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7. 바람 그치기를 기다리지 마라
설교자 김기석
본문 전 11:1-6
설교일시 2019/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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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그치기를 기다리지 마라
전11:1-6
(2019/02/17, 주현 후 제6주)

[돈이 있으면, 무역에 투자하여라. 여러 날 뒤에 너는 이윤을 남길 것이다. 이 세상에서 네가 무슨 재난을 만날지 모르니, 투자할 때에는 일곱이나 여덟로 나누어 하여라. 구름에 물이 가득 차면, 비가 되어서 땅 위로 쏟아지는 법. 나무가 남쪽으로나 북쪽으로 쓰러지면, 어느 쪽으로 쓰러지든지, 쓰러진 그 곳에 그대로 있는 법. 바람이 그치기를 기다리다가는, 씨를 뿌리지 못한다. 구름이 걷히기를 기다리다가는, 거두어들이지 못한다. 바람이 다니는 길을 네가 모르듯이 임신한 여인의 태에서 아이의 생명이 어떻게 시작되는지 네가 알 수 없듯이, 만물의 창조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너는 알지 못한다.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부지런히 일하여라. 어떤 것이 잘 될지, 이것이 잘 될지 저것이 잘 될지, 아니면 둘 다 잘 될지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해할 수 없는 삶이라 해도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우수 절기를 앞두고 내린 눈이 참 반가웠습니다. 이른 비와 늦은 비로 은택을 입히시는 주님의 사랑이 우리 삶 곳곳에 배어들기를 빕니다. 농가월령가 정월령에 나오는 한 대목입니다. “일년 豐凶은 測量하지 못하여도 人力이 極盡하면 天災를 면하나니 제 各各 勤勉하여 게을리 굴지 마라. 一年之計 在春하니 凡事를 미리 하라. 봄에 만일 失時하면 終年 일이 狼狽 되네.” ‘인력이 극진하면 천재를 면한다’는 구절을 꼭 붙들고 싶습니다. 삶을 정성스럽게 살아내는 것처럼 소중한 일이 없을 겁니다.

전도서 하면 사람들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구절을 떠올립니다. 자칫 잘못하면 전도서가 허무주의의 교과서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돈도, 명예도, 권세도, 열정도, 이념도, 옳고 그름에 대한 가름도 다 부질없다고 말하는 것 같으니 말입니다. 그런 것들을 얻기 위해 일심으로 달려가는 이들에게 전도서의 가르침은 김 빼는 소리임에 분명합니다. 그러나 전도서의 메시지는 세상사가 다 허망하다는 것 혹은 가치의 상대주의를 가르치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애집하는 모든 일들이 손아귀에 든 모래처럼 빠져나갈 수밖에 없음을 알고 살라는 것입니다. 붙잡지 못할 것을 붙잡으려 인생을 낭비하지 말고,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가능성을 귀히 여기며 살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과거의 화려했던 기억이나 미래의 소망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삶입니다.

세상의 모든 학문을 섭렵한 사람이라 해도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을 다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선한 사람이 어려움을 겪고 악한 이들에게 즉각 벌이 내리지 않는 현실은 부조리해 보입니다. 사람은 ‘알 수 없음‘ 속에서 살아갑니다. 불확실함을 우리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동시에, 삶의 시간을 사랑을 배우는 과정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신뢰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 생각과 다르고, 우리의 길은 하나님의 길과 다릅니다. 이러한 ‘다름’을 인정할 때, 하나님의 생각에 우리 생각을 조율할 때, 하나님의 길에 우리 길을 잇댈 때 우리는 조금씩 이전보다 나은 존재가 될 것입니다. 이런 기본 이해를 바탕에 깔고 오늘의 본문을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신앙은 투자가 아니다
전도서의 거의 말미에 나오는 본문 말씀은 조금 혼란스럽습니다. 특히 1, 2절이 그렇습니다. “돈이 있으면, 무역에 투자하여라. 여러 날 뒤에 너는 이윤을 남길 것이다. 이 세상에서 네가 무슨 재난을 만날지 모르니, 투자할 때에는 일곱이나 여덟로 나누어 하여라”. ‘헛되고 헛되며……‘라고 말하던 전도자의 말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습니다. 무역 투자를 장려하고, 투자의 방법으로 분산 투자를 권고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대목만 따로 떼어놓고 보면 자본주의의 교과서처럼 보입니다. 수수께끼 같아 이해하기 어려운 원문을 번역자들은 해상 무역을 염두에 둔 가르침으로 본 것입니다. 원문의 의미를 풀어서 현대의 독자들이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려는 것까지는 좋았지만, 그 의미를 너무 좁게 한정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제 스승인 민영진 박사님이 들려주신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성서공회의 총무로서 성서번역을 책임지고 있을 때였는데, 하루는 어떤 사람이 당신 방에 들어오더니 다짜고짜 전도서 11장 1절을 왜 그렇게 번역해 놓았으냐고 따지더랍니다. 그는 그렇게 의미를 협소하게 해놓은 번역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 당돌한 사람은 신학자인 동시에 정치학자이기도 한 제 벗 김민웅 박사였습니다. 김 박사는 지금도 그 번역이 적절하지 않다고 투덜거립니다.

개역개정판은 1절을 달리 번역하고 있습니다.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교회 전통은 이것을 대가를 바라지 않고 하는 구제 혹은 봉사의 권고로 받아들여 왔습니다. ‘떡‘은 삶에 꼭 필요한 것을 의미하는 은유로 볼 수 있습니다. ‘떡’은 그러니까 돈일 수도 있고, 시간일 수도 있고, 재능일 수도 있습니다. 지금 잠시 내게 머물고 있는 것을 나의 것으로 전유하지 말고 필요한 사람에게 주라는 말로 받아들여도 좋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도 비슷한 가르침을 주신 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어라. 거기에는 좀이 먹고 녹이 슬어서 망가지는 일이 없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서 훔쳐 가지도 못한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을 것이다."(마6:20-21)

보물을 하늘에 쌓는다는 것은 정말로 필요한 사람에게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건 미래를 위한 투자가 아닙니다. 보상을 바라서 하는 행동도 아닙니다. 사회적 위신이나 존경을 얻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감사하다는 말을 듣기 위해서 하는 것도 아닙니다. 구제나 봉사는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자연스러워야 합니다. 자기가 남에게 잘 해준 일을 치열하게 기억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들은 가끔 그 기억을 소환해냄으로 적절한 감사를 표하지 않는 상대방의 무례함을 꾸짖습니다. 저는 그런 기억력은 불행한 기억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남에게 잘 해 준 일은 가급적이면 잊는 게 좋습니다. 대신 다른 이들이 내게 잘 해 준 일은 꼭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남에게 주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는 아브라함 조수아 헤셸의 말에 깊이 공감합니다. “절망을 피하는 유일한 길은 자신을 목적으로 세우는 대신에 ‘필요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행복’이란 ‘그가 필요하다는 사실의 확실성’이라고 풀이할 수 있을 것이다“(루스 카머스 굿힐 엮음, <헤셸의 슬기로운 말들>, 이현주 옮김, 한국기독교연구소, 2010년 5월 15일, p.27-8). 지금 누군가는 나를 필요로 합니다. 구체적인 도움이 필요한 사람도 있고, 그냥 옆에 있어줄 사람이 필요한 사람도 있고, 마음의 지지를 보내주는 한 사람이 필요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에게 우리의 시간, 정성, 물질, 사랑을 거저 주는 것을 하나님은 기꺼워하십니다.

∙오직 모를 뿐
삶은 유한합니다. 시간 속에서 우리는 안간힘을 쓰며 삶의 의미를 추구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영원을 사모하지만 일의 결국을 다 알 수 없는 존재입니다. 바람과 현실은 어긋나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속상해 하고, 슬퍼하고, 누군가를 원망합니다. ‘알 수 없음’, 이게 우리의 한계입니다. 오늘의 짤막한 본문에서 몇 차례 반복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모른다’ 혹은 ‘알지 못한다’가 그것입니다.

2절 “이 세상에서 네가 무슨 재난을 만날지 모르니”
5절 “바람이 다니는 길을 네가 모르듯이 임신한 여자의 태에서 아이의 생명이 어떻게 시작되는지 네가 알 수 없듯이, 만물의 창조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너는 알지 못한다.”
6절 “이것이 잘 될지 저것이 잘 될지, 아니면 둘 다 잘 될지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유발 하라리는 <호메 데우스>라는 책에서 호모 사피엔스의 극한에 도달한 인간이 거의 신적인 영역까지 넘보고 있는 현실을 우려 섞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인간이 해결하거나 통제할 수 없었던 기아, 역병, 전쟁 등의 문제를 인류는 그럭저럭 해결하고 있고, 죽음의 문제 역시 완전히 인간의 통제 밖에 있는 것은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인간은 못할 일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여전히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습니다. 슈퍼컴퓨터로 아무리 계산해 보아도 기상 변화를 온전히 예측할 수 없고, 정치적 행위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미리 알 수 없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세계를 인간이 어찌 다 알 수 있겠습니까? 전도자는 바람이 다니는 길도 알 수 없고, 태중에서 생명이 자라는 이치도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유대인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태아의 생명의 지평은 어머니라는 인간의 태내에만 국한할 수 없다면서, 유대인의 속담을 소개합니다. “사람은 태 안에 있을 때 우주를 알고 탄생과 함께 이를 잊는다”(마르틴 부버, <나와 너>, 김천배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07년 8월 30일, p.43). 인간은 어머니를 통해서 오지만 그 궁극을 알 수 없는 신비라는 말일 겁니다. 그러나 탄생과 더불어 그 신비의 상당 부분을 잃어버립니다. 그 때문에 인간은 잃어버린 세계에 대한 그리움을 품고 삽니다. 살면서 우리가 절감하는 것은 삶이 우리 계획이나 예측대로 전개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오죽하면 ‘새옹지마塞翁之馬’의 고사가 나오겠습니까? 행운처럼 보이는 일이 불행의 단초가 될 때도 있고, 불행처럼 보이는 일이 행복의 전조일 때도 있습니다. 상식의 세계에서는 인과율이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인과율과 무관하게 작동되는 현실도 있습니다.

그러니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다 알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에 대해 다 아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은 오만에 빠진 영혼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앎의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직 주의 이름을 부르고 찬양할 수 있을 뿐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주신 이성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야 합니다. 그리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여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기 어려울 때도 있는 게 사실입니다. 흑백으로 재단할 수 없는 일이 허다합니다. 흑백논리는 단순하고 명쾌하지만 그만큼 폭력적이기도 합니다. 자기와 같지 않은 이들을 다 배제하니 말입니다. 삶은 참 모호합니다. 그래서 지혜가 필요합니다.

돌아가신 박정오 목사님은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 그대로 못 사는가?’를 물으신 후에, 사실 우리는 알면서도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서 하나님의 뜻을 여쭙는 때가 많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이익이 걸린 문제에서 내가 손해 보는 쪽을 선택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가깝다고 하셨습니다. 그게 객관적으로 옳다는 말이 아니라, 그런 선택을 하면서도 스스로 비참해지거나 피해의식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있다면 하나님은 그 마음을 귀히 보시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씨를 뿌리는 용기
선을 행해야 하는 시간은 언제입니까? 빵을 물에 던져야 할 적절한 시간은 언제일까요? 많은 이들이 이 ‘때’의 문제에 걸려 넘어집니다. ‘기회가 되면‘이라든지, ‘조금만 형편이 나아지면’ 좋은 일을 하고 싶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오늘 본문의 표현대로 ‘바람이 그치기를 기다리고’ ‘구름이 걷히기를 기다리는‘ 게 우리 버릇입니다. 하지만 지금이야 말로 바로 좋은 때입니다. 시인 이정하는 ‘바람 속을 걷는 법2’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바람 불지 않으면 세상살이가 아니다그래, 산다는 것은바람이 잠자기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그 부는 바람에 몸을 맡기는 것이다바람이 약해지기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그 바람 속을 헤쳐나가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바람에 몸을 맡기는 것, 그 바람 속을 헤쳐나가는 것이랍니다. 바울 사도는 “보십시오, 지금이야말로 은혜의 때요, 지금이야말로 구원의 날입니다“(고후6:2b)라고 말했습니다. 믿는 이들은 지금 여기서 하나님의 임재를 드러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아브라함 조수아 헤셸은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의 촛불”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통해 당신의 살아 계심을 이 땅에 드러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쉼 없이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속적인 창조 덕분에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계신지 안 계신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수행함을 통해 하나님의 일하심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일찍이 예수님은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한다"(요5:17)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은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셔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것을 염원하게 하시고 실천하게 하시는 분”(빌2:13)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우리의 욕망을 내려놓을 때, 자기 삶의 유한함을 인정하고, 다른 이들을 복되게 하기 위해 자기가 가진 모든 자원을 사용할 때 하늘 바람이 우리에게 불어옵니다. 그 바람은 자유이고 기쁨이고 평화입니다. 농부들이 한 해의 농사를 준비하는 이 때 우리도 하나님 밭의 일꾼답게 사랑과 평화를 파종해야 합니다.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당장 결실이 보이지 않는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테레사 수녀는 자신을 가리켜 하나님이 쓰시다 만 몽당연필이라 했습니다. 우리는 잠시 동안 그분의 일을 하다 가는 것입니다. 번듯하지는 못해도 중요한 것은 그 분의 손에 들렸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우리와 함께 구원사를 써 가시도록 우리를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주님의 은혜로 우리 삶이 영원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9년 02월 17일 10시 50분 00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