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레스 웃사
설교자 김기석
본문 삼하 6:1~8
설교일시 2021-07-11
오디오파일 s20210711.mp3 [59953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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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레스 웃사
삼하6:1-8
(2021/07/11, 성령 강림 후 제7주)

[다윗이 다시 이스라엘에서 정병 삼만 명을 징집하여서, 그들을 모두 이끌고 유다의 바알라로 올라갔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궤를 옮겨 올 생각이었다. 그 궤는 그룹들 위에 앉아 계신 만군의 주님의 이름으로 부르는 궤였다. 그들이 언덕 위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하나님의 궤를 꺼내서, 새 수레에 싣고 나올 때에, 아비나답의 두 아들 웃사와 아히요가 그 새 수레를 몰았다. 그들이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하나님의 궤를 싣고 나올 때에, 아히요는 궤 앞에서 걸었고, 다윗과 이스라엘의 모든 가문은, 온 힘을 다하여서, 잣나무로 만든 온갖 악기와 수금과 거문고를 타며, 소구와 꽹과리와 심벌즈를 치면서, 주님 앞에서 기뻐하였다. ○그들이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렀을 때에, 소들이 뛰어서 궤가 떨어지려고 하였으므로, 웃사가 손을 내밀어 하나님의 궤를 꼭 붙들었는데, 주 하나님이 웃사에게 진노하셔서 거기에서 그를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었다. 주님께서 그렇게 급격히 웃사를 벌하셨으므로, 다윗이 화를 내었다. 그래서 그 곳 이름을 오늘날까지 베레스 웃사라고 한다.]

∙혼돈의 시대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민망한 시절입니다. 또 다시 우리는 비대면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같은 상황이 주기적으로 반복되니 지친다는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세상은 참 우리 바람대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바이러스에게 염치도 없냐고 책망할 수도 없습니다. 어려운 여건이지만 과거에도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넘어진 자리를 딛고 일어서야 합니다. 모두 부정적인 생각을 거두고 용기를 내 다시 한번 희망을 향해 몸을 돌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 주간 동안 마음이 아팠습니다. 서울대 청소노동자 한 분이 과도한 업무를 수행하다가 쓰러졌습니다. 그의 죽음을 통해 우리는 청소 노동자들이 처한 비참한 실태를 알게 되었습니다. 직장 내 갑질 이야기는 이미 다양하게 언급된 바 있습니다만, 서울대에서는 직무에 불필요한 시험까지 치르게 하고, 그 시험 성적까지 공개했다고 합니다. 건물 이름을 한자와 영어로 쓰는 게 그분들의 직무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일종의 길들이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평가하는 이들의 시선 앞에서 마치 발가벗겨진 듯한 느낌이 들지 않겠습니까? 한자나 영어로 건물 이름을 쓰지 못한다고 하여 굴욕감을 느껴야 합니까? 사회적 약자에 대한 존중 혹은 배려심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이런 일은 벌어져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사람은 누군가의 동료가 됨으로 성숙하게 된다지 않습니까? 동료가 되기 위해서는 그가 처한 상황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인간적 성숙에 이르지 못한 이들이 높은 자리에 있을 때 세상은 차가운 곳으로 변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실수를 합니다.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조금씩 발전합니다.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할 때 사람은 화석처럼 굳어버립니다. 고난의 풀무질을 거쳐 점점 맑고 깨끗하게 변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더 이기적이고 고집스러워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경에서 사람들에게 바람직한 지도자의 모범처럼 여겨지는 아브라함, 모세, 다윗 같은 분들도 우리와 성정이 같은 이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살면서도 많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하지만 그 잘못을 통해 더 나은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오늘은 다윗 왕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려 합니다.

사울과 요나단이 블레셋과 맞섰던 길보아 산 전투에서 장렬하게 최후를 맞이했다는 소식을 들은 다윗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영웅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를 지어 바쳤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헤브론으로 올라갔고, 거기서 유다의 왕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사울이 죽은 후 다윗이 바로 2대 임금이 되어 다스렸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조금 복잡합니다.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은 근거지를 마하나임으로 이주한 후에 왕이 되어 두 해를 다스렸습니다. 한 동안 두 임금이 이스라엘을 다스렸던 것입니다. 세력을 다투는 내전이 벌어졌고 전쟁의 시기였기에 장군들의 위세가 하늘을 찔렀습니다. 권력 다툼, 배신과 음모의 세월이었습니다.

이스보셋의 휘하에 있던 아브넬 장군은 용맹한 장수였습니다. 그러나 지나칠 정도로 위세를 부렸습니다. 어느 날 그는 왕이 자기를 경원시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후 헤브론으로 가서 다윗에게 투항합니다. 다윗의 입장에서는 천군만마를 얻은 셈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을 섬기는 장군 요압은 전투 중에 자기 동생 아사헬을 죽였던 아브넬을 유인하여 살해하고 맙니다. 겉보기에는 개인적 복수였지만, 실은 자신과 세력을 다툴 수 있는 정적을 제거한 셈입니다. 혼란의 시간은 있었지만 민심이 점점 다윗에게로 넘어가는 것을 보고 레갑과 바아나가 모반을 일으켜 이스보셋을 살해하고, 그 수급을 베어 다윗에게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들을 처형했습니다. 비록 적수였다고는 하지만 모셨던 이를 배신한 사람을 징계함으로 다윗은 백성들의 민심을 얻게 되었습니다.

∙민심을 얻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쳐 내전이 끝났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온 지파가 헤브론으로 가 다윗에게 왕이 되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네가 나의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될 것이며, 네가 이스라엘의 통치자가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실 때에도 바로 임금님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삼하5:2)이라고 말했습니다. 자기들이 다윗을 왕으로 모시려는 것은 하나님이 이미 예정하신 일임을 알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다윗이 ‘이스라엘의 목자(ra‘a)’, ‘이스라엘의 통치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표현은 정중하지만 이 속에는 왕권이 무소불위하게 작동해서는 안 된다는 바람이 담겨 있습니다. 목자는 양떼를 돌볼 책임이 있습니다. 에스겔은 제 역할을 방기한 이스라엘의 목자들을 준엄하게 꾸짖었습니다.

“너희는 약한 양들을 튼튼하게 키워 주지 않았으며, 병든 것을 고쳐 주지 않았으며, 다리가 부러지고 상한 것을 싸매어주지 않았으며, 흩어진 것을 모으지 않았으며, 잃어버린 것을 찾지 않았다. 오히려 너희는 양 떼를 강압과 폭력으로 다스렸다.“(겔34:4)

지도자로 부름받은 이들이 양 떼를 잡아서 자기들의 배만 채우고 양 떼는 굶겼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윗에게 양 떼를 푸른 초장,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는 목자의 이미지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통치자‘라고 번역된 ‘나기드’(nagid)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제왕적 권위를 뜻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위임해주신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의 바람이야 어쨌든 다윗은 명실상부한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기름 부름을 받은 왕이라고는 하지만 그는 자기 세력 기반을 공고히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시온 산성을 점령하고 그곳을 다윗 성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지금의 예루살렘입니다. 두로 왕 히람은 다윗과 친선을 유지하고 싶은 마음에 백향목과 목수와 석수를 보내 궁궐을 짓도록 도와주었습니다. 다윗은 그곳에서 많은 아내와 후궁들을 맞이하였고 자녀들을 얻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도 연전연승을 거두어 하나님이 세우신 왕임을 입증해 보였습니다. 이제 외적인 것은 거의 갖춰진 셈입니다.

∙정통성 문제
하지만 효과적인 통치를 위해서는 어떤 상징이 필요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상징 말입니다. 얼핏 다윗의 마음에 떠오른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였습니다. 언약궤는 출애굽 사건을 상기시키는 동시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상징이었습니다. 다윗은 아비나답의 집에 임시로 모셔져 있는 하나님의 궤를 다윗 성으로 옮겨오기로 작정했습니다. 다윗은 정병 삼만 명을 징집하여 유다의 바알라로 올라갔습니다.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다윗은 스펙타클한 장면을 연출하여 온 백성의 시선을 한 데 모으려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무언의 메시지였습니다. ‘봐라, 하나님의 궤가 다윗성으로 거처를 옮긴다. 그러니 어떤 경우에도 다윗왕의 출신이나 경력을 문제 삼아 왕으로서의 정통성에 이의를 제기하지 말아라.‘

그들은 아비나답의 집에서 하나님의 궤를 꺼내서 새로 만든 수레에 싣고 출발했습니다. 아비나답의 두 아들 웃사와 아히요가 그 수레를 몰았습니다. 온갖 악기가 다 동원되어 장엄함을 더했습니다. 백성들도 그 압도적인 행렬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순간 그런 들뜬 흥분은 두려움으로 변했습니다. 수레가 나곤의 타작 마당을 지날 때 갑자기 소들이 날뛰기 시작했습니다. 브올의 아들 발람 이야기에서는 그를 태운 나귀가 칼을 든 천사를 보고 놀라는 장면이 나오지만, 여기서는 그런 암시조차 없습니다. 그 소들이 왜 날뛰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수레에 실려 있던 하나님의 궤가 떨어지려 하자 웃사는 얼른 그것을 꼭 붙들려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께서 웃사에게 진노하셔서 그를 치자 그가 그 자리에서 죽었다고 말합니다. ‘베레스 웃사‘. ‘웃사를 치심’. 갑자기 그 평화롭던 타작마당은 하나님의 분노를 상기시키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왜 화가 나신 것일까요?

다윗은 하나님을 경외했기에 모시려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려 했던 것입니다. 죄란 사용해야 할 것을 섬기고, 섬겨야 할 분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돈이든 지위든 물건이든 잘 사용해야지 섬기면 안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섬겨야 하지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법궤가 수레에서 떨어지려 한 것은 납치되는 것을 거부하는 하나님의 몸짓이자 경고입니다. 웃사는 그 뜻을 헤아리지 못했기에 하나님의 진노를 샀습니다.

자기에게 부족한 신뢰를 채우기 위해 유력자와의 친분을 과시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같이 찍은 사진을 마치 친밀한 관계인양 포장하여 사람들을 호도하는 이들 말입니다. 최근에 뇌물 공여 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는 어느 수산업자의 경우도 그 한 예입니다. 나의 의사와 상관없이 내 이름이나 이미지 혹은 글을 도용당하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상당히 불쾌합니다. 자기 욕심을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있는 정도가 아니라 비일비재입니다. 종교적 언어가 특권이 될 때 그릇된 권위주의가 고개를 듭니다.

∙신앙의 회복
사람들에게 스펙타클한 볼 거리를 제공하면서 하나님이 자신의 편이라는 사실을 만방에 과시하려던 다윗의 의도는 좌절되었습니다. 다윗은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하나님의 궤를 모실 엄두를 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드 사람 오벳에돔의 집으로 실어 가게 했습니다. 궤는 그 집에서 석 달을 머물렀는데, 주님께서 그 가정에 복을 베푸셨습니다. 그 소문을 들은 다윗은 다시 그 궤를 모시기로 작정합니다. 이번에는 군사 퍼레이드 같은 과시적 절차를 다 포기했습니다. 그는 제사장들이 입는 에봇만 걸친 채 주님 앞에서 온 힘을 다하여 힘차게 춤을 추었고, 주님의 궤는 수레가 아니라 사람들에 의해 옮겨졌습니다.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옮길 때마다, 행렬을 멈추고, 소와 살진 양을 잡아 제물로 바쳤습니다. 이 모든 행동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에서 비롯된 것이었을 겁니다.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은 “지식은 호기심으로 자라고 지혜는 두려워함으로 자란다. 두려워함이 신앙을 선행한다. 그것은 신앙의 뿌리다”(아브라함 요수아 헤셸 선집 3, <누가 사람이냐>, 이현주 번역, 종로서적, p.84)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외경심을 잃어버릴 때 세상은 이익과 손해에 대한 계산만 남은 장터로 변하고 맙니다. 다윗은 무서운 경험을 한 셈입니다.

태생이 어리석은 인간은 늘 하나님의 마음을 읽는 데 실패합니다. 실패를 통해 귀중한 교훈을 얻으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답답한 일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왜 내 사정을 헤아려주지 않으십니까?‘라고 대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하나님을 이용하려고만 하지,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왜 내 마음을 헤아릴 줄 모르냐고 책망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최영철 시인의 ‘쑥국’이라는 시는 ‘아내에게’라는 부제를 달고 있습니다. 그는 염치 없는 소망인 줄 알면서도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난다면 지금의 아내를 다시 만나기를 바란다고 말합니다. 이번에는 역할을 바꿔서 자기가 그의 아내가 되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대 입맛에 맞게 간을 하고
그대 기쁘도록 분을 바르고
그대 자꾸 술 마시고 엇나갈 때마다
쌍심지 켜고 바가지도 긁었음 합니다
그래서 그래서 지금의 그대처럼
사랑한다는 말도 한번 못 듣고
고맙다는 말도 한번 못 듣고
아이 둘 온 기력을 뺏어 달아난
쭈글쭈글한 배를 안고
골목 저편 오는 식솔들 기다리며
더운 쑥국을 끓였으면 합니다
끓는 물 넘쳐 흘러
내가 그대의 쓰린 속 어루만지는
쑥국이었으면 합니다“
(최영철, <찔러본다>, 문학과 지성사, p.82)

가족들을 위해 애를 태우던 아내를 위해 쑥국을 끓이고, 자신이 쑥국이 되어 아내의 속을 풀어주고 싶다는 것입니다. 이 마음을 얻기까지 얼마나 오랜 세월이 걸렸을까요? 우리가 정녕 철든 신앙인이라면 하나님의 입장이 되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하나님을 사용하는 일에 몰두한 것은 아닌지요? 이제는 폭력과 부패가 넘치는 세상을 보고 애를 끓이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지속되는 팬데믹 상황을 겪으며 문득 ‘베레스 웃사’ 즉 ‘웃사를 치심’이 떠올랐습니다. 이제는 겸허히 하나님의 뜻을 받들 때입니다. 물건이든 사람이든 아끼고, 존중하고, 귀히 여길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풍요로움과 권력과 인기의 유혹을 뿌리치고, 기어이 하나님의 마음과 접속하려고 애쓸 때 우리 영혼은 거룩함에 이르게 됩니다. 어려운 시절이지만, 그렇기에 더욱 믿음과 인내가 필요합니다. 주님의 은총으로 우리 삶 속에 거룩함의 열매가 많이 맺히기를 기원합니다.


등 록 날 짜 2021년 07월 11일 12시 08분 04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