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29. 물러나지 않는 믿음
설교자 김기석
본문 히 10:32-39
설교일시 2021-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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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러나지 않는 믿음
히10:32-39
(2021/07/18, 성령 강림 후 제8주)

[여러분은 빛을 받은 뒤에, 고난의 싸움을 많이 견디어 낸 그 처음 시절을 되새기십시오. 여러분은 때로는 모욕과 환난을 당하여, 구경거리가 되기도 하고, 그런 처지에 놓인 사람들의 친구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감옥에 갇힌 사람들과 고통을 함께 나누었고, 또한 자기 소유를 빼앗기는 일이 있어도, 그보다 더 좋고 더 영구한 재산이 있다는 것을 알고서, 그런 일을 기쁘게 당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확신을 버리지 마십시오. 그 확신에는 큰 상이 붙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서, 그 약속해 주신 것을 받으려면, 인내가 필요합니다. 이제 "아주 조금만 있으면, 오실 분이 오실 것이요, 지체하지 않으실 것이다.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그가 뒤로 물러서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뒤로 물러나서 멸망할 사람들이 아니라, 믿음을 가져 생명을 얻을 사람들입니다.]

• 순례자의 본분을 잊은 순례자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오늘 여선형 교우가 연주한 ‘아무 것도 두려워 말라’는 어려운 시기를 지나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불안함이 마치 안개처럼 스멀스멀 우리의 일상을 파고 들고 있습니다. 미국 서부의 산불로 인해 10km 높이의 불구름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서부 유럽의 홍수로 인해 수많은 인명 피해가 나고 있습니다. 마치 묵시록의 한 장을 보는 것 같은 나날입니다. 코로나 확산세는 좀처럼 줄어들 줄 모릅니다. 조심스럽게 이 시기를 견뎌야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두려움 속에서 마냥 몸을 사리고 있을 수만도 없습니다. “아무 것도 두려워 말라 주 나의 하나님이 지켜주시네/놀라지 말라 겁내지 말라 주님 나를 지켜주시네”. 이것이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길을 떠나는 아브람에게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너의 방패다”(창15:1b)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방패는 외부의 공격으로부터도 우리를 지켜주지만 신앙의 방패는 내부의 공격으로부터도 우리를 지켜줍니다. 두려움과 불안, 의기소침, 절망감, 무의미와 같은 것들 말입니다. 신앙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방패입니다.

바울 사도는 “여러분은 자기가 믿음 안에 있는지를 스스로 시험해 보고, 스스로 검증해 보십시오.”(고후13:5a)라고 말합니다. 믿음 안에 있는지를 시험해 볼 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는 무엇일까요? 먼저 돌아보아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을 의식하고 사는가입니다. 그걸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요? 바울의 말 속에 답이 있습니다. “우리는 진리를 거슬러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해서만 무언가 할 수 있습니다.“(고후13:8) 진리에 대한 이해도 각기 다르니 이 대답이 모호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위해서 사는 사람의 으뜸가는 특색은 다른 이들을 귀히 여기고 복되게 하는 것입니다. 천성이 이기적인 우리가 그렇게 살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시고, 성령께서 우리를 이끌어 주시면 됩니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살고 싶다는 갈망입니다. 그런 갈망이 우리 속에 있는지요?

우리는 푯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향해 나아가는 순례자입니다. 바울 사도는 “나는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며, 이미 목표점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빌3:12)라고 고백했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그리스도에게 사로잡힌 사람입니다. 동시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얻으려고 달려가는 사람입니다. 사랑에 빠지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일상 속에서 요구되는 일들을 처리하느라 허둥대다 보면 우리가 순례자라는 사실을 잊을 때가 많습니다. 안락함과 쾌적함에 길들여지는 순간 사람은 더 이상 십자가의 길을 걷지 않습니다. 이질적이고 낯선 것을 거부하고 익숙한 것에만 집착합니다. 과거에 감사원장을 지냈던 한승헌 변호사가 툭 던졌던 질문이 생각납니다. “기독교인은 사서 고생하는 사람 아닌가요?” 자신이 인권 변호사의 길로 접어든 순간을 떠올리며 한 말입니다.

• 다시 신발끈을 조이며
자신이 그리스도의 마음을 얻기 위해 길을 떠난 순례자라는 사실을 잊는 순간 영혼의 전락이 시작됩니다. 믿음이 습관이 되고, 고집스러워집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마16:24) 하신 주님의 부름은 까맣게 잊고, 주님이 내 욕망에 응답해 주시기만 바랍니다. 우리 없이 세상을 창조하신 주님은 우리와 더불어 세상을 회복시키고 싶어하십니다. 폭력이 일상이 된 세상에 사랑과 우애의 공간을 만들고, 설 땅을 잃어버린 이들의 설 땅이 되어주고, 선한 일을 하며 사는 것이 더 쉬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지키는 청지기로서의 삶이야말로 우리의 소명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우리는 이런 지향을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요? 그런 조짐을 가장 예민하게 알아차린 것은 우리가 아니라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에게서 예수의 향기가 느껴지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아픈 지적입니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된 것일까요? 믿는다는 것이 우리 삶을 위기로 몰아넣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 갈릴리의 어부들은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랐고, 초대교회 교인들은 공동체를 위해 자기 재산을 내놓았고, 박해의 위협 속에서도 찬양과 기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믿음은 모험이고 결단입니다. 길 없는 곳에 길을 내는 것이고, 물 위를 걷는 것이고, 광야에서 꽃을 피우는 것이고, 증오의 땅에 사랑을 심는 것입니다. 주류 질서에 틈을 만들고 새로운 세상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존 웨슬리의 말대로 ‘진정한 그리스도인’(altogether christian)이 아니라 ‘거의-그리스도인’(almost christian)으로 사는 것에 만족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받았던 책망이 우리에게도 해당됩니다. “나는 네 행위를 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겠다”(계3:15). 부끄럽지만 이게 우리의 실상입니다. 변명하자면 못할 것도 없습니다. 삶이 너무 힘듭니다. 멈추면 쓰러질 것 같아 우리는 늘 가속 페달을 밟으며 삽니다. 주변을 살필 여유조차 없습니다. 신자유주의 경제 질서 아래 살면서 자신을 세상의 요구에 최적화하기 위해 분투합니다. ‘후림불’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갑작스레 정신없이 휩쓸리는 서슬을 이르는 말입니다. 현대인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에 후림불이 당겨져서 허둥거립니다. 사람들을 무한 경쟁 속으로 몰아넣는 세상은 가끔 우리에게 모욕감을 안겨주기도 합니다. 자존감(self-esteem)이 바닥을 치면, 서러움이 몰려오기도 합니다. 그러는 중에 우리에게 슬며시 찾아오는 부정적 확신이 있습니다. 세상은 아무리 애써 봐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백년하청(百年河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문자적으로는 황하의 물이 항상 흐리어 있어 맑을 때가 없다는 말이지만, 우리 삶에 적용하면 아무리 노력해도 변화가 일어나기 어렵다는 뜻이 됩니다.

기독교인들도 이런 생각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부정적 확신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신앙이란 불가능의 가능성을 붙들고 가는 것입니다. 정신적 애굽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해 길을 떠나는 것입니다. 용기란 아무 때나 으르렁거리는 것이 아니라, 넘어진 자리를 짚고 일어서는 것입니다. 혼자는 외롭기에 주님은 동료들을 주셨습니다. 교회는 바로 그런 새로운 삶의 못자리여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꿈꾸는 사람들이 내 곁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때 우리는 다시 시작할 용기를 낼 수 있습니다.

• 고난의 싸움을 견디며
오늘 본문에서 사도는 “여러분은 빛을 받은 뒤에, 고난의 싸움을 많이 견디어 낸 그 처음 시절을 되새기십시오”(히10:32)라고 말합니다. 교회 전통은 오랫 동안 우리 영혼의 성숙 단계를 셋으로 나누어 설명했습니다. 첫째는 믿음을 통한 죄의 정화입니다. 둘째는 은총의 빛으로 조명을 받는 단계입니다. 셋째는 하나님과의 깊은 일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빛을 받는다는 것은 환해지는 것이지만, 동시에 자기가 어둠임을 깊이 자각하는 단계입니다. 자기 행실이 더럽고 추하다는 것을 아프게 자각하며 새로운 삶을 갈망하는 단계입니다. ‘갈망’이 있기에 고난의 싸움을 견디며 그리스도의 꿈을 이루려 합니다.

고난의 싸움이라 할 때 사용된 단어는 athlesis입니다. 영어로 운동선수를 뜻하는 단어 athlete이 여기에서 나왔습니다. 사도는 신앙생활을 운동선수들의 삶에 빗대 설명합니다. 육체와 정신의 한계까지 밀어붙이는 훈련을 거듭 견디어 내야 선수가 되듯이 믿음 또한 훈련이 필요합니다. “우리도 갖가지 무거운 짐과 얽매는 죄를 벗어버리고, 우리 앞에 놓인 달음질을 참으면서 달려갑시다”(히12:1b). 박해 시기에 믿음을 지키려던 이들은 모욕과 환난을 당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의 풀무를 거쳐 그들은 더욱 신실한 신앙인으로 거듭났습니다. 고난을 당하면 겨릅대처럼 툭툭 부러지는 사람도 있지만, 담금질을 통해 더욱 단단해지는 무쇠처럼 강인해지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 과정을 거친 이들은 지금 고난의 시간을 견디고 있는 이들과 연대하고, 갇힌 자들의 고통을 나눠 짊어집니다. 심지어는 자기들의 소유를 빼앗기는 일조차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소유를 빼앗기는 것은 누구에게도 유쾌한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진리 안에서 살다가 그런 손해를 감수할 때 재산은 줄지 몰라도, 정신은 더욱 단단해집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누리기도 합니다. 어쩌면 그것이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영구한 재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도는 평안하고 안일한 일상 속에서 잃어버린 그 열정을 되찾으라고 권합니다.

• 믿음으로 산다는 것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것인지 뱀의 말을 따를 것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뱀은 우리를 염려해주는 척하면서 하나님의 뜻에서 멀어지라고 말합니다. 다른 이들을 위해 좋은 몫을 남겨두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합니다. 나눔과 선행은 일단 자기 배를 채운 후에 해도 늦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은 그대가 아니라도 누군가가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다른 이들을 위해 좋은 것을 남겨두라고, 지금 눈 앞에 있는 어려운 이들의 좋은 이웃이 되라고. 그렇게 살 때 우리는 영혼의 음식인 보람과 삶의 의미를 발견합니다. 헤셸은 “인간 삶은 요구됨, 명령받음, 기대됨의 술어로만 이해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아브라함 요수아 헤셸 선집 3, <누가 사람이냐>, 이현주 옮김, 종로서적, p.99). 어려운 말 같지만 간단합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이웃이 되라는 주님의 부름 앞에 서 있습니다. 그 부름에 응답하는 것이 우리를 인간답게 만든다는 말입니다.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믿음으로 산다는 말은 이 세상의 가치에 길들여지기를 거부한다는 뜻입니다. 젊을 때만 해도 믿음은 삶 전체를 건 도전이었습니다.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이 찬송을 부를 때마다 비장한 표정을 짓곤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뜨거운 마음이 잦아들었습니다. 태만함과 나태함이 확고하게 저를 사로잡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가 뒤로 물러서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않을 것이다” 하신 말씀이 아프게 다가옵니다.

물러나지 않는 믿음을 회복해야 할 때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얻기 위해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몸을 내밀면서……목표점을 바라보고 달려가고 있습니다”(빌3:13b, 14b)라고 고백했습니다. 몸을 내밀면서 달려가는 그 역동적인 모습이 눈에 보이는 것 같습니다.

저는 꽤 오랫동안 여러 지역에 거주하는 목회자들과 함께 한 달에 한 번씩 독서모임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작년부터는 부득이 zoom을 통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이번 달에 읽은 <부서진 사람>은 평화주의 대안 공동체인 브루더호프 공동체의 2대 장로인 하인리히 아놀드의 생애를 다루고 있습니다. 평화로운 공동체를 이루기 위한 그의 노력이 아름다운 결실로 이어지기도 했지만, 예기치 않은 시련과 상처 또한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답게 살려는 공동체의 꿈을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그의 겸손하고 끈질긴 노력이 참으로 아프게 다가왔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 책을 읽으며 울컥해져서 책 읽기를 멈추곤 했다고 말했습니다. 아마 비슷한 경험들을 하며 살기 때문일 겁니다. ‘아, 나도 그런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하고, 또 그렇게 살 수 있기를 바랐던 적이 있었는데……’라는 회한이 컸던 것 같습니다.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당장 결실이 보이지 않는다 하여 낙심할 것 없습니다.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맙시다. 지쳐서 넘어지지 아니하면, 때가 이를 때에 거두게 될 것입니다.“(갈6:9) 우리는 뒤로 물러나는 사람들이 아니라, 몸을 앞으로 내밀고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맛본 아름다운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허세를 잠시 내려놓고, 우리 자신의 부족함을 자각하고, 영적으로 분발해야 할 때입니다. 무더위를 식혀줄 단비가 그리운 계절, 우리가 누군가에게 단비가 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빛을 받은 사람답게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21년 07월 18일 10시 16분 27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