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컬럼

제목 [목회서신] 우리에게는 날개가 있습니다 2020년 04월 17일
작성자 김기석


우리에게는 날개가 있습니다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당합니다.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요, 따로 따로는 지체들입니다.(고전12:26-27)

주님의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모든 가정에 임하시기를 빕니다.

벌써 4월 중순을 지나고 있습니다. 이제 내일이면 벌써 곡우 절기가 시작됩니다. 농가월령가는 청명 곡우 절기의 풍경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춘일春日(봄날)이 재양載陽(비로소 따듯해짐)하여 만물萬物이 화창和暢하니, 백화百花는 난만爛漫(꽃이 만발하여 흩어진 모양)하고 새 소리 각색各色이라. 당전堂前(대청 앞)의 쌍雙 제비는 옛집을 찾아오고, 화간花間의 범나비는 분분紛紛히(뒤섞여서 어지러이 나는 모양) 날고 기니, 미물微物도 득시得時(제때를 얻음)하여 자락自樂(스스로 즐김)함이 사랑홉다”. 한자투여서 읽기 괴로우시겠지만 그래도 글의 리듬을 맛보시라고 그대로 살려두었습니다. 봄날의 흥겨움이 여실히 느껴지는 나날입니다.

전도서 기자는 “하나님은 모든 것이 제때에 알맞게 일어나도록 만드셨다”(전3:11)고 말합니다. 저는 삶이 곤고하다고 느낄 때마다 이 구절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때를 바라보고 또 기다립니다. 그 때에 깃든 아름다움을 보기 위해 노력합니다. ‘알맞게’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야페(yapheh)는 ‘적당하게’, ‘아름답게’, ‘어울리게’라는 뜻을 내포합니다. 하나님의 질서 안에서 살아갈 때 삶의 비애는 줄어듭니다. 투덜거림을 그칠 때 명랑한 삶이 시작됩니다. “이제 나는 깨닫는다. 기쁘게 사는 것, 살면서 좋은 일을 하는 것, 사람에게 이보다 더 좋은 것이 무엇이랴!”(전3:12)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현실이 녹록지 않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는 분들도 계시고, 감염에 대한 공포 때문에 두문불출하고 있는 분들도 계십니다. 뜻하지 않는 질병으로 어려움을 겪는 교우들도 계십니다. 어려운 시절이라 피차 조심하느라 알리지도 않고 노심초사하셨던 분들도 계십니다. 코로나-19 위기가 조속히 지나가기를 바라지만 전문가들은 성급한 낙관론을 경계하는 분위기입니다. 이것을 ‘새로운 일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앞으로 정말 많은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할 때입니다.

다행히 우리나라는 확진자들이 줄어드는 추세지만, 다른 나라의 형편은 그렇지 않습니다. 세계는 연결되어 있기에 우리는 여전히 비상상황 속에 있어야 합니다. 미국의 경우 코로나-19로 인해 사망한 사람들 가운데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많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바이러스는 사람을 가리지 않지만, 감염 이후의 상황은 사람에 따라 사뭇 다르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의료 보험이 없는 사람들은 속절없이 죽음의 위기에 내몰리고 있습니다. 의료 시스템이 취약한 나라, 사회적 안전망이 부실한 나라는 정말 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지구촌에 있는 인구 밀집 지역은 대개 가난한 이들이 많이 삽니다. 코로나-19가 그곳을 휩쓸면 정말 재앙적 상황을 맞이할 수도 있습니다. 눈 밝은 이들은 이런 위기 상황 가운데서 억압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정치 세력이 부상할 가능성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행스럽게도 재앙적 상황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안도의 한숨만 내쉬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숨결이 깃든 지구가 지금 신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공들여 지으신 작품들이 위태로운 벼랑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코로나-19 이후에 종교계에도 큰 변화의 바람이 불 것이라고 말합니다. 신앙생활도 어떤 의미에서는 ‘습관’과 무관하지 않은데,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그런 생활에 익숙해질 거라는 우려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1945년 이후에 미국에서 종교 부흥 운동이 일어났던 것처럼, 각박하고 힘겨운 세태 속에서 정신적 피난처를 찾는 이들이 늘어날 거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교회가 쇠퇴할 것인가, 부흥할 것인가’도 물론 매우 중요한 관심사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뜻을 바르게 이해하고,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몸에 있는 지체들 하나하나가 다 소중합니다. 그 지체들이 저마다의 역할을 다 잘 감당할 때 교회는 건강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본래 인간은 서로 기대고 살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창세기의 인간 창조 이야기는 ‘네가 있어 내가 있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철학자인 마틴 하이데거는 인간을 가리켜 ‘다자인Da-sein’이라고 설명합니다. 보통 ‘현존재’라는 말로 번역하는데, 사람은 저마다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책임 있는 존재로 살아야 한다는 말일 겁니다. 인간은 또한 ‘서로-함께-존재’입니다. 바울 사도의 편지에서 우리가 자주 발견하는 단어가 ‘서로’입니다. 서로 존경하고, 서로 무거운 짐을 지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 이해하고, 서로 섬기고, 서로 용납하는 것이야말로 사람됨의 본질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많은 분이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써달라고 헌금을 바쳤습니다. 공적으로 다 밝힐 수는 없지만 이미 꼭 필요한 곳에 잘 전달하고 있고, 앞으로도 지속해서 나누려 합니다. 떠들썩하게 이리저리 소문을 내지 않는 것은 받으시는 분들의 마음을 헤아려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시혜자와 수혜자가 갈리는 순간 일종의 권력 관계가 생기게 마련입니다. 그것은 예수적 삶은 아닌 것 같습니다. 주변에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 있다면 조용히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김기림의 시 가운데 ‘바다와 나비’가 있습니다.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 준 일이 없기에/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라는 구절로 시작되는 시입니다. 갓 부화한 나비는 바다를 경험해본 적이 없기에 바다가 무섭지 않습니다. 나비는 푸른 물결을 청(靑)무우밭으로 생각하고 내려앉으려다가 어린 날개를 그만 물결에 적시고는 깜짝 놀랍니다. 삼월의 바다에 꽃이 피지 않아서 나비는 서글펐습니다. 시인은 뭍으로 돌아오는 나비의 허리에 걸린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고 노래합니다.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현실 앞에서 우리는 당혹스러워합니다. 그래도 우리에게는 날개가 있습니다. 짠물에 젖을 때도 있지만 그래도 날아오를 수 있으니 다행입니다. 신앙은 날개입니다. 세상의 중력을 거스르면서 날아오를 수 있도록 해주니 말입니다. 날기를 포기하지 않을 때 우리는 명랑하게 살 수 있습니다. 이제 교회에서 만나 함께 예배드릴 수 있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날을 내다보며 그리움을 달랩니다. 부디 아프지 마시고, 우울함에 빠지지 마시고, 주님과 더불어 열어갈 새로운 세상을 바라보며 오늘을 기쁘게 살아내시면 좋겠습니다.

2020년 4월 18일

김기석 목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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