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27. 사람을 보는 눈
설교자 김기석
본문 창24:10-14
설교일시 2020-07-05
오디오파일 s20200705.mp3 [48681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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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보는 눈
창24:10-14
(2020/07/05, 성령강림 후 제5주)

[그 종은 주인의 낙타 가운데서 열 마리를 풀어서, 주인이 준 온갖 좋은 선물을 낙타에 싣고 길을 떠나서, 아람나하라임을 거쳐서, 나홀이 사는 성에 이르렀다. 그는 낙타를 성 바깥에 있는 우물 곁에서 쉬게 하였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여인들이 물을 길으러 나오는 때였다. 그는 기도하였다. "주님, 나의 주인 아브라함을 보살펴 주신 하나님, 오늘 일이 잘 되게 하여 주십시오. 나의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십시오. 제가 여기 우물 곁에 서 있다가, 마을 사람의 딸들이 물을 길으러 나오면, 제가 그 가운데서 한 소녀에게 '물동이를 기울여서, 물을 한 모금 마실 수 있게 하여 달라' 하겠습니다. 그 때에 그 소녀가 '드십시오. 낙타들에게도 제가 물을 주겠습니다' 하고 말하면, 그가 바로 주님께서 주님의 종 이삭의 아내로 정하신 여인인 줄로 알겠습니다. 이것으로써 주님께서 저의 주인에게 은총을 베푸신 줄을 알겠습니다."]

∙버스크 의식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불안과 초조함 속에서 엄벙덤벙 지내다보니 벌써 7월의 첫 주일입니다. 세상이 어떠하든 때가 되면 피었다 지고, 꽃 진 자리에 열매를 맺는 나무들의 성실함 앞에 부끄러울 때가 많습니다. 금년도 하반기에는 조금 더 정신을 가다듬고 견실하게 하루하루를 채워갈 수 있기를 빕니다. 이맘 때가 되면 시간을 새롭게 한다는 말이 자꾸 떠오릅니다. 낡아버린 시간, 설렘조차 없이 허겁지겁 채워가는 시간에 뭔가 청신한 기운을 불어넣고 싶어지는 겁니다. 며칠 전 제가 좋아하는 김진혁 박사의 새로운 책 원고를 읽다가 놀라운 구절과 만났습니다.(, 7월 중 발간 예정)

“우주는 창조 이래 똑같은 법칙 하에 운동을 반복하지만, 하나님은 질려 하지 않으시고 어린아이처럼 매번 늘 새롭게 우주를 보고 놀라워하고 즐거워하신다.”

그런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 놀람, 즐거움, 경탄이 없다는 것은 우리 영혼이 늙어버렸다는 증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똑같은 일을 반복할 때 대개는 권태를 느낍니다. 그 일에 마음을 담지 못하고 그냥 습관적으로 몸과 마음의 관성을 따라 삽니다. 그렇기에 삶은 고단하고, 우울하고, 왠지 모를 억울한 느낌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행복의 파랑새는 늘 우리 손이 닿지 않는 곳을 날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시간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늘 우리 앞에 새롭게 도착하는 시간을 권태 속에 흘려보내면 안 됩니다. 가끔 시간을 새롭게 하기 위해 뭔가 자기만의 의례를 치르는 이들도 있습니다. 머리카락을 자르거나, 여행을 떠나거나, 직장을 그만 두기도 합니다. 그들은 모두 낡아빠진 시간에 멀미를 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사상가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월든>에서 들려주는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미국의 원주민 가운데 ‘머클래씨Mecclasse‘ 족 사람들은 매년 ‘버스크busk’라는 의식을 치른다고 합니다. 일종의 허물을 벗는 의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때가 되면 부족원들은 새 옷, 새 솥과 냄비 그리고 새로운 살림 도구와 가구를 미리 마련해놓습니다. 헌 옷가지들과 지저분한 물건들을 모두 한곳으로 모으고, 집과 거리와 마을 전체를 깨끗이 청소해 쓰레기를 모아놓고, 여기에 남은 곡식과 식료품들을 한데 더해 무더기를 쌓은 후 불을 질러 태워버립니다. 엄청난 낭비처럼 보입니다. 그 후에 어떤 약 같은 것을 먹은 후에 사흘간 단식을 하는데, 그동안 마을 안에는 모든 불이 꺼집니다. 이 기간 중에는 식욕과 성욕 등 일체의 욕망도 끕니다. 며칠 후 대사면이 선포되면 죄 때문에 부족 밖으로 떠나야 했던 이들도 다 자기 마을로 돌아올 수 있게 됩니다. 나흘째 아침에 의례를 주재하는 이가 마른 나무들을 비벼서 광장에 새로운 불을 피워놓으면, 부족원들은 이 불에서 새롭게 깨끗한 불을 붙여 집으로 돌아갑니다.(헨리 데이비드 소로, <월든>, 신재실 옮김, 삼협종합출판부, 2012, 94쪽 참고) 우리 눈에 원시적이고 신화적인 삶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그들이야말로 인생을 진지하게 사는 사람들이란 생각이 듭니다. 의례를 통해 시간을 새롭게 하며 사니 말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예배는 시간을 새롭게 하는 의식입니다. 하나님 앞에 죄를 고백하고, 우리의 몸과 마음을 주님께 바치는 시간입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치유하고, 당신의 놀라운 숨을 채워주시는 은혜의 시간입니다. 예배를 통해 우리는 옛 사람에 대해 죽고,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예배는 우리를 늘 원점에 서도록 합니다.

∙고귀한 영혼
오늘 주님은 우리를 아브라함 이야기 앞으로 불러 모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나그네 인생길의 동반자였던 아내 사라를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떠나보내고 헛헛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의 도움으로 하는 일마다 복을 누렸습니다. 그가 해야 할 남은 일은 장성한 아들 이삭의 맞춤 배필을 찾아주는 일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집 모든 소유를 맡아 보는 늙은 종에게 중대한 임무를 맡깁니다. 이삭의 아내가 될 사람을 자기 고향, 친척들이 사는 곳으로 가서 찾아보라는 것이었습니다. 늙은 종은 주인이 준 온갖 좋은 선물을 낙타에 싣고 길을 떠나 아람나하라임을 거쳐, 나홀이 사는 성에 이르렀습니다.

그 여정 가운데 어떤 일이 벌어질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뭘 어떻게 해야할지 좀 막연했지만 그 늙은 종은 자기에게 위임된 일을 하기 위해 길 위에 섰습니다. 위임은 ‘맡김’입니다. 위임은 그러므로 상호 신뢰를 전제로 합니다. 믿음직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어떤 일이든 위임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그 늙은 종은 아브라함의 집에 오랫동안 머무는 동안 자기 일에 충실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주인에 대한 신뢰와 존경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자기를 무시하고 함부로 대하는 이의 일을 살뜰히 보살피기는 어렵습니다. 아브라함은 복을 매개하라는 주님의 소명에 충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종들까지도 귀히 여겼던 것 같습니다. 주인의 신뢰와 사랑과 돌봄은 종들에게서도 자발성을 이끌어냅니다. 어떤 일을 할 때 불퉁거리며 마지못해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노예로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괴테의 소설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에 나오는 빌헬름은 주인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충실한 하인이 얼마나 아름다운 사람인지를 설명하기 위해 이렇게 말합니다.

“이 경우 충실은 위대한 사람과 동등해지기 위한 하나의 고귀한 영혼의 노력입니다. 주인은 평소에 하인을 그저 돈 주고 부리는 노예로 생각하지만, 하인은 끊임없는 충실과 사랑으로 주인과 동등해집니다.“(요한 볼프강 폰 괴테,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곽복록 역, 동서문화사, 212쪽)

아브라함 이야기와 경우가 좀 다르기는 하지만 하인은 자기 일에 충실함으로 주인과 동등한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대가를 얻기 위해 마지못해 일하지 않고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충실히 수행하는 사람을 일러 빌헬름은 ‘고귀한 영혼’이라 일컫습니다. 일에 대한 성실함으로 말미암아 그는 신분의 차이를 해소합니다.

∙시금석
아브라함의 늙은 종은 주인이 그에게 맡긴 일을 완수하기 위해 많이 고심했을 것입니다. 좋은 사람을 알아보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제법 괜찮은 사람 같아 보여 택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잘못된 판단이었다고 후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의 앞모습보다 뒷모습이 오히려 진실하다고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앞모습은 대개 사람들을 의식하며 꾸민 모습인 경우가 많지만, 뒷모습은 속절없이 보여지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만물보다 더 거짓되고 아주 썩은 것은 사람의 마음이니, 누가 그 속을 알 수 있습니까?”(렘17:9) 예레미야의 이 질문에는 사람을 신뢰하기 어려운 고통스러운 기억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그의 질문에 하나님이 대답하십니다. “각 사람의 마음을 살피고, 심장을 감찰하며, 각 사람의 행실과 행동에 따라 보상하는 이는 바로 나 주다.”(렘17:10) ‘마음’이라 번역된 단어 킬야(kilyah)는 콩팥을 가리킵니다. 고대인들은 콩팥이 감정과 기질을 관장한다고 생각했고, ‘심장’(레이브, leb)에는 사람의 양심, 경향성, 마음이 깃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두루 살피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한갓 인간인 우리는 그럴 수 없기 때문에 많은 시행착오를 거칩니다. 누군가를 완벽하게 알 수는 없지만, 누구에게나 하나를 보아 열을 안다는 말이 있듯이 사람을 분별하는 기준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늙은 종이 세운 판단의 기준은 매우 구체적입니다. 우물 곁에 서 있다가 어린 소녀들이 물을 길으러 나오면 그 중 한 소녀에게 “물동이를 기울여서, 물을 한 모금 마실 수 있게 하여 달라”고 부탁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때 그 소녀가 지체하지 않고 “드십시오. 낙타들에게도 제가 물을 주겠습니다” 하고 말하면 그가 바로 주님께서 정해주신 이삭의 배필로 받아들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일단 그가 세운 기준은 ‘낯선 이에 대한 환대의 마음이 있는가‘입니다. 한가지가 더 있습니다. 그가 부탁을 받은 것만 행하는 사람인지, 나그네가 처한 상황을 깊이 이해하고 부탁받은 것 이상의 일을 하는지를 살펴보겠다는 것입니다.

나그네는 취약한 사람입니다. 자기를 보호해주는 사회적 울타리 밖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살갗이 벗겨진 사람과 같습니다. 그런 취약함을 이용해 자기의 이익을 취하거나, 권력욕을 채우려는 이들이 많습니다. 누군가를 차별하고 배제함으로 저열한 쾌감을 누리는 이들, 그런 일을 통해 소속감을 확인받으려는 이들은 영혼이 빈곤한 사람들입니다. 찬송가 475장은 ‘인류는 하나 되게 지음 받은 한 가족’이라고 전제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우리 속에 자리잡은 죄악은 편당심을 일으키고 차별의식 넣어서 대화를 가로 막습니다. 불신의 땅에 믿음과 사랑을 심는 것이 우리의 소명입니다. 미국 사회가 뿌리깊은 인종주의로 인해 들끓고 있습니다. 조지 플로이드의 죽음을 계기로 하여 백인 우월주의에 항거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인종주의를 심화시켰던 인물들의 동상에 페인트가 뿌려지고, 동상 철거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갑니다. 이건 우리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저런 차별의식이 우리 사회의 성숙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성숙한 사회란 모든 사람이 두려움 없이 자기 몫의 삶을 충실하게 살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는 곳이 아닐까요?

세상에는 차별의식과 편당심에 사로잡힌 이들도 있지만, 나그네들을 보호하고 그들의 울타리가 되어주려는 선한 이들이 더 많습니다. 아브라함의 늙은 종은 바로 그런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약속을 실현할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빚을 지고 있다는 자각
사람은 누군가의 요구에 응답함으로 사람다워집니다. 응답하는 이들은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에서 행복을 느낍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포도원 일꾼의 비유에서 주인은 오후 다섯 시에 포도원에 들어와서 겨우 한 시간 일한 사람에게도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주었습니다. 그가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할 마음만 있으면 우리는 이웃들에게 줄 것이 참 많습니다. 사람됨의 실현은 우리가 빚진 자라는 사실을 깨닫고 하늘의 요구에 응답하는 것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나는 인간 존재로서 실존하는가? 나의 대답은 이것이다. ─나는 명령받았다─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인간의 의식 속에 자신이 빚진 자라는 인식이, 감사의 빚을 지고 있다는 깨달음이, 어느 순간에 보답하고 대답하고 삶의 장엄함과 신비로움에 어울리는 삶을 살라는 요구를 받고 있다는 깨달음이 뿌리박혀 있다.”(아브라함 요수아 헤셸 선집3, <누가 사람이냐>, 이현주 옮김, 종로서적, 1996, 104쪽)

감사의 빚을 지고 살고 있다는 자각이야말로 낯선 이들을 환대하며 사는 삶의 뿌리입니다. 구원받을 자격이 없는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불러주시고,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일에 불러주신 주님의 은총을 생각하면 우리는 아무도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사랑의 빚을 갚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리브가는 그 시험에 통과하여 이삭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물론 세상에는 나쁜 의도를 가지고 우리에게 접근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우리의 선의를 이용하여 자기들의 잇속을 차리려는 사람들 말입니다. 그들을 잘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일상 속에서 만나는 이들에게 우리는 줄 수 있는 것이 많습니다. 친절한 말 한 마디, 친절한 몸짓 하나가 세상을 따뜻하게 만듭니다. 호수 한복판에 던져진 돌이 일으킨 파문이 호수 끝까지 번져가듯 우리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우리가 사는 세상을 만듭니다. 시간의 새로움은 마음을 그렇게 맑게 유지할 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한 주간 동안도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내주신 그리스도와 동행하며 행복과 기쁨의 파장을 일으키며 살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20년 07월 05일 12시 07분 52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