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3. 다른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
설교자 김재흥
본문 마태 21:33~43
설교일시 2021-03-28
오디오파일 s20210328.mp3 [61334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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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말씀 -
“다른 비유를 하나 들어보아라. 어떤 집주인이 있었다. 그는 포도원을 일구고,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포도즙을 짜는 확을 파고, 망대를 세웠다. 그리고 그것을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멀리 떠났다. 열매를 거두어들일 철이 가까이 왔을 때에, 그는 그 소출을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냈다. 그런데, 농부들은 그 종들을 붙잡아서, 하나는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또 하나는 돌로 쳤다. 주인은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더 많이 보냈다. 그랬더니, 농부들은 그들에게도 똑같이 하였다. 마지막으로 그는 자기 아들을 보내며 말하기를 '그들이 내 아들이야 존중하겠지' 하였다. 그러나 농부들은 그 아들을 보고 그들끼리 말하였다. '이 사람은 상속자다. 그를 죽이고, 그의 유산을 우리가 차지하자.' 그러면서 그들은 그를 잡아서, 포도원 밖으로 내쫓아 죽였다. 그러니 포도원 주인이 돌아올 때에, 그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그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그 악한 자들을 가차없이 죽이고, 제 때에 소출을 바칠 다른 농부들에게 포도원을 맡길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성경에서 이런 말씀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집 짓는 사람이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이것은 주님께서 하신 일이요, 우리 눈에는 놀라운 일이다.' 그러므로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나님의 나라를 빼앗아서, 그 나라의 열매를 맺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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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으신 주님의 은혜가 오늘 예배를 드리는 모든 이 위에 함께하시길 빕니다. 그리고 오래 지속되고 있는 코로나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지구촌 위에도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새롭게 하시는 은혜가 함께하시길 빕니다. 국내 확진자 숫자가 지난 목요일 10만 명을 넘어섰습니다. 앞자리 숫자가 바뀌기 전에 코로나가 종식되길 소망해 봅니다.

· 한국교회의 민낯을 드러내다
작년 이맘때 교회 화단에 핀 꽃을 사진으로 찍어 청년부 단체 카톡방에 올렸습니다. 청년들은 봄꽃이 다 지기 전에 다시 함께 만나 예배를 드릴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소망을 이루지 못한 채 1년이 지났습니다. 올 봄에도 꽃 사진을 찍어 단체 카톡방에 올렸습니다. 꽃이 예쁘다는 말들은 했지만, 그 꽃이 지기 전에 다시 교회에 모여 예배 드리면 좋겠다는 말을 이번에는 아무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 같이’ ‘함께’ ‘모여’라는 말을 이제는 쉽게 쓸 수 없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어느새 비대면이 관계의 기본값이 되어버린 코로나 2년차를 보내고 있습니다. 다들 힘겨운 1년 보내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방역 최전방에서 수고하신 의료진과 방역당국 관계자분들이 제일 수고가 많으셨지만 사실 온 국민이 모두 수고하고 고생한 1년의 시간이었습니다. 코로나와 관련하여 좋은 소식과 안 좋은 소식이 모두 들려오고 있는 지금이지만, 백신접종률이 높아지는 하반기에는 지금보다는 상황이 많이 좋아지지 않을까 조심스레 예상해 봅니다.

지난 코로나 1년 살이 동안 무엇이 가장 힘드셨나요? 경제적인 어려움, 정서적인 어려움 등이 크셨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저 또한 보고픈 이들을 이전처럼 볼 수 없다는 것이 좀 힘들었습니다. 작년에 목사님이 쓰시는 목회서신에 목회실 식구들이 짧은 인사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저는 이런 말을 썼습니다. 반찬 중에 제일 맛있고 영양가 있는 반찬은 얼굴반찬인데, 그 얼굴들을 마주하지 못하니 이전처럼 힘이 나지 않는다고. 일종의 관계 영양결핍이라고나 할까요. 모두가 비슷한 상황이시겠지요. 그와 더불어 지난 코로나 살이 1년간 제 마음을 힘들게 한 것은 이 재난을 통해 한국교회의 부끄러운 민낯과 바닥을 자꾸만 반복적으로 재확인해야만 했다는 것입니다. 처음에 신천지를 중심으로 코로나 바이러스가 급격하게 퍼져나갔습니다. ‘신천지는 기독교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분도 계실 수 있겠지만, 교회 밖에서 볼 때는 교회와 신천지의 차이는 크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 이후에는 사랑제일교회가 코로나 전파의 진원지가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인터콥선교회, 그 다음에는 IM선교회와 TCS국제학교. 그 이외에도 비대면 예배 규정을 어기고 대면예배를 드리고 소모임을 진행하다가 확진자가 발생한 교회들이 많았습니다.

온 국민이 코로나 확산 방지를 위해 노력할 때 아랑곳하지 않고 집회와 모임을 강행했던 교회들, 사회야 어떻게 되든 자신들의 종교적 형식을 지켜야겠다고 고집했던 교회들에 대한 국민의 시선은 곱지 않았습니다. 올 1월에 이루어진 한 여론 조사에 따르면 한국 교회를 신뢰하느냐는 질문에 신뢰하지 않는다고 대답한 비율이 76%나 됩니다. 기사를 보며 참담했습니다. 한국교회는 지금 말 그대로 바닥을 치고 있습니다. 각 지방 대학에 신입생들이 모집되지 않고 있다는 기사를 보신 적이 있으실 겁니다. 그런데 각 교단의 신학대학들도 신입생이 모집되고 있지 않습니다. 지방이 아니라 서울 경기 수도권에 있는 각 교단의 신학대학들 중 정원이 한참 미달된 학교들이 다수라고 합니다. 젊은 세대의 인구수가 급격하게 줄어든 인구절벽 시대라 그런 일이 생기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제 이 사회가 점점 교회의 존재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싸인, 아니 교회가 사라지기를 바란다는 싸인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바야흐로 전락의 시대를 맞고 있습니다. 단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만 이것을 느끼고 있지 못할 뿐입니다.

· 마태복음 21장
이번 사순절기간을 보내면서 제 안에 강렬하게 떠오른 이미지가 있었습니다. 모두가 힘이 풀린 눈빛으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부유하듯 정신없이 살아가는 이 때에, 예수 그리스도 홀로 맑고 깊은 눈빛으로 한 곳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시는 모습. 중심을 잃고 무너져가는 세상을 다시 새롭게 세우기 위해 아픔과 고통이 기다리는 곳으로 나아가는 한 사람의 결기에 찬 발걸음. 유월절 명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많은 사람들과 방향은 같았지만 그 안에 담긴 지향은 달랐던 발걸음. 가장 가까운 이들에게 조차 공감받지 못하고 지지받지 못해 외로웠던 발걸음. 그 끝에 죽음이 기다리고 있으나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며 끝까지 나아갔던 발걸음. 그 발걸음은 그 옛날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한 번 걸어감으로 끝난 발걸음이 아닙니다. 해마다 겨울 지나 만물이 소생하는 봄으로 접어드는 때, 늘 우리로 하여금 우리 삶의 지향을 돌아보게 만드는 발걸음입니다. 너는 참 생명답게 살고 있냐고, 가야할 곳을 바르게 보며 살고 있냐고, 너만을 위한 발걸음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발걸음을 내딛고 있느냐고, 흙에서 온 생명이지만 흙으로만 끝나지 않는 생명이냐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만드는 발걸음입니다.

갈릴리를 떠난 예수님의 발걸음은 어느덧 예루살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며 성에 들어가신 예수님은 곧바로 성전으로 향하셨습니다. 다른 이들처럼 하나님께 유월절 제사를 드리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그릇된 것을 바르게 고치기 위함이었습니다. 성전에서 팔고 사고 하는 사람들을 다 내쫓으시고, 돈을 바꾸어주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셨습니다. 먼 곳에서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온 순례자들을 위해 제물을 준비해 파는 것과 성전에 바칠 성전세를 세겔로 바꾸어 주는 것은 성전의 제사장들이나 순례자들에게는 당연하고 익숙한 것들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일종의 배려와 편의 제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연하고 익숙하고 편의를 위한 것이 예수님께는 더러운 것, 불의한 것, 강도들이나 하는 짓처럼 보였습니다. 제물을 준비하고 성전세를 바치는 행위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었겠죠. 그 과정에서 부정하게 이익을 챙기는 이들이 많았던 것이 문제였습니다. 제사장들은 사람들의 종교심을 이용해 자기 배를 불리는 것에 관심을 둘 뿐, 아프고 병든 이를 돌보고 그들을 회복시키는 본질적인 하나님의 일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성전을 한바탕 둘러엎으신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제사 드리는 사람을 만나시지 않고 뜰로 나가 눈 먼 사람들과 다리를 저는 사람들을 만나 그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이는 성전이 본디 무슨 일을 해야 하는 지를 여실히 보여주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21장에는 예수님의 예루살렘성 입성과 성전정화의 사건 이외에도 두 개의 사건과 두 개의 비유가 더 나옵니다. 두 개의 사건을 먼저 보시죠. 예수님께서는 길 가에 서 있는 무화과나무로 가셨습니다. 그 나무는 잎사귀만 무성할 뿐 열매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부터 너는 영원히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라며 나무를 저주하셨고, 그 나무는 곧 말라버렸습니다. 아시다시피 그 무화과나무는 겉만 그럴듯할 뿐 진정한 생명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그릇된 성전체제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후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계실 때, 대제사장 무리가 다가와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시오?”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이냐? 사람에서 온 것이냐? 이에 답하면 나도 답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요한의 세례는 하늘에서 온 것이 아니라고 믿었지만, 그렇게 말했다가는 요한을 따르는 많은 무리에게 비난받을 것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성전체제가 아무 생명력 없이 바짝 말라 버린 것은 그들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진짜 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진짜 누구를 통해서 일하고 계신지 볼 눈이 그들에게는 없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자신만이 하나님의 사람이며 오직 자신이 하는 일만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여기며 살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사람들을 두려워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 무리를 앞에 두고, 마치 작정이라도 하신듯 두 가지 비유를 연이어 말씀해 주십니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 아버지가 맏아들에게,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해라했더니 처음에는 싫다고 말했다가 나중에 뉘우치고 일하러 갔다. 둘째 아들에게도 그렇게 말했는데, 둘째는 가겠다고 답하고는 가지 않았다.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행하였느냐?’ 사람들은 대답했습니다. ‘맏아들입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 무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이다. 그들은 뉘우쳤지만, 너희는 뉘우치지 않았다.’ 이 본문은 재미있는 본문입니다. 대제사장 무리와 그들에 의해 죄인 취급받던 이들이 이야기 속에서 형제로 표현되는데 첫째와 둘째의 위치가 좀 특이합니다.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큰아들과 둘째아들처럼 대제사장 무리를 큰아들 자리에, 죄인을 둘째아들의 자리에 놓지 않았습니다. 그 반대로 위치시켰습니다. 이는 대제사장 무리에게 스스로를 다른 사람들보다 하나님과 가까운 사람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자신들이 사람 취급도 안하던 이들과 형제로 언급될 뿐 아니라 그들보다 자신들이 못하다는 이야기가 대제사장 무리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을 겁니다.

그들의 충격이 가시기 전에 예수님은 또 하나의 비유를 말씀해 주십니다. 소위 ‘포도원 주인과 소작인의 비유’입니다. 어떤 포도원 주인이 자신이 만든 포도원을 농부들에게 세를 주고 멀리 떠났습니다. 수확철이 되어서 소출을 받기 위해 농부들에게 사람을 보냈습니다. 농부들은 의당 소출의 일정량을 감사의 마음을 담아 바쳤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고 주인이 보낸 사람을 때리고 죽이고 돌로 쳤습니다. 나중에는 아들을 보냈는데 그 아들마저 죽였습니다. 포도원을 오랫동안 자신들이 유지관리하다 보니 그것을 마치 제것으로 알게 되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히 착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물으십니다. “주인이 그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사람들은 답합니다. “그 악한 자들을 가차없이 죽이고, 제 때에 소출을 바칠 다른 농부들에게 포도원을 맡길 것입니다.”예수님께서는 그 답을 듣고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나님의 나라를 빼앗아서, 그 나라의 열매를 맺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과 가까운 자들이 아니다. 오히려 너희가 죄인이라 부르는 이들이 너희보다 하나님과 가까운 사람들이다.’ ‘너희에게서 하나님의 나라를 빼앗아서, 그 나라의 열매를 맺는 다른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 이 말씀들은 그 옛날 대제사장 무리에게 주신 말씀인 동시에 오늘 한국교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 열매 맺는 다른 민족들
우울하고 힘겨운 코로나 시국이지만 간간이 우리의 마음에 감동을 주는 이야기들도 들려왔습니다. 어릴 때 부모님을 사고로 잃은 형제가 있었습니다. 몸이 편찮으신 할머니와 셋이 살았습니다. 형은 고등학생 나이지만 아르바이트를 하며 세 식구의 벌이를 했습니다. 어느 날 동생은 형에게 치킨을 사달라고 졸랐고 돈이 5천원밖에 없던 형은 치킨을 사줄 수가 없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치킨집에 들어가 5천원어치만 치킨을 먹을 수 없냐고 물었지만 가는 가게마다 두 형제를 쫓아냈습니다. 그러던 중 한 치킨집 사장이 그 형제를 가게로 불러들였고 돈을 받지 않고 배부르게 치킨을 먹게 해 주었습니다. 형은 그 때의 기억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얼마만에 느껴보는 따뜻함이었는지 1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생생히 기억이 납니다.” 나중에 치킨 값을 치르려했지만 사장은 끝내 돈을 받지 않았고 오히려 자주 치킨집을 찾아간 동생에게 공짜 치킨을 대접해 주었습니다. 그게 미안해서 발길을 끊은지 오래 되었지만 형은 코로나가 장기화되며 자영업자들이 어려움을 겪는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 사장이 걱정되어 그 치킨집이 속해 있는 프랜차이즈 회사에 감사 편지를 보냈습니다. 여느 교회보다 하나님 나라에 가까운 치킨집입니다.

지난주에 듣게 된 감동적인 뉴스도 있습니다. 41년 전 광주의 한 저수지에서 진압군으로 투입된 공수부대원이 검문에 불응하며 뛰어가던 청년을 총으로 사살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무고한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을 안고 40여년을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올해 5.18 민주화운동 진상규명 조사위원회의 주선으로 그 공수부대원과 그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했던 청년의 유가족들이 만나게 되었습니다. 60을 넘겨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공수부대원은 유가족이 있는 방에 들어서자 무릎을 꿇고 고개를 깊이 숙였습니다. 머리를 땅에 박은 채 “죄송합니다. 그 때 당시에 말씀 드리지 못해서”라고 말했습니다. 나중에 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나눌 때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때 당시도 그랬지만 오늘 또 이 자리에서 마음의 상처를 드린 것 같아 죄송합니다.” 그의 눈은 눈물로 젖어 있었고 목소리는 울먹였습니다. 동생을 잃은 형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늦게라도 사과해줘서 고맙습니다. 용기 있게 나서줘 참 다행입니다. 이제는 과거의 아픔을 잊고 떳떳하게 살아가시면 좋겠습니다.” 그 후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악수를 나누려다가 서로 부둥켜안고는 한참 큰 소리로 울었습니다. 진정한 뉘우침과 반성, 진심어린 사죄 그리고 진심어린 용서와 받아줌. 그 자리는 그 옛날 야곱과 에서가 만난 자리였으며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자리였습니다.

하나님은 다른 농부를 찾고 계십니다. 한국교회에 의해 짓밟히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한국교회에서 빼앗아서 그 나라의 열매를 맺는 다른 이들에게 주실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은 이미 교회 밖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고 계시고, 다른 농부들을 통해 그 나라의 열매를 맺어가고 계십니다. 76%의 국민들이 한국교회를 신뢰하지 못한다고 말한 이유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교회와 교인들을 보았을 때 하나님 나라가 보이지 않는 겁니다. 예수가 보이지 않는 겁니다. 어느 대형교회가 담임목사직을 부자세습했을 때 뉴스에서 한 앵커가 했던 말이 생각납니다. 그는 교계의 원로였던 한경직 목사에게 후배 목사들이 찾아와 ‘목사님, 저희에게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했을 때 한경직 목사가 ‘목사님들, 예수 잘 믿으세요’라고 말해 주었던 일화를 소개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앵커는 교회를 다니지 않아도, 성경을 잘 몰라도 ‘예수 잘 믿는다’는 말의 의미는 잘 알고 있다고 말하며, 오늘의 한국교회도 예수를 잘 믿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올해 초 기독교를 표방하던 광주TCS 국제학교가 정부의 방역지침을 어기고 집단생활을 하다가 집단감염을 일으켰을 때의 일입니다. 사람들이 그 학교 정문에 있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현판에 계란을 던졌습니다. 그 계란은 마치 주님의 얼굴에 던져진 계란 같았습니다. 주님은 대제사장과 병정들과 빌라도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늘 우리에 의해 또다시 모욕을 당하고 계십니다.

참으로 좋아하고 존경하는 이가 있습니다. 그는 이미 이 세상을 떠난 지 오래 되었습니다. 마음이 어수선하고 갑자기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 싶을 때면 그가 일하던 곳에 가서 서성거려 봅니다. 그의 출퇴근길을 따라 걸어보기도 합니다. 걷다가 그의 발이 닿았던 자리에 내 발이 그대로 닿기도 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발맞춤처럼 삶맞춤도 이루어질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참 진리와 생명과 평화의 길을 만들기 위해 오늘도 걸어가고 계십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걷는 하루하루의 발걸음이 예수님의 발걸음과 많이 포개지는 발걸음이 될 수 있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기도----

하나님, 참담한 마음으로 고난주일을 맞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내셨는데 한국교회는 고난을 겪으며 이기적이고 고집스러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한국교회는 예수를 따르는 자로 사회 속에 서 있지 못했고 예수를 모욕하는 자로 서 있었음이 드러났습니다. 그러나 주님, 교회는 조금도 이를 인정하려 들지 않습니다.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니 아파하지도 않습니다. 아파하지 않으니 변화가 없습니다. 주님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주님께서 우리가 아닌 다른 이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고 계심을 보게 해 주십시오. 당신의 사람들에 의해 모욕을 받으시면서도 계속해서 예루살렘을 향해 나아가고 계신 주님을 보게 해 주십시오. 주님, 이제는 우리도 주님이 계신 곳에 함께 있게 해 주십시오. 어려움에 처한 이를 사랑으로 보듬는 자리에 있게 해 주십시오. 진실한 뉘우침과 용서와 받아줌이 있는 곳에 서게 해 주십시오. 나를 내어줌으로 너를 살리는 자리에 서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21년 03월 28일 12시 26분 28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