무늬 있는 것과 점 있는 것을 가리고 암염소 중 흰 바탕에 아롱진 것과 점 있는 것을 가리고 양 중의 검은 것들을 가려 자기 아들들의 손에 맡기고 자기와 야곱의 사이를 사흘 길이 뜨게 하였”(창30:35-36)던 것이다. 친족에 대한 의무 혹은 어른다움은 이렇게 스러지고 말았다. 

하지만 야곱은 그런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모종의 조치를 통해 외삼촌의 가축 가운데 튼실한 것들을 자기 소유로 확보한다. 그 행동은 매우 주술적이어서 오늘의 관점에서 이해하기는 어렵다. 껍질을 벗겨 흰 무늬를 낸 가지를 짝짓기 하는 양 앞에 세운다고 하여 양들이 얼룩얼굴하고 점이 있고 아롱진 것을 낳는다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것은 일종의 유머일까? 강자들의 폭력에 저항하기 위해 약자들 사이에 전승되는 이야기 말이다. 이야기는 꼭 논리적이거나 합리적이지 않아도 괜찮다. 어린 시절에 우리가 듣고 자란 이야기를 팩트로 믿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민담과 전설을 통해 아이들은 삶의 복잡성과 삶의 곤경을 헤쳐 나가는 민중적 지혜를 배운다. 이야기는 진실의 전달 매체인 것이다.  브루노 베텔하임은 “옛이야기의 비현실적인 면(편협한 합리론자들이 반대하고 나서는)이 바로 옛이야기가 지닌 가장 중요한 장치”6)라고 말한다.

셈법이 다를 때
야곱의 꾀로 인해 약한 것은 라반의 것이 되고 튼튼한 것은 야곱의 것이 되었다. 속이는 자가 더 크게 속이던 자를 다시 속인 셈이다. 결국 야곱은 번창하여 양 떼와 노비와 낙타와 나귀를 많이 거느리게 되었다. 라반의 아들들은 묘하게 돌아가는 사태를 수수방관하지 않았다. 그들은 고종 사촌인 야곱이 아버지의 모든 소유를 빼앗아 자기 소유를 불렸다고 판단했다. 지난 날 아버지가 야곱에게 한 부당한 행위에 대한 반성은 물론 없다. 라반도 안색이 달라졌다. 이전에 노련하게 야곱을 달래던 여유가 사라졌다. 야곱은 결국 떠날 때가 다가왔음을 깨닫고는 아내들을 자기 양 떼가 있는 들로 불러다가,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자기의 계획과 입장을 털어놓는다. “그대들도 알거니와 내가 힘을 다하여 그대들의 아버지를 섬겼거늘 그대들의 아버지가 나를 속여 품삯을 열 번이나 변경하였느니라“(창31:6-7a). 이 고백 속에 야곱이 그 동안 억눌러왔던 씁쓸한 감정이 다 녹아들어 있다. 결국 야곱은 가족들을 솔가하여 고향으로 돌아간다. 
야곱의 말과 행동은 정당한가? 적어도 야곱의 입장에서는 그러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외삼촌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라반과 그 아들들의 생각은 조금 다를 수 있다. 그들은 야곱이 불의한 속임수로 자기들의 재산을 강탈했다고 생각한다. 이런 시차가 발생하는 것은 서 있는 자리가 다르기 때문이다.

2008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르 클레지오가 서울을 배경으로 하여 쓴 소설의 주인공은 ‘빛나’라는 인물이다. 전라도 어촌 마을 출신인 그는 딸이 더 나은 교육을 받기 원하는 부모들의 염원을 품고 서울로 유학을 온다. 지낼 곳이 마땅치 않았지만 다행히 고모가 그를 품어준다. 청소년기를 지나고 있는 사촌 동생을 보살펴주는 것이 그에게 기대되는 역할이었다. 숙제도 봐 주고, 방을 정리하거나, 집안일을 돕는 것도 그가 해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사촌 동생은 도저히 통제 불능의 아이였다. 한바탕 소란이 벌어지면 고모의 비난도 따라왔다.

“배은망덕한 년 같으니. 너한테 얼마나 잘했는데, 네가 서울에서 살 수 있게 얼마나 도와줬는데, 여기가 아니었다면 너는 길거리에서 거지처럼 살았을 게다. 이 집이 싫으면 고기잡이하는 전라도로 돌아가지 그러니. 시장에서 생선 비늘 긁고 내장이나 따면서 살란 말이다.”7)

어쩌면 라반의 마음이 이랬던 것이 아닐까 싶다. ‘고향에서 말썽을 부리고 도망 나온 녀석을 살뜰하게 거둬주고, 딸들까지 줬건만, 이렇게 뒤통수를 치다니.’ 야곱의 마음은 아내들에게 한 속에 오롯이 담겨 있다. 그는 가족 간의 연대감을 지켜야 할 의무를 진 외삼촌으로부터 종처럼 취급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서로의 셈법이 다르기에 발생하는 문제이다. 그러나 양비론으로 이 사태에 접근해서는 안 된다. 라반의 문제는 무엇일까?

경제학자들이 인간이 본성을 이해하기 위해 한 연구 가운데 독재자 게임Dictator game이라는 게 있다. 학자들은 실험 참가자들을 갑과 을로 나눈다. 10만원의 돈을 받은 갑은 그 중 얼마를 을에게 줄 것인가를 선택해야 한다. 을은 아무런 선택도 할 수 없다. 실험 결과 갑에 속한 이들 가운데 60% 정도는 기꺼이 을에게 돈을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평균 액수는 대략 가진 돈의 20% 정도였다. 학자들은 이 게임 결과를 가지고 인간에게 이타적인 면이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들은 게임의 룰을 바꾸어 보았다. 일종의 빼앗기 게임이다. 을은 1만 원을 이미 갖고 있다. 갑은 본인이 가진 10만 원 중의 일부를 을에게 줄 수도 있고 을이 가진 1만 원을 빼앗을 수도 있다. 이번에도 을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결과는 놀라웠다. 먼저 했던 독재자 게임에서 돈을 나눠 가졌던 다수의 갑들이 두 번째 게임에서는 을의 돈을 빼앗는 결정을 했던 것이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처럼 돌변하는 이유는 프레임이 우리의 의사 결정과 행동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행동경제학에서 프레이밍 효과framing effect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독재자 게임에서 실험 참가자들은 이타심을 평가받는다는 인식을 하고 그에 순응합니다. 반면 두 번째 게임에서는 빼앗는 행위가 허락되었기 때문에, 죄책감 없이 상대방의 돈을 빼앗는 결정을 합니다. 빼앗는 행동이 허락되지 않았다면 조금만 주고 말았을 수도 있습니다. 갑의 욕망은 ‘갑질’ 할 수 있는 위치에 선 순간 터져 나올 수밖에 없다는 분석입니다. 자신이 을의 위치에 있을 때에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갑질 할 수 있는 위치에 오르면 갑의 욕망으로부터 자유롭기가 쉽지 않습니다. 갑을관계 자체가 구조악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8)

이런 실험 결과를 라반의 경우에 대입해 볼 수 있겠다. 그는 선의로 조카를 보살폈다고 생각했지만, 갑의 위치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자신이 구조악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는 눈을 감았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싶은 욕망이 그의 눈을 가려 정의와 공의의 원리를 외면하게 했다는 말이다. 양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가는 목자의 마음을 내면화하고 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신앙생활이란 욕망의 인력에 끌리는 자신의 모습과 한계를 직시하면서, 하나님의 은총 앞에 자신을 바치는 행위가 아니던가? 하나님의 마음과 접속한 이들의 으뜸 되는 특질은 공감과 연민이다. 처음부터 라반이 야곱을 수단으로 삼았던 것은 아닐 것이다. 오랜만에 만난 조카에 대한 최초의 반가움이 스러지고 난 후부터 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조카를 수단으로 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익숙해진다는 것은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그렇기에 자꾸만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 가져가야 한다. 13세기 페르시아의 신비주의 시인인 루미는 “소용돌이치는 버릇이 물에 들었거든/바닥을 파서 바다까지 길을 내어라”9) 하고 권한다. 마찬가지다. 우리 몸과 마음에 밴 나쁜 버릇을 고치기 위해서는 우리를 하나님께 돌려보내야 한다. 라반은 먼 데 있지 않다. 어쩌면 우리 자신이 누군가에게 라반인지도 모른다. 


정현종, <견딜 수 없네>, 시와시학사, ‘비스듬히’ 중에서
나희덕의, <어두워진다는 것>, 창작과비평사, ‘흔적’ 중에서 
프레카리아트는 폴란드 출신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이 제안한 개념으로 프롤레타리아와 ‘불안정하다’는 뜻의 프리캐리어스 precarious를 결합시킨 단어이다. 그들은 “불안정한 사회적 지위에 위협을 느끼고, 일자리·소득·재산 등을 잃거나 좌천·배제·거부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들”이다. (지그문트 바우만, 스타니스와프 로비레크 지음, <인간의 조건>, 동녘, 2016년 10월 20일, p.73) 
신경림 시집, <사진관집 이층>, 창비시선370, ‘먼 데, 그 먼 데를 향하여’ 중에서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문학과지성사, 2016년 1월 12일, p.165
브루노 베텔하임, <옛이야기의 매력1>, 김옥순, 주옥 옮김, 시공주니어, 2012년 2월 5일, p.43
J.M.G. 르 클레지오, <빛나―서울 하늘 아래>, 송기정 옮김, 서울셀렉션(주), 2017년12월 11일, p.11
8. 김재수, <99%를 위한 경제학>, 생각의힘, 2016년 10월 26일, p.19-20
9. 루미, <루미 詩抄> 이현주 옮김, 도서출판 선우, 1999년 6월 1일, p.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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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은희(19 01-07 10:01)
진심 공감했습니다. 저도 보잘것 없는 궁색의 일상을 보내고 있으나 하나님이 보내주신 사람들과 계속 연민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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