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43. 숨은 보물 찾기
설교자 김기석
본문 마 13:44-53
설교일시 2021-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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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보물 찾기
마 13:44-53
(2021/10/24, 창조절 제8주)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 놓은 보물과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발견하면, 제자리에 숨겨 두고, 기뻐하며 집에 돌아가서는,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그 밭을 산다." "또 하늘 나라는, 좋은 진주를 구하는 상인과 같다. 그가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면,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그을 산다." "또 하늘 나라는, 바다에 그물을 던져서 온갖 고기를 잡아 올리는 것과 같다. 그물이 가득 차면, 해변에 끌어올려 놓고 앉아서,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내버린다. 세상 끝 날에도 이렇게 할 것이다. 천사들이 와서, 의인들 사이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서, 그들을 불 아궁이에 쳐 넣을 것이니, 그들은 거기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이것들을 모두 깨달았느냐?" 하고 물으시니, 그들이 "예"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를 위하여 훈련을 받은 율법학자는 누구나, 자기 곳간에서 새 것과 낡은 것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 예수께서 이 비유들을 말씀하신 뒤에, 그 곳을 떠나셨다.]

• 일상 언어로 하나님 나라 말하기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삶의 자리는 다 다르지만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잘 살고 계시지요? 땅에 심은 씨앗이 싹이 트고 자라 결실하듯이 우리의 믿음에도 귀한 열매가 맺히기를 빕니다. 가을이어서인지 모든 것이 풍성합니다. 다양한 과일은 물론이고 고구마와 밤이 지천입니다. 나눔의 재미 또한 큽니다. TV에서 저물녘 집 옆에 자리를 깔아놓고 깨를 터는 노부부의 모습을 보면서 ‘평화가 저기에 있구나’ 생각했습니다. 유년시절에 시골에서 살았기 때문인지 깨를 터는 모습을 보면 깨 쏟아지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옵니다.

김준태 시인은 ‘참깨를 털며’라는 시에서 깨를 터는 흥겨움을 노래했습니다. “산그늘 내린 밭 귀퉁이에서 할머니와 참깨를 턴다”는 말로 시작되는 시입니다. 손자는 어두워지기 전에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일을 서두릅니다. 한 번을 내리치는 데도 힘을 더합니다. 솨아솨아 참깨가 쏟아지는 소리는 세상사에서 맛보기 어려운 쾌감을 줍니다. 사람살이에도 이렇게 기분 좋게 내리치면 참깨처럼 쏟아지는 것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할머니의 가엾어 하는 꾸지람 소리가 들려옵니다. “아가 모가지까지 털어선 안 되느니라”. 아, 얼마나 깊은 지혜가 담긴 말입니까! 세상 사는 이치가 다 이런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격다짐으로 할 일이 아닙니다. 이런 여유가 없어, 강약 조절을 할 줄 몰라 우리 생이 무겁습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 지루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창문을 열어 환기를 하듯 비일상적인 경험이 때로는 필요합니다. 사람들이 집을 나서면 고생이라고 말하면서도 낯선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까닭은 새로운 자극이 필요한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낯선 세계에 들어서는 순간, 우리는 취약한 존재가 됩니다. 낯선 환경, 낯선 사람들과의 만남은 긴장감을 주고 자기의 작음을 절감하게 만듭니다. 사막이나 높은 산, 거대한 파도 앞에 설 때 더욱 그러합니다. 그 자리에 서면 그동안 애집하고 있던 것들이 사소하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낯선 세계의 부름을 외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아주 낯선 존재였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도,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도 당시의 관습과 아주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시인이었습니다. 칼릴 지브란은 <사람의 아들 예수>에서 그리스 시인 루마누스의 입을 통해 예수님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시인이었습니다. 그는 우리 눈을 대신해 보았고 우리 귀를 대신해 들었으며 우리가 말로 못하는 것을 그는 입술로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것을 그는 손가락으로 만졌습니다. 그의 심장 속으로부터는 이루 셀 수 없는 노래하는 새가 날아 북으로도 남으로도 갔고, 언덕의 조그마한 꽃들은 하늘을 향해 가는 그의 발걸음을 멈추었습니다.”(칼릴 지브란, <사람의 아들 예수/예언자>, 함석헌 전집16, 한길사, 1987, p.82)

루마누스는 예수님이 허리를 구부려 풀잎을 만지는 것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그분은 어린이의 수줍어하는 얼굴을 사랑하고, 석류와 아몬드 꽃을 사랑하고, 골짜기와 사막과 바다와 하늘을 알았습니다. “그의 침묵 속에는 사막이 있었고 그의 말 속에는 동산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세상은 하나님의 숨결이 깃든 신비였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실 때 종교적인 언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일상적인 소재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의 진실을 가르치셨습니다. 주님은 비유에는 씨 뿌리는 농부, 빵을 만들기 위해 반죽을 하는 여인, 집을 샅샅이 쓸며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는 여인, 잃어버린 양을 찾느라 애태우는 목자, 바다에서 그물을 끌어올리는 어부가 등장합니다. 주님이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는 우리의 일상과 무관한 특별한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일상 속에서 영원을 보고, 우리 삶이 더 큰 질서 속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그 영원의 빛을 따라 사는 사람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 삶이라는 기회
유한한 존재인 사람은 누구나 시간과 공간의 제약 속에서 살아갑니다. 올 때가 있으면 가야 할 때도 있는 법입니다. 탄생과 죽음 사이를 일러 일생이라 합니다. 그 일생 동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이런 질문 자체가 낯설 수도 있습니다. 대개는 각자의 시간을 견디며 살기에 급급합니다. 가끔은 행복하고 또 가끔은 슬픔에 잠기기도 합니다. 참담한 일을 연속적으로 겪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런 때면 ‘해도 해도 너무하십니다’라는 말이 저절로 나옵니다. 모든 사람은 다 자기만의 삶의 무게를 견디며 삽니다. 어려움이 많기에 편안함을 구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사람들이 그렇게도 돈에 집착하는 것은 그것이 삶을 안전하게 지켜주고 평안을 줄 거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삶이란 정말 그게 다인가요? 생명은 살라(生)는 명령인 동시에 위로부터의 명(命)을 살려내는 과정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은 우리를 통해 하실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일을 찾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나사렛 회당에 들어가신 예수님은 이사야 두루마리를 건네받아 다음의 구절을 읽으셨습니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눅4:18-19)

요한복음에서는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더 넘치게 얻게 하려고 왔다”(요10:10b)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이를 복되게 하는 것, 주님은 그것을 당신의 소명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남을 복되게 하기 위해서는 철저히 자기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자기 내려놓음이야말로 사랑의 본질입니다. 사랑은 우리가 인생이라는 밭에서 찾아내야 할 가장 소중한 보물입니다. 자기를 초월하게 하여 하나님의 마음과 접속하게 하는 것이니 말입니다.

남의 밭에서 일하던 농부가 있습니다. 구슬땀을 흘리며 밭을 일구다가 우연히 숨겨져 있던 보물을 발견합니다. 누가 감춰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는 그것을 다시 땅에 파묻어두고, 집에 돌아가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샀습니다. 그의 행동은 우리의 도덕 감정을 건드립니다. 비도덕적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비유임을 잊지 마십시오. 중요한 것은 비유를 통해 드러내려는 핵심 메시지이지 도덕적인지 여부가 아닙니다. 주님이 강조하시려는 것은 보물을 발견한 사람의 기쁨과 그것을 얻기 위한 기민한 실천입니다.

이어지는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진주를 구하던 상인이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면,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그것을 산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가진 것 전부’와 ‘값진 진주 하나’가 대조되고 있습니다. 인생살이에서 이런 경험을 한 번쯤은 해본 적이 있지 않나요? 누군가와 사랑에 빠질 때 그 대상은 세상에서 유일한 사람이 됩니다. 그를 위해서라면 못할 일이 없을 것 같습니다. 온 세상은 배경으로 물러나고 오직 그 사람만 보입니다. 이런 감정을 느낀 적이 없다면 쓸쓸한 인생입니다.

그 하나를 얻기 위해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를 통해 그 사랑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내게 이로웠던 것은 무엇이든지 그리스도 때문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므로, 나는 그 밖의 모든 것을 해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고, 그 모든 것을 오물로 여깁니다.”(빌 3:7-8) 바울 사도의 고백입니다. 하나를 얻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린다는 말입니다. 하나를 붙잡을 때 삶이 단순해집니다. 그 하나를 얻지 못해 삶이 복잡합니다. 삶은 선택입니다. 우리는 모든 길을 다 걸을 수 없습니다. 신중하게 길을 선택하고 그 길을 충실히 걷는 것이 지혜입니다. 남들과 자꾸 비교할 것 없습니다.

• 어떤 보화를 찾는가?
지금 여러분은 어떤 보물을 찾고 계십니까? 돈과 명예와 권세입니까? 일확천금의 기회입니까? 누가 보물을 찾은 사람입니까? 일상 속에 깃든 영원을 볼 줄 아는 사람이 아닐까요? 들꽃 한 송이 속에 깃든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고, 가난한 이웃이 흘리는 눈물 속에서 하나님의 슬픔을 느끼고, 다른 이들의 행복을 위해 자기가 누릴 수 있는 특권을 기꺼이 내려놓을 줄 아는 마음, 그것이 보석과 같은 마음이 아닐까요? 엘리자베스 바렛 브라우닝의 ‘오로라 리 Aurora Leigh’에 나오는 시 한 구절을 들어보십시오. “땅은 하늘로 가득 차고,/흔한 덤불마다 하나님으로 불붙어 있지만,/그것을 보는 사람만 자기 신을 벗고/나머지는 덤불에 둘러앉아 검은 딸기를 땁니다.” 문제는 볼 눈입니다. 우리는 아름다움과 추함, 선함과 악함, 거룩함과 속됨 사이에서 바장입니다. 어느 쪽으로 몸과 마음을 기울이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집니다.

인간은 누구나 다 본능적으로 이기적입니다. 악하고 비열하고 편견에 사로잡힐 때가 많습니다. 자기 좋을 대로 말하고 판단하고 행동합니다. 잘못이 드러나도 어떻게든 합리화하려 합니다. 꽤 좋은 사람처럼 보이지만 자신의 안전이 위협받을 때면 돌변하여 폭력적으로 변하기도 합니다. 인간은 합리성에 따라 움직이지 않습니다. 20세기 미국의 저명한 신학자인 랭돈 길키는 20대 초반에 선교사가 중국에 세운 기독교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일본군은 중국에 머물고 있던 서양인들을 한곳에 모아 수용했습니다. 그들이 간첩행위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겁니다. 그들은 지금의 산둥 지역에 있는 수용소에 갇혔습니다. 1500여 명이 갇혀 있던 수용소는 일종의 축소된 인류였습니다. 그때의 경험을 담은 책이 <산둥수용소>입니다. 그런데 그 책의 부제는 ‘인간의 본성, 욕망, 도덕적 딜레마에 대한 실존적 보고서’였습니다. 매우 흥미로운 책입니다. 산둥수용소에서는 신체적인 위협이나 모욕은 없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생필품이 많이 모자랐습니다.

어느 해 성탄 무렵, 미국 적십자사가 보낸 구호물품 꾸러미 1,550개가 수용소에 도착했습니다. 수용소 전체 인원은 1,450명이었기에 사람들은 각자 하나씩 받을 수 있다고 흥분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미국인들은 200명 정도였는데 그들이 대표를 뽑아 수용소 당국에 그 구호물품은 전적으로 미국인을 위한 것이니 미국인들에게 한 사람당 꾸러미 7개 반을 주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갈등이 심해지자 수용소장은 분배를 유보했습니다. 그 경험을 한 후에 랭돈 길키는 부는 공동체에 완전한 축복이 될 수 없음을 깨달았다고 말합니다.

“부는 운 좋게도 그것을 소유한 사람에게 음식과 평안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운이 좋지 않아 부를 가지지 못한 공동체 내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지 못하게 만들며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게 만든다.”(랭던 길키, <산둥 수용소>, 이선숙 옮김, 새물결플러스, p.207-8)

우연처럼 찾아온 부가 오히려 사랑을 가로막는 장벽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비도덕성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의 욕망을 따르느라 이웃의 아픔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많은 것을 얻기 위해 혹은 지키기 위해 가장 소중한 하나를 잃어버리는 것이 타락입니다. 자기 욕망에 충실한 이들은 결국 영혼의 헛헛함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두려움과 고립감에 떨게 됩니다.

• 구별의 시간
잠시 마지막 비유를 살펴보겠습니다. 주님은 하늘 나라는 마치 바다에 그물을 던져서 온갖 고기를 잡아 올리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물이 차면 해변으로 끌어올려 놓고,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별한다는 것입니다. 나쁜 것이라고 번역된 sapros는 도덕적인 선악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나쁜, 해로운, 무익한’이라고 번역될 수 있는 말입니다. 이 비유의 맥락은 초대교회의 상황입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오다보니 문제가 많았습니다. 뜨거운 감격과 사랑이 넘칠 때는 잘 보이지 않던 차이들이 발견되고, 그 차이를 불편하게 인식하면서 사람들의 갈등 또한 깊어졌습니다. 사람이 모인 곳 어디에서나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성급하게 옳고 그름의 척도를 가지고 사람들을 평가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은 모두 편견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자기 확증 편향에 사로잡히지 않은 사람을 만나기 어렵습니다. 사람들을 함부로 재단하다보면 사랑은 싸늘하게 식게 마련입니다. 잘못된 것을 경계할 필요는 있지만 최종적인 심판자로 행세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과 관용과 이해심을 품고 서로를 대해야 합니다.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를 가르는 것은 마지막 날 천사들이 할 일입니다.

주님의 하나님 나라 비유가 가리키는 것은 저 세상이 아닙니다. 우리의 비근한 일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상황에 따라 주님은 하나님 나라를 다양한 비유를 통해 가르치셨습니다. 하늘 나라를 위하여 훈련 받은 율법학자는 마치 곳간에서 새 것과 낡은 것을 자유롭게 꺼내는 집주인과 같습니다. 주님이 그러하셨습니다. 적절한 때, 적절한 비유의 말씀을 하실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중심에 확고하게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특별할 것도 없는 일상이야말로 하나님의 나라가 감춰진 곳입니다. 그 속에서 사랑을 선택하고, 평화를 파종하는 이들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보물이 우리 곁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누리지 못하고 스스로 빈곤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가련한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은총으로 우리의 눈이 밝아지기를 빕니다. 소멸하는 것들 속에서 영원의 흔적을 볼 눈이 열리길 빕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21년 10월 24일 12시 08분 47초